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배의 그 말도, 내 감정도.


그냥 거절하면 될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부탁일 뿐.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난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걸까.


타는듯한 더위는 한풀 꺾이고 서늘하고도 산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인터하이가 끝난 가을. 

비록 우승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어느정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결과 자체만 놓고 봤을때는 몰라도 퍽 만족스러웠다.

고비를 넘겨서일까, 이전의 투지는 사그라들고 다들 어느정도 풀어진 분위기인 요즈음이었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였다면 지금쯤 한창 연습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렇게 팔자좋게 돌아다니다니.

뭐, 그래도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온 나에게 주는 일종의 상이라 여기기로 했다.


파르페는 달콤하다.

나는 단 맛을 좋아하기에, 예전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종종 파르페를 먹곤 했다.


그런 파르페가 필요할 때 마다 찾는곳이 바로 이 카페였다.

가격이 싼것도 있지만 정이라고 해야하나. 다른 카페는 특유의 그 맛을 잘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백하면서도 포근한 식감. 또한 너무 깊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은 맛.

없다고 해서 삶에 지장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정작 사라지면 허전함을 느끼는 그런 파르페는 내 인생의 활력소였다.


그리고 그런 카페에서 나는 오늘, 해어졌던 전 연인과 재회한다.


미나즈키. 혹은 료스케.

생각해보니 료스케라고 부른 적은 많았러도 미나즈키라는 성씨로 부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나와 료스케가 서로 친밀했었다는 증거겠지.


보통 재회라고 하면 뭔가 감동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내가 배구에 집중하기 위해 료스케에게 이별통보를 했고, 료스케는 아무 말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료스케는 새로운 애인을 사귄 뒤 연락이 끊어졌다.

물론 후일 만난 선배는 서로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까지 했지만 믿을수가 있어야지.


끝이 좋지 않았기에 당연히 서로간의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고, 그렇기에 사실 이 만남도 그닥 내키질 않았다.

하지만 선배가 내게 부탁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 뿐이다. 겸사겸사 사실관계도 확인해 볼 겸.

어느덧 카페가 내 시야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디.


"....3시 30분."


약속시간은 오후 4시였다.

정확한 시간을 잊어버렸다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떨릴 뿐 이었다. 만남은 항상 긴장되고 떨리는 법 이니까.

나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도착한 카페는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약 1년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속의 모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은은히 느껴지는 향수에 차갑게 식은 내 가슴도 은은히 달아오르는 것 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이토록 설래는것은.

분명히 료스케와는 이미 해어진 상태이고, 끝도 좋지 않았는데.

그가 내게 남긴 흔적 때문인걸까. 나의 꿈, 나의 목표...


불현듯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문자였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선배.


[료스케는 결백해. 걔한테는 오직 너 뿐이야.]

[지금은 잘 와닿지 않겠지만 믿어줘.]


"...염병."


나는 대충 문자를 읽은 뒤 곧바로 주머니에 전화기를 쑤셔 넣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료스케가 헐래벌떡 뛰어오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꽤나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는지라 퍽 반갑기도 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허억... 허억..."

"일찍... 와 있었네..."


"응. 10분 정도."

"들어가자."


카페는 벌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남아있는 자리는 딱 한 자리.

그것도 과거 내가 료스케에게 고백을 했던 그 테이블이었다.

그닥 내키진 않았지만 그 외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냥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료스케의 인상은 퍽 달라져 있었다.

어깨는 잔뜩 주눅들어 움츠려져 있었고, 시선은 어느 한 곳에도 제대로 두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이전의 그 료스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바뀐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야. 하나에."


"...응. 나도."


"저기, 잘 지냈어?"


"그닥, 너는?"


"어... 나도... 잘 지냈어."


오랜만에 하는 료스케와의 대화는 매우 어색했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한 뒤, 나는 상황도 환기할 겸 종업원을 불러 파르페를 주문하였다.

료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이 자리가 불편한 듯했다.

결국 우리는 파르페가 나올 때 까지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파르페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 너도 먹어."


나는 료스케에게 먼저 파르페를 내밀었다. 물론, 빨대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료스케는 내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아무말도 않고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정말,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내 기억속의 료스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던걸로 아는데.

덕분에 나조차도 슬슬 이 시간이 지겨워지기 시작할 무렵, 의외로 선뜻 말을 꺼낸건 료스케였다.


