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럽게 오랜만에 쓰는데 이번 이야기는 기수의 비중이 많이 크다.






누구에게나 최고의 파트너가 있으며, 모든 기수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을 파트너가 있다.


타케에게 사일런스 스즈카와다에게 오페라오가, 그리고 오카베에게 심볼리 루돌프가 이러한 말들이다.

그리고 윌리엄에게 스노우 바운드가, 마크에게 카리스마크리스틴에게 그라나트가 이러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말과 기수의 가장 각별한 인연을 고르라고 한다면 

난 적어도 이 글의 주인공일 폭스헌터(Foxhunter)와 그의 기수를 고를 것이다.








폭스헌터의 품종은 서러브레드다.

정확히는 빈마가 하프-브레드라 전에 소개한 제니 캠프처럼 3/4 서러브레드다.

빈마인 캣콜의 모계혈통이 클리블랜드 베이였거든.


아무튼 1940년

에레웨모스와 캣콜의 사이에서 잉글랜드 와이몬덤에 위치한 킨벳 밀래드(Kynvet Millard)의 목장에서 일스킨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 말의 특이한 점이라면 태어난 지 몇 주 뒤부터 목초지를 뛰어다닌단 것과 굳이 쓰러진 나무나 물웅덩이를 뛰어다니길 좋아했단 거다.

그거외엔 사람 손을 거부하지 않는다+모르는 말과도 잘 어울린다+나름 특이한 식성? 정도일꺼다.




(노먼 홈즈와 폭스헌터)


4세 때 노먼 홈즈(Norman Holmes)라는 목장주이자 조교사 겸 기수에게 60파운드에 팔렸다.

노먼은 어린 말을 사다가 목초지와 사냥터에서 훈련시킨 뒤 승용마나 경주마로 파는 일을 했다.

이 4세마의 특유의 짧은 보폭과 점프력은 장애물 비월에 적합하다 판단, 이름을 폭스헌터로 개명하고 제대로 훈련을 시켰다.

(40~60년대 영국의 승마에 나름 이름을 남긴 조교사다.)



첨언하면 영국의 승마전통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마장마술은 주로 프랑스, 독일, 스페인-포루투갈, 오스트리아-헝가리, 폴란드 쪽을 중심으로 발전했거든.

그나마 말붕이들이 볼때마다 놀래는 내셔널 헌트와 기원을 같이 하는 장애물 비월과 기병대 훈련을 위한 종합마술은 나름 발달되어 있었다.



폭스헌터는 피터버러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그 자질을 선보이고 이후 파죽지세로 입상하며 대표팀 제의까지 받지만...

노먼은 본업인 농장과 목장일을 더 우선했던 것도 있고 폭스헌터를 파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도 있다.


그리고 이 폭스헌터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해리 르웰린(Harry Morton Llewellyn, 1911~1999)이었다.




(저 중앙에 말탄 사람이 젊을적의 헤리 르웰린 경이다.)


이 양반 이야기가 상당히 긴데....

석탄을 채굴하는 광산업으로 부를 쌓은 데이비드 르웰린경(준남작)의 차남으로 이 양반 어릴적은 질풍노도 그 자체다.


스포츠를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아버지가 마주다보니 간간히 말을 타며 장제사를 꿈꿨으나....

아버지가 장제사는 개뿔이고 경제학이랑 법학이나 배워서 광산이나 물려받으라고 어거지로 공부를 시켰다.

그나마 니 공부잘하면 허락해보마 이랬는데 당연히 구라였고 공부성적을 빌미로 해리를 케임브리지에 처박았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당연히 망나니가 되어 수업째고 놀러다니기 일수였고, 

특히 경마장 가서 말들을 분석하고 순위 예상해서 마권을 사는걸 즐겼다.


그 덕에 나름 케임브리지에서 크리켓, 럭비, 축구, 테니스 시합 용병 겸 용돈복사기 비슷한 걸로 유명인사가 되어있었고,

나중가선 이 마쟁이가 뭐가 이쁜건지 기수 권유까지 받아 대학생활이고 뭐고 걍 경마기수를 뛰어버린다.


그 덕에 대학 담당교수인 모리스 돕과의 관계는...당연히 최악이었다. 

당장 출석도 안하는데 과제는 꼬박꼬박 내고 논쟁으로 교수를 비꼬곤 했다.

(해리는 모리스 특유의 마르크스적인 사고관을 싫어했다고 했다.)

그 덕에 평가에 나태하고 게으름이라고 써놓았는데.... 모리스가 블런트 사건에 연관된 교수였던 것도 참 다이나믹하다...


