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황혼'하고 제목만 같을 뿐, 사실 다른 내용이라 굳이 전편을 읽고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왕자의 황혼


600여 기의 기병이 들판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하거나 여유로웠다ㅡ나만 빼고. 난 그냥ㅡ후에 내 선임이 말하길ㅡ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쳐 자다 말고 생전 타보지도 않은 거대한 말에 올라타 어디나라 말인지도 모를 외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걸 발견한 사람한테 뭘 바라는가.


"어이 신입! 또 그 멍청한 표정이냐?" 


선임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저 새끼는 분명히 지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를거다.


"멍청한 김에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너 군인 맞냐? 지도 줬잖아 임마! 눈 쳐 뜨고 지도 봐!"


글씨를 못 읽는다는 말을 했다간 멍청한 놈 취급이 아니라 미친 놈 취급을 당할 것 같아 그만뒀다. 이 인간들이 준 지도는 어느 지역을 확대해 놓은 데다가 국경선이라고는 쥐뿔도 안 그어 놓은거라 지도 읽는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 뭐, 시키는대로 달리면 뭐가 있겠지.


"연대장님! 전방 30km 부근에 적군을 발견했습니다. 한 개 연대 규모의 보병입니다. 중화기 보유도 확인됐습니다!"


.....그게 적일 줄은 몰랐지. 젠장.


보고가 들어온 게 8시가 넘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일단은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후속 보고에서도 적 움직임은 없다고 했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 나는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후아암. 곧 바꿔 주겠네. 


"자네."


"예?"


계급장이 안보여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쨌든 나보단 높은 사람일거 같아서 대답해드렸다.


"내 하나만 묻고 싶은게 있네만."


"말씀하십쇼!"


"자네는 피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뭐야, 새벽갬성 터지는 아잰가.


"즐기겠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 고난이 있을 때 마다 피하면서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내 안의 흑염룡을 꺼내도록 하지.


"그런가..? 그러한가? 고맙네. 많은 도움이 되었어."


"아닙니다!"


흠. 그래도 꽤 멋진 아잰걸? 


"신참! 교대다!"


아싸! 들어가 잠이나 자야지.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잠이 덜 깬채로 누군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제군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2000명 가량의 적군을 조우했네. 곧 전투에 돌입하겠지. 수가 적은 우리 연대가 흐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선제공격이 필수라고, 본 지휘관은 판단했네. 이를 위해 연대를 4개의 중대로 재편하고 제 1, 2중대는 기마돌격을 가해 적 대열을 분쇄한다. 이후 흩어진 적들을 제 3중대가 돌격을 감행, 각개격파한다. 4중대는 보유한 중화기로 화력지원을 한다ㅡ 이것이 기본 골자네. 이의는 받지 않겠네."


미쳤냐? 기관총하고 대포를 앞에 두고 칼 빼들고 돌격한다고? 잠이 싹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썩어들어가는 나의 표정을 알아챈 모양인지, 연대장님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씀하셨다.


"어제 누가 본관에게 그러더군.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고. 오늘 그것을 실천해보려 하네. 마침 주변 풍광도 좋지 않나?"


아재가 왜 거기서 나와? 젠장. 어제 그 아재가 지휘관인줄 알았으면 그딴 소리 안했지. 주변 풍광이 좋긴 하네. 흐드러지게 해바라기가 피어있는게 나 죽으면 무덤하기 딱 좋겠구만.


"적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기에 말일세."


궁예세요?


주변 중대병력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전투 준비하는게 보였다.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죽기 싫은데. 


"전 중대원 승마!"


이제 디졌다.


"발검! 샤볼라 똑바로 쳐들어!"


누가 그랬던가. 황혼이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그 스스로를 태워 세상을 덮으려는 노력이 황홀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라고. 


"돌격! 이대로 적 중앙을 돌파한다!"


삶의 마지막에 서서 그 남은 삶을 모조리 태우기 때문이라고.


"사보이아!"


그리고 그제서야 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보이아!"


우리는 지상전의 왕자-기병 최후의 황혼을 함께한 이탈리아 최정예ㅡ


그 이름도 영광된 사보이 기병 연대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