"...저기, 먼저 연락해줘서 고마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나 그동안 너한테 연락해야될지 말아야할지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냥... 계속 기다렸어."


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는걸까나.

나는 너에게 따지기 위해서 이 자릴 찾은건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잖아.


뭐, 이를 위해서 머리를 식힐 용도로 파르페를 주문한거지만.

아무리 해어진 사이라고 해도 내게는 아직 료스케에 관한 애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파르페를 한 입 떠먹은 뒤, 료스케를 향해 말했다.


"왜 온거야?"


"...뭐...라고?"


"내가 갑자기 불러냈는데도 왔잖아."

"무슨 이유라도 있어? 시간이 곤란하거나 그러진 않았던거야?"


"시간이야 뭐... 늘 비는걸."

"그리고 너가 오라고 한거니까..."


말을 마친 료스케는 머리를 긁적이며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파르페를 한 번 더 떠먹었다.


"...선배에게 들었어. 너 협박 당했다면서?"


"으,으응? 내가?"


"시치미 때지 마. 너가 선배의 협박에 못 이겨서 애인 노릇을 해준거라며." 

"무슨 애인 대행 알바 그런 비스무리 한거야?"


료스케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서서히 표정이 썩어들어갈 뿐.

굳어버린 분위기를 띄우기위해 친 개그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난 듯 했다.


"뭐, 말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ㄷ..."


"...맞아. 애인 대행 알바."

"나랑 선배는 애초에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어. 선배랑은 단순히 거래를 한거 뿐이고..."


"거래? 무슨 거래였는데?"

"너가 그런 일을 해서, 넌 뭘 얻기로 했는데??"


료스케는 말이 없었다.

나는 파르페를 한 입 더 떠먹었다.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다. 분노와 황당, 동시에 동정과 연민이 한데 뒤섞여 날 감정의 소용돌이로 이끌었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표정관리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아무리 파르페를 떠 먹어도 한껏 고조된 감정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줄곧 침묵중이던 료스케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 자리."


"...뭐?"


"이 자리 말이야. 너랑 다시 만나는거."

"...선배가 그랬어. 나랑 잠시 애인 대행 연습을 해주면 너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래서 한거야. 나라고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건 아니란 말이야..."


머리가 멍해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난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떠오르는게 없었다.


"...왜. 왜 하필 나야?"

"무슨, 다른 여자애들도 있었을거 아냐. 단순히 외로웠던거라면 미팅도 있었을거고..."


"...외롭긴 했어. 당장 하굣길부터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건 다른 누군가로 채울 수 없는 거잖아. 하굣길의 추억은 너와 함께 쌓은 인연의 결과인걸."


말을 마친 료스케는 파르페를 한 입 떠먹은 뒤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붉어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파르페를 급히 들었지만 이미 다 먹은지 오래.

나는 어색하게 파르페 컵을 내려놓은 뒤, 머리를 무릎에 처박은 채 말했다.


"...나랑 다시 만나려고? 그게 목적이었어?"

"하지만... 내가 널 그렇게 찼는데도? 대체 왜??"


"..."

"처음부터 다른 목적은 없었어."


마음이 떠난 줄로만 알았다.

더 이상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나츠키 선배를 만나고, 함께 사귀는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지금까지 줄곧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연습에 정신이 팔려 1주년도 잊어버린 나를.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해어져버린 나를.

그런 나를 잊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지금까지 쭈욱 참아 왔던거야?


"..."


머리가 다시금 아파오기 시작했다.

겨우 진정시켰는데, 최근까지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걸까.


만약 료스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내가 오해한거라면.

료스케는 내가 그렇게 매정하게 문자를 보내고 차버린 이후에도 나를 계속 기다렸다는 의미인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얼마나 큰 상처를 준거지?


"저기, 아이자와. 괜찮아...??"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료스케를 바라보았다.

겅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료스케의 두 눈동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아아. 정말이구나. 내가 오해한거구나.

너는 정말로 결백했던거구나. 하지만 내가 그걸 믿어주지 않았던거구나.


"...아이자와...?"


"...넌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


말 그대로, 료스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위해주던 너, 그런 너에게 나는 몹쓸 짓만 했구나.


짜증났다. 내 자신에게 너무나도 화가 났다. 

나에게 과분한 너에게 내가 주제 모를 짓을 했구나 싶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과오를 모두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애초에 바로 잡을수는 있는걸까?

