1화: https://arca.live/b/regrets/24910144?p=2


상쾌한 사직서 제출, 그 끝은 행복한 백수 생활일까? 


 솔직히 사직서만 낸다고 바로 당장 이 직장을 때려칠 수는 없었겠지. 아마 인수인계라든지 여러모로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을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 성격 지랄맞은 인간을 잘 보좌할 수 있는 좋은 친구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


 그래도 어쨌든 이 나라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는 나라 아닌가? 솔직히 다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힘들어 발버둥 치는 세상인데, 나 같은 퇴직자가 나온다면 그건 오히려 다른 이들이 좋아해줄 일이지.


 “절대, 절대 허락할 수 없네! 인수인계고 뭐고 다 그만하게, 제발! 이 문 열고 같이 이야기하게.”


 “죄송합니다 장관님, 제 일신상의 이유로 더는 비서로서의 업무를 계속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신상의 문제가 뭔가? 질병이 이유라면 요양을 위해 충분히 휴가를 주겠네. 급여가 불만이었다면 내가 직접 올려주겠네.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나? 뭐든지 말해주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제발!”


 문을 하염없이 두들기며, 주변에 지나갈 사람들은 생각도 않고 계속 나에게 문 좀 열어달라고 보챈다. 벌써 30분은 지난 것 같다. 저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는 건 여러 번 봤어도 이렇게 매달리는 적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보니,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머리는 헝클어지고 숨은 거칠어진 그녀가 서 있었다. 눈은 한바탕 눈물을 흘리다 말았는지 마스카라가 조금 번져 있었고, 목선이 보일 정도로 가지런히 묶었던 머리는 반쯤 풀어져 제멋대로 목을 따라 풀어해쳐 져 있었다. 그 와중에 셔츠 자락도 흐트러지고 외투는 집어 던졌는지 보이지도 않아서 얼굴 말고는 보기에도 난감했다.


 “일단 들어오시죠 장관님. 이러다가 장관님까지 품위유지 위반으로 해임당하시겠습니다. 좀 진정하시고 얘기 나누시죠.” 


 그녀를 들여보내고, 밖에서 이쪽을 구경하던 이들에게 눈짓을 줘 자기들 할 일이나 똑바로 하게 지시한다. 그러고 문을 닫고 돌아보니 비서실 한 귀퉁이의 의자에 앉은 그녀의 모습이 영 거슬려 직접 외투까지 벗어서 겉에 둘러주고 내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일단…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장관님이나 저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아… 그래, 그러도록 하지…”


 내가 둘러준 외투가 불편하기라도 한지 그녀는 여기저기를 만져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또 나를 봤다. 


 나 역시 그런 불편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차가 들어올 때까지 조금 기다리며 내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됐지만.


 마침내 차가 들어오고 그녀와 나 둘 다 차분히 차를 음미하고 난 뒤, 그제야 우리는 다시 말을 꺼내게 됐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장관님. 저는 지금 맡은 비서직을 더는 수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말해보게. 아까도 말했지만, 급여가 됐든 업무환경 개선이 됐든 최대한 개선해줄 테니까.”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장관님. 급여는 지금도 충분합니다. 저는 단지 지금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장관님도 제 업무 수행 능력이 좋지 않다고 평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닐세! 그건,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 나는 자네가 그런 평가를 통해 더 잘되길 바랐던 거였을 뿐이었네.”


 “그러셨습니까? 저는 정말로 장관님이 저를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아니네. 왜 자네를 미워하겠나! 여태까지 자네가 나를 위해 일해준 게 얼마인데?”


 “그럼 왜 여태껏 저를 그리 대하셨습니까? 솔직히 사직서 제출하는 거로 끝나고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장관님이 이렇게까지 반대하시니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장관님, 제가 처음으로 장관님에게 보고서를 올렸을 때 말씀하셨던 ‘훈화’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여태 살면서 영어에 그리도 많은 모욕적인 표현 방식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또, 장관님이 ‘훈계’라면서 제 뺨, 무릎, 팔 등에 가하신 폭력적 행위도 있죠. 장관님은 제가 일해준 걸 기억해 주신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모두 절망적이고 끔찍했을 뿐입니다. 직접 앞에서 말씀드리기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에게 그 어떤 제안을 하셔도 제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부분은 정말 미안하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네 생각을 안 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던 게 너무 많았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내 확실히 약속하겠네. 그러니 사임하지 말아 주게.”


