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링크

1화 2화





작열하는 대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선혈이 낭자하고,  우거진 나무들은 불타며,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몇 시간째 이어진 화마로 인해 하늘은 마치 피칠갑을 한듯 붉었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이곳이 뚫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법사들을 지켜라!!”



“젠장할… 그건 아직인가?”



전신을 무장하고, 몸을 다 뒤덮을 정도의 커다란 방패를 지닌 사내가 한탄하듯 말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깊게 눌러쓴 투구에선 피가 흘러나왔고,  



복부를 감싸고 있던 강철의 갑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방패는 마치 태양빛을 내뿜는 듯한 광색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지휘관이 있었구나!”



그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괴이하며 이질적인 목소리. 



이 참혹한 전쟁터에서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사를 보며 조소를 날리고는 그의 앞에 섰다.



“니놈이 공허의 존재인가..!”



이때까지 수 많은 전쟁을 겪은 노장답게, 그는 한계인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전투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마치 태양과도 같은 금빛의 오라가 그의 주변에 맴돌았다.



놈은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너는 그놈들에게 총애 받고 있는 녀석이구나.

  

  

 과연 과연!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군..”



“그런데 그런 꼴로 아직도 싸울 생각인가?”



“닥쳐라.”



“…뭐?”



"말이 많구나. 멍청해 보이는 외관과 똑같군. 어서 덤비기나 해라."



"...허"



놈의 농담 섞인 어조에 그가 도발하듯 답하자, 조금 당황 한 듯 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 그것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놈의 그 붉은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듯 했다. 그리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오만한 사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니 흥미롭군!  좋다! 상대해주마!”



말을 마치자 마자 놈의 몸에서 마력이 증기의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마력을 충전하는 행위로 판단한 그는 서둘러 대비를 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놈의 몸이 비대화 되기 시작했고. 조금 있자 놈의 크기가 그의 두 배는 넘어간 듯 보였다.  



보라색을 띄던 놈의 피부는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몸의 근육량 또한 전과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놈의 손에 붙어있는 손톱 또한 전에 없던 크기로 변화하였다. 붉게 빛나던 그 눈동자엔 초점이 사라지고 이글거리는 분노만이 남아있었다.



“자.. 준비는 된 건가?”



목소리 만으로 상대에게 압도 당하는 기분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젠장할..”



살아나간다면 도발하는 습관은 꼭 고쳐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는 나지막히 외쳤다. 



그는 방패를 쥔 손을 다잡고 놈의 공격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



"흐아압!"



놈의 기합과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주먹이 날라왔다. 방패는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놈이 주먹을 내지를때마다, 그들 주위에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놈은 아랑곳 않고 그의 방패를 계속해서 가격했다. 그러나 방패도 이에 대항하듯 황금색 오라를 내뿜으며 부서질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방어만 하고 있는 상대에게 지루하다는 듯 놈이 말했다.



"계속 그렇게 막고만 있을 심산인가?

  


도발한 것 치곤 보잘것 없는 실력이구나!"



"얕보지 마라!"



"!!"



그 순간, 방패 중앙의 사자 형상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의 은총과도 같은 엄청난 양의 광량이 놈을 감싸자, 그것이 마치 활 시위를 떠난 화살 마냥 튕겨져 나갔다.  



빛과 함께 일직선으로 날아간 괴물은 쭉 나아가 그대로 성벽에 쳐박혔다.



"아직이다!"



"우오오!"



그가 함성을 내지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성의 중심에서 놈이 쳐 박힌 성 외곽까지 단숨에 주파한 



그는 부서진 잔해를 발판 삼아 높게 도약했고,  방패를 아래로 향해 그대로 놈에게 내려 찍었다.



"크허억.."



무서운 기세로 강하한 방패는 그대로 몸통에 직격해 놈에게 멋진 바람 구멍을 선사해 주었다.



숨이 거의 끊어져가는 괴물의 모습을 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우린 전쟁의 신의 지식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괴물?"



"..."



이미 눈을 감아버린 괴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키는 자. 우리는 우리의 백성을 지킨다. 



하물며 상대가 니놈과 같은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도 말이다.

  


그것이 전쟁의 신도다."



말을 마친 그가 놈의 몸통에 깊숙히 박힌 방패를 빼내었다. 