정작 그 아버지는 한술 더 떠서 지 말들을 이 아들내미가 타도록 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해리의 아버지는 마쟁이보단 경마기수가 더 건전하고, 이마저도 젊은 날의 일탈정도로 여기셨다고 한다.


아무튼 1930년에 첫 우승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름 이름을 날리는 아마추어 기수가 되었고 그 정점은 그랜드 내셔널이었다.

1936년과 37년에 아버지의 말 에고를 타고 그랜드 내셔널에서 2착과 5착을 하는데 당시 그랜드 내셔널에 나가기 위해 약 12kg을 감량하셨다.


이때부터 해리는 기수로서 가닥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에 자신이 중령이고 대영제국 훈장(OBE)와 미국 공로 훈장을 받은 이유는 그랜드 내셔널의 명성이라는 되도 않는 망상을 써놓으셨거든...

(실제론 진짜 군생활 잘한거+전선에서 직접 싸움.)




그리고 2차 대전에 기병대에 지원넣고 참전했는데..특이 사항이라면 북아프리카 전선노르망디 상륙작전 등등에 참가했단거다.

눈치 깐 말붕이도 있겠지만 해리피셜 -꼰-이라는 몽고메리의 눈에 들어 나중엔 미군을 상대하는 선임연락장교 까지 한다.


자서전엔 몽고메리가 젊을적 소원이 뭐였냐고 물었는데 하이페리온을 한번 타보고 싶었다고 했다가 마쟁이라고 존나 까였다고 한다.

그거 외엔 조지 패튼의 연락이 안오기를 기도했다 정도가 특이사항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운명의 전환점?이 될 만남을 가진다.

이탈리아 전선에 근무할 당시 같이 주둔중인 제니 캠프의 기수인 얼 포스터 톰슨을 비롯한 미국 대표팀이었던 미군 기병장교들을 만난거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당시 미군 기병장교들은 해리를 비롯한 영국군들에게 나름 자신들의 마음가짐과 말 관리 노하우를 가르쳐줬는데,

특히 토미와 나눈 대화 및 가르침은 해리의 관심을 경마에서 승마로 돌려놓은 계기라고 한다.

(해리는 토미와 제니캠프를 몰랐고, 해어지고 나서야 그들의 명성을 알았다고 한다.)




아무튼 전쟁이 끝나고 전역하고 난 뒤 석탄 산업이 국유화 산업으로 전환되자 해리는 이를 불행의 탈을 쓴 행운이라 판단,

목장주 겸 양조장 주인에 방송국 사장이었긴 했다만, 이참에 승마기수로 전업해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경마도 완전히 버린건 아니고, 1948년 첼튼엄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을 끝으로 아마추어 경마기수 커리어를 끝냈다.

그렇게 영국 장애물 비월 협회에 등록된 말들의 기록 및 대회를 다니며 타고 다닐 말을 물색하던 와중 1947년 폭스헌터를 발견했다.







해리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0 파운드 그니까 9600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폭스헌터를 사왔다.

처음엔 당연히 삐걱거렸다고 한다. 경험이 있다지만 경마였고 승마조차 미국 대표팀에게 잠시 배운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해리의 표현을 빌리면 폭스헌터의 재능과 관대함 덕에 그들은 점차 나아졌고,

미국 대표팀의 조언데로 기초적인 마장마술 훈련을 병행하며 폭스헌터를 좀 더 호흡이 맞도록 개선했다.


그 결과 1년 정도 뒤엔 명실상부한 영국 최고의 장애물 비월 기수와 말 중 하나로 꼽혔고, 1948년 영국 승마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1948년

런던 하계올림픽.


해리와 폭스헌터의 본격적인 첫 국제대회였다.

또한 승마의 전환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군인들만 출전하던 마지막 대회이자 민간인들의 참가가 가능했던 대회다.


이 올림픽의 승마는 전통의 강호 독일은 당연히 참가를 못했다.

영국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는데 2차 대전때 앵간한 군마나 기병장교들은 명을 달리해버렸다.

그 덕에 미국이나 멕시코  기병장교들이 그나마 온존했던 나라들이 유리했다.


영국은....그동안 뻣대던 것과 달리 종합마술에서 관광을 당해버리고 장애물 비월 역시 마찬가지....




는 아니었다.


홈그라운드+그나마 장애물 비월 전통은 뻘로 있던게 아니었다.


단 한명의 낙마자도 없었던 덕에 단체 동메달을 따는 것으로 체면치례가 가능했다.

특히 폭스헌터와 해리는 개인 7위였고 모두가 이 루키의 활약을 의심치 않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영국은 이 올림픽의 굴욕을 잊지 않았다.

