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운 게임 -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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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지 우리가 인생이나 전쟁 혹은 다른 어떤 것에서든 하나의 최우선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다른 모든 고려사항을 이 하나의 목적에 종속시킬 때만 성공한다."

-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그날은 하늘이 무척이나 높고 맑은 날이었다. 불꽃같던 태양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온 땅이 붉어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곡식이 떨어지고 토지가 익어가는 계절이었음에도 농사에 관심을 가지는 자는 없었다. 그저 그런 시기였다. 땅 위에서 익어가는 것은 곡식이 아니라 고철이 되어버린 기계와 사람뿐인 시기였다.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회색이었지만 곳곳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하늘을 먹구름처럼 뒤덮어 올라가고 있었다. 반면 땅에서는 굉음들이 뒤섞여 땅 아래로 스며들었다. 피와 함께 스며든 소리는 저주라도 되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와, 거리며 소리 지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보다도 큰 폭발음과 철거음으로 가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언덕 너머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마치 연극이라도 보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천천히 무릎을 접어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곱게 갈린 모래들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모래를 집어 든 남자는 천천히 모래가 들어있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손 너머로 보이는 강철 외벽들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에 뒤덮이고 있었다. 천천히 손가락을 펼치자 새어 나오던 모래들이 그 자유낙하에 따라 아래로 흩뿌려졌다.

스콜 같은 폭우처럼 쏟아지던 모래들은 바람을 타고 새처럼 날아 언덕 아래로, 다시 위로 흐르더니 뿔뿔이 흩어지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남자는 자신의 뒤로 누군가가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강해지던 인기척이 자신의 등 뒤까지 느껴졌지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뿐, 뒤돌아 반응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자 뒤를 차지한 남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 계셨소?"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에 더불에 몸이 터질 것만 같은 은색 정장과 깊게 팬 눈은 마치 폭력적인 느낌마저 주는 탓에 눈이 마주쳤다간 본능적인 공포감을 심어줄 법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언덕에서 모래를 뿌리던 남자는 대충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뭐, 우리야 앞장설 이유가 없기도 하고... 내가 없다고 뭐가 어떻게 되지는 않더라고."


"나는 아니오만."


다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전히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꽃이 튀어 오르는 전장을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중저음의 남자는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자 그 눈길을 쫓았다.

자신들의 기억속에 강철같던 철옹성은 이제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를 따라온 남자, 세르게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왕도도 이제 머지않았군."


"...그렇겠지."


잠시의 대화가 이어졌지만 세르게이는 다시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저 다시 눈길을 돌려 그의 어머니, 공진의 알렉산드라가 이끄는 애니웨어 시리즈 부대가 공략 중일 서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철같은 왕도는 결국 반란군의 발길을 허락하게 되면서 포위전에 들어갔다.

AGS 공장과의 연결 라인도 끊어지면서 왕도는 더 이상 AGS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AGS와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 만으로 이 연합군을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카캉!


어디선가 길게 늘여진 폭연음이 들렸다. 두 남자의 시선이 그 위치로 향하자, 하늘에서 떨어진 미사일 뭉치가 벽 하나를 완전히 작살내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하에 있을 총사령관에게 피해가 갈까 봐 폭격을 자중하던 자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성이었다.

폭격에 대한 논의는 왕도 포위전에 들어간 날부터 계속 이어져 왔지만 그 허락이 떨어진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덕분에 둠 브링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늘어났었다.


"커티스가 좋아라 하겠군."


세르게이가 무너지는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메이의 아들은 망나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으나 그만큼이나 화끈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멸망의 메이보다도 먼저 열의적으로 폭격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 바로 그였다.

정작 전쟁에 대한 관심도 없으면서, 더불어 왕도에 대한 관심도 없는 주제에 불꽃놀이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폭격을 신청하던 그가 어제의 회의에서 얼마나 기쁜 웃음을 지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놈이야 술만 있어도 좋아할 놈이니 무슨 상관이겠어? 저게 하루치 안줏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역겹기는 한데."


남자는 세르게이의 말에 길게 답했다. 그 말의 아래에는 커티스에 대한 역겨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눈길은 무너진 외벽의 멀리서 포격 지원을 보내는 자신의 어머니의 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라색 머리로 육중한 포격들을 날리고 있던 그녀는 무언가 고함이라도 지르며 부대원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요새화된 도시를 공략하기 위한 그녀들은 이번 포위전에서 큰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아머드 메이든은 무너지는 외벽을 향해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아무리 강철같은 왕도라고 해도 일단 구멍이 뚫리면 막기는 어려웠다. 물론 구멍이 좁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오래 버티리라 기대할 순 없었다.

