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판사 본인보다는 그 사람이 쓴 책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목은 <어떤 양형 이유>.


이 책을 쓴 박주영 판사는 2006년 임관해 17년째 판사직을 맡고 있는 법관이며,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해 울산 3인 자살시도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유명해졌다.


직업도 안정적이고, 수입도 많고, 명예롭기까지 한 삶을 사는 그가 어째서 글을 쓰게 된 것일까?



















한가족이 외식을 하는 동안 다른 한 가족은 번개탄을 피운다. 

같은 프레임 안에서 조차 아웃포커싱으로 흐려진 곳에 ‘얼굴’들이 있다. 

사랑은 근경이다. 원경의 사랑은 없다. 원경의 그리움만 있을 뿐. 

법정에 선 사람들의 슬픔은 계속 차올랐고 나는 판결문이 아닌 글을 직접 쓰리라 결심했다.


- 박주영의 ‘법정의 얼굴들’ 중에서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어느 한 판결문이다.


2019고합241 자살방조미수.


너무나도 건조하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이 차가운 15글자의 제목 아래 담긴 내용이 피고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인데,


함께 천천히 훑어보도록 하자.
















일명 울산 3인 자살미수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재판의 전말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계 곤란을 이유로 자살을 시도하려던 한 사람이 혼자서는 용기를 낼 수 없어서 SNS를 통해 함께 죽을 사람을 모집했고,


울산의 어느 여관에 모여 다같이 자살 기도를 했으나 중간에 한 명이 마음을 고쳐먹어 나머지 두 사람을 구한 사건이다.


이후 의식을 잃어 응급실로 이송된 한 명은 꺠어난 후에 도망쳤고, 남은 두 사람이 기소되어 재판장에 서게 된 것이다.


불우한 유년기를 거친 피고인은 유일한 삶의 버팀목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속적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고작 2, 30대의 청년들이 이렇게나 암울한 삶을 버티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박주영 판사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삶의 의지가 될만한 얘기들,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그렇게 그는 재판 당일 피고인들에게 줄 책 두 권을 준비해 법정으로 들어섰다.


영치금이 고작 7만원밖에 없는 청년들에게 차비라도 하라며 책 사이에 끼운 20만원을 건네주기 위해서.


아래는 그날 박 판사가 작성한 판결문의 일부이다.















사. 마치며 

(1) 앞서 본 바와 같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자살예방에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한 결과, 2019년 자살백서에 의하면, 

2017년에는 20대를 제외한 전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다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 등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의 자살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서도 광범위하게 자살이 발생하고 있다. 

사망원인 통계에 의하면 여전히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회원국 사이에서 최고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자살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2)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 처지가 크게 상이함에도, 

피고인들이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된 공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 비춰 보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실감 때문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들 역시 불우한 유년기, 어머니의 사망, 경제적 파탄, 

대인관계의 단절 등으로 인해 사회적 존재감이 계속 축소되다 극단적 고립감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 피고인들이, 전혀 일면식조차 없던 상태임에도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눈 마지막 대화가 자살에 대한 것이고, 

사심 없는 순수한 생의 마지막 호의가 죽음의 동행이라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기로 마음먹었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 공감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서글프기 그지없다. 

인터넷이 이제 사물에까지 연결되고, 소셜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된 이 시대에서 

고립감을 견딜 수 없어 자살에 이르렀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역설적이고 가슴 아프다.


우리는 어떤 시대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어 너무 많은 단절의 두려움을 느끼고, 

세상과의 접촉은 쉬워졌지만,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질병에 전염되고 너무 큰 상처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로 넘쳐 나지만, 너무 많은 정보는 타인의 행복을 너무 많이 보게 하고 

우리를 타인과 너무 쉽게 비교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너무 많이 절망에 빠지고, 너무 많은 소외를 겪는다.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단 한명의 진지한 청자(聽者)는 찾아보기 어렵다.












(3) 피고인 A는 수사기관과 판결전 조사에서 왜 적극적으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명의 전화 같은 곳에 도움을 요청해 봤자 ‘힘내라’는 뻔한 충고가 전부일 것이라 생각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누구도, 심지어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기관조차, 생의 기로에 선 개인의 불행과 고립감에 

진지하고 실효성 있는 관심과 대책을 고민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피고인의 이 인식, 

이 사회적 신뢰의 붕괴라는 이 지점이 다른 무엇보다 뼈아프다. 


A 피고인의 믿음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철저히 타자의 불행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하고 축소시킨 다음,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밀봉해 온 사회다. 설령 한 개인이 열등하고 못나서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를 잘라내고 도태시켜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 때문이든, 환경 탓이 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못 본 척 할 순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생존방식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 빨려 들지 않으리라는 장담 역시 할 수 없다.








(5) 현대인에게 있어 자살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이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사회 문제다. 

그 사회경제적 손실을 떠나 우리 주변의 다정한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증발함으로써 

그의 부재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누군가의 가족과 이웃이자 같은 시민으로서 우리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자살을 막으려는 수많은 대책과 구호가 난무한다. 

그러나 생을 포기하려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밖에서 보기에 별 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유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듯,

보잘 것 없는 작은 것들이 또 누군가를 살아있게 만든다. 

삶과 죽음은 불가해한 것이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전문 

https://casenote.kr/%EC%9A%B8%EC%82%B0%EC%A7%80%EB%B0%A9%EB%B2%95%EC%9B%90/2019%EA%B3%A0%ED%95%A9241














판결을 마친 후 박 판사는 피고들에게 직접 찾아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까지 삶과 죄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전 형의 선고로 모두 끝났지만, 이후 이야기는 직접 써 내려가야 합니다. 


그 남은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이기를 기원하며, 설령 앞으로의 이야기가 애달프다 해도 절대 도중에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로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 때문일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듣게 됐고, 듣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이야기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다음 피고인에게 '동생 집으로 빨리 가고 조카 줄 선물도 사서 가라' 는 말도 같이 남겼다.


그렇게 그는 홀가분하게 퇴근을 했고, 피고인은 여동생의 집으로 돌아갔다.


6개월이 지난 후 보호관찰소에 피고인의 상태를 묻자, 심리 치료를 잘 받고 있으며 새로 찾은 일도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로도 1년이 지나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을 즈음, 피고인의 여동생이 뉴스기사를 보고 유튜브에 댓글을 달았다.


그 내용은 위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