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에서 가끔 나오는 말로 “사직을 보존”하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종묘사직으로 불리는데. 사직은 곡식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말하고, 종묘는 역대 국왕들의 위패를 모신 장소 또는 그 역사를 말한다.

서울에 있는 조선의 유산, 종묘는 선대 조선 국왕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된 건물이다. 전제왕정국가에서 왕이란 국가의 아버지이며, 지존이고, 주인이며, 현재 왕의 권력을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권력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종묘제례의 핵심이다.

조선의 태조의 건국을 신격화하여 권력의 위대함을 인식시키고, 역대 선왕들과 지금의 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나열하여 바로 자기 자신의 권력을 공표한다.

기술적으로는 역사서와 왕족의 족보 등의 문서로 증명하고, 중국 황제로부터의 인가를 받는다.

이것은 왕정 국가에서 통치와 권력의 정당성, 적법성을 증명하는 이론이자 기술이며, 종묘제례라는 거추장스럽고 화려한 의식으로 경탄을 자아내어 통치자의 권위를 세상에 공표하는것을 의도한다.


신정의 경우 조금 다르나,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교황이 지배하는 가톨릭 체제를 보자.

교황은 추기경들이 참석한 콘클라베에서 성품성사를 받은 주교 중 하나가 선출된다.

그 주교직을 부여받은 성품성사는 또 다른 주교의 손에 집전된다.

일종의 재귀함수이며 귀납법이다. 새로운 주교의 탄생을 위해 이전의 주교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재귀의 시초는 누구로부터 이어졌나?

최초의 교황은 베드로이며, 그를 포함한 12명의 사도가 최초의 주교이자 예수의 첫 제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 예수는 신의 아들 즉 성자이며 또한 삼위일체로 절대신 야훼 그 자체이다. 따라서 12사도는 신에게 직접 사사받은 신의 제자이며, 그들 중 하나가 교황으로서 교회를 통치하고, 그들이 최초의 주교가 되어 이후로 주교들을 배출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보전하며 퍼뜨려 나간다.

즉, 현재의 교황과 주교 이상의 사제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신-예수로부터 이어지는 직계 자손들이며, 이 이론의 증명을 위해 교회는 사제들의 계보를 기록하고 관리하며, 존경받고 성스러운 의식인 성품성사를 집전하여 일반 신도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신정에서 권력의 정당함을 확보하는 핵심기술이자 이론인 사도계승이다.


학계, 특히 과학 사회는 어떤가.

교수는 학생들을 양성하며, 직접 석사, 박사학위를 부여한다. 이 과정인 학위수여심사에 수 명의 박사급 인사가 참석하며, 그 근거인 학위논문을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현대의 박사학위심사의 경우, 평가자들은 대상자를 자신과 동급의 연구자로 인정하는지 결정하는 중대한 과정이며 현재까지의 자신의 명예를 담보삼아 이뤄진다즉, 추기경과 유사하게 이미 박사가 있어야, 그리고 교수가 된 박사가 논문심사를 주최하여야 후계 박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 시초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우리 주변에 흔히 보이는 교수님들 대부분은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으셨다. 그 교수들 중 일부는 베르너 폰 브라운, 스티븐 호킹, 리처드 파인만, 존 폰 노이만의 제자였거나 그 자신이었고, 그들은 애덤 스미스,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등의 제자였으며, 또한 그들은 멘델, 라이프니츠, 라부아지에로부터 수학하였으며 결국 그 정상에는 뉴턴이 자리한다. 

그리고 뉴턴에게 학위를 수여한 계보는 중세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교수들로 이어지고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예수의 방계 제자들이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계보 역시 이어받았다.

학위수여증서에서 명시된 자신의 지도교수는 자신이 가진 학문적 권위의 기초 척도이며, 이 증서가 이어지는 족보를 관리하는 대학은 학계의 종묘나 다름없다.


이쯤되면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그렇게나 중시하던 이유의 단편을 짐작할 수 있다. 신분사회에서 알기쉬운 신분의 증명은 곧 가문의 역사의 나열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또한 자신의 가문의 역사를 중시하던 전세계의 귀족들의 행동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정-공화정의 종묘란 무엇인가.