그러곤 놈의 거대한 몸통에서 뛰어내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음.. 너무 안일한 것 아닌가?  '지키는 자'여."



"!! 살아있었던 건가!"



뒤를 돌아보자 언제 맞았냐는 듯 상처는 온데간데 없고, 마치 새로 태어난 듯 멀쩡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가 금방이라도 도약할 자세를 취하자 괴물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선 그에게 질문을 해왔다.



"'지키는 자'..라. 그렇다면 네가 지키던 이들이 배신하더라도, 너는 그들을 위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나?



 가령.. 저기에 있는 블러드 엘프처럼 말이지."



놈은 저 멀리서 신도들과 싸우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 여성을 가리켰다.



블러드 엘프, 붉은 눈과 붉은 머리카락 어두운 피부색까지, 일반 엘프들과는 완전히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자연을 매개로 하는 주술을 사용 할 수 없어 동족들에게 배척받게 된 비운의 종족이다.



주로 숲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사는 일반 엘프들과는 달리, 그들은 동족들의 눈을 피해 동굴에 모여살며 비천한 생활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지언정 그들은 우리의 적이다."



기사가 그리 답하자 괴물은 즐겁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해 왔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떤가? 저기서 '신'이라고 불리는 놈들에게 주어진 힘을 너희를 향해 쓰는 자들이 있다."



이번에 기사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저들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에게 굴복했다. 저런 탐욕스러운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의 거침없는 대답에 조금 놀란 듯, 연신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크게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너희들은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 



저 붉은 머리의 종족을 한번이라도 도와 준적이 있는가?



그런데 이제와서 연민을 느끼는가?



또한, 니가 말한 그 힘을 가진 드루이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들은 소수였다. 엘프들보다 더, 물론 너희 인족들보다 훨씬 더.



'소수'라는게 이 세상에서 얼마나 불리한 지 알고있나? 너희 인간들은 소수 민족이 받는 편견과 핍박을 이해하고 있냐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힘을 원했다. 자연의 힘을 완벽하게 다루는, 가장 강력한 힘을 놈들에게 받아도 말이다.



너희들은 그들의 고통을 이해했는가? 또 연민했는가? 아니면 동정? 아무리 공감하고 함꼐 슬퍼한다고 해도 결국 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문제를 해결할 힘. 그리고 그들은 그 힘을 받아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다! 



너희들은 이때까지 그들을 방관해온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가만히 서서 듣고 있던 기사가 답했다.



"..말은 청산유수로군. 그런 언변으로 그들을 기만했나?"



"!"



"확실히 우리가 그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낸 건 맞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척 하며 



정작 그들의 문제엔 관여하지 않았지. 그건 우리가 충분히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놈들이 그들에게 '세상을 바꾼다' 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타락시켜 이런 참상을 만들었다는게 용서 될 것 같나?



너희들은 단지 약자인 그들을 앞세워 세상에 혼돈을 초래하고 



그것을 양분으로 삼을 뿐인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그는 이 말을 끝으로 방패를 들어 다시 한번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꼭 끝을 내리라고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내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크게 발돋움 하여 높게 도약했다.



"끝을 내주마!!"



그가 그 커다란 방패를 내려 찍기 직전,  그는 놈의 표정을 보았다. 그것은 절망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오만으로 찌든, 그의 미소를. 



그 조소 섞인 미소를 보며 그는 깨달았다.



그에 부응하듯, 놈은 한 손으로 방패를 잡았다.  그러고는..



"크하하! 그래 정답이다! 아주 자알 알고있구나!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라!"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에 금이 갔다. 이내 그 사이로 검은 마력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무슨 짓이냐!"



기사는 당황한 듯, 몸부림 치며 방패를 빼앗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방패는 맥 없이 산산조각 나 지면으로 흩어졌다.



"!!"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던 방패는 바깥 면이 다 스러져 중간의 사자 형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산산조각 나버린 방패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기사, 이를 본 괴물은 씩 웃으며 방패를 쥔 손의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여파로 튕겨나간 기사는 저 멀리 나가 떨어져 성벽에 박히고 말았다.



기사가 쓰러진 곳까지 한달음에 날아간 괴물이 그의 앞에 앙상한 방패를 떨어뜨리며 조소했다.



"과연..! 너의 오만함은 그 방패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너와 이대로 더 싸워 그 음습한 정수를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다.



  그 장난감으로 노는 건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