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소리를 빽 지르는 메지로 라모누. 당황한 메지로 아사마가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번엔 왜 또 이러는지, 언제나처럼 발단을 향해 시계를 조금 감아보자.



메지로 라모누는 해방되었다. 지난 주에 있었던 불행한 사고로 트레이너와의 관계가 또 파탄 위기에 처한 것을 할머님이 결자해지했고, 근신 감금처분도 없었던 일이 되었다. 사과의 의미로 레이스 상금의 일부도 반납되었다.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 텐션이 잔뜩 업된 라모누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주의 식사 자리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다.

그 준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다이어트였다. 짧은 감금 생활이었지만 레이스를 위해 단련된 몸의 밸런스를 망가트리기에는 충분히 방탕한 나날이었다. 가불해서 먹었던 칼로리들을 이제는 부지런히 상환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파카파카 포카포카 파카파카 포카퐁! 파카파카 포카포카 파카파카 포카퐁! 퐁!”

흥겹고 중독성 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방 안에서 라모누는 훅, 훅, 소리를 내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구슬땀을 쏟고 있었다. 그냥 타협하고 한 치수 큰 드레스를 입을까도 고민했지만, 놀랍게도 한 치수로 타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윽, 아프다!”

흡사 눈물처럼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눈을 질끈 감아 흘려내리면서 라모누가 절규했다. 그런 그녀가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 트레이너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토레삐 님을 함락시키기 위해선 참아야 해!”

“우마우마 뾰이! 우마우마 뾰이! 우마뾰이! 우마뾰이! 우마우마 뾰이!”

점점 템포가 빨라지는 음악에 맞춰 몸을 꿀렁대고 있는데, 노크와 함께 차가워보이는 인상의 우마무스메가 굳은 얼굴로 들어와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어쩐지 쭈뼛대고 있는 귀여운 그녀를 보고 라모누는 운동을 멈추고 인상을 풀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머, 벨쨩 아니니. 어쩐 일이야?”

“소, 솔직히......라모누 큰언니에게 제일 부족한 건......츤데레함이라고 생각해요......”

“!”

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라모누의 소중한 동생 중 하나인 메지로 도베르. 보다시피 사람, 특히 남자 대하는 게 서툴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는 아가씨다. 자존감이 조금 낮은 축에 들지만 전혀 그럴 이유가 없어보이는 귀여운 동생이었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도 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면, 그 뒤에는 수없는 고민의 나날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라모누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잠시 의자에 앉아 동생이 남긴 말을 곱씹어본다.

“핫!”

얼마간 두뇌를 풀가동한 결과 라모누에게 전류가 흘렀다. 번뜩였다. 도베르는 분명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언니는 지금 너무 다이어트나 드레스 따위 외면에만 신경쓰고 있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

“동생아......!”

당연한 진리를 깨우쳐준 동생에게 속으로 감사를 보내고, 찔끔 배어나온 눈물을 닦아낸 뒤 라모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쥔다.

“좋았어! 벨쨩의 마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어!”

하지만 시간이 없다. 정신 문화는 본디 물질 문화에 비해 발전과 변화가 더디고 보수적이다. 문화 지체 현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는 걸 라모누조차 알고 있다. 그러니 식사가 있는 다음 주까지 실전압축으로 빡세게 자신을 츤데레로 변모시킨다.


다이어트나 금연 따위를 할 때 주변인에게 선언하면, 사람들은 말이나 글로 표현한 자기 생각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어 효과가 올라간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샤워를 마친 라모누는 즉시 당주 집무실로 찾아가 문을 벌컥 열고 고용인들을 물린 뒤 외쳤다.

“있지있지! 모누는 이제부터 츤데레야!”

또 이 기집애가 어디서 무슨 소리를 줏어듣고 왔길래 이러나 할머님, 메지로 아사마는 걱정부터 앞선다. 빼도박도 못하는 자신의 실수를 어찌저찌 무마해놨더니 또 지뢰가 터질 느낌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큰손녀야.”

“흥! 딱히 할머니한테 알려줄 의리는 없거든?”

기껏 물어봤더니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리면서 쏘아붙이는 손녀에게, 아사마는 자기도 모르게 펜을 부러트릴 만큼 분노한다. 그래도 부처님 얼굴도 세 번까지라는 말도 있으니 참아준다.

