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래 줄래?”

간만에 혈색이 좋아지고 숨길 수 없는 웃음으로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할머님, 메지로 아사마를 보고 라모누가 말을 좀 잘못했다 생각하기 전에, 왜 이런 얘기가 나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메지로 라모누는 괜찮았다. 울면서 도망치긴 했는데 메지로 저택 안에서 결국 잡혔다. 스태미너는 맥퀸한테 밀리고, 파워는 라이언한테 밀리고, 근성은 파머한테 밀리는데 멀리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트레이너를 별실에 두고 아사마와 가족 몇 명이 그녀를 방에 끌고 들어가 전말을 말해주었다. 라모누는 전후 사정을 듣자마자 의외로 쿨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딱 하나, 트레이너의 마음에 대해서만큼은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야 그 모든 것을 겪고도 그가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이겠다는 게 라모누의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갔으니까.

“헤에! 그럼 토레삐 님은 기꺼이 모누모누랑 결혼하겠단 거야?”

“그렇게 되겠지.”

“우, 우와이......”

할머님의 대답에 라모누가 멍한 얼굴로 중얼대며 바닥에 풀썩 쓰러지더니, 체면이고 뭐고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눈가를 훔치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우와이아아앙! 해내따아아아아!”

“잘 됐구나, 우리 큰손녀.”

“모누 너무 행보캐애애앵!”

“축하해요, 큰언니.”

“오메데토!”

“오메데토!”

메지로 가문의 구성원들의 한가운데서 눈물을 쏟으며 박수갈채를 받는 라모누, 어떤 감정도 5분 이상을 격렬하게 지속하지 않는 냉미녀였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좀 긴 시간을 울어댔다.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얼굴과 머리를 정돈한 뒤에 별실에서 대기중인 트레이너를 만나러 간다. 관계가 성립했는데 정작 그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뭣도 없었다는 사실에 뿡뿡 가벼운 분노를 발산하면서, 그에 대한 장난스러운 보상심리도 발동해가면서 히죽히죽 별실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에서 급한 호출이 있어 먼저 돌아갑니다.>

라는 짧은 편지가 라모누가 들을 수 있던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 뒤로 며칠째 트레이너에게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아 라모누는 매일같이 방안에 틀어박혀 울어댔다. 물론 기운차게 울려면 꼭 필요하니까 과자도 먹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진짜 슬프려면 일단 기뻐야 하니까 취미생활도 충실하게 즐겼다. 더 슬프게 울기 위해 눈가에 스모키 화장을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

라모누의 낮은 윽박지름에도 아무 대답없이 들려오는 사뿐사뿐한 걸음 소리. 알아들은 라모누가 휙 돌아보자 거기에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프릴이 가득한 원피스를 입고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키 작은 롤머리 우마무스메가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했다.

“강림한, 나.”

“헐.”

어쩌다보니 친해진 옆집 영애 다이이치 루비였다. 매일같이 비교당하지만 그래도 몇 안되는 찐친을 만나 라모누의 꼬리가 흔들렸다. 루비와 똑같은 각도로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를 받는다.

“루비 어서오고.”

“아침부터 죽상인 메지로의 영애(아리마가 없는 쪽)......”

루비도 나름대로 라모누를 친구로 여기고 있어서 편안하게 진심을 내보이며 대화한다.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준비된 다과를 즐긴다.

“그래서 토레삐 님이 아직도 연락이 안돼서......”

“아주 비련의 여주인공 납신 메지로의 영애(뽀송한 쪽)......”

“루비루비! 공감해 달라고!”

“같은 얘기를 세 번 들으니 슬슬 지겨운 나......”

볼을 부풀리는 라모누를 무시하고 매정하게 차를 홀짝이면서 다이이치 루비가 눈을 감았다. 약간 피곤해보이는 그 얼굴을 살피고 라모누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친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방문한 지가 벌써 1시간 째인데, 라모누의 얘기를 들어주고만 있었다. 자유시간에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너 왜 옴?”

화려한 일족의 일원으로서 그녀의 시간은 귀하고 일정은 타이트하다. 그녀가 무언가 행동을 했다면 거기에는 의도와 목적, 이유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다이이치 루비는 당연한 의문에 말없이 찻잔을 내려두고 혀를 한 번 찼다.

“네가 부러운 나.”

“그야, 모누가 키도 더 크고 몸매도 더 좋고, 머리도 똑똑하고, 스타일도 좋고, 유머감각도 있고, 춤도 잘 추니까 당연한 건데 그 얘기하러 온 거?”

“그 낙천적인 성격과 정략결혼이 들어오지 않는 점이 부러운 나.”

“루비루비! 시비 걸러 왔냐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나.”

한숨을 쉬며 루비가 머리를 한 번 꼬았다. 머뭇대다가 말을 이었다.

