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속보입니다! 방금 전, 빌런 '그림자의 마녀'가 세계 히어로 협회 본부를 습격했다는 소식입니다.]


[정기총회가 열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던 협회 본부가 습격을 당한 가운데, 본부 인근에서는 히어로와 빌런들 간에 대규모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협회 내부의 상황은 불명이나, 일대에 비상 대피령이 발령되었습니다. 시민여러분께서는ㅡ]


ㅡ파삭!


뉴스를 떠들고 있던 TV는 마력의 격돌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깨져나갔다.

마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형의 힘.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가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초능력과 마법의 기본이었으나, 상식 이상의 힘을 자랑하는 S급 히어로들 수십명과 그들에게 대등하게 맞서는 존재가 싸우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기에, 상식에 어긋난 일도 얼마든지 일어났다.


마력이 서로 충돌한 여파만으로, 기둥이 터져나간다거나.

마력이 서로 충돌했는데도 한 쪽이 다른 한쪽을 통째로 집어삼켜버린다거나.

마력이 충돌할 순간, 한쪽의 마력이 실체화되면서 공간을 뜯어버린다거나.


아니면.


"괴, 물...!"


우득.


S급 히어로 수십명이라는 인류 최대의 전력을.


"빌어먹을...! 이 괴물같은 년이ㅡ"


"피해! 막지 말고 피하라고! 그림자 마녀의 마력은, 우리 마력을 흡수한다!"


단 한명이 압도해 버린다거나.


마지막 까지 남은 것은 순백의 갑주를 입은 기사와, 그 기사의 앞에 선 칠흑색의 소녀.


그러나 그 순백의 갑주가 재로 더럽혀지고 곳곳이 일그러져있으며, 소녀가 그런 기사를 짓밟은채로 기사의 목을 향해 낫을 겨누고 있는 상태라면.

그 누가 보더라도, 승패는 명확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있어, 라이언하트씨?"


벽도, 기둥도, 유리도 모조리 터져나가 사방에 파편들만이 남은, 폐허가 되어버린 로비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맑은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기사ㅡ 라이언하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푸흐흐... 그때의 그 마녀가 이렇게 되어서 다시 돌아올줄이야."


"..."


"너도 그 쓰레기들과 마찬가지다, 이 학살자야ㅡ"


서걱.

마녀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대로 낫을 휘둘렀다.

낫이라 함은, 수확을 위한 도구. 그 의미를 담은 칠흑의 낫은 그 의미대로, 목숨을 거두어갔다.

그 대상이 빌런이라도, 평범한 사람이라도, 히어로라도, 인류의 영웅이라도 마찬가지로.


"아니야."


쓰레기는 너희들이지.


소녀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로비에는, 소녀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를 막고자 왔던 히어로들도, 능력자들도, 경비원들도, 군인들도 이미 소녀의 손에 전부 목숨을 잃어버렸기에.



소녀가 만들어낸 침묵 속에서, 소녀는 한발짝 한발짝 위로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빌딩의 위쪽에서 느껴지는 다급한 움직임들. 새로 방어선을 만드려고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정을 파려고 하는 것이거나.

이미 히어로 협회의 전력은 소멸되어버렸고,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알테니. 남은 것은 마지막이겠지.


그 정도 생각은 소녀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에게, 23번에게 필요한 것은 상징성이었으니까.


세계 히어로 협회가 전세계에서 모은 병력을 동원했는데도.

고작 빌런 하나를 막지 못하고 그들의 본부마저 파괴되어버렸다는 상징이.

그리고 그 빌런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히어로 협회의 눈빛 아래에 숨죽이고 있던 빌런들이 다시 날뛰기 시작할 것이고, 수없이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만들어지고, 정의를 믿고 싸우던 진정한 히어로들마저 죽고 다치겠으나.


23번에게는,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복수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었으니까.


복수를 위해서, 정의를 죽여야한다면.

악이 되겠다.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악이라도 되어주겠다.


23번은 그렇게 맹세하였고.

23번은 악이 되었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증오받고, 저주받는ㅡ


절대악(惡)이.







저벅, 저벅, 저벅.


23번은 반쯤 깨져버린 계단을 걸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우선은, 시작부터.



소녀는 남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평행세계의 남자였다.


소녀는, 소년은 다리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서 강에 떨어졌다.

