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미국 대선 결과는 월드시리즈 향배보다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없었다. 실은 훨씬 중요한 문제지만 뭐 그래봐야 남의 나라 대통령 얘기 아닌가. 그보다는 류현진이 우승 반지를 끼는게 중요했다. 트럼프 이전에는 그랬다.

조 바이든이 승리를 확정지은 지금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이 트럼프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들이 미국 현지의 음모론을 그대로 퍼 나르고 있다. 어마어마한 투·개표 부정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야당이 투개표 부정했다는 얘기를 다 들어본다. 상당수는 4·15 총선이후 같은 부정선거 주장을 하면서 구독자를 늘렸던 사람들이다. 이들이야 장삿속으로 그런다치고 여기에 혹해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한국의 두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트럼프 당선을 열망했다. 먼저 미북 정상회담이라는 톱다운 방식 남북문제 해결을 희망하는 '친문' 진영이 지지했다. 이들은 트럼프가 재선돼야 차기 한국 대선 국면에서 종전선언을 비롯해 또 한번의 남북미 화해쇼가 가능할 것으로 봤다. 다른 한쪽은 극렬 우파로 분류할수 있는 세력인데 첫째 세상의 리버럴을 모두 위선이라며 혐오하는 사람들, 특히 PC(Political Correctness) 색채가 갈수록 강해지는 미국 민주당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다. 둘째 다른건 제쳐두고 트럼프가 중국 다루기 하나는 잘 했다고 보고 이 참에 중국을 '옥쇄'시켜 버리기를 바랬던 반중주의자들이다.

두 진영중 전략적 사고가 돋보이는 쪽은 친문이다. 이들은 정치성향으로는 트럼프나 미국 공화당에 터럭만한 매력도 못느낄 집단이지만 '한국 대선에 활용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응원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두번 만났다. 세번 못만날 이유가 없고 그것은 분명 여당의 선거전략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들이 트럼프 패배에 아쉬워하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하다.


이에 비해 '반문'이면서 트럼프를 지지한 쪽은 무척 시끄럽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는 쪽도 주로 이쪽이다. 왜 그럴까. 요즘 미국 민주당은 매력이 없어졌다. 버니 샌더스같은 '칵테일 좌파'(미국판 강남좌파)들이 위선 냄새 폴폴 풍기며 대중을 선동한다. 예전엔 주변부였던 이들이 지금은 주류다. 한국 보수층이 이들에게 느낄 역겨움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강남좌파가 혐오스럽다면 칵테일 좌파라고 좋아보일수 없다. 그러나 그건 비교적 작은 문제다.

칵테일 좌파가 인류에 미치는 악영향은 트럼피즘에 비하면 사소하다. 트럼프는 지난 4년 미국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렸고(대선 불복이 클라이맥스다) 세계의 민주주의도 덩달아 수준이 떨어졌다. 내로남불과 억지, 뻔뻔함, 절차 무시, 대놓고 하는 거짓말, 국가의 폭력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일상사로 벌어진다. '이게 민주주의냐'고 하면 '미국도 그렇지 않느냐'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트럼피즘과 그 아류가 동시다발로 극성을 부린다.

이런 트럼프를 '보수'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실은 허무한 얘기다. 보수는 정상을 지향하는 가치인데 트럼프는 비정상이고 돌연변이다. 세상에 비정상을 선호하는 보수주의는 없다. 스탈린이 싫다고 히틀러를 지지하면 그는 보수주의자인가. 아니다. 독재자의 선동에 넘어간 우중(愚衆)일 뿐이다. 칵테일 좌파는 역겹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은 아니다. 이 문제는 미국민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도 된다. 우리가 사는데 아무 지장없다. 그러나 트럼피즘은 우리가 사는데, 우리 민주주의에 실시간으로 지장을 준다.

두번째로 중국을 잘 두들겨서 트럼프가 좋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샤라포바처럼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경기에서 이기는게 아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이 누가 됐든 중국을 억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싸움의 방식이 중요하다. 미국이 소련과 냉전에서 이기는데 45년가량 걸렸다. 자유진영 동맹국들과 힘을 합쳐 엮은 봉쇄 사슬로 소련을 서서히 고사시켰다. 중국은 소련보다 인구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비교할 수 없이 큰 나라다. 전면전은 생각할수도 없다. 장기 봉쇄로 가야 하고 또 한번의 거대한 자유연대가 필요한데 트럼프는 동맹들의 인심을 잃었다. 역사적인 싸움은 명분을 쌓는 쪽이 이긴다. 동맹 중시론자인 바이든이 훨씬 잘할 것이다. 미국이 동맹을 중시하면 한국의 공간도 커진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투개표 부정, 그것도 야당이 저질렀다는 주장이 나오는 세상을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이게 트럼프가 만든 세상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해악은 세상을 저질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의 승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상 회복'이 아닐까 한다. 지난 4년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으로 돌아갔는지 한번 돌이켜보라. 그 비정상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누가 가장 큰 득을 보았는지도 한번 따져보라. 구독자 늘리기, 슈퍼챗 따먹기가 주목적인 유튜버들 말장난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말라. 그 사람들은 보수도, 뭣도 아니다. 트럼프가 만든 비정상적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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