이미 시간은 한없이 흘러가 버렸는데.

멀어진 간극은 도무지 매울만한 수준이 아닌데.


어쩌면 좋지.

되돌릴 수 없다면 잃어버려야만 하는걸까.

진정으로 널 보내줘야만 하는걸까.


그건 싫어.

널 놓치고 싶지 않아.


"...파르페 하나 더 시킬까? 배고프진 않고?"


"...어,어? 아,아니...?"


"너도 거의 다 먹어 가잖아. 나도 다 먹었고."

"괜찮아. 네것까지 내가 다 살테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동안의 애정에 보답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파르페 한 잔 뿐이라고 할지라도.


"아니야 진짜 괜찮아...! 안 사줘도 되니까..."

"네것만, 네것만 사... 난 진짜 안 먹어도 돼."


하지만 그런 나의 노력은 료스케에게 닿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거부당하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해야하나.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료스케에게 마음을 닫아왔던 만큼, 료스케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어쩌면 지금의 료스케는 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래? 그럼 내 것만 시킬게."


그래서, 그냥 도로 태연한 척을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한 척을 하며 치근덕거리면 누구라도 분명 부담을 느낄 터.

비록 시간은 지났지만 과거가 과거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은 오직 조용히 티를 내지 않으며 료스케의 마음이 열릴 때를 기다리는 것 뿐.

그것이 얼마의 시간을 필요로 하든 나는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저기, 아이자와."


"...응? 왜?"


료스케는 들고 있던 파르페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굴에는 왠지모를 고심의 흔적이 가득해 보였다.


"내가... 말했잖아? 널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서 그 짓을 했다고..."

"넌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지금도 내게는 오직 네 생각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감정으로 하여금 주변 공기조차 은은히 굳어갈 무렵.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며, 료스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만 좋다면...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


"..."


마음이 열릴 때를 기다릴거라곤 했지만 이토록 금방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싫은건 아니었다. 오히려 듣던 중 반가운,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만큼 기뻤다.

료스케가 스스로 재결합을 바라오다니, 정말 그동안 간절히 바라오던 기적이 일어난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내 입은 섣불리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 당장 료스케와 재결합을 한다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그놈의 시기가.


아무리 인터하이라는 큰 고비를 넘겼다고 해도 안심하기는 일렀다.

바로 1월달에 열리는 전일본 배구 고등학교 선수권 대회, 일명 "하루코" 때문이다.


3학년들은 드래프트가 곧이라 별 상관 없지만, 나와 같은 2학년들. 

그것도 2학년 끝자락의 부원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이 대회가 정말 중요했다.

대회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료스케의 제안은 안타깝지만 거절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에, 괜찮아?"

"그...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생각해보고 대답 해줘도 괜찮아..."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래, 사귀자' 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껏 그 말을 계속 기다려왔다고, 오래전부터 난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백하고 싶었다.


"..."

"....료스케."


"응...?"


"혹시 기억해? 그때 내가 했던 말."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료스케와의 인연을 쌓아 올리기에는 지금이 너무나도 중요한 시기였으니까.


"...응. 기억하지."


"...그럼, 내가 뭔 말을 하려는지도 알겠네...?"


"응. 알다마다."


료스케는 씁쓸하게 웃어보이며 내게 말했다.

저 표정. 감출 수 없는 슬픔과 실망감이 끝없이 묻어나오는 저 표정.

정말, 저 표정이 안타까워서라도 네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건데.


가슴이 저려왔다.

눈물젖어 울먹이는 눈빛, 애써 덤덤한 척 하는 목소리.

감출 수 없는 좌절감이 절실히 느껴지는 행동 하나하나가 날 너무나도 괴롭게 만들었다.


"...미안, 아이자와. 내가..."


"....잠깐...!"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빨리 농담이었다고 말해.

그리고 가서 꼭 안아줘. 간단하잖아.


어서 가서 말해. 보고 싶었다고.

널 놓치고 싶지 않다고. 널 보내고 싶지 않다고.

지금껏 줄곧 그렇게 속으로만 외쳐왔으면서.

이제 기회가 왔잖아. 기회를 잡으면 되는거잖아.


뭘 그렇게 망설이는거야? 

왜 주저하는거야 아이자와?


.

.

.



'전에 누가 그러던데, 슬럼프가 왔을때는 목표를 세우면 조금 나아진다더라고.'