익사. 참으로 어이없고, 쉬운 죽음이었다. 수십미터 위에서 떨어진 사람이 살아남기에는, 겨울의 한강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소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소녀가 되어있었다.

11번. 이라는 의미있지만 성의없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녀가.


소녀는 실험체였다. 순백의 시설에서 실험을 받는, 모르모트와 비슷한 신세의 실험체.


그런 소녀의 몸에 빙의한 소년은 당연히 현실을 부정했다.

소년은 인권과 정의가 살아숨쉬는 현대에 살아왔으며, 실험체는 불의이고 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소년의 정의가 꺾여버리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반항하는 실험체를 진압하기 위한 준비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저 리모콘 하나를 누르는 것 만으로 소녀가 된 소년의 목을 감싸고 있던 초커에 붉은 빛이 들어왔고, 소녀가 된 소년은 그대로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목에서 뇌를 향해 바로 주어지는 전기충격은 그 누구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그렇게, 소녀가 된 소년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실험체가 되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실험을 받고, 피를 뽑히고, 재생력을 평가한다며 칼로 베이기를 몇 번.

그러나 소녀가 아니라 소녀가 되어버린 소년이었기 때문일까.


소녀가 되어버린 소년은 초능력을 각성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떨어져갔다. 폐기할 대상은 아니나, 연구할 가치는 더 없음.

간단한 도장이 찍힌 것 만으로 소년의 가치는 그대로 추락했다. 소년은 실험체였고, 실험체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소년이 아니라 연구소였기에.


그리고, 남자들로 가득차고 보안문제로 외부 출입마저 어려운 곳에 있는.

인체실험에 참여할 정도로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연구원들로 가득찬.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해치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 소녀의 말로는.

너무나도 뻔했다.


어느 날.


소녀가 되어버린 소년은, 소년이었던 소녀가 되어버렸고.

웃기고 슬프게도, 그토록 원하던 초능력을 얻게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탈출할 수 없었다.

막 각성한 초능력 따위로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기에.


소녀는 다시 리모콘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번에는 23번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23번은 8번을 만났다.

다른 사람을 비웃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8번을.


23번은 21번을 만났다.

같은 처지인 실험체들을 모아,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21번을.


23번은 6번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을 속여넘기며, 살아남고자 절규하는 6번을.


23번은 22번을 만났다.

이미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채, 죽은 눈을 가진 22번을. 


그리고, 23번은 17번을 만났다.

그저 멍하니 연구원들의 명령을 따르고, 헤실헤실 웃는 멍청한 17번을.


6명. 그것이 실험체의 끝이었다.


매일같이 훈련을 받으며, 수술을 받으며, 피를 뽑히며, 무언가를 주입당하며.

여섯 실험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절규했다. 폐기당하지 않기 위해서.


6번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켜서 23번에게 두들겨맞고, 8번은 그런 6번을 비웃고, 21번은 그런 둘을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하고, 한 구석에서 22번은 멍하니 앉아있고, 17번은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매일과 같은 일상.


그러던 어느날.


무언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와서.

방송이 나왔다.


'서로 죽여라.'

'마지막으로 남은 실험체는, 특별히 살려주도록 하마.'


그럴리 없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수도 없다.


목의 초커라는 개목줄을 벗겨낼 수 있는 자가 없었기에.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구원들의 생각.


그 날, 연구소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여섯 실험체들은 목줄을 벗어던지고, 자신들을 실험하던 연구원들을 마구 죽이며 탈출했다.

지금까지 죽어나간 옛 실험체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연구원들의 목숨을 제사로 바치며.


그렇게 수많은 연구원들을, 경비원들을 죽인 여섯 실험체들의 눈 앞에 보인 것은.


"빌런이다! 진압해!"

"사살이 승인되었다! 대량학살을 저지른 중범죄자니 체포보다 사살을 우선시하도록!"


정의를 위해 싸우는, 정의의 히어로들이었다.


인체실험을, 고문을 감행한 연구원들은 주민등록이 되어있었고.

실험체들은 주민등록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빌런이었다.


연구소를 습격해 연구자료를 탈취하고, 시설을 부수고, 무고한 경비원들과 연구원들을 학살한 빌런.


6번은 뒤따라가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죽었다.

21번은 6번을 혼자 내버려두지 못하고 죽었다.

22번은 자폭으로 통로를 무너트리며 죽었다.

8번은 17번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으며 죽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17번과 23번이었다.