지하에 타일런트라도 있었다면 자멸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유일하게 남은 타일런트는 서부 해안에서 바다에 잠겨 눈을 감았다. 아마 이 전쟁이 끝나면 그에 대한 처분도 이루어질 테지.


찰랑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남자는 마침내 포격이 외벽에 구멍을 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 하는 소리가 세르게이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이제 모든 병력이 저 구멍 하나로 집중될 것이다.

왕도에서도 어떻게든 구멍을 막아보고자 나올 테지만 그 때 즈음엔 다시 둠 브링어가 반대편에 새로운 구멍을 만들 것이다. 정말로 커티스만 좋아라 하겠군, 그렇게 생각한 남성은 코를 쓰다듬으며 얼굴의 주근깨를 어루만졌다.

귀를 덮는 블러디 팬서를 따라 귀를 덮도록 내려온 머리카락은 보라색 분위기가 어울려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얼굴에 가득한 남성적인 풍향은 확실히 남성의 것이었다. 특히 날카로운 눈빛과 탄탄한 몸은 어딘가 고집불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세르게이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남자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세르게이의 시선이 왕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장을 주시했다. 밀물처럼 몰아치는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에 무언가 예술과 같은 고양심이 피어올랐다.


"글쎄... 아빠, 그러니까 총사령관을 깨우고 나서 각지로 돌아가겠지?"


남자는 코를 킁, 하고 뿜어내고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 당황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자는 아니었다. 그저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출 뿐.


"아버님이 아직 지하에 계시다고 보오?"


"...상당히 불경한 말인데. 설마 세바스티안이 무언가를 했으리라고?"


처음 연합군이 모인 것은 그들의 아버지이자 멸망 전쟁의 대영웅, 총사령관의 안전을 위함이었다. 생사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에 분노한 바이오로이드들과 기회를 틈타 권력을 차지하려던 그 아들들의 쇼, 그 정도가 사실 공통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총사령관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것은 당연한 목표였다. 아무리 마틴을 베는 만행을 저지르는 세바스티안이라도 총사령관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멸망 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은 그에 대한 잠재적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싸운 전우는 물론 애정까지도 가진 그녀들이 총사령관을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즉, 만약 총사령관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다는 그 스스로 해야만 했다. 게다가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들키지 않으며 그 후에도 들키지 않도록 해야 할 테지. 당연히 불가능한 소리였다. 게다가 총사령관 대리라는 직책을 가진 세바스티안이 총사령관을 시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몰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연합은 총사령관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총사령관이 결국 체내의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을 가능성. 그것만이 유일한 골칫덩어리였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었다. 총사령관의 신변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세바스티안과 콘스탄챠의 태도,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갔음에도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가 여전히 세바스티안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도 모두 설명이 가능했다.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총사령관이 죽어버렸습니다, 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특히 대리라는 직책을 가진 탓에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면 더더욱이나. 정식 후계자라도 논란이 될 법한 사건인데 제대로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총사령관이 죽어버리는 것은 곤란했다.

그를 위해 그 사망을 숨기고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병사했으니 당연히 그 후계는 장남인 세바스티안이 가져가야 한다고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녀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신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정말로 총사령관의 의지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라고.


어느 쪽이든 연합은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아니. 아마 그 작자라면 그러지는 않았을 테지."


세르게이가 기억하는 세바스티안에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용기라기보단 만용에 가까울 테지만 어쨌든 그의 손으로 총사령관을 시해하는 일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세르게이 자신도 지금까지 마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은 오히려 세바스티안 산하 바이오로이드의 과잉 충성으로 일어난 비극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굴의 마리가 그 죽음을 이해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그 책임을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 모두에게 물을 것이다.


"다만, 이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우리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소?"


세르게이의 시선은 여전히 외벽에 향해 있었다. 두 개의 자석이 연결한 철 가루처럼 쏠리는 전장의 흐름을 주시하던 그는 이번엔 직접 고개를 돌려 남자를 향해 이어서 말했다.


"패트릭, 그대도 이미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패트릭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옆으로 향했다. 세르게이와 눈이 마주친 패트릭은 입술을 끌어올리고는 대답했다.


"그렇겠, 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버님이 돌아오더라도 우리의 위치가 지금까지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부터는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겠지. 피를 보기 전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고기의 맛을 알아버린 지금, 사냥개가 피를 탐하는 일이 끝나지는 않을 테니."


세르게이는 갑작스럽게 들리는 하늘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패트릭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이 하늘에서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는 둠 브링어의 부대로 모아졌다.

흰 연기를 내뿜으며 날아가던 그녀들은 왕도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포에 하나, 둘 격추당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정도의 숫자가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무너진 외벽의 반대편에 P-2000 지니야 한 부대의 채프 미사일들이 떨어졌다. 우후죽순으로 떨어진 미사일들은 불꽃을 일으키며 길게 화염의 길을 이어나갔다.