1949년 윈저 호스쇼에 영국의 유명 승마기수들을 초대하여 앞으로 영국의 승마가 나아갈길을 정립하고 그 수준을 높히기로 했다.





아무튼 해리와 폭스헌터는 각성이라도 했는지 진짜 말도 안되는 활약을 해대기 시작했다.

여러 대회 특히 국제대회들에 얼굴을 비추며 입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힉스테드의 조지 5세 골든컵(1948, 1950)의 우승 및 지금의 네이션스 컵 대회들인 제네바 우승은 물론이고

더블린의 아가칸 컵(1950~51), 런던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컵(1949~51, 현재는 힉스테드에서 열린다)에서 영국팀으로 참가해 우승했다.


※ 조지 5세 골든컵은 여성기수의 참가는 2008년부터 가능했다. 그 덕에 1949년에 여성기수만 참가 가능한 엘리자베스 2세 컵의 개최가 시작되었다.




이 불세출의 활약, 특히 약 10년간 외국인들이 차지하던 힉스테드의 조지 5세 골든컵을 탈환해낸 것으로 폭스헌터는 별명을 2개 얻었다.


하나는 기사(sir). 우선 마주이자 기수인 해리가 대영제국 훈장을 받은 것도 있는데다 후술할 어느 1명이 붙혀준 별명이 시작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베이야드.


이 조지 5세 골든컵의 모티브가 용을 죽이는 게오르기우스인데, 폭스헌터의 생일이 성 게오르기우스 축일인 4월 23이었다.

그 덕에 게오르기우스가 탔다던 말인 베이야드가 폭스헌터의 다른 별명이 되었다.


근데 명성과 별개로 다른 장애물 비월 기수들이 기초적인 마장마술도 훈련해야 한다 주장했지만 앵간해선 다 씹혔다.


아무튼 이런 활약을 하며 두 기사는 다음 올림픽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2년

헬싱키 하계올림픽.


한국의 첫 장애물 비월 참가이기도 하지만...영국에게 이 승마종목은 매우매우 특별했다.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했는데 마지막날 대회가 승마였다.


이 올림픽의 승마 마장마술은 여성의 최초참가 및 공정성 관련으로 이야기가 많은데...그거랑 별개로 영국은 이번에도 죽쒔다.

종합마술? 이거 대비한다고 개최한 배드민턴 호스 트라이얼의 최초-최연소 우승자는 비명횡사했다.


결국 돌고돌아 또 장애물 비월이었다.





(각각 해리 르웰린-폭스헌터, 윌프레드 화이트-니제펠라, 더글라스 스튜어드-에를로, 피터 롭슨-크레이븐 A. 피터롭슨은 결국 후보선수였다.)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감이 충만하다못해 오만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다른 팀들이 적어도 개최 몇주전에 헬싱키에 가있을때 얘넨 대회시작 5일전에 윈저 호스쇼에 참가하고 있었다.


윈저 호스쇼는 폭스헌터에게 기사 별명을 붙혀주신 분 부탁에 동료기수들이 '주장님 쫄?' 같은 분위기라 결국 참가했다.


일단 거리상으로 가깝기도 하고, 국제권에서 노는 유력한 금메달 후보들이었긴 했다.

특히 팀 리더로 결정된 해리와 폭스헌터는 금메달 확정이다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오히려 해리는 기존의 기병장교들이 스태프로 은퇴하고 신인기수들로 구성된 미국팀을 안타까워 했었다.




그리고 해리는 이 오만함의 댓가를 몸소 치뤄야 했다.


장애물 비월은 2 라운드의 결과를 토대로 최소한의 감점을 받는 것으로 순위를 정하는데,

평소였다면 안건드릴 장애물을 건드리고 시간조차 초과했다.


폭스헌터는 미안했는지 풀이 죽어있었다.


이것으로 개인 메달은 물건너 갔다.






더군다나 안타깝게 느껴지던 신인들로만 구성된 미국 대표팀의 루키.

자신이 힘내라고 격려까지 건넨 윌리엄 스테인크라우스와 홀란디아가 되려 개인 메달 경쟁권이었다.

(해리를 변호하면 윌리엄은 그 누구도 예상못한 다크호스였다.)


해리는 자서전에 당시 문제는 폭스 헌터가 아닌 해리 자신임을 알고 있었다고 저술했다.

주장으로서 팀의 컨디션 관리를 책임지긴 커녕 무리한 스케쥴을 잡고, 경기 시작전 폭스헌터가 충분히 쉬고 워밍업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며, 낙마자가 없는 것은 폭스헌터의 우월한 능력과 팀원들 개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라고 저술했다.