'네 목표는 뭐야 아이자와?'


'일본 최고?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솔직히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거잖아.'

'그리고 허무맹랑하지 않으면 그게 왜 꿈이겠어? 허무맹랑하니까 꿈꾸고 목표로 하는거지.'


'지금은 그저 꿈일지 몰라도, 그게 목표가 되고 단계가 되는거랬어.'

'그러니까 힘내. 남자친구로써 여자친구 응원하는건 당연한거지!'


'응원할게. 아이자와.'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든.'


'...그래. 알겠어'

'꼭 꿈을 이루길 바래.'


.

.

.


역시. 안되겠어.

난 포기 못해. 내 꿈을 포기하지 못하겠어.


네 덕에 여기까지 올라왔고, 네 덕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

그래서 놓지 못하겠어. 네가 되돌려준 이 꿈을 도무지 놓을수가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너까지 잃기는 싫어.

너와 같은 소중한 인연을 다시금 잃고싶진 않아.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한걸까.


최고가 되려는 목표와 너를 향한 진심.

둘 다 가져갈 수는 없는걸까.


"무슨... 일인데?"


"그,그게..."

"...료스케. 너도 알겠지만..."


"알아, 나도. 너 요즘 바쁜거."

"하아... 미안해... 내가 괜한 이야기를 또..."


"내가 그랬었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그러니까... 모든게 끝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어렵사리 꺼낸 대답이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내 마음에 일말의 여유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응. 알겠어."


"고마워. 이해해줘서."


료스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마다, 내 가슴도 찢어질것만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엎어진 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럼, 일어날까."


"그래. 그러자."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6시였다.

나도 참,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구나.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카페에 앉아 몇시간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이렇게 다시금 서로를 마주본 채 이야기를 할 날이 다시 올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분명 처음 선배의 제안에 응했을 때는 이러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뭐, 결과적으로는 꽤나 괜찮은 일이었지만.


돌아서서 멀어지는 내게, 료스케는 말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빛 너머로 전해져오는 료스케의 환한 미소.

그 미소를 보니 지금껏 아파왔던 머리가 다시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잘 한거야.

이렇게라면 최고가 되려는 나의 목표도, 료스케를 향한 진심도 모두 잡을 수 있어.

잠시 떨어질지언정, 우리가 운명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거니까.


이는 아마 변함없는 사실일테니까.


***


"...휴우..."


어느덧 아이자와도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

불현듯 울적해진 기분탓에 모든것이 헛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속으로 수없이 연습했을텐데.

선배가 말해준대로 아이자와에게 말했을텐데.

자신을 만악의 근원으로 몰아 세우면서까지 나와 아이자와를 응원해 주셨는데.


망쳐버렸다.

그것도 완전히.


선배가 애써 마련해준 기회를 내가 바보같이 모두 날려버렸다.

상황으로 보나 반응으로 보나, 아까전의 아이자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자와는 내게 불친절했다.

정말 이전의 그 아이자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 마냥 아예 고개를 파뭍고는 내 시선을 피했다.


"왜 온거야?"


아이자와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래, 어찌보면 정상적인 반응을 바란 내가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아이자와의 일정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붙잡고자 했다.

내 첫 사랑이자 첫 인연인 그녀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뭐, 물보듯 뻔했지만.


내가 바래왔던 그녀와의 재회는 이게 아니었는데.

이전처럼 화기애애는 조금 무리더라도, 적어도 대화다운 대화는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겪은것은 취조, 그리고 취조였다.

다시 만난 아이자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아이자와가 아니었다.

과거 다정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 오직 차가운 시선과 냉혹함만 남은 여제 그 자체.

철의 여인이라는 이명은 나츠키 선배보단 아이자와에게 더 어울릴듯 싶었다.


애써 마음을 전했건만 돌아온것은 또 다른 형태의 기다림이었다.

6개월전 아이자와에게 들었던 그 말 그대로, 나는 또 한번 그녀에게 거부당하고 만 것 이다.


물론 그녀를 탓하고자 하는건 절대 아니지만.

아이자와 입장에서도 내가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일 터.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에게 있었다.


그렇게 성급하게 내지르면 안됐다.

조금 더 아이자와의 감정을 해아렸어야만 했다.

그녀가 마음을 열때까지 기다렸어야만 했다.


그냥 모두.

내 책임인걸.


