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극.

스극.

스, 극.

스......극.



"...읏."



서늘하고 섬뜩한 소리가 날카롭게 손목을 지나간다.

곧이어 뜨겁고 알싸한, 그 익숙한 통증이 소리가 지나간 길을 따라 번진다.



주르르.

얼얼한 손목의 틈새로 붉은 피가 비어져 나온다.



투툭. 툭.

적당히 잘 베었다.

너무 깊게 베면 큰일난다. 꿰매는 일은 귀찮고 아프다.



통제하지 못하는 아픔은 싫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은 언제나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고통일지라도.

긋는 것은 기쁘지만 꿰매는 것은 불쾌하다.



어둡고 조용한 방.

피 묻은 휴지들이 나뒹구는 책상 위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다.

액정에는 보다 만 웹소설 화면이 아직 그대로다.



난 웹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치열하다.

여러 위기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가끔은 좌절하지만 결국은 이겨낸다.



나는 그 과정이 험난할수록.

주인공이 그 과정을 이겨내며 많이 상처입을수록.

그 소설에 손이 가고 애정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훌륭했다.

AI가 쓴 소설이라 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AI가 써서 그런가.

일말의 자비도 없이 주인공들에게 끝없는 시련을 선사했다.



습격. 습격. 또 습격.

아카데미를 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습격으로 인해.

일러까지 있어서 당연히 히로인인 줄 알았던 인물들도 가차없이 죽어 버리고.



파괴된 건물들과 널브러진 친구들의 사체 속에서.

피를 뒤집어 쓴 주인공이 자신의 무력함에 슬퍼서 울부짖을 때의 감동이란.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은 흡사.

자해할 때와 정말 유사할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며 커터칼을 들었다.



스....극.

"읏...."



섬뜩한 소리가 신음처럼 손목을 스친다.



스, 극.

"아극...."



뜨거운 통증이 고통스러운 신음의 자취를 따라 기어가고.



나는 마치 친구들을 모두 잃고 울부짖는 주인공처럼.

주인공이 자신의 무력함과 이 절망적인 상황에 지쳐 땅을 치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스극.

스극.

스극.

스극.

스극.

스극.

스극.



애원했다.

죽고 싶어.

아니.






살고 싶어.





*  *  *   *  *  *  *  *  *  *  *  *  *  *  *






쓰러졌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는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낯선 방.

낯선 향기.



"이건..."



낯선 목소리.

그리고, 거울 속의 낯선 모습.



덥수룩하고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와 꾀죄죄한 몰골은 온데간데없고.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를 가진 소녀가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손목은 깨끗했다.

새하얀 도화지처럼, 아무런 자국도 흉터도 없는 소녀의 가녀린 손목은.

정말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뻤다.



다만 어깨까지 오는 짙푸른 짧은 머리 사이로 가려진 우중충한 그 눈빛은.

이 소녀가 엉뚱한 누군가가 아니라 다름아닌 나라는 걸 분명히 깨닫게 해준다.



"뭐냐고 대체."



왜 내가 여자가 됐는지는 잘 모른다.

갑자기 내 주변이 덜컥 바뀌어버린 이유도 모른다.

다만, 그냥, 지금의 나는.



"...칼, 커터칼..."



불안했다.

그래서 상처를 내야 했다.

섬뜩하고, 뜨겁고, 축축하게 비어져 나오는 일련의 고통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생생히 깨닫게 해준다.



아프고 싶어.

아프게 해줘.

칼, 칼이....



서랍들을 열어 봤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그래서 방을 나섰다.



나와 보니 생각보다 평범했다.

이곳은 집이었다.

혼자 살기엔 조금 큰 집.



'...부담스러워.'



부엌으로 보이는 곳으로 가니 어렵지 않게 칼을 찾을 수 있었다.



식칼은 자해에 좋은 칼이 아니다. 자칫 너무 깊게 들어가면 꿰매야 하는데.

난 꿰매는 게 너무 싫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극도로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까.

이 소녀의 집에는 커터칼 같은 게 없으니까.



'살살....'



나는 평소보다 조금 힘을 빼고.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목에 대고 식칼을 주욱 그었다.



슥.



불쾌한 소리는 짧게 지나갔고.

상처는 생각보다 깊게 났다.



피가 주르륵, 평소보다 조금 많이 난다.

하지만 흐르는 피만큼, 고통의 크기만큼 마음의 안정은 빨리 찾아온다.



아, 너무 아파.

그래서 너무 좋아.



황홀하게 웃으며 잠시 숨을 돌리던 그때.



딩동.

쿵쿵쿵.



누군가가 벨을 누르고서 그 새를 못 기다리고 문을 두드린다.



성질 급한 녀석이네.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한숨을 푹 쉬었다.



딩동딩동.

쿵쿵쿵.



"에스델. 에스델! 집에 있어? 나 요아힘이야!"



남자의 목소리. 대학생쯤 되었을까.

요아힘이라. 익숙한 이름이다.

AI가 쓴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요아힘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소설에서 '에스델'이라는 이름의 여자애는 안 나오는데.

요아힘은 이 낯선 소녀와 무슨 관계여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나는 주변에 보이는 앞치마를 집어 들고, 손목을 그은 상처에다 칭칭 감았다.

자해한 걸 남들에게 자랑하듯 내보이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무슨 일이냐고, 왜 이런 못된 짓을 했냐고 참견해올 텐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수한 스트레스를 굳이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가렸다.

그 사이에도 요아힘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계속 문을 두드린다.



아무래도 직접 쫓아내야 할 것 같다.



"집에 있어."



나는 현관문 앞까지 다가가서 나지막이 말했다.

굳이 문을 열어주기는 싫었다.

하지만 요아힘은 끈질겼다.



"아, 그럼 문 좀 잠깐 열어줄래? 교관님이 오늘 주신 보급품이 있는데, 최대한 빨리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보급품?"

"별 건 아니고. 해독제라고 했나?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앞에 놓고 가."

"그, 귀찮은 건 아는데.... 미안하지만 교관님이 꼭 직접 전해주고 오라고 하셔서."

"대체 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성실한 놈은 내 귀찮은 대답에도 언짢아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안한 기색으로 설명을 늘어 놓는다.



"요 근래에 맹독성 마물들이 많았잖아.그래서 주신 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장이 다 녹아서 죽는 일 없으려면 꼭 챙겨 둬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요아힘은 아카데미에서 반장 역할도 했었다.

그 반장이라는 것도 된 데에 사연이 있는데.



지금 나한테 찾아온 것처럼 귀찮게 돌아다니는 일들이 많은지라.

아무도 안 하고 싶어하니까 자신이 자처해서 반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착하고 책임감도 있는 녀석이다.

아마 직접 받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둘 테니까.



"...알았어."



나는 살짝, 말 그대로 손만 뻗을 수 있는 만큼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자해한 팔을 내밀지는 않았다. 아직 피도 안 멎었고, 자해한 흔적을 굳이 보여주면 피곤해질 게 뻔하니까.



그런데.



"에스델...?"

"왜 또."

"너, 손에 피가...."



아.

나름대로 닦는다고 닦고서 내민 건데, 피가 마르면서 손에 생긴 얼룩 자국들을 본 모양이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바로 피곤해져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