남은건 단체 메달뿐이었고 영국의 자존심은 위태롭기만 했다.





해리는 이 상황에선 더 안될 것이라 판단.


2 라운드가 시작되기 남은 1시간 동안 기수들은 잠을 자게 하고,

구무원들에겐 셔터를 터뜨리는 신문기자들을 막고 말들이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


윌프레드와 더글라스는 단 한번의 실점만을 허용했다.

가장 마지막의 차례에 해리와 폭스 헌터는 각오를 품고 2라운드를 시작했고...






(1분 20초 경 부터 해리와 폭스헌터. 영국인들이 야구 응원하는 맥퀸마냥 발광하는 이유가 있다.)


폭스헌터는 마치 악룡을 가지고 놀았던 베이야드 같이 너무나 쉽게 장애물을 넘겼다.

2라운드는 무실점 완주였다.



(가장 오른쪽을 기준으로 2번째가 윌리엄, 4번째가 해리. 이때 대화를 좀 나눴다고 한다.)


장애물 비월 단체 금메달.


해리와 폭스헌터에게도 의미가 큰 금메달이었으나 이 금메달은 헬싱키 하계올림픽에서 영국의 유일한 금메달이었으며,

이를 증명하듯이 처음으로 God save Queen이 울려퍼졌다.


잉글랜드, 영국의 수호성인의 말의 이름을 별명으로 받은 말은 기사답게 영국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당연히 영국 왕실과 총리였던 처칠은 축하전보를 보냈다.




참고로 이 덕에 영국은 현재까지 모든 올림픽에 금메달을 획득한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다.






이덕에 아이돌 아니 히어로 호스 취급을 받았다.

폭스헌터 그리고 그의 기수 해리가 아니었다면 헬싱키의 유일한 금메달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했을정도였다.

영국 승마사에선 폭스헌터의 활약을 영국 장애물 비월의 1차 붐으로 보고있다.


정작 해리는 폭스헌터의 명성은 좋아했지만 자신의 실수를 폭스헌터가 틀어막았고,

윌프레드와 더글라스 역시 동등한 공로자라며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은 좋아하진 않았다.


진짜 개인 순위만 놓고보면 해리는 가장많이 감점을 당해 15위였고, 윌리엄은 미국팀에서 가장 높은 11위였다.

오히려 개인 순위가 가장 높았던건 5위인 윌프레드 였다.


어쨋든 마지막이 드라마틱 하기도 했고, 

두 기수는 마지막에 해리가 내린 결단이 금메달에 충분히 공헌했다며 해리는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이후 더블린과 런던의 네이션스 컵에서 52년과 53년에 우승했고, 힉스테드에서 열린 조지 5세 골든컵도 53년에 다시 우승했다.


폭스헌터가 55년 장애물 비월에서 은퇴할때까지 올림픽을 제외한 약 80번의 국제대회에서 78번을 우승했고, 

그 중 35번의 대회는 영국을 대표하여 나갔다.


무리하면 56년 올림픽도 출전은 가능했겠지만, 

착지는 말의 목숨에 직결되기 때문에 폭스헌터의 착지가 불안정해지자 바로 은퇴한 것도 있었다.



(장남인 데이빗과 차남인 로디. 로디에게 폭스헌터는 친구였다.)


폭스헌터의 특이한 점이라면 사람들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차남인 로디가 자신의 갈기를 땋거나, 꼬리를 만져도 그냥 가만히 있었을정도였다.


근데 이게 팬이랍시고 말총을 뽑는 진상들도 가만히 지켜본터라,

해리는 폭스헌터는 길가의 꽃이 아니라며 화를 내고 말총을 뽑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또한 해리나 로디가 일부러 손에 먹이를 들고 있을땐 로디가 손에서 놓을때까지 기다려주는 등 인내심도 있었다.

그리고 로디가 혼자 등에 있을땐 일부러 걷기만 했고, 해리가 등에 타야 달리곤 했던 기사 그 자체였다.




그거 외엔 꽃이랑 과일을 좋아하는 식성이었다. 그 덕에 사람 모자나 옷에 꽂아놓은 꽃이랑 과일도 덥석 먹었다.

특히 제네바의 국제대회에서 상을 주러온 스위스 장교의 모자에 꽂힌 꽃과 건네준 꽃다발을 먹어치운 사건은 꽤나 유명했다.

물론 나중에 엘리자베스 2세의 모자에 있던 꽃도 먹었다.


이 식성 때문에 차남인 로디가 심은 꽃을 죄다 먹어치워서 울린적이 있다고 한다.

나중엔 로디가 보기에 폭스헌터가 안절부절 거리면서 눈동자 굴리는게 너무 불쌍하다고 걍 먹게 냅뒀다고 한다.