"...젠장."


씁쓸했다.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까지 되어버릴줄은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다.


사실 징조는 이미 차고 넘쳤었다.

내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태도부터 명백한 적대감이 드러나는 어조까지.


어쩌면 나 자신도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은것은 나였으니, 이마저도 내 책임이겠지만.


"넌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아이자와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대체 얼마나 내게 실망했으면, 대체 얼마나 내가 싫었으면 그런 말을 할 정도였을까.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단 한치도 성장하지 않은, 미숙하고 어린 상태 그대로였던 샘이다.


이쯤되니 모든것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자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걸까?

내가 아이자와를 다시 잡는게 맞는걸까?


"...훌쩍."

"...크흑...! 크흐흐흑...."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아이자와를 사랑하고 있었다.

솔직히 누구의 잘못을 따지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아이자와는 아이자와의 길을 추구할 뿐.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진작에 끝날 일이었다.

이토록 고통스러워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학창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여긴 채 유종의 미를 거두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나.


사실상 이미 끝난지 오랜 관계인데, 회복의 가능성도 없는데 기대한 나의 잘못이었다.

어쩌면 나와 아이자와의 인연은 6개월 전에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츠키 선배였다.


"...여보세요?"


"료스케, 쿨럭... 어떻게 잘 됐어?"

"지금쯤이면 끝났을 것 같아서 전화 했는데..."


"...예. 끝났죠. 끝났어요."


선배의 목소리는 아침에도 그랬지만 상당히 힘이 없고 쉬어있는 상태였다.

본인은 감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감기가 심하면 보통 목이 잠기지, 목소리가 쉬어버리진 않기 때문이다.


"그,그래? 방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음... 그게..."

"...죄송해요 선배. 망쳐버렸어요."


"...망쳐버렸다고? 어,어쩌다가...???"


"아이자와의 마음이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나봐요."

"뭐, 결국은 제 책임이겠지만요... 죄송합니다 선배."


전화기 너머의 선배는 말이 없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미약한 숨소리를 제외하곤 정말 아무런 

충격이었던걸까. 하긴 그렇게나 열심히 후배의 뒤를 봐줬는데 실패했으니.

하지만 이후 이어진 선배의 말은 의외였다.


"..."


"...선배?"


"..."

"...미안. 료스케."


"네? 미안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ㄹ..."

"자,잠깐. 선배?!? 선배!!!"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음만 들려올 뿐, 선배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다.


"선배... 대체 무슨 일이..."


당황스러웠다.

미안하다니, 선배가 미안할 일이 대체 어디있다고.

늘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게 선배였지만 이번만큼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 뒤 내가 택한 행선지는 안봐도 뻔했다.


"나츠키 선배? 선배 오늘 연습 안 왔는데?"


"...뭐라고?"


"응. 오늘 아프다고 안 오셨어!"


부 주장인 마도카마저도 그렇게 말 할 정도였으니 내 혼란이 가중되는것은 당연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연습도 빠진 채 갈 장소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어느덧 나는 아이자와와의 일도 모두 잊어버린 채 선배를 걱정하고 있었다.


[...]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하아,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이후로도 수차례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정말 무슨일이라도 생긴걸까. 만일 그렇다면 대체 왜?


다음날, 선배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배의 교실로 가봐도 질병 때문에 결석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체육관에서도 마도카에게 똑같은 소리만 들을 뿐, 별 다른 소득은 없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도.

선배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내일 보자는 선배의 그 말.

그 말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연습 이후 나는 단 한번도 학교에서 선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들었어? 선배 배구부 그만 뒀다는데?"


"정말? 그 나츠키 선배가? 대체 무슨 일이래?"


"몰라~ 이유도 없이 그냥 나갔대~!"

"덕분에 우리 코치 개빡쳐서 방방 뛰었잖아~"


그로부터 몇 주 뒤.

선배가 배구부를 그만두었다는 소문이 교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


선배는 강했다.

철의 여인이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게 아닐 만큼, 선배의 정신력과 피지컬은 모두가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모르는 선배의 이면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각 나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외롭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료스케, 너도 들었어? 나츠키 선배 이야기..."


"...응. 나도 오늘 처음 들었어.


"세상에 왠일이래? 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어?"


"내가? 내가 왜..."


"뭐야, 너 선배 남친 아니었어? 매번 둘이 같이 붙어다니길래 남친인줄 알았지."