민주국가에서 전대 대통령과 총리들에게 지도교수나 추기경, 선왕과도 같은 무궁한 존경과 경외를 보내던가? 미국 독립기념일, 한국 광복절에 역대 지도자들과 초대 대통령을 신격화시키던가?

민주정에서 국가의 주인은 일개 국민들이다. 국민 하나하나가 곧 국가 그 자체이자 스스로의 주인이며,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심부름꾼이며, 정부의 정상인 대통령은 국민 하나하나의 의견을 전수조사하는 국민투표로 선출된다. 

여기가 핵심이다. 현재의 대통령을 뽑는데, 전임 대통령은 절차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임 대통령은 단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뿐, 그 어떤 결재권도, 평가도 휘두를 수 없이 오직 국민투표의 결과로 선출이 이뤄진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피선출권의 자격요소는 단지 나이와 대한민국 국민임을 요구할 뿐이다.

관습적으로 거대정당의 공천이 요구되지만, 이는 선출을 유력화 할 요소일 뿐, 피선출의 자격과는 구분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심지어 그 거대정당의 권력의 원천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적어도 역대 대통령의 계보는 단지 역사에 불과할 뿐, 민주정의 종묘가 아님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정의 종묘이자 족보라 할 것은 무엇일까? 

국가 수반이 매년 직접 찾아가 의례를 집전하고, 선조의 정신을 기리고, 자신의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장소.

적어도 대한민국은 현충원이라 할 수 있다.

일개 국민 영령들이 직접 국가의 지원으로 모셔지는 장소. 모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생명을 조국을 위해 희생하여 다른 국민들을 지켜낸 정신을 기리는 곳. 숭고했던 그 선조의 의식을 본받고 이어나가기를 다시 한번 다짐하여 그들의 죽음에 의미를 이어나가는 성스러운 의식. 외력에 굴복하지 않고 내 손으로 우리의 의지를 관철하여 더 나은 후대를 기원한 그들에게 예를 표하는 현충원이 바로 민주정의 종묘일 것이며, 이러한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현충일의 행사가 곧 왕정의 종묘제례에 대응하는 적법하고 정당한 통치권력의 포고일 것이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 정신은 현재의 행동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한다.

과거의 숭고한 영령이, 살아남은 자들의 손에 그대로 지박되어, 박제된 의지의 태피스트리를 신성하게 걸려지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으로 남겨진다.

민주정은 모든 국민들이 주인이다. 그렇기에 국민 하나 하나의 희생은 곧 국가 스스로의 희생이며, 그 생명의 값은 그 어떤 체제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그런 체제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으로 값을 내버렸다면, 그 대가로 살아남은 국민들은 그 원금과 이자를 청산하기 위해 남은 평생을 다 치러도 모자라고 심지어 후대에까지 그 빚이 상속된다. 

자유를 갈망하며 나은 미래를 위해 값을 치렀건만, 그것이 오히려 빚으로 남아 액자속에 보존처리된 의지만이 전해지며 후대의 자의적인 평가와 함께 그들 스스로의 손발을 묶는 신성한 유물로 남는다.


종묘의 의지를 어디까지 보존하고 어디까지 기려야 할까.


가톨릭에는 공의회라는 제도가 있다.

현재의 교황이 인정하고 전 세계의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회의 정신, 의미, 현실, 미래에 대해 토의하고 이뤄지는 발표는 오류가 없는 무류성을 가진다. 평하자면, 가톨릭 영원불멸의 진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자리에서의 결정을 뒤집으려면 이후 다른 공의회의 결정이 아닌 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성경을 거스를 수는 없다.

예수, 삼위일체에 의해 신의 육성을 담아 전해오는 책. 세계 인구의 절반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상의 근본에 이 오류투성이의 책이 군림한다. 설령 공의회라 한들 성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교회의 범주가 아니니까. 공의회가 가지는 무게 자체도 성경으로부터 부여받았다기보다 이 시대에 존재하는 예수의 직계제자들이 이렇게나 한자리에 모였기에 이 이상 신의 의지에 가까운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가톨릭은 선대의 의지를 뒤집는데 무류성이라는 양날의 검을 가지면서도, 결코 기저 근본의 의지를 뒤집기란 불가능한 구조인 것이다.


왕정은 그나마 단순하다. 아무리 선대 왕이 내린 결정인들, 현재 나라의 주인은 바로 지금의 왕이기 때문이다. 