1959년


그렇게 은퇴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지내던 어느날.

해리는 그날따라 유독 폭스헌터가 애교를 부렸고 평소라면 걸었을 순간을 일부러 뛰었다고 한다.

평소는 잘 안하던 머리를 기대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 폭스헌터는 잠을 자듯이 죽어있었다.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던 건지 모르지만 기사의 죽음은 너무나 고요하고 차분했다.




(......)

그것과 별개로 해리는 매우 슬퍼했고 마치 자신의 반쪽이 깨진듯한 슬픔이었다고 회고했다.


내장과 가죽은 따로 애버게브니 블로렌지(현 국립공원)에 묻고, 

그의 뼈는 영국왕립수의대학의 요청에 따라 기증하여 박물관에서 전시하도록 허락했다.


땅에 그냥 묻히는 것보단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며,

대회에 첫 출전하는 장애물 비월 기수들을 위한 대회인 폭스헌터 챔피언십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후 승마 대표팀 감독을 시작으로 승마쪽 고위직들을 역임했고, 기사작위도 받고, 사업적으로도 성공한 웨일스의 명사가 되었다.

(대표팀 감독하고 장애물 비월 협회 회장직은 69년까지만 했는데 사업이 바뻐서 관뒀다는 핑계고 스트롤러 퇴출을 반대하다가 답없다고 때려치우셨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론 가정사는 여러모로 험난했다.


르웰린 이라는 성씨와 차남의 이름이 로디 라는 것에서 눈치 깐 사람들도 있겠지만...

장남은 장남대로 온갖 추문을 달고 살았고, 말 잘듣던 차남인 로디가 그 마거릿 공주의 불륜상대라는 스캔들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나마 자신의 부인목장에서 돌보는 말들 그리고 폭스헌터와의 추억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단 폭스헌터 사랑은 진심이었는지라 마리온은 인터뷰에서 그의 단점을 스트롤러가 아닌 폭스헌터를 최고의 말로 추켜세우는 거다 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1999년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차남 로디에게 자신의 장례를 미리 부탁했다.













(폭스헌터의 무덤. 2012년 런던 올림픽 성화봉송은 이곳을 지났다.)



그리고 해리의 장례는 유언대로 진행되었다.

무덤을 만드는 대신 폭스헌터의 무덤에 그의 뼛가루가 흩날렸다.


자신이 죽으면 더이상 폭스헌터의 무덤을 관리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영원히 곁에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두 기사는 지금 웨일스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다.












ps1. 저 말총뽑기를 대놓고 당당하게 하신 양반이 있는데.....












바로 애든버러 공작, 즉 필립 마운트베튼 되시겠다.


1948년 조지 5세 골드컵을 우승한 해리와 폭스헌터를 칭찬하며 꼬리털과 갈기를 뽑아서 간직해도 되겠냐(....)는 심히 난감한 부탁을 하셨다.

자서전엔 여러모로 난감했다지만 결국 허락했고 당연히 그 덕에 말총을 뽑으려는 진상들이 증가했다....


나중에 52년 단체 금메달 따고 귀국했을때 에든버러 공만이 아닌 엘리자베스 2세까지 와서 부탁하고 말총을 뽑아갔다고...

하필 폭스헌터가 엘리자베스 2세의 모자에 있던 꽃을 먹어서 거절도 못했다.


그리고 폭스헌터에게 기사라는 별명을 붙혀준 양반이 이 에든버러 공이다. 장난삼아 sir 폭스헌터 로 부른게 시초였거든.

(이거 외에도 에피소드가 하나 더있는데 나중에...)





ps2. 해리의 자서전에는 윌리엄과 대화했다 정도로 그치지만, 윌리엄의 자서전에는 그 내용이 적혀있다.


경마에 대해선 견해차이가 있었지만 말의 적절한 훈련에 마장마술이 필요하다는 것과 

장애물을 넘는 것보다 착지가 더 중요하다는 견해는 공감했고 수용했다 한다.


그거 외엔 윌리엄이 언젠가 최고의 장애물 비월 기수가 될것이라 하자 해리는 그 상대는 영국의 기수일 것이다며 나름의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68년 올림픽에 이 대화가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나름 2차대전 참전자라고 '버마전선에서 멕시코 노새가 쓸만했다던데' 라고 하신거 같은데 윌리엄이 바로 욕을 뱉었다고 한다.

절대 쓸모있는 동물이 아니고, '율리시스 그랜트가 이딴 동물을 데리고도 욕을 안했던게 기적'이라며 토미도 비슷한 말을 했다가 욕지거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