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계속 업데이트) - 창작문학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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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아인은 감옥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밖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웅성거림과 스쳐 지나가듯이 들리는 익숙한 여자들의 목소리로 둘이 용에게 제물로 바쳐지려 함을 알아차렸다. 몇시간이나 지났을 까.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아인은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가만히 머리를 쥐어 싸맸다. 그때, 누군가 감옥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인, 내다.”


그 소리는 바로 샌디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샌디? 분명 여기는 경비병들이 감시하고 있을 건데요.”


“묵인이라고 해두지. 빨리 나와라! 해가 지는 순간 둘이 재물이 될기다.”


샌디는 그렇게 말하며 감옥문을 열고는 아인에게 칼과 방패를 주었다. 아인은 샌디의 인도로 빠르게 잔과 마리가 재물로 바쳐지는 마을 광장에 달려갔다. 어느새 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아인! 저기다!”


아인의 눈에 광장 한가운데에 묶인 잔과 마리, 그리고 두 사람 위를 나는 용이 보였다. 그러나 용은 이미 둘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지만 아인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인은 달리는 와중에도 머리속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그때, 아인의 눈에 천막을 고정시키기 위해 팽팽하게 묶어 놓은 밧줄이, 용과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아인은 미소를 지으며 방향을 틀어 밧줄을 향해 달렸다.


“아인! 뭐하노!”


아인은 밧줄을 단단히 잡은 다음 기적을 바라며 칼로 줄을 끊었다. 동시에 밧줄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며 아인을 그대로 광장을 향해 날렸다. 아인은 그대로 날아가며 용을 노려보았다.


‘용에게 바로 도달하기는 힘들어! 그렇다면…!’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아인은 팔을 뻗었다. 손이 바닥에 닿는 순간 아인은 엄청난 근력으로 바닥을 밀며 몸을 뒤집었다. 발이 안정적으로 땅에 닿는 순간 아인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거의 날다시피 용에게 돌격했다. 어느새 땅에 착지한 용은 눈치채고 피하려 했으나 아인이 조금 더 빨랐다. 검은 피가 용의 왼쪽 눈이 있던 자리에서 솟구치며 용은 괴성과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려 날아가 버리고, 동시에 해가 지평선 밑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광장의 모두가 침묵했다. 아인은 얼른 마리와 잔을 묶은 밧줄을 끊어 둘을 풀어주었다. 오래지 않아 게비알이 길길이 날뛰며 욕을 한 사발 퍼붓더니 아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놈이 우리의 신성한 의식을 망쳤다! 용의 분노가 대지를 뒤덮으리라! 우리가 가는 길마다 시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고 모든 적들이 우리의 여자와 아이들의 목숨을 노릴지어다!”)


한창 격노하던 게비알은 레드암스의 멱살을 붙잡아 올리며 그를 위협했다.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네놈이 굳이 데려온 저 외부인 덕분에 우리들의 생명이 위험해졌다! 네놈과 네놈의 부족이 공동체에서 숙청당하고 싶으냐?! 네놈이 책임을 져라!!”)


레드암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라! 저 자의 처벌은 우리의 전통대로 진행하리라! 내일 해가 뜨는 그 순간, 우리의 부족장이 저 외부인의 목을 베어, 그 피로 용의 분노를 삭이리라!”)


이번에는 모든 오크가 환호했다. 샌디가 아주 벌벌 떨며 말했다.


“아… 아인! 이를 우짜면 좋노! 니는 우리의 의식을 망친게 됀기라! 우리는 의식을 망친 사람은… 부족장님이 직접 목을 잘라 피를 바친다! 니는 죽는 기다!!”


아인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건장한 병사들이 달라붙어 아인을 꽁꽁 묶었다. 아인은 저항 없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때, 한 병사가 게비알에게 물었다.


(“저 여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게비알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가둬버려!”)


(“그 드워프는 어쩔까요?”)


(“알아서 해라!”)


아인은 오크 병사들의 억샌 손아귀에 머리와 팔을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이번에는 레드암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레드암스!! 너는 속고 있어! 그 까짓 게 전통이라면 그냥 전부 멸망하라 하지! 거짓을 말하는 건 게비알이다!!”


아인의 목소리가 황무지의 거센 바람에 묻혀 들리지 않자 레드암스는 자신의 처소로 힘없이 돌아갔다. 아인은 오크들의 거주지 외곽에 세워진 오래된 나무 장대에 묶여졌고, 혹여나 아인이 탈출하거나 야생동물의 습격을 막기 위해 그 앞을 병사들이 지키게 되었다. 아인은 차디찬 황무지의 밤바람을 그대로 맞으면서, 절대 삭힐 수 없는 분노를 삭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 까, 어느새 아인의 주위로 오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곧이어 혹여나 돌발행동을 하는 걸 막기 위해 다른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샌디와 아인을 죽이기 위해 나온 레드암스, 게비알에 이어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험상궂은 오크 떡대 십여 명에게 전신이 꽁꽁 묶인 잔과 마리가 끌러왔다. 그들은 그녀들의 머리만 한 손으로 둘의 머리나 어깨 등을 만지며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과 비웃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해가 동쪽 평원 너머에서 떠오르자 칼을 든 레드암스와 게비알이 다가왔다. 게비알이 군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들의 신성한 전통을 모욕한 이방인이 여기 있노라. 신성한 전통을 모욕한 자에게는 어떤 형벌이 기다리는가?”)