“왜 갑자기 츤데레가 되겠다고 그러는 거냐고.”

“하? 할머니랑은 상관 없잖아!”

상관 없으면 말을 않으면 좋을 텐데, 하고 할머님은 속으로 둘, 이라고 카운트를 올렸다.

“말하기 싫으면 방해하지 말고 나가.”

“흐, 흥! 모누 싫다고는 안했거든?”

“셋.”

메지로 아사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뻗어올리며 다가온다. 황급히 양 손을 뻗어 육박하는 할머님을 제지하면서 라모누가 외쳤다.

“타임! 타임! 말할게! 말한다고! 벨쨩이, 도베르가 알려줬어! 나한테 그런 게 필요하다고!”

“도베르가......? 너한테 츤데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그래! 정말이야! 물어봐!”

“뭐, 됐다. 스스로 생각해낸 게 아니라면야.”

다른 메지로 아가씨들에게는 무척이나 자상한 할머님은 도베르의 이름을 듣자마자 누그러진다. 그건 그거고 라모누는 세 번이나 기분을 거슬렀으니 좀 맞아야 한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다고 하라고!”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매서운 손바닥을 몇 번이나 받아내고 라모누는 몸과 꼬리를 쭉쭉 경직시키면서 울먹였다.

“할머니가 츤데레가 되면 어쩌잔 거야! 할머니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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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라모누는 생각하면 할 수록 도베르의 조언이 굉장히 자신을 잘 파악한 것임을 느꼈다. 츤데레는 차갑고 쌀쌀맞은 츤과 살갑고 다정한 데레의 조합, 따져보면 츤이야말로 자신이 평소 연기해오던 메지로 라모누고 데레는 있는 그대로의 모누모누 자신이 아닌가.

‘두 가지 모두 소중한 큰언니의 모습이야. 중요한 건 드러내는 타이밍일 뿐이야.’

도베르가 따뜻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싱글벙글 머릿속 동생과 함께 치야호야 일주일을 훈련하는 동안, 결전의 날이 다가와 있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조금 핼쑥해진 듯한 트레이너와 아사마가 서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자리에 앉는다. 뒤이어 착석하는 메지로 가문의 구성원들. 할머님이 라모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혹시 트레이너의 옆에 앉고 싶다면......”

“딱히.”

할머님에게도 트레이너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메지로 라모누는 짧게 말하고 글래스를 살짝 기울여 입술을 적신다.

“할 말이 있다면......”

“생각나는 건 없네.”

“저번 일에 관해서는......”

“그건 할머님께서 설명하신 그대로. 오해가 풀렸으니 이제 괜찮잖아?”

청산유수와 같은 츤츤거림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하)는 라모누, 의자 뒤편에서는 꼬리가 가볍게 살랑거렸지만 아무도 눈치채고 있진 못하다. 츤데레의 정석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츤에서 연애감정과 함께 데레로 급속도로 이행하는 것을 오늘 밤 보여줄 생각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토레삐 님의 앞이라 긴장해서 약간 더 츤츤대긴 했지만, 할머님조차 압도당하는 메소드 연기라 생각하지 않을 것도 없다. 오히려 리얼리티가 올라가니 좋은 것 아닐까?

시간 관계상 실전압축을 해야 하므로, 식사 자리에서 츤을 연출하고 이후 데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지금 대화는 라모누의 설계대로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의도대로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하하......”

어색하게 웃는 트레이너의 얼굴이 죽상이 된다. 메지로 가의 셰프들이 힘주어 만든 요리들이 넘어가질 않는지 깨작거리고 있다. 할머님도, 동석한 몇 명의 아가씨들도 심지어 고용인들도 조금씩 눈치를 채고 있었는데 자기 세계에 빠진 라모누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역으로 무르익고 디저트가 나올 정도의 타이밍에, 그녀는 트레이너의 눈치를 힐끗 보고, 지금이야말로 순애 드리프트의 시간이라 판단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면서, 팔짱을 끼고 30도 위에서 트레이너를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짧게 말했다.

“당신, 디저트를 먹고 나면 2층 별실로 오지 않겠어?”

“어? 음, 네......”