빈틈이 생긴 사이, 그녀들의 뒤에서 가려져있던 회색의 비행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왕도에 근접한 비행기는 그 내부를 열어젖히고는 포탄들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그제서야 통제권을 되찾은 외벽에서 대공포를 다시 쏘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미 떨어지는 포탄들을 쏴 맞추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두, 세 개의 포탄이 내부로 스며들었다.

외벽 너머로 굉음과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는 커티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후계자 싸움이라..."


패트릭은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세르게이가 말한 대로 후계자 싸움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몽구스 팀의 강연의 전적을 무시하기는 힘든데, 이미 결정된 것 아닌가?"


"확실히, 강연은 연합의 장이자 공을 세운 장수이지. 하지만 결국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아버님이오. 그 사이에 새로운 전적을 쌓아올리면 언제든지 가능성이 있소."


"하, 이제 와서?"


패트릭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연합을 만든 것도 이미 공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해낸 업적들이 많았다. 이번 침투 작전을 성공한 것도, 보급로를 되찾은 것도 몽구스 팀의 활약이라는 점은 다들 알고 있었다.

숫자가 적은 팀이라 곧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 놓고 기다리며 서로를 견제하던 형제들의 실패였다. 누구보다도 크게 성장한 강연은 이제 누구에게도 비빌 수 있는 업적을 쌓은 영웅이 되어버렸다.


"치워버리지 않는 이상 새로운 공적을 쌓는 일은 없을걸.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서야..."


패트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동쪽의 외벽에 구멍이 생겼다. 땅굴을 파려던 시도가 동쪽의 성문에 구멍을 내버린 모양이었다. 아마 아까 둠 브링어의 폭격이 지하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찌 되던 새로운 구멍이 생긴 연합은 이번엔 그쪽으로도 병력이 밀려들었다. 양쪽에 구멍이 생긴 왕도는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터였다. 어차피 자급자족이 안되는 왕도의 특성상 식량을 보존으로 먹어야 하는데 왕도 포위전이 5일차에 들어가는 상태에서 더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그거요."


콰강!


세르게이의 말과 함께 이번엔 서쪽 벽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완전히 무너진 서쪽의 성벽으로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서로 뒤엉킨 채로 전투를 벌였다. 바로 옆의 자매의 이마에 구멍이 뚫려도, 팔과 다리가 찢겨나가도 개의치 않고 서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모습은 마치 지옥도와 같았다.

선두에 서서 서벽을 지키던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의 앨리스가 고함을 지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손길에 2자리 수의 바이오로이드가 강철의 비에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 자리를 대신해 붉은 피가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직격당한 자매들은 즉사했고 그 옆에 있던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대장급의 바이오로이드가 선두에 나서자 뒤를 지키고 있던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도 앞장서 공격을 가했다. 일방적인 폭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거라니?"


잠시 그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패트릭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설마 싶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지만 세르게이의 대답은 단결하고도 우직했다.


"강연이 더 이상 필요한가? 왕도가 함락되고 나면 연합의 장이라는 자리는 필요가 없소. 그렇게만 된다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지."


"...허."


패트릭은 세르게이의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고지식하고 충성심 깊던 세르게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가 알던 세르게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 이 뒤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고 짐작한 패트릭은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확실히, 전쟁이 끝나고 연합의 장이 사라진다면 다소 혼란스러울 순 있지만 문제가 커지지는 않을 거야. 결국 마무리를 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역할이니까.'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신상필벌이 시작될 때, 강연이 없다면? 전쟁 중에 눈먼 탄환에 죽어버리거나, 실종이 되어 버린다면?


'세르게이 말대로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찾아온다.'


물론 세르게이의 아이디어는 아니었겠지만, 어느 쪽이든 새로 시작할 찬스를 놓치기는 어려웠다. 패트릭은 점차 밀리는 왕도의 전선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언덕을 내려가는 패트릭을 따라 세르게이도 한 걸음 뒤늦게 그를 뒤따랐다.


"좋아, 세르게이. 좋아."


패트릭이 입꼬리를 올리며 파란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고."


왕도 포위전이 시작된 지 5일차 저녁, 마침내 왕도가 함락되었다.








대충 원래 생각하던 키보도 대회 분량이 끝이 났습니다. 칸이 등장하면서 이상하게 분량을 잡아먹어서 더 길어진 느낌이 없지않아 있네요. 이쯤하고 원래 쓰던 작품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일단 다음주가 너무 바쁜 주간이라 연재가 힘들어서 천천히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주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고 시원하게 보내실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