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다

 

비가 내리는 밤이다. 떨어진 물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중력을 따라 선을 그었다. 추적추적 빗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발코니로 몸을 끌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흡입했다. 폐 속이 담배연기로 충만해졌다. 평소와 같은 느낌이었다. 편안하고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가는 듯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캄캄한 밤은 구름 한 점 비추고 있지 않았다. 비만이 빈 공간을 채웠다. 아마도 나는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이 씻겨나가는. 그런 생각을 전부터 계속 하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을 생각했다. 뜬구름처럼 가벼운 기억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리듯 타버린 담뱃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남은 불씨가 바닥에 있던 물기에 치익 하고 꺼졌다. 담배를 다시 피울 생각은 없다. 온 신경이 머릿속을 뒤지는데 집중했다.

 

쿠르릉

 

순간 하늘과 땅을 이으면서 번개가 떨어졌다. 동시에 비가 더욱 거세졌다. 총알처럼 미친 듯이 발코니의 난간을 때렸다. 금속이 울리고 파르르 떨렸다. 그 소음이 집중력을 고갈시켰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몸을 돌렸다. 침대에 쓰러져지듯 누워 잠을 청했다.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깼을 때. 비는 이미 멈춘 뒤였다. 밤새 흘린 땀이 침대시트에 스며들었다. 불쾌한 냄새가 방을 가득 매웠다. 찝찝함을 지우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았다. 뜨거운 열기에 몸 담그며, 오늘 있을 만남을 이미지화했다. 늘 이렇게 해결해왔으니까 분명 이번에도 잘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말처럼 어젯밤의 고뇌는 이미 잊은 뒤다.

 

~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건만 넘기면 다시는 부탁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책상 건너편의 남자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이봐... 내가 말 했지 다음번에 경찰조사 나오면 그땐 정말 끝이라고. 우리 쪽에서도 막는데 한계가 있어. 아무리 돈을 받아봐야 경찰이 들이닥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미안하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미간을 구겼다. 그 얼굴에는 눈물점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이내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앞으로 이런 시시껄렁한 일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계속 몸 바치며 일 해왔는데 이렇게 가볍게 버린다니. 두통과 함께 무기력증이 밀려왔다. 충동적으로 술잔을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술잔은 와장창 파편을 튀기며 슬프게 깨졌다. 술자리를 정리하고 거리로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끈적이게 달라붙는 습기와 비는 내 기분을 대변하는 듯 했다. 챙겨온 우산도 없었기에 봉투를 뜯어 택시를 탈까 고민했지만, 혹여나 찾아올 기회를 위해 총알을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딱히 차선을 찾지 못하고 비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가 내리는 귀갓길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늘 지나다니는 차도,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걸을 뿐인 행인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씻겨나가고 있어.”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어느새 분노와 불안은 흔적도 없이 비에 녹아들었다. 자리에 서서 감상하고 있자.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턱 선을 따라 흘렀다. 스윽 소매로 닦아냈다. (소매도 이미 젖었기에 의미는 없었지만.) 순간 따끔한 고통을 느꼈다. 아까 술잔이 깨지면서 튄 파편이 만든 상처인 모양이다. 피가 배어나왔다. 이내 비와 함께 섞였다. 그 모습을 보며 어젯밤 세상을 씻기는 비에 대한 기억을 상기해냈다. 어렸을 적 그저 순수했던 때 친구와 놀이터에서 나눈 이야기를. 내리는 비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둘은 비에 맞지 않게 미끄럼틀 아래에 쭈그려 앉았다. 나는 비에 대한 불평만 나열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밑에는 작은 눈물점이 있었다.

 

왜 웃는 거야?” 정말 그뿐이다. 왜 웃는지 궁금했다. 녀석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꺼냈다. “비는 세상을 씻겨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우리가 걸어 다니는 더러운 바닥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무엇이든 전부.” 말을 마치곤 함박웃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따뜻해서. 내 생각 따위는 상관없다고.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비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씻겨낸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택시가 요란하게 물을 튀기며 지나가고 있다. 점점 속력을 줄이더니 결국 내 옆에 멈췄다. 곧 작게 경적을 울렸다. 창문이 내려가고 탈거에요?” 라는 질문만 던졌다. 픽 웃음이 났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잡아당겼다. 비에 홀딱 젖었지만, 목욕을 한 것보다 더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