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제트)

디자인은 파격 그 자체. 우마무스메의 머리색깔 룰(원본의 털색깔과 일치)을 두번째로 깬 우마무스메(첫번째는 하루우라라)에, 첫번째 오드아이.

승부복 원본의 녹색 줄무늬는 귀로 가 있고, 신발엔 이름에서 따온 트윈 머플러가.





1990년대 전반, 일본 경마장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예시장에는 '(마권을 산) 나는 상관하지 말고 도주해라'라는 응원 현수막을 걸어놓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맞을리 없는 말의 단승 마권을 사서 들고

레이스가 시작되자마자 승부 따위는 도외시하고 풀악셀로 선두에서 돌진하는 말에게 환호성을 보내며,

약속의 4코너에서 비실비실 침몰하는 모습을 보고도 휴지가 된 마권을 쥐고는 상쾌하게 웃는 사람들이 있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승패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 경주마, 그 이름은 트윈 터보다.








* 이하 나이 표기는 2001년 이전 기준에 따라 1살 많게 표기


트윈 터보는 1988년 4월 13일 시즈나이쵸에 위치한 후쿠오카 토시히로 소유의 목장에서 태어났다. 가족경영의 소규모 목장인 여기까지 망아지를 보러 온 조교사는 사사쿠라 타케히데. 16년간 기수 생활을 하며 통산 120승만을 거두고 조교사로 전업했지만 영업 능력에서 뒤쳐져 혈통 좋은 비싼 말은 절대 그의 마방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모를 진흙 속의 진주를 찾으러 홋카이도를 훑고 다니는 건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대부분 진흙 속에서 나오는건 돌멩이였지만...


그렇게 해서 망아지 시절의 트윈 터보를 만난 사사쿠라는 단숨에 문제점을 하나 눈치챘다. 목장이 작아도 너무 작다보니 동년배라고는 없이 덜렁 혼자 방목되고 있었던 것. 즉시 좀더 큰 규모의 목장으로 옮겨 방목하도록 했지만 이미 때는 반쯤 늦은 상태. 거기서도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고 혼자 겉도는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목장에서의 기초 육성을 끝내고 마방에서 경주마로 뛰기 위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생긴다. 소심한것도 모자라서 완고한 성품까지 있어 조교를 기수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마방에선 얌전하다가도 사람만 탔다 하면 개난장을 피우며 움직이질 않으니 바쁜 기수가 마냥 기다릴수는 없고 중간에 가버리면 조교사 본인이 올라타서 어르고 달래며 훈련시키는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타고 나서 담배 한대 빨려고 집어들면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고.


트레이닝 센터에서 정식 조교 타임을 재는 것도 문제였다. 보통은 코스를 달리다 거리 표기가 되는 5펄롱 지점부터 기자들이 초시계를 눌러 조교 타임을 계측하곤 했는데, 움직이기 싫으면 절대 안 움직이고, 해당위치에서부터 5펄롱을 제대로 뛰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기자 양반, 저놈이 뛰기 시작하면 그냥 그때부터 타임을 재 주게"


하는 식으로 야매 계측을 했다고.


거기에 게이트 훈련은 유독 애를 먹어서 아무리 게이트가 열려도 나가질 않고 멀뚱멀뚱하기를 반복, 남들처럼 출발이라도 할 수 있게 되는데까지는 4개월이 걸려야 했다.



그렇게 420kg 정도의 작은 체구였지만 경주마 꼴을 겨우 갖추고 신마전에 내보낼 수 있었던 건 1991년 3월, 4세 신마전. 더트 1800m. 기수는 은퇴를 앞두고 있던 이시즈카 노부히로. 게이트 이탈이 늦을까 노심초사하던 사사쿠라는 기수에게 단 한가지만 지시한다.


"게이트를 나오면 마음껏 달려도록. 맨앞에 서고, 그 다음은 중심만 잡아 주게"


그 결과는 2착과의 3마신차 낙승.


잔디로 무대를 옮겨 치른 두번째 조건전도 승리하고, 내친김에 일본 더비의 출주권을 잡기 위해 아오바상(당시 오픈, 잔디 2400m)에 기수를 오오사키 쇼이치로 바꿔 내보내지만 9착으로 참패하며 클래식 도전의 꿈은 접는다. 시바타 마사토로 기수를 바꾼 조건전에서 한번 더 지고, 다시 오오사키로 기수를 바꿔 내보낸 5전째, 라디오 탄파상(GIII, 후쿠시마 잔디 1800m)에서





여기서 보기좋게 도주에 성공하며 승리, 사사쿠라 조교사에게 개업 후 첫 중상 승리를 안겨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도주' 스타일이었다. 이때까지는...