"아,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닌걸."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응."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본래 나와 선배는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선배와의 체무관계는 진작에 끝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이 되긴 매한가지였다. 

비록 더 이상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함께 보냈던 시간마저 사라지는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아..."

"뭐야 도대체..."


공허했다.

마음속 한 켠이 텅 비어 있는듯한 느낌.

수업도, 친구들의 농담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빠트린것만 같았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대체 왜 이러는걸까.

뭐가 문제길래 이토록 허전하고 불편한걸까.

단순한 걱정이라기엔 그 깊이가 너무나도 깊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홀로 걷는 하굣길도 점차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어째서인지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최대한 늦게 돌아가고 싶었다.

내 곁을 스쳐간 인연들.

그 인연들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나는 향수에 젖은 골목길을 홀로 거닐었다.


불현듯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고통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때면 나를 염려해주던, 아이자와나 선배같은 인연들.

그러나 그 모든 인연들은 이미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쿵"


"악! 아야야..."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차에 문득 이마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걸으면서 너무 집중을 했던 탓일까. 눈 앞에는 커다란 벽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의 주인은 다름 아닌 집 앞의 갈림길이었다.


이번이 몇번째인지.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리면, 운명에 이끌린 것 마냥 항상 이곳이었다.


방황하던 아이자와에게 처음으로 우산을 씌워준 장소도.

부쩍이나 친해진 그녀와의 첫 인연을 쌓은 장소도.

매일 오후 아이자와와 함께 거닐던 장소도.


아이자와에게 차인 후 방황하던 나를 선배가 도와준 장소도.

나와 선배가 연습을 위하여 종종 지나던 장소도.

선배와의 연습이 끝난 장소도 모두 이 곳. 


자그마한 집 앞의 갈림길이었다.


"...선배."


문득 선배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가만히 선배의 연락을 기다리는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기다림은 결코 좋은 해답이 되지 못했다. 

내가 그랬고, 내가 경험했으니까.


나는 다시 한 번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그러나 이번에도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아픈 사람에게 몇번이고 전화를 건 내가 이상한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니 너무 과했던게 아닐까 싶었기에,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어차피 남남이니 아무 문제도 없을터였다.


하지만 걱정되었다.

떨어지면 아쉬움을 느꼈다.

해어질 때 내심 붙잡고 싶었다. 

남남인데 말이다.


'왜 그렇게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있어?'

'너, 나랑 연습하자.'


정말 미쳐버린걸까.

도대체 선배가 뭐라고, 나로 하여금 이토록 신경쓰이게 만드는걸까.


그 목소리.

쾌활함이 넘치던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옆을 돌아보면 환하게 웃고있는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

.

.


'...뭐랄까. 되게 신기해.'

'왠지는 모르지만 네 앞에만 서면 마음이 편해지는듯한 기분이 들어...'


'남들에겐 이런 적 없는데... 왜 유독 너한테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걸까...?'

'...어쩌면 너가 특별한 아이라서 그런걸지도? 후훗.'


'너와 함께 보냈던 그 시간, 내겐 너무나도 복에 겨운 일이었어.'

'그래서 말인데 료스케, 너에게 있어 난 무슨 존재야?'


.

.

.


"...크윽....!!!"


나조차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 확실한것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동정이나 걱정 따위의 시시콜콜한 감정이 아니라는것.


나는 다시금 전화기를 뽑아 들었다.

어차피 받지 않을게 뻔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더 이상 남남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

지금의 내게 있어 선배는 단순한 선후배나 연습 상대를 넘어선 무언가였으니까.


그렇기에 또 다시 잃을수는 없었다.

내게 먼저 다가와준 소중한 사람을 잃고싶진 않았다.

붙잡아야만했다. 붙잡는게 당연했다.


[...]

[...]

[...]


"젠장... 젠장...!"


그때였다.


[♩~ ♬~]


어디선가 주인 잃은 벨소리가 벽 너머에서 미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벽에 바싹 붙은 채 들려오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점차 확실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더이상 귀를 붙이지 않아도 선율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

"거기 누구세요?"



"....!!!"


그곳에는 사람이 서 있었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키 큰 여성이,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로 말이다.


***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듯

처음 이거 쓸 땐 여기까지 쓸 수 있을지도 반신반의 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

지금까지 함께 달려와줘서 고마워

남은 클라이막스도 힘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