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 

3. 겨울전쟁



"몰로트프는 안돼!"

핀란디아, 핀란디아! 이반놈들이 다시 돌아왔네!

몰로토프는 장담했지,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내일이면 헬싱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고!"


그만 알아보자



~자신만만한 소련~


당시 소련은 1차,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극적으로 성공시켰으며,

3차 5개년 계획을 실행함으로써 후에 보여줄 거대 공업국으로써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역설한 것 과 같이, 타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공업력을 바탕으로 하여 대규모 군사력을 준비하고, 또한 신무기였던 전차를 대량 도입한다.

특히 당시 두드러졌던 것은 그 기갑부대의 규모였는데, 겨울전쟁 당시 총 6,500대 가량의 전차를

투입할 수준의 세계 최대의 기갑전력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영토 확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첫 목표는 핀란드가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대숙청~


겨울전쟁 전의 소련군에는 적백내전 당시 유입된 고위 장교가 많았으며,

또한 기존에 스탈린과 경쟁하던 트로츠키에 호의적인 사상을 가지거나,

스탈린의 기갑 육성정책에 불만을 가진 장교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또한 적백내전을 거치며 장군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권을 부여한 나머지,

사실상 부대 자체가 사병화되어가는 현상마저 발생했으며, 

비리와 횡령이 횡행하고 있었다(로코솝스키 장군도 목재 횡령죄로 당시 숙청된 바 있다).

이로 인해 스탈린 서기장은 대숙청을 단행, 군 고위장교 대다수를 처형하고, 고위 정치국원 전원이 숙청되는 등

군 지휘부를 갈아엎었으며, 그와 동시에 하급 장교까지 사상이 의심되거나 범죄행위가 적발될 경우

바로 숙청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예좁시나"라는 비이성적 공포정치로 변질되어가고,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거나 즉결심판되는 등 사회적 문제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대숙청으로 인해 다수의 붉은 군대 고위장교와 전력들이 사망, 혹은 수감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소련군의 하드파워는 세계 최강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프트파워는 최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숙청은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에게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개전, 이걸 못 이기겠어?~


1939년 11월 26일, 소련은 핀란드와의 접경지인 마이닐라에서 자작극을 벌여 핀란드에 의한 포격을 가장,

이와 레닌그라드의 안정적 세력권 확보를 명분으로 핀란드에 대한 전면적 공세를 감행한다.


당시 소련군은 두 사람에 의해 지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위 정치국원 안드레이 즈다노프



소련군 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일단 이 장성 라인업 자체는 얼핏 보기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당 내부에서 명망높은 정치국원으로서, 스탈린의 신임을 잘 받고 있었으며

또한 선전활동에 대해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서기장 스탈린의 절친한 친우로서, 대숙청 이전의 세르게이 키로프와 버금가는

우정을 갖고 있던 사이였다. 스탈린과 친분을 쌓게 된 계기는 적백내전. 당시 남러시아 전선에서

차리친 공방전 등에서 전공을 쌓던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여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적백내전 당시의 전장에서는 적절한 전술을 구사해 백군을 상대로 승리를 다수 거두는 등 

유능한 장군이였다.


그러나, 실제로 보자면, 일단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정치국원이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군사적 업무에 탁월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그의 휘하 참모장이였던 키릴 메레츠코프가 그의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였으나, 이마저도 그가 정치국원으로서 간섭을 하는 사례가 존재했기에 효율적이지 못한

지휘로서 이어지게 된다.

또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는 적백내전 당시에는 남러시아 전선에서 활약하며 무수한 무공을 쌓았으나,

그는 원수라는 계급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존재였다. 후에 보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의 그의 전략적 안목의 문제나,

전체적 역량을 보았을 때, 그는 전술지휘관의 역량이 있었던 것이지, 원수라는 전략적 식견을 요구하는

최고위 장교로서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군'(黨軍)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던 소련군의 특성 상, 스탈린의 측근이였기에

그의 능력보다 높은 직위인 원수로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그는 당시에 도태되어가고 있었던 기병을 지지하는 "기병파"의 대표자로서(또다른 예로는 세묜 부됸늬가 있다.), 1937년, 안타깝게도 대숙청으로 인해 처형되었던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주창했던 종심돌파전술에

입각하여, 기갑병력의 적극적인 활용 및 적 부대와의 기동화력전에 의한 물리적 섬멸을 추구한 "기갑파"와

기존에 제 1차 세계대전에서 구사되던, 전열보병과 경보병의 어중간한 상태의 전술을 구사하며 낮은 충격력을

기병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던 보수적인 "기병파"가 대립하고 있었던 당시 소련군에서,

구시대적으로 도태되어가고 있었던 기병파의 수장이였던 그가 이 전쟁을 지휘, 그것도

대규모 병력을 다루는 전쟁의 사령관이 되었으니, 구시대적 전술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개전 당시, 이들에게는 약 42만명 가량의 병력이 주어졌다. 또한 2550대 가량의 전차, 3880기의 항공기가 

우월한 소비에트의 공업력을 과시하듯 전장에 물밀듯이 투입되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소련군에 핀란드는 전역이 수 주 안에 점령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망 했 어 요~


우리는 이 시점에서 혹자가 한 명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나 번지르르한 계획이 있다. 한대 맞기 전까지는."

그렇다 소련군은 핀란드군에게 얻어맞았다.

그냥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어째서인가? 우리는 이를 위해 당시 핀란드의 전술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핀란드의 수장은 만네르하임, 군인 출신으로서 군사 분야에 대해 탁월한 안목을 가졌던 이다.