여름을 나고 돌아온 트윈 터보의 가을 복귀전은 나카야마에서 열린 세인트 라이트 기념(GII, 잔디 2200m). 여기서부터 트윈 터보 특유의 노브레이크 대도주 컨셉이 잡히기 시작한다.





반대편 직선에서 점점 더 후속과의 격차를 벌리며(펄롱타임 11.0-11.9-11.7) 대도주를 감행했고, 4코너에서 거진 따라잡히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대로 버티더니 2착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


이어진 후쿠시마 기념에서도 마찬가지로 3F 연속 11초대를 찍으며 앞에 나섰지만, 이번엔 선행조가 바짝 달라붙으며 견제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라 스텔라를 빼고는 앞을 내주지 않으며 2경주 연속 2착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전국 시청자에게 트윈 터보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1991년 아리마 기념.

천황상에서 충격의 강착을 당하고 권토중래를 노리던 최강마 메지로 맥퀸. 맥퀸의 강착 때문에 공짜로 먹은 GI 타이틀이란 비아냥에 시달리던 프렉크라스니, 그리고 다이타쿠 헬리오스 같은 유력한 선행조의 흐름을 트윈 터보가 완전히 흐트러뜨리고 만다.






2500m 경주에서 스타트 100m를 6.9초를 찍고 시작한 트윈 터보가 이후 3펄롱(600m)을 10.9-11.4-11.4를 찍으며 풀가속, 거기에 선행조가 휩쓸리는 바람에 후반에 남길 체력을 까먹고 만 것. 하이페이스 속에서 선행마들의 다리가 무뎌지자 인코스에서 이날 딱 한번, 평생을 통틀어 가장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던 다이유우사쿠가 추입해오며 맥퀸을 제치고 우승을 거두는 대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단승 인기 꼴찌에서 두번째, 단승 배당 137.9배.


...물론 트윈 터보는 라스트 3F 39.9초로 문워크를 하는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꼴찌에서 두번째로 골인한다.



이때 이후 트윈 터보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공멸한다는 인식이 관계자들에게 널리 박혔고, 이는 이후 트윈 터보가 도주를 시작하면 전보다 더 거리가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인식이 훗날 플래그가 된다.




아리마 기념 후 비출혈이 발생해 장기 휴양을 끊게 된 트윈 터보는 1992년 11월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복귀전으로 맞이한 오픈전에서는 인기 1위를 배신하는 10착. 이후 1993년에 세 차례 중상에 더 도전하지만 항상


4코너에 들어갈때까지 세이프티 리드로 보이는 도주

->관객들이 '혹시나?'하면서 동요

->4코너를 넘자마자 약속한것처럼 침몰


의 황금 패턴을 보이며 6-6-8착을 찍곤 했다.


그리고 맞이한 운명의 1993년 7월. 기수가 도주의 명인 나카다테 에이지로 바뀌고 맞은 타나바타(칠석)상(GIII, 후쿠시마 잔디 2000m). 여름에 강해지는 말의 전형으로 보이던 다이와 제임스가 인기 1위, 이름값은 제일 낫지만 2000m는 살짝 짧아 보이던 아일톤 심볼리가 인기 2위, 그리고 트윈 터보가 인기 3위로 꼽히는 가운데







"전개다, 터보엔진! 도주했다!!!"


전반 1000m를 57.4초를 찍는 초 하이페이스를 찍고는 라스트 3F를 37.7초로 버텨내는데 성공하면서 근 2년만에 중상 타이틀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 승리 타임은 1분 59초 5. 나카다테의 코멘트는 "나는 잡고만 있었을 뿐. 말이 멋대로 멋지게 이겼다"


골수 팬들은 당연히 대환호, 언제나처럼의 역분사를 예상하던 일반 관객들도 놀라워하면서 박수를 보내는 결과였으나, 아직 트윈 터보에게는 한발이 더 남아 있었다.




두달 후 나카야마에서 열린 올커머(GIII, 잔디 2200m). 가을 왕도 GI을 향한 스텝 레이스인 만큼 멤버는 GII 레이스 중에서도 충실한 편이었다.


봄철에 메지로 맥퀸의 천황상·春 3연패를 저지한 라이스 샤워.

1991년 최우수 4세 암말 시스터 토쇼.

GII 대장, 그러나 GI엔 손이 닿지 않는 화이트 스톤.

1992년에 16회 출전, 중상에 13회나 출전한 철의 여인 이쿠노 딕터스 등등.


이 유력 주자들은 언제나처럼 트윈 터보가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올때 전혀 견제를 하지 않았다. 분명 저번처럼 하이페이스고, 저걸 일찌감치 추격하다간 공멸한다는 생각에 페이스를 늦추고 만다. 반대편 정면에서 선두 트윈 터보와 두번째인 화이트 스톤과의 거리는 10마신, 거기서 다시 후속 마군과의 거리는 10마신 더.