“뭐야, 그 태도. 딱히 당신을 책잡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단지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닐 뿐이지. 이해했어?”

“네, 이해했습니다......”

“좋아. 잠시 뒤에 봐.”


기껏 먹은 게 얹히는 표정의 트레이너를 뒤로 하고 식당에서 빠져나온 라모누는 즉시 라스트 스퍼트와 같은 달리기로 방에 돌아들어갔다.

“꺄아아아아아! 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어떡해! 모누 너무 떨려! 모누 너무 긴장돼애애애애!”

양 팔을 꼭 경련하는 것처럼 휘저으면서 깡총깡총 옷장으로 뛰어들어가 이날을 위한 승부복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 확인해보고 황급히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후, 후, 화이또 오-! 한다면 하는 말딸 메지로 모누모누! 힘내자!”

혹시 모르니까 안에 승부 속옷도 깔맞춰 입는다. 고혹적이고 성숙한 블랙? 조금 대담한 레드? 중용의 미덕을 살려 버건디로 할까? 트레이너가 아직 갸루남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차라리 스트링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그의 시선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포석을 고민하느라 라모누는 행복하고 바보같은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헤히히히, 후후, 헤헷......”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 할머님, 메지로 아사마는 잠시 자리를 비켜 2층으로 성큼성큼 올라왔다. 츤데레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라모누는 너무 무례했다. 아니, 츤데레라는 걸 고려했기 때문에, 데레가 나올 거라 기대하고 참아줬더니만 온데간데 없지 않은가. 별실 문을 벌컥 열면서 으르렁댔다.

“이 기집애가, 츤데레가 어쩌고 하더니 네 맛도 아니고 내 맛도 아니다, 이것아......”

뭐라 더 욕지기를 입에 올리려던 할머님의 입이 떡 벌어져서 다물어지질 않는다. 별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촛불들이 가운데에 마련된 하트 모양 자리까지 반짝이고 있고, 저 옆쪽에서 조율된 악기를 가지고 대기하던 연주자들이 머쓱하게 할머님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자기도 모르게 길을 따라 걸어들어온 아사마의 눈에, 장미가 빼곡한 꽃다발, 그리고 저 너머에 앰프에 연결되어 준비된 마이크가 들어왔다.

메지로 라모누의 진심데레가 거기 준비되어 있었다.

“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말 좋아하긴 하나 보네.”

입꼬리를 올려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가 준비한 꽃다발을 잠깐 들어올려 보는데, 별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할머님의 눈이, 막 들어선 트레이너의 눈과 마주쳤다.

“에.”

“어라.”

어색한 침묵 가운데, 둘은 한참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메지로 아사마, 그러나 관록과 재치로 수많은 위기를 넘겨온 그녀, 금방 여유를 찾고 오른손을 가볍게 저어 악단에 지시를 보냈다. 곧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로맨틱한 색소폰과 착 깔린 드럼 비트 사이를 스텝을 밟으며, 결의에 찬 할머님이 촛불 사이를 걸어 다가왔다. 손녀의 진심을, 어떻게든 이뤄줘야 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어째서인지 할머님은 죽은 영감 생각이 나서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살짝 몸을 굽혀 트레이너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내, 내 손녀 사위가 되어주겠나......?”

“엑.”

몹시 당혹스러워하는 트레이너, 그를 지그시 올려다보는 메지로 아사마의 보랏빛 눈을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꽃다발로 손을 뻗어 받아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네, 기꺼이.”


쿵.

드르르르......

하필 그 때, 드디어 승부복 풀세트를 갖춰입고 온 라모누가 열려있던 별실 문 너머로 시종을 지켜보고 말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나무로 된 작은 반지 상자가 바닥에 떨어져, 내용물이 땅을 굴러간다.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곧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볼을 타고 떨어져내린다. 몇 번이나 들썩거리던 그녀의 몸이 마침내 폭발한다.

“할머니 미워! 어떻게 모누한테 그래! 이건 아니잖아!”

“어, 저기......”

“으아아아아앙!”

울면서 뛰쳐나간 메지로 라모누를 트레이너와 아사마가 황급히 쫓고, 악단은 이제 어떡하냐는 듯 서로 마주보다가 팀레이스 패배 음악을 대충 연주하고 퇴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