그리고.

17번은 헤실헤실 웃으며 23번을 절벽 아래를 향해 밀쳤고.

동시에, 17번은 가슴팍이 궤뚫리며 죽었다.


피가 허공을 향해 튀는 마지막 순간까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23번이었다.

다 죽어버리고, 다른 실험체들의 희생 끝에 살아남은 것은 23번이었다.


그렇기에 23번은 맹세했다.

복수하겠다고.


친구들을 죽인 자들을 모두 찾아내서, 전부 죽여버리겠다고.



복수는 쉽지 않았다. 연구시설은 탈출 직후 폐쇄되어버렸고, 연구실을 운영했던 기업은 세계적인 대기업이었으며.

23번은 이미 빌런으로 수배되고 있었고, 히어로들은 23번보다 강력했으니까.


사살허가됨. 서류에 적힌 크고 붉은 글자는 23번의 목숨을 언제나 위협했다.

매일같이 히어로들과 싸우고, 도망가고, 피하고, 숨고.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알렸던 진실들은 곧 '빌런들의 선전'이 되었고, 곧 '빌런의 음모론'같은 글이 되어 돌아다녔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웃음거리가 되어.


그렇게 23번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도중에. 그러던 도중에 일어난 것은.

그 날의 일은, 우연이었다.

자신보다 약간 강한 히어로를 상대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싸우던 날.

지반이 붕괴되면서 날렸던 공격이 살짝 빗나가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향했을 때.


그 히어로는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가 틈을 보여 23번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빗나간 공격은 그대로 날아가, 무고한 시민 수십명을 죽였다.



그리고 다음날, 23번은 다시 수배되었다.

이번에는 사살승인이 아니라 무조건 사살이라는 크고 붉은 글자와 함께.


그러나 소녀는 깨달았다.

그 소식을 보며 자신을 욕하고 자신을 붙잡지 못하는 협회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보며, 깨달았다.

어차피 자신은 빌런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연구시설을 운영하던 거대기업은 양지의 기업이었으며.

생체실험을 하던 연구원들은 뉴스와 신문에서 가족들을 위해 일하던 선량한 시민이 되어있었고.

히어로 협회는 반드시 자신을 잡아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시민들은 그런 협회에게 박수를 치고 있으니까.


알고는 있다. 시민들은 무고하다는 것을.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하니까, 협회를 믿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내가 숨은 곳을 신고한 것은, 시민이다.

내가 피한 곳을 신고한 것도, 시민이다.

내가 도망가는 것을 신고한 자도, 시민이다.


시민은 히어로 협회에게 찬사를 보내며, 나를 잡지 못한 히어로 협회를 비난하며, 나를 보면 신고하고, 나를 욕하며, 인체실험을 한 연구원들을 축복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민들이 무고하단 말인가?


23번은 깨달아버린 것이다.


내 말을 믿지 않은 것도 시민이다.

협회를 지지하고 지키는 것도 시민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23번은, 자신이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23번에게 중요한 것은 복수였으니까.


그 날부터, 23번은 달라졌다.

히어로와 싸울때는 민간인을 얼마든지 건드렸다.

민간인들에게 마구잡이로 공격을 날리며, 히어로를 도발했다.

가끔은 히어로를 불러내고자 할 때는 시민들을 인질로 붙잡고서, 히어로가 나타나지 않으면 한명씩 한명씩 죽였다. 잔인하게, 잔혹하게.


신고 버튼을 누르는 시민은 손을 잘랐다.

신고 전화를 하는 시민은 성대를 뜯어냈다.

은신처를 알리는 시민은 눈을 파냈다.

자경단 활동을 하는 시민은 다리를 잘라냈다.


위험도는 점점 더 오르고, 점점 더 강한 히어로들이 23번을 붙잡기 위해 왔으나.

이미 망가져버린 23번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강했다.


한명 한명 거꾸로 잡아먹고. 군대를 습격해 빼돌린 폭발물 함정으로 끌어들이고, 인질을 쓰며 히어로들을 고문하고. 인질에 폭탄을 심어 되돌려주고, 가족을 인질로 잡아 히어로를 공격하게 만들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시민들은 협회의 편을 드는데.

협회의 힘을 줄이는데 있어서 망설일 것이 있단 말인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협회는 이번에는 다른 히어로를 보냈다.