신하들이 선왕의 사례와 저마다의 합리성으로 왕을 설득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를 통치하는 제왕의 카리스마와 권위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이다.

강력히 바라고 주장하기만 한다면, 전제왕정은 오직 현재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될 것이다. 독재자들의 행동을 보아라. 그들이 입으로 과거로부터의 권위를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 얼마나 영향력이 있겠는가?


학계는 정 반대이다. 

뉴턴은 달에 가기 위한 자연의 작동원리를 훌륭하게 설명했지만, 수성의 세차운동과 GPS를 구현하기 위한 이론에는 모자랐고, 이것을 설명한 아인슈타인은 현대 집적회로를 지배하는 이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고작 신의 주사위 놀이를 들먹이는 오류를 범하면서. 

그들은 위대했고 자신의 분야에서는 마치 신과도 같은 통찰을 보여주었지만, 조금만 시선을 확장해도 수많은 오류를 발견할 수 있었어며, 후대는 그 오류를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신의 스승이 틀렸다 인정하고 뛰어난 제자에게 상을 주며 위대했지만 틀린 스승과 그 어께에서 더 정확하게 세상을 바라본 제자 모두를 교과서에 실었다. 더욱 뛰어난 후학이 이 이론들을 모조리 뒤집기를 기대하면서.

논리에만 맞으면 하극상이 권장되고 또 당연한곳. 얼마든지 과거의 귄위가 뒤집힐 수 있는 그곳이 바로 학계이다.


사실, 민주정 역시 과거를 뒤집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단순하다. 국민투표를 거쳐 과거를 지우겠다 물어보면 그만이다. 결국 국가의 주인은 모든 국민이며, 기술적으로는 모든 살아있는 국민만의 손으로 이뤄지기에.

그러나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을 기리고 싶어하는것 역시 사실이다. 단적으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한 구절에 ”3·1운동과 4·19 혁명의 정신”이 등장하는 것을 보라.

다만, 이는 과거에 죽은 영혼 역시 우리의 국민으로 대우하고자 하는 문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남은 유족이 자신의 형제와 부모의 명예와 업적을 잃기 싫어서이거나. 그리고 이것들을 또다른 국민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정에서 과거를 뒤집는 수단에 대해 말하려면 단순히 체제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국가의 정신을 지배하는 문화까지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처롭게도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특정 종교가 압도적이지 않고 가톨릭, 개신교, 불교가 삼국지를 펼치면서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유교 신자들이 기저에 깔려있다.

이런 정신문화의 용광로속에서 안온했던 과거의 제도를 고쳐 격동하는 사회의 앞날을 대비하기란 극도로 어려울 것이다. 주인이라는 자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니까.

그리고 압도적이지 않은 지지를 받는 지도자는 그 민주주의적 정통성을 끊임없이 다른 국민들로부터 의심받을 것이며, 이는 인간사회의 강점인 협력의 의지를 희석시킬 것이다.


2000년동안 세상에 군림한 가톨릭처럼 설령 오류투성이일지라도 영원 불멸의 진리를 지향할 것이 아니라면, 정신에 대한 지배 뿐이 아닌 물질을 지배하는 권력을 누리려면, 현실에 맞게 선현조차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런 제도를 기반으로 과학은 2세기의 종묘만에 범지구적인 찬란한 물질세계를 일궈냈다. 산업혁명 이후 현세는 실로 ‘인류세’에 걸맞는 지구 환경 개변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남세균이라는 광합성에 의한 산소오염 즉 최초의 생물에 의한 환경오염에 비할 만 하다.

5000년동안 세계를 지배한 왕정을 거부하겠다면, 민주정은 자신에게 기생하는 혹은 자신의 숙주인 문화의 존재를 면밀히 파악하여 특유의 장점인 유연성을 벌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제도에 반영하여 종묘에게까지 적용시켜야 한다. 자신의 형제, 부모의 사상과 업적을 뒤집는것이 서로 인정되는 문화를 자신의 주인의 정신에 심어야 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왕정복고의 미래가 기다릴 것이다.


다가오는 현충일을 맞이하여 생각을 정리해봄.

모든 의견, 논박, 토론을 환영함.


또한, 이걸 여러분 글쓰기의 소재로 참고해주면 감개무량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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