그는 소련의 침공의도를 사전에 파악하였으며, 이를 막기 위하여 소련군의 침공 예상지대에 만네르하임 선을 만들어낸다.

물론 만네르하임 선은 당시 세계 전역에 이름을 날렸던 마지노 선에 비하면 그저 콘크리트 벙커 몇개를 올려놓은 

느슨한 벙커 지대에 불과했지만... 핀란드군은 이를 경탄할 정도로 잘 이용하게 된다.


먼저, 핀란드군은 분단 후 각개격파 전술을 매우 충실하게 이행한다. 당시 핀란드군의 전력은 30만명, 구형 르노-FT가 주인

전차 32대, 항공기 110기 가량이 전부였다. 설상가상으로 개전 초의 소총 수는 25만정 뿐이였기에, 총기조차 모자라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압도적 전력비에도 불구하고, 핀란드군은 자신들이 가장 유리한 전술, 게릴라전을 극도로 활용하게 된다.

게릴라전, 나폴레옹 전쟁기에 열세에 놓여있던 에스파냐 파르티잔들이 활용했던 전술로서, 정예부대를 저질의 병력으로

섬멸하기에는 최적의 전술이였다. 그들은 게릴라전을 위해서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화염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설상전에서 엄청난 위장력을 보이는 설상 위장복을 대대로 활용,

보병 개개인에게 높은 기동력을 부여하기 위한 스키 보병대를 운용하는 등 최고의 게릴라전을 펼쳤다.


또한 "하얀 사신"으로 불렸던 시모 헤위헤로 대표되는 다수의 저격수를 활용, 게릴라전의 이점을 살려 고위장교 및

소련군 병들을 일방적으로 사살하며 그야말로 영웅적 활약이라고밖에 말할 길이 없는 전공을 세우며,

핀란드군의 출혈을 최소화하고, 소련군의 혼란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등,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데 크게 일조하도록

하였다. 거기에 저격수를 상대하기 위한 기갑병력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부터 제병합동에 부정적이였기에

각개전투를 벌이다가, 핀란드군의 교묘한 분단전술에 말려들어 단독으로 부대에서 떨어져 

화염병에 공격당해 취약한 가솔린 엔진이 불타 수많은 기갑차량이 무력화된다.




~분수령, 라도가-카렐리야 전투~

라도가 호는 레닌그라드의 서쪽에 위치한 호수로서, 소련군의 주요 진격루트인 카렐리야 반도로

이어지는 호수로서, 근처에는 중요한 전략거점이 다수 분포해 있었다. 그렇기에

소련군은 해당 지역을 돌파하기 위해 4개 사단을 투입한다.



이것이 당시의 전술지도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북쪽이였다.

당시 남부에는 보다시피 만네르하임 방어선이 존재했기에 남부로 진격한 소련군 2개 사단은 공격 시작 후

얼마 가지 못해 돈좌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전설은 북부에서 펼쳐진다.


북부의 톨비예르비에서,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핀란드의 설상환경과 지형지물을 활용한 전술)에 의해

소련군 제 139사단과 제 56사단이 격멸당하고 만 것이다. 당시 소련군 전차부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핀란드군의 적절한 유도로 인해 폭설로 인해 기동불가 상태에 빠져 격멸되거나, 핀란드군의 기습으로 인해 탈취당하거나 격파당하는 등 허망한 참패를 겪었으며, 보병부대는 기관총 진지와 매복했던 보병들로 인해 우후죽순 죽어나갔다. 당시 소련군 장병들은 후퇴하면 정치장교에게, 전진하면 핀란드군에게 죽을 판이였기에, 답이 없는 상황이였을 것이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계속되는 진격 실패 및 참패로 인해 소련군은 위축되었으며, 또한 라도가 호 북부 전역 및 콜라 반도 전투에서의 전력비 우세성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해당 전장에서의 공세능력을 잃은 듯 보였다.


~소련군 최후의 공세와 협정~



당시 스탈린이 보로실로프를 질책했으며, 보로실로프가 접시를 내던졌다는 야사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후, 스탈린은 총사령관 직위를 세묜 티모셴코 원수에게 인계, 90만명의 추가병력을 투입하여 최후의 공세를 펼쳐

유리한 협상조건에서 핀란드와 협상하고자 하였고, 결국 소련군은 라도가 호를 둘러싼 지역을 석권하게 된다.

결국 핀란드는 2만 5000여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1940년 3월에 소련군에게 항복, 상단 지도에서 보이는 지역을

소련에게 할양하게 된다. 



그러나, 핀란드군이 겨울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용전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와 반대로 소련군은 온갖

조롱을 당하며 저평가되게 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소련군이 낸 사망자만 12만 5000명 가량으로,

핀란드군에 비해 압도적 사망비를 내면서 졸전을 거듭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군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개혁과 동시에 기병파의 몰락, 화염병 전술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디젤 엔진으로의 전차엔진 설계 교체 등의

대대적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은 갓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다음 화- 바르바로사 작전-



300만 대군, 소련 침공.

"소련 역사상 최대의 위기"

영웅들은, 그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다음 시간에 알아본다.




1화-몰로토프 리벤트로프 조약

2화-폴란드 침공


글 쓰면서 느낀건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너무 비슷한 것 같음.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련 시절엔 빵빵하던 지원마저 없는 더욱 심각한 상태라는게 어찌보면 유머임.


아무튼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멈추고, 제발 좀 곡틴이 실각했으면 한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