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공 아니라서 틀린 서술 있을 수 있음




바로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 이전 선조 16년(1583)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북방에서 니탕개와 다른 여진 부족들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한 사건인데, 전쟁인데 왜 조선을 구했느냐 하면,


1. 경험치 쌓기

조선은 28년 전 명종 시절 을묘왜변 이후 별다른 싸움이 없었음. 여진족이나 왜구들이 깔짝대기야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규모였고, 이건 다시 말하면 조선군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거임. 그런 의미에서 나라를 초토화시킬 대전쟁도 아니고 정말 소규모 침략도 아닌 니탕개란은 조선군이 경험을 쌓고 향후 국방 계획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됨.


2. 무기 개발

승자총통은 김지가 만들어낸 총포였는데 니탕개란에서 큰 활약을 함. 여진족들이 성을 포위했는데 성 안에서 승자총통은 난사해서 물리치는 활약을 하고 선조한테도 보고되면서 각광을 받는데, 이후 총포 개발도 열심히 하고 임진왜란 때 큰 도움이 됨.


3. 행정가 율곡 이이

이이는 행정 능력이 뛰어나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여러 고위직을 도맡아 했는데 그러다가 병조판서, 그러니까 국방부장관이 됨. 그리고 1년이 안되서 니탕개의 난이 벌어지는데 여기서 신참 병조판서답지 않게 신들린 공을 세움. 


3-1. 일단 서얼과 노비들 중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뽑아서 서얼들은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하고 노비들은 양인이 되게 함. 무예를 못해도 식량을 바치면 그렇게 해줌


3-2. 삼남의 신검 2~3급인 애들은 어차피 잘 못 싸우는데 북방까지 걸어가면서 횡포도 심하니까 말을 바치면 군 복무 면제시켜주고 그 말을 1급 애들 타게 함. 애초에 여진족 상대하려면 기병이 필요하기도 하고


3-3. 성을 증축하고 삼남지방에서 북방까지 식량과 군인 옮기는 거 총괄 및 기타 등등


이때 율곡 이이가 세운 방어 전략이 임진왜란 때 그대로 채용되면서 대규모 침략에 비교적 혼란을 겪지 않고 대응하는 주춧돌이 됨.


4. 이순신.

이순신 장군님은 당시에도 엄청나서 여진의 삼거두인 니탕개, 우을기내, 율보리 중 우을기내의 목을 따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함. 이 니탕개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립, 이순신같은 무장들이 본격적으로 기용되기 시작함.


5. 북방 정리

니탕개의 난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국경의 여진족들을 제압하기 시작함. 선조 21년의 시전부락 전투가 그 예시. 만일 니탕개의 난급 여진족 침공이 왜란때 일어났다면..?



니탕개의 난을 보면서 주목해볼 인물은 선조, 이이, 이순신이라고 볼 수 있음. 사실 활약만 보면 선조, 이이, 신립이지만..역사적으로 보면 신립은 아무래도;;


그럼 선조는 무슨 활약을 했을까?

여기서 선조는 거의 회귀물 주인공이 아닌가 싶은 능력을 보여줌.


일단 병조판서로 이이를 제수하고, 이이의 정책을 지지함. 이후에 노비를 양민으로 올린 것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전부 이이를 비난하니까 이이를 쉴드쳐주고 이이를 공격한 신하 3명을 귀양보내서 이이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함. 여진족 토벌에 전력을 다하고 진압 후에는 신립 등 활약을 한 무장들을 지원해주면서 무를 장려함. 실제로 임진왜란 5개월 전에 홍문관 부제학 김성일이 선조한테 지금 너무 무신을 우대해서 나라의 근본인 영남 호남에서 글읽는 소리가 안 들린다고 함. 여기에 니탕개란의 영향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등용하는 것까지 완벽


근데 앞으로 전개에 복선도 충실히 깔아놨는데, 잠시 후퇴해서 수습했다가 여진족 상대로 선전한 김수같은 장수들을 사형에 처하면서 현지의 여러 장수들을 죽이는 우를 범하는데 이건 임진왜란에서 반복됨.




요약: 경험치+전략 수립+이순신의 발견+북방 정리+무관 대우 향상으로 니탕개의 난 없었으면 조선은 임진왜란때 진짜 망할 수도 있었음.


다시 말하지만 역사 전공 아니라 틀린 서술 있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