히어로가 아니라 암살자를. 정의가 아니라, 악을 처단하는 사냥꾼을.


이번에는 더 위험했다. 그들은 인질도, 시민도, 민간인도 신경쓰지 않고 23번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들은 23번보다 더 노련했으며, 더 날카로웠고, 더 정교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23번의 정의감을 불태웠으니까.


자 보아라.

협회도 결국 시민들을 신경쓰지 않는, 자신들의 권력만을 위한 이기적인 집단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것도 괜찮다. 그들이 그러는 만큼, 나도 그래도 되니까.


한번은 팔이 잘렸다.

그래서 병원에 쳐들어가서, 의사를 협박했다.

의사가 거부하자 의사의 가족을 붙잡았다.

수술을 끝낸 의사가 장난을 쳐놔서, 의사의 눈 앞에서 가족을 찢어죽이고서 의사는 살려두었다.


너 때문에 가족들이 죽은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서.


한번은 은신처가 밀고당해서, 밀고자를 찾아냈다.

밀고자의 눈 앞에서 가족들을 한땀한땀 해체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밀고자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후회했다.

너무 늦은 후회였지만.


그러기를 몇 번.

몇 번이고 목숨의 위협을 넘긴 23번은, 더 강해졌다.

더더욱 강해졌고.


마침내, 연구시설을 운영하던 기업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것도 대낮에.


대낮에 벌어진 테러.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습격은 쉬웠다.

가로막는 경비원들도, 자리를 피하던 민간인들도 신경쓰지 않고서,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트려버렸다. 우연히 건물을 방문했던 사람들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왔던 구조대원들도 신경쓰지 않고서.


뒤늦게 찾아온 히어로는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경악했고.

시민들의 죽음에 분노하며 달려들었으나.


분노한 히어로만큼 다루기 쉬운 존재는, 없었다.


그렇게 23번은 처음으로 S급 히어로의 목숨을 앗아갔다.

수천명의 사망자들과 함께.



그 이후로 남은 것은, 그저 반복이었다.

히어로들을 한명 한명씩 죽이고, 가끔은 떼로 죽이고.

가끔은 예비 히어로들을 찾아가서 죽이고, 가끔은 협회의 사무원들까지 죽이며.

찾아오는 히어로들을 피해 도망가고, 가끔은 거꾸로 죽여버리고.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23번은 마침내 초월의 경지에 이르렀고.

협회는 그런 23번을 '그림자의 마녀'라 불렀다.


그 말을 들은 23번은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더이상 소녀가 되어버린 소년도, 소년이었던 소녀도, 23번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과거의 잔재만으로, 복수를 위해서 살아가는 과거의 그림자였으니까.


최초의 S급 빌런. 이제는 전세계가 23번을 토벌하기 위해, 사냥하기 위해, 죽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군대가 움직이고, 특수부대가 움직이고, 23번이 있는 곳은 지역째로 날려버리는 공격까지 있었으나.

23번은 그 대가로 장군을 죽이고, 정치인을 죽이고, 원수를 죽이고, 파일럿을 죽였다.


서로 죽이고, 계속 죽였다. 그럴수록 소녀의 그림자도, 소녀가 남긴 그림자도 점점 더 짙어졌지만.

소녀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소녀는 이제 그림자였으니까.


두번째 초월. 이전까지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도, 겪지도 못한 경지.

어떻게 보면, 생체실험을 했던 연구소는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녀였던 그림자는 마침내 복수를 이루기에 충분한 힘을 얻었기에.


그 날, 소녀는 세계 협회를 습격했고.

협회가 모은 모든 히어로들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자랑했다.



6번은 거짓말을 하면 눈동자가 돌아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맨날 들켜서 얻어맞고서, 다음날 다시 거짓말을 해서 들켰다.


8번은 비웃다가 재수없다고 맞으면 서로 싸웠다.

한 하루이틀 말을 안하면 자기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21번은 셋을 중재하다가 매일같이 욕을 먹었다.

그래도 다시 설득해서 셋을 같이 이어놨다.


22번은 매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옆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느샌가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17번은 항상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웃고있었다.


그림자는 23번의, 소녀의 과거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여섯 실험체들의 묘비를 세웠다.


시민들과 히어로들의 피로 만들어진, 여섯 실험체들 중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묘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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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고백) 사실 계획하고 있던 소설의 플롯입니다.

하지만 언제쓸지는 아무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