“곧 결혼하게 생긴 나.”

“응?”

짧은 대답에 라모누가 기분이 팍 상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낀다.

“자기과시?”

끝까지 들으라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면서 루비가 덧붙였다.

“집안에서 밀어붙인 정략결혼.”

“아.”

“상대는 어느 옛 화족 방계...... 재산만을 보고 팔아넘기듯 추진한 결혼.”

“너도 고생이네.”

침울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루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생겨서 놀란 나.”

“하? 역시 자기과시?”

입꼬리가 다시 내려간다.

“라고는 해도 내 취향은 아닌 상대방.”

“음......”

오늘따라 표정 변화가 죽 끓듯 하는 걸 보니 루비의 마음이 많이 심란하다는 걸 느꼈다. 뭔가 마음속 깊은 곳에,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말하지 못하고 있단 인상을 받는다. 물어보고 싶지만 건드리기 두려운 우마무스메와, 말하고 싶지만 말하기 두려운 우마무스메가 어울리지 않게 침묵에 잠겨 다과만 깨작거렸다.


“......메지로 라모누 씨.”

한참을 그러고 있다 마음을 굳혔는지, 다이이치 루비는 고개와 눈가를 살짝 들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라모누가 반사적으로 거기 손을 척 올리자, 헬리오스를 보는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손 말고, 돈 내놔.”

“하아?”

라모누의 손 아래에서, 루비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 야반도주합니다.”

“뭐?”

이를 악물면서 다이이치 루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살짝 떨궜다.

“저는, 제 트레이너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일족의 옥조도, 부여한 사명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랑보다 중하지 않습니다......처음으로, 어쩌면 두 번째로, 일족이 싫어졌습니다.”

루비의 눈에 고인 것들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 버리고......도망치고 싶어......그치만 일족을 벗어나 살아본 적도, 그럴 생각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을까 무서워......”

파들파들 떨리는 루비의 손을 잡아주면서, 라모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 팔을 벌려 안아주면서 물었다.

“그래서 돈 달라고?”

“정답.”

울면서 피식 웃으면서, 루비가 라모누의 품에 안긴다.

“처음엔 같이 도망가자 하려고 했던 나......하지만 일족에 묶여버린 나의 재산......너나 나나 어차피 부잣집 아가씨......생활력 제로......서로의 무게추가 되는 전개......빈민 몰락 엔딩......”

“그래서 돈만 달라고?”

“오늘따라 이해가 빠른 메지로의 영애(겉늙은 쪽)......”

“난 항상 이해가 빨랐거든? 그래서 얼마나 필요한데?”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만큼.”

“이 감성충 기집애가. 찐친이라 생각하면 가진 돈 다 내놓으란 거잖아.”

달래듯이 토닥이면서 피식 웃는 라모누, 품 안에서 루비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쿡쿡 웃었다.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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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모누는 결단이 빨랐다. 차를 한 잔 루비에게 따라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 차가 식기 전에 돈을 가져올게.”

방을 나선 라모누가 한 방에 들어가 종을 울렸다. 곧 백의를 입은 남자가 들어와 라모누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치의입니다.”

“급전이 필요해.”

“주치의입니다?”

“내 앞으로 된 자산, 계좌의 레이스 상금 등등, 비밀스럽게 현금화해서 가져와. 10분 줄게.”

“주치의......”

“최대한 빨리.”

“주치의입니다!”

남자가 샤샥 방을 나선 뒤, 라모누는 잠시 창 밖을 내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즛토모의 불안한 미래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근데 루비는 뒷각질이 어울리는데, 야반도주보다는 야반선입이나 야반추입이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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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어쩔 계획?”

“작은 꽃집이라도 차려서, 누추한 동네에서 살아갈 예정인 나.”

“오픈하면 얘기해! 모누가 기여운 전단지 만들어 줄게!”

“......머리 나쁜 영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녀를 무시하고 라모누가 화제를 휙 틀어버린다.

“트레이너랑도 얘기한 거?”

“물론. 그 사람은 내 일이라면 언제나 적극적이니까.”

루비가 얼굴을 붉히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낮이나 밤이나.”

“계속 그런 식으로 돌려서 자랑할 거면 돈 돌려줘.”

“아이는 일곱 정도.”

“진짜 맞을래? 그럼 나는 여덟! 아니 열 둘!”

“......풉.”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자니, 백의를 입은 남자가 검은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갚을 거란 보장은 못하는 나......”

“빌려주는 거 아니야. 그냥 주는 거야. 축의금이라고 생각해.”

라모누가 내민 가방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한 루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금전감각이 희미한 메지로의 영애......같이 안가서 역시 다행이라 생각한 나.”

“임마.”