그러나 이 날의 트윈 터보는 그렇게까지는 빠르지 않았다는게 함정이었다. 전반 1000m 통과 타임 59.5초. 조금 빠르긴 하지만 '초'가 붙을 하이페이스는 전혀 아니었던것. 근 4초가 훨씬 넘는 격차를 그정도 페이스에서 나머지 1200m로 메운다는건 전성기 루돌프가 돌아와도 불가능한 수준.





라스트 3F 타임은 출전마중 가장 느린 37.8초였고, 다른 말들보다 2초 이상 느렸지만, 결과적으로는 5마신차의 완승이었다. 리플레이를 본 나카다테는 "어째서 이렇게나 벌어져 있었던 걸까, 믿어지지 않았다"라고 코멘트했다.


이 흐름을 타고 천황상·秋에서도 단승 인기 3번째로 지지받지만, 올커머에서 완전연소한 건지 17착으로 대패. 이후는 중앙에서 단 한차례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하게 된다. 능력의 감퇴는 현저히 드러났고, 4코너까지는 선두를 지키던 것도 어느샌가 3코너까지만 겨우 근근히 지키는 데까지 떨어졌지만, 팬들이 기대하는 트윈 터보의 정체성은 스타트와 함께 노브레이크로 맹렬히 돌진, 그리고 깨끗한 완패였고, 커리어 말년까지 그 전통은 이어가고 있었다.




트윈 터보의 커리어 후반기를 상징하는 장면 "트윈 터보의 선두는 여기서 끝"


그리고 1995년. 명백히 중앙에서의 경쟁력이 끝을 향해 가고 있던 트윈 터보의 활로를 찾기 위해 지방 교류 중상인 제왕상에 출전을 결정한 진영은 처음으로 타케 유타카에게 안장을 맡겼는데, 그 결과는 참혹했다.






스타트가 늦었던 건 어쩔수 없었지만, 트윈 터보를 선두로 몰지 않고 그대로 최후미에서 경마를 진행했던 것. 결과는 선두와 7초 이상 차이나는 최하위. 타케 유타카는 레이스 후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팬과 경마 라이터의 비난을 한몸에 모았다. 비난의 초점은 "제대로 몰지 못했다"가 아닌 "대도주라는 트윈 터보의 상징성에 상처를 냈다"는 것.



이때의 영향이 있었는지 한달 뒤 치른 니가타 대상전(GIII, 후쿠시마 잔디 2000m)에서는 그동안 알던 트윈 터보의 모습은 없었다.




힘겹게 선두에 서고 후속과의 거리를 벌리지도 못하다 3코너에서 이미 선두를 내주고 뒤로 처지는 모습. 이것이 중앙에서의 마지막 경주였다.


이후 트윈 터보는 지방 경마인 우에야마로 이적했으나, 데뷔전에서만 승리하고 이후 9전을 하위권에서 맴돌다 1996년에 완전히 은퇴했다.



그러나 트윈 터보의 열성적인 팬들은 이대로 그들의 애마가 조용히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다. 혈통 면에서도 성적 면에서도 씨수말 데뷔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지만, 경마, 경정, 쇼기 라이터이자 반쯤 미쳤다는 소리를 듣곤 하던 하타케야마 나오키(畠山直毅)가 '트윈 터보를 씨수말로 하는 모임'을 설립하며 밀어붙이기 시작, 거기에 호응한 팬들의 도움으로 정말로 트윈 터보를 씨수말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그렇게 미야기현 사이토 목장에서 조촐하게 씨수말 생활을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씨수말 2년차 시즌을 시작하기 전인 1998년 1월 15일, 심부전을 일으켜 급서하고 만다. 씨수말로 남긴 자식은 단 다섯 마리.



사사쿠라 조교사의 회고로는 경주 1주일 전에 등록할때부터 관계자든 기자든 만나기만 하면 "절대로 앞으로 간다"고 나팔을 부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기수 대기실에서도, 예시장에서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선두 경합이 일어나도 무조건 앞으로 나가라"고 매번 큰소리를 치면서 도주를 시도할 다른 말을 견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몸은 작지, 성격은 소심하지. 어지간한 도주로는 뒤에서 쫓아오는 걸 의식하는 순간 무너질 정도로 소심했기 때문에 선두 경합이 아예 붙지 않도록 하는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참패하지만 1%의 가능성이라도 올리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은 다행히 1993년의 중상 2연승으로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 덕에, 중앙 경마 최후의 개성파로 불리는 트윈 터보의 명성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출처 : 우마무스메 캐릭터 소개 67 - 트윈 터보(ツインターボ) - 우마무스메 갤러리 (dcinsi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