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멍하니 내가 뽑은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회관의 문이 열리면서 무당처럼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무당은 내가 뽑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 용신님에게 바칠 재물을 이끌 행운아가 나타났다! 모두들 축배를 올리거라!!!!"


"뭘 꾸물거리는 거냐?!"


이상하게도 사내들은 이장과 무당의 말을 마치 왕이 명령을 하는 것 마냥 군말 없이 따랐다. 뭔가 기분이이상했다. 사내들은 나를 기숙사 건물까지 배웅해줬다. 나는 묘한 기분을 애써 부정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우중충한 탓일까. 나는 악몽을 하나 꿨다. 족히 몇백 명은 되어보이는 어린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어떤 수직굴에 스스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린아이들을 말리기 위해 뛰어갔지만 아무리 뛰어나고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중충한 하늘에선 엄청난 기세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나는 그 폭풍우에 그대로 휩쓸려 하늘로 날아갔고 나를 던져버린 폭풍우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검푸른 비늘들이 겹겹이 붙어있고 황금색 사슴뿔이 머리에 달려있는 '용'을 말이다.


"허억....!"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뭐지? 꿈이었나? 그래 꿈이다. 꿈일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문을 얼였는데 하늘은 꿈속처럼 우중충했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기분 좆 같아지네..."


화장실에거 몸에 찬물을 끼엏고 나왔는데 익숙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인도자님.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어제 나와 어깨가 부딪힌 그 여자애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어줬다. 


문을 열어보니 소연이가 아침밥상을 들고 서있었다. 그런데 어린애한테 이런 걸 시켜도 되는 건가?


"아침밥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안그래도 악몽을 꿔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운데 갑자기 나한테 소연이가 나를 자신들이 섬기는 신성한 존재를 대하는 것처럼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


"어, 그래 고마워...."


아침밥은 평범하게 찌개, 전, 야채, 고기였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먹기 싫었지만 저 고사리 손으로 아침밥상을 가져온 소연이의 성의를 봐서라도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내가 밥을 다 먹자 소연이는 나를 향해서 절을 한 번 한 다음 반 그릇들을 정리해서 가져갔다. 나는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밖을 나와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다.(절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를 섬까지 데려다준 사내들과 나와 함께 이 마을에 온 사람들도 있었다.)


"저기 용신님에게 선택받은 인도자분이 나오셨다!!!"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나한테 꽃을 뿌렸고 몇몇 여자들은 나와 입을 마추고 싶었다. 나는 기겁을 하며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왔다.


"저 사람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이 마을은 용신님을 숭배한다고. 그러니까 용신님에 바칠 재물을 이끌 인도자 역시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밖에."


허승준 아저씨가 소주를 들이키면서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깟 제비뽑기 좀 잘했다고 용신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고? 이 마을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지?


"자네가 오기 전에 인도자 역할을 했던 젊은이는 1년 전에 실종되어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슬퍼했어."


"저 말고 또 인도자가 있었어요?"


"그래. 다른 점이라면, 그 인도자는 자네와는 다르게 그 직위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썼다는 거지."

이름이.. 한승권이었나?"


그런데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풍겨오는 무언가가 내 시선에 들어왔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수직굴 하나가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심연을 연상시키는 저 수직굴은 보기만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야 이건?"


내가 더 자세히 볼려고 다가갔는데 허승준 아저씨가 내 뒷목을 잡았다. 나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는데 어자써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수직굴은 용신님이 살고 계시는 동굴이야. 함부로 들여다 봐서는 안 된다고."


나는 그토록 무서운 표정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별다른 반항 없이 뒤로 물러났다.


"몰라서 그랬어요. 몰라서..."


그런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이장님과 사내 여섯 명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 씨, 당장 이쪽으로 오게!"


나는 군말 없이 이장님을 따라갔다. 이장님의 일행은 나를 이장님의 집으로 보이는 으리으리한 저택 뒷마당으로 데려갔다.


"자 이걸 쓰게나."


이장님은 나에게 빵봉투처럼 생긴 복면을 건넸다. 자세히 보니 복면에는 붓으로 용신이라고 적혀있었다. 이장님을 따라온 사내 여섯 명도 똑같은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복면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이장님은 나에게 무당들이 입을 것 같은 화련한 옷을 입혔는데 거울을 보니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회초리가 허벅지를 때리는 소리가들려오고 훌쩍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저게 무슨 소리에요?"


"아, 최서호 씨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양이네."


"최서호가 누군데요?"


"이 마을의 무당일세."


그리고 몇 시간 뒤, 최서호라는 무당이 대충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쁘장하게 차려입은 소년, 소녀들을 이끌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저 어린아이들은 뭐예요?" 


하지만 무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붙잡고 강제로 끌고갔다. 사내들도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고 무당은 어린아이들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더니 어린아이들은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장은 나에게 어린아이들은 용신님이 잠들어있는 수직굴로 대리고 가라고 말했다.


나는 뭔가 불긴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장님에게서 풍겨오는 압박감이 더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들을 수직굴로 이끌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에게 꽃다발을 던지거나 나를 따라오는 어린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다.


뭐가 저리 즐거운 걸까? 


그렇기 몇 번이나 마을을 돌아다니자 수직굴에 다다랐다.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이제 어린아이들을 다시 돌려보내면 되는 건가?


그런데 수직굴에는 몇 분 전에는 보지 못한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느새 나를 따라온 이장님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린아이들 한테 저 밧줄을 타고 수직굴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게나. 저 애새끼들은 자네 말이라면 혀 깨물고 죽을테니까 말이야."


나는 이장님이 내뱉은 말을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미친 노인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머뭇거리자 이장은 한숨을 쉬더니 무당이 어린아이들에게 뭐라 말했다.


"뭐하고 있어? 당장 들어가!"


무당이 말하자 어린아이들은 마치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한 명 씩 줄을 서서 설치된 밧줄을 타고 수직굴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린아이들을 말리려고 했지만 사내 정 얼굴에 흉터가 나있는 사내가 손에 낫을 움켜쥐고 내 앞을 가로막자 나는 그 살벌한 분위기에 겁을 먹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아시겠어요?"


사내가 또박 또박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손으로 굵은 밧줄을 타고 수직굴을 네려가는 모습을 사내의 어깨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어린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수직굴 안으로 내려갔다. 가만히 서있는 나에게 무당이 걸어와 장작 패는 도끼를 건네주었다.


이덜로 뭘 하라는 거지? 나는 당혹감과 위하감을 동시에 느꼈다. 무당은 이내 새 손목을 잡고 수직굴 근처로 끌고갔다. 그리고 설치된 밧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무당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