“......나와는 다르게, 있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메지로의 영애.”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루비가 그녀에게 팔을 벌리면서 보여준 미소는 진짜였다.

“미안하고 고마워. 즛토모.”

“......즛토모.”

우정어린 허그를 나누면서, 두 영애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시간을 잠시 보냈다. 떨어지기 전에, 루비가 생각났다는 듯이 불렀다.

“아. 라모누 양......”

“응?”

“아니. 모누모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른 그 애칭이 마음에 드는지 라모누가 목 안으로 쿡쿡 웃었다.

“왜, 루비루비.”

“......이건 절대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인데......”

가방을 들고 나가면서, 다이이치 루비가 희미하게 웃었다.

“버추얼 우마튜브 <소박한 일족> 채널 구독과 좋아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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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낮, 화려한 일족의 말석이자 URA 대표상 수상에 빛나는 명 우마무스메 다이이치 루비와 그녀의 트레이너의 실종 뉴스가 시끄러운 것을 확인한 메지로 라모누는 당주의 집무실에 찾아갔다. 고용인들을 물린 그녀가 양 볼에 검지를 쿡 찌르면서 히죽거렸다.

“하머니! 모누 기여어?”

“긴히 할 얘기가 그거?”

“모누 기엽냐고! 묻짜나!”

“그래. 내 손녀인데 당연히 귀엽지. 근데 그냥 귀여우려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올~ 정답!”

라모누가 손으로 하트를 만들면서 애교를 부려댔다.

“하머니 모누 용돈 좀 올려주세요!”

“......하?”

“모누 메지로의 첫째 영애인데! 품위유지비!”

“네 품위 유지는 돈으로 안 돼. 이것아.”

“이거 부탁 아니거든? 하머니! 루비 뉴스 봤어 안 봤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라모누가 볼을 잔뜩 부풀리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하아, 모누도 확 야반도주 해버려? 하머니 자신 있어? 모누 없이 살아갈 수 있어?”

“그래 줄래? 정말로? 그래 줄거야?”

간만에 혈색이 좋아지고 숨길 수 없는 웃음으로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할머님, 메지로 아사마를 보고 말을 좀 잘못했다 싶었는지 라모누가 멈칫했다. 위세가 조금 죽어버린다.

“라는 건 농~담☆ 모누모누가 하머니를 버리고 도망갈 리가 없짜나!”

“에휴. 행복이란 건 3초를 넘기질 못하는구나.”

“에히히. 할머님도 참~ 농담도 잘하고 장난꾸러기이~!”

“.......”

말없이 신문 기사에 집중하는 메지로 아사마를 보고 지레 찔려서 라모누가 허둥지둥댄다.

“아니, 진짜로? 모누가 나갔으면 좋겠어? 모누가 없는 게 행복해?”

“일단 할미 체험이나 시켜주고 물어보지 그러니.”

“하, 할머님......”

“.......”

“당주님? 농담이 지나치신 거 아니신지?”

“메지로 라모누.”

부름에 차렷 자세로 선 메지로 라모누.

“예, 옙.”

“할미는 당주지?”

“예. 물론입니다.”

“할미도 품위유지비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당주니까.”

“아이 참~! 할머니 품위 유지는 돈으로 안 되는 거야!”

“되는지 안되는지 한 번 보여줘?”

“스탑! 스탑! 지팡이에서 손 떼시고!”

라모누가 입술을 댓발 내밀면서 지갑을 꺼내 유키치 몇 장을 털어냈다. 기왕 드리는거 일류답게 드리자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녀가 돈을 허공에서 우아하게 저으며 책상으로 가져갔다.

“우리 사랑하는 하머니한테~ 용돈 들어갑니다~ 라부라부 큥~!”

“아이고, 우리 큰손녀, 다 컸구나. 할미한테 용돈도 다 주고. 사랑한다, 우리 모누.”

“모누도 우리 할머니 사랑해요! 라뷰라뷰!”

“그래. 할 말 끝났으면 나가거라.”

“......이게 아닌데......”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가는 라모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사마는, 신문을 내려두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예, 화려한 일족과의 혼사가 없던 일이 되셨다면서요. 그러게 애들 연애사에 끼어들지 마시라니까.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니까요.”

어쩐지 기분 좋게 빈정대는 그녀의 말에 수화기에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껄껄 웃으면서 아사마가 넉살 좋게 받아준다.

“제가 어찌 아나요. 우리 손녀도 아무것도 모릅디다. 예. 그러니 계약은......”

잠시 후 전화를 끊은 아사마는, 굳게 닫힌 문 쪽을 바라보면서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때로는 친구를 돕는 것이 자기를 돕는 길이지. 알고 그랬다고 생각은 안 들지만, 계속 그렇게 살거라. 우리 모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