 홍차가 은은히 식어 마침 딱 마시기 좋게 되었다. 이 여자도 지금 이 홍차처럼 적당히 머리를 식히고 살 줄만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안 좋은 관계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한 모금 홍차를 천천히 마시고 불안함과 희망이 섞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장관님, 제가 무엇을 믿고 장관님의 그런 약속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말로만 하는 사과라는 게 얼마나 허무한 건지는 장관님이야말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 사이에 신의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지난 3년여간 장관님과 같이 일하면서 저에게 보여준 모습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걸 보고 어떻게 장관님을 믿겠습니까?”


 “그렇다면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나를 믿을 수는 없더라도, 정당한 법적 공증을 걸친 계약서라면 믿을 수 있지 않겠나? 자네가 원하는 조항은 최대한 넣어주겠네. 만일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계약서를 토대로 자네가 나에게 항의나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 계약서를 안 쓴다고 자네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겠지만, 자네가 그 계약서를 가지는 것만으로 신뢰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네.”


 “계약한다면 문항은 무엇을 넣으려고 하십니까? ‘고용인 ‘올리비에 레너드 스펜서 처칠’은 피고용인 ‘존 에드워드 맥머리’에게 그 어떠한 상황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때 10000파운드의 보상금을 제공하겠다.’ 뭐 이런 내용이라도 쓰시려고 하십니까? 그것도 공증인을 대동한 상황에서 말이죠. 정말로 제 명예를 생각해주신다면 그런 말씀은 해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관님.”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자네가 나를 믿을 수 있게 할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믿을 필요 없습니다 장관님. 이미 이 일은 모두 끝난 겁니다. 저는 사임을 하고, 장관님은 새 비서를 뽑으면 되는 거죠. 더는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 믿음은 무슨 얼어 죽을 믿음인가. 3년 동안 꾹 참고 같이 일한 것만으로도 이미 내 의무는 충분히 다했다. 더 볼 것도 없다. 저 여자의 표정이 갈수록 슬퍼지는 것도, 꾹 참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려도, 안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약해지면 안 된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 사이에 그런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 않나? 같이 인도 식민지를 순회할 때는 자네도 좋지 않았나? 지난 겨울밤에 단둘이 야근할 때, 핫초코를 마시며 여러 담소를 나누기도 했고, 그리고 또,”


 “장관님, 됐습니다. 그만하시죠. 제가 여태까지 본 상관 중에서 장관님이 가장 최악이었습니다. 여태까지 함께 일한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하늘은 아침과 같이 너무도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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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로는 뭐,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는 프랑스로 갈 배편을 구하고, 또 그곳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있을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했다. 재산을 조금씩 정리를 해보니 비서로 있는 동안 상당히 많은 돈이 모였다는 걸 알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업 하나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식적으로 내 비서직이 잘리지는 않았는지, 그 여자는 계속해서 나에게 출근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뭐, 그래 봐야 내가 안 가면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계속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보지도 않고 한구석에 처박아놨다. 


 그리고 대망의 그 날, 프랑스로 건너갈 배를 타게 될 날이 왔다. 예매한 표와 간단히 정리한 소지품 가방을 챙기고, 잘 정돈된 정장을 빼입었다. 특별히 문제될 부분이 어디 없나 다시 한번 확인을 한 뒤, 오랫동안 정들었던 내 집에 인사를 한 번 해주고 떠났다.


 도버 해협 너머로 멀어지는 나의 조국을 보며, 프랑스에서 기다릴 친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봤다. 여자임에도 유난히 키가 큰 게 특징인 친구였는데, 키만 따지면 거의 나와 같은 정도였다.


 저번에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는 막 소령으로 진급했다고 기뻐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워낙 성격이 고지식한 친구여서 군대에서도 약간 고립되어 있었거든.


 그래도 뭐 프랑스로 도착하고 나면 알 수 있겠지. 그 친구가 아마… 사관학교에서 일한다고 했나? 파리에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뭐 만나보면 알 일이지.


 마침 다 도착을 한 것 같다. 항구 여기저기에 펄럭이는 청백적의 프랑스 국기를 보니 내가 드디어 조국의 오랜 라이벌 국가에 도달했다는 실감이 난다.


 항구에 내려 빠진 짐은 없나 살펴보고, 다시 한번 내 복장을 단속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왔어?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


 큰 키, 잘 관리된 군복, 단정하게 잘라 깔끔해진 흑발 숏컷까지, 내가 아는 한 이런 사람은 한 명뿐이다.


 “샬럿! 세상에 일은 어쩌고 여기까지 온건가?”


 “친구가 내 조국으로 온다는데 자랑스러운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안내할 의무가 있지 않겠어? 마침 휴가여서 나온거니 신경쓰지 말게!”


 샤를로테 드 골, 줄여서 샬럿으로 프랑스에 몇 안되는 지인이자 친구이다. 파리에서 일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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