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세나는 얇은 종이를 펼쳐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굵은 글씨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여백도 남기지 않을 작정으로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씨들이 있었다. 

 

 카를이 서쪽으로부터 보내온 편지였다. 얼마 전에 그의 심부름꾼이 직접 전달해온 그것은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세나의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메논이 도착한 뒤로 귀족들의 여론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동부의 귀족들은 그와 세나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방의 유력한 귀족을 주군으로 삼으면 센트리올 영지의 위용이, 혹은 그들 자신이 위용이 더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사 필립의 목소리였다. 세나는 편지를 책상 아래로 감춘 뒤에 문을 열었다. 검은 집사복을 입은 노인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요, 필립.”

“메논 님께서...접견을 청하십니다.”

 

 세나는 이를 악물었다. 

 

“해가 진 뒤에 공녀를 함부로 만나는 법도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뻔뻔하게도, 찾아온 날 밤에 이렇게 자신의 방까지 들어오려고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허락을 구해주시겠습니까, 집사님.”

 

 귀에 박히는 목소리, 메논의 것이었다. 세나는 다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몸 일부분에 눈을 크게 떴다. 등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논 님...”

“필립,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라고 전해주세요.”

“그렇다고 하십니다.”

“필립, 아직 그럴 시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메논이 말했다. 세나는 자신의 복장을 살폈다. 공적인 자리에 입을 복장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할 정도로 흐트러진 옷은 아니었다. 이런 복장은 공작가의 오랜 전통에만 충실한 하녀들의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하십니다, 아가씨.”

 

 사이에 낀 집사의 곤란한 목소리에 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집사님은 내려가보세요. 그리고 아래 쪽에 있는 하인들에게 메논 공께서도 금방 내려가실 것이라 전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노인의 목소리와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소리, 그러나 메논은 내려가지 않았다. 세나는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까지 찾아오셨나요?”

“우리 말 좀 편하게 하면 안돼?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말 놓아보는 건데. 예전에는 편하게 대하던 분들도 잔뜩 얼어서 나를 대하니,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10년 전에는 그냥 피난 온 귀족가의 꼬맹이였으니 그랬겠지. 다시 가주 자리를 차지해서 한 지역의 우두머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오셨죠?"

"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니까. 미리 양해를 좀 구했지. 그러니까 부르는 방법 좀 어떻게.."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세나는 문을 막고 거기에 기댄 채 말했다. 

 

“본인이 청혼자의 자격으로 왔으니 그에 걸맞는 대접은 기대하고 계셨어야죠, 메논 공.”

“...하긴 그렇네...그럼 문 사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는 감내할 테니, 제게 잠깐의 시간을 할애해주시겠습니까? 세나 양?”

 

 예전의 친구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세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갑자기 나타나 일을 이렇게 망쳐버린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센트리올 영지의 상황이 전보다 더 안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세수의 4분의 1이 줄었고 영주들 간의 불균형은 더욱 심해졌으며 고용인들의 일부를 내쫓아야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제법 어두워보였다. 자신이 알던 하인이나 하녀 중 누군가가 사라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공작가에서 일한 고용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요.”

“...서쪽 지방이 고향이었던 사람들은요? 그들의 소식을 들으실 수 있으십니까?”

 

 세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서쪽 지방의 황폐화는 광범위했고, 고향으로 돌아간 공작가의 사람들 중 소식이 끊어진 자들도 여럿 있다고 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서쪽에서 명망 높았던 센트리올 공작가가, 이제는 영토의 절반조차지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전투 또한 적의 초병과 맞붙어 거둔 작은 승리가 전부라는 것을 말입니다.”

“싸우자고 한다면 싸울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세나는 처음으로 강하게 항변했다. 그러나 그 뒤로 돌아온 대답은 더욱 더 차가웠다.

 

“아니요. 거기서 싸우지 않았던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누가 제안했는지는 모르지만요.”

“그건...”

“지금은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방어선을 사수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방어선, 서쪽 야만족들의 한 계파만 몰려와도 부서질 겁니다.”

 

 그의 말에 세나는 서쪽의 평원을 떠올렸다. 카를과 보았던 적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의 바람, 그것이 아버지와 기사들, 그리고 카를을 짓밟으며 모래 속에 묻어버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센트리올 공작령의 역량은 저들을 상대하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급하게라도 새로운 병력을 충원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버틸 수 있다.”

“못 버팁니다. 서쪽의 영주들은 무너졌고 동쪽의 영주들은 서쪽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들 다음 대의 영주는 누가 될까 관망하며 이 영지를 좀먹으려 들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하이에나나 다름없습니다.”

 

 늙은 아버지에게는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 오로지 늘그막에 본 딸 하나가 모든 계승권을 쥐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영주들의 시선은 자명했던 것이다.

 

“세나, 이번만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저는 제 어린 시절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청혼자 자격으로 여기에 온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당신과 센트리올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서쪽 영지를 회복하고, 그 방어선에 있는 당신의 병사와 기사들 역시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마지막 말이 나온 순간 세나는 다리가 휘청이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말이었을지언정 지금의 그녀에게 그 발언은 사지에 있는 카를과 그 기사들을 구해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세나...당신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전 당신이 영지의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을..."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세나?”

“이만 돌아가주세요.”

“세나...센...”

 

 마침내 그가 어렸을 적의 아명까지 부르자 그녀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품었다. 그리고 말했다.

 

“메논, 돌아가. 나중에 이야기하자.”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메논은 대답했다.

 

“알았어.”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는 그의 발소리,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세나는 멍한 얼굴로 앉아있기만 할 뿐 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순간, 그녀는 마음의 벽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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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도 필요없지 않습니까! 메논 백작은 자신의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자 주인입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결혼식만 올리면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동쪽 영지의 누군가가 주장했다. 메논이 찾아온 뒤 다시 열린 영주 회의에서도, 그 다음 영지 회의에서도 이 문제는 결론내려지지 않았다. 

 

 이 문제가 장장 열흘을 끌게 된 것은 세나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려 들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센트리올 공작 본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일의 주도자인 멜레오르 백작도 공작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일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공작님...!”

 

 멜레오르 백작이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회의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메논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세나 아가씨. 오늘은 아가씨께서도 한 말씀 거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세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세나는 들리지 않게 탄식했고, 저 멀리서는 메논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온갖 주목을 받게 된 세나는 짜내듯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프 경...”

“예, 아가씨.”

“서쪽 전선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까.”

 

 소식이라도 좋다. 편지라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카를의 편지는 요 열흘 간 한 번도 도착하지 않았다. 만약 무슨 피치못할 일이 있어 보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혹은 아직 전령이 도착하지 못한 것이라면.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해줄 지지대가 필요했다. 가르프 백작이 말했다.

 

“송구하오나, 아직은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거기서 작은 희망은 끊어졌다. 멜레오르 백작은 가르프를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다시 세나를 조준했다. 

 

“아가씨, 아가씨의 기사와 병사들에 대한 걱정은 익히 알고 있으나 지금은 아가씨의 혼사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디 아가씨의 뜻을...들려주시옵소서.”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마치 그녀에게 이제 그만 선택을 하라고 종용하는 듯 했다.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순간, 그것은 더 큰 소리에 의해 묻혀버렸다.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옆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공작 마마!”

 

 의자에서 한 사람이 무너지는 광경, 그리고 그가 힘없이 계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광경, 그 모든 것이 스쳐지나가며 세나는 자신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쓰러진 공작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키려고 노력하던 그 때에, 오직 메논만이 그녀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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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