군중들이 하나 되어 발을 구르며 같은 말을 소리쳤다.


“Death! Death! Death! Death! Death! Death!”


(“그렇다, 처형! 오로지 죽음으로써! 그 피를 대지에 흩뿌림으로 모욕당한 대지와 신들에게 속죄를 해야 한다! 이방인이 전통을 모욕한 칼로써 우리들의 부족장이 그의 목을 치고! 그 피를 대지에 뿌리며 그 육신을 용에게 바쳐 우린 속죄할 것이다.”)


모든 오크들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했지만 게비알의 손짓 한 번에 금세 잠잠해 졌다. 곧이어 맑은 하늘에 눈보라가 몰아치더니 서쪽 하늘에서 용이 그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와 아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게비알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용에게 속죄하여 우리는 용과 함께 대륙을 손에 넣으리라! 저 가증스러운 드워프들을 그들의 산 째로 파묻어 주자! 그들의 절망이 영원히 대지를 울리리라!”)


레드암스와 샌디를 제외한 모두가 환호했다.


(“벌레같이 바글바글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어라! ‘트리움피한(승리)’를 ‘펠로스(패배)’로 바꾸자!”)


또다시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오크들이 환호했다.


(“저 오만한 엘프들의 콧대를 땅바닥에 짓이기고, 그리힌리즈의 신성한 나무를 불태워라. 여자들을 겁탈하자! 그들의 비명과 눈물이 숲을 집어 삼키리라!”)


다시 둘을 제외한 오크들, 특히 젊은 남자들이 열성적으로 환호했다. 그때, 잔과 마리를 붙들고 있던 오크 떡대들이 두 사람을 끌고 인파 뒤로 사라지려 했다. 둘은 비록 재갈이 물려 비명을 지를 순 없었지만, 비명을 질렀다. 그때, 게비알이 한 손을 들며 소리쳤다.


(“멈춰라! 놈이 죽은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


떡대들은 둘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둘은 반쯤 찢어진 옷을 부여잡으며 아인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레드암스는 아인의 칼을 들고 아인의 곁에 다가왔다. 레드암스는 게비알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아인에게 속삭였다.


“미안하네 아인. 전통을 무시한 이를 살리는 것은 나조차 할 수 없는 일이야. 자네는 몰라도 동료들은 어떻게든 해보겠네. 정말 미안하네.”


아인은 머리를 굴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인은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아인은 이전까지 싸워온 용들의 약점을 파악할 때만큼 죽어라 머리를 굴리다 칼이 자신의 목을 치기 직전에야 입 밖으로 꺼냈다.


“그게 전통이야? 잘은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알고 있어. 너희에게 짐승 그 이상의 것을 바치는 일은, 그게 아니더라도 살아있는 생명에게 재물을 바치는 건 수백 년 전 이후로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이야. 설사 나를 바친다고 해도 머리 위에 저 녀석이 너희들의 말을 잘 따를까? 아니, 처음부터 의심스럽지 않아? 당신들의 노전사 말이야. 사라진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라는데 그 부족이 어떤 부족인지도 모른다며? 얼마 전에 세상에 다시 등장한 ‘용’과 대화를 한다니, 노전사라는 것 이전에 수상하잖아? 그러니까 미안한데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들어줘. 내 추측과 다르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게.”


레드암스는 오랫동안 -오랫동안이라 했지만 5초 동안-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귀를 기울여 아인의 부탁을 들었다. 레드암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을 거두고 군중 앞에 다시 섰다.


(“죄인 아인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자기 인생 최후의 명예를 걸고! 우리들의 위대한 노전사 님과 겨루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명예에 조건반사적으로 환호하는 오크라면 분명 찬성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아인은 최후의 도박을 걸었다. 그리고 아인의 도박이 정확히 들어맞아 모든 오크들이 환호하며 결투를 드높게 소리쳤다. 게비알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인의 예상대로라면 그 역시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지라. 결국 게비알은 자신의 거대한 지팡이를 두 손 높이 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결투 신청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레드암스는 빠르게 아인에게 묶인 밧줄을 풀고 검과 방패를 들려주었다. 아인은 몸을 가볍게 풀더니 게비알을 바라보았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네가 만든 이 공연이 네 포승줄이다.”


둘은 천천히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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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써뒀던 스토리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비정기 연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