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서쪽으로 기운 태양은-”

나는 ‘이연화’ 이라는 이름만을 알고 있는 여자 동급생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의 한 구절을 읽는 목소리를 들어 가며 국어 교과서의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밝은 빛을 땅에 비치며 생명에게 빛을 선물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찾아오기까지 한참은 남았을 4월임에도 나는 유달리 오늘의 날씨가-“

오후 수업의 첫 시간인 5교시는 국어 시간이었다. 식사를 한 직후인 데다 따뜻한 햇살이 밀려 들어와 졸음이 쏟아졌지만 교사에게 지적받고 싶지 않아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다다른 그 곳에는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 있었다. 나는 고양감을 느끼며 천천히 그 사람에게 걸어 가 말을 걸어 보았다.”

“좋아요. 이연화. 다음에 읽을 사람은...”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흑색 바지를 입고 회색 코트를 걸친 깔끔한 차림을 한, ‘이경훈’ 이라는 이름의 남자 국어 교사는 1학년 2반의 학생 명단을 훑어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서유현. 이어서 읽어 보세요.” 

“네.”

국어 교사는 글을 이어서 읽을 사람으로 나를 지목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전 ‘이연화’ 라는 아이가 읽다가 만 부분부터 글을 읽어 나갔다.

“따뜻하고, 밝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햇살을 닮은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나는 글을 읽으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가령 지금 내가 읽었던 ‘햇살을 닮은 사람’ 이 누구일지에 대해서나, 어째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4월임에도 햇빛을 덥다고 느꼈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지 못하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사람은 마침내 나에게 태연한 표정을 하며 답했다. “나는 당신을-”

햇살은 태양 빛을 의미한다. 태양은 스스로 내는 빛으로 식물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에게 빛을 선사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없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체감하지 못한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따뜻함을 이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도 그 사람에게 답을 전했다.”

햇빛이 없어진다면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얼어 죽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과, 앞으로 78억 년이 지나면 태양은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을 나는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때 지금까지 당연하게 느껴 왔던 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없어도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정말로 무서워했다. 게다가-

“잘 읽었어요. 서유현. 자리에 앉으세요.”

내가 책을 다 읽었다고 알려 주는 교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가끔씩 생각을 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도 생각을 더욱 깊게 하는 버릇이 있다. 딱히 일상 생활에 지장은 가지 않아 별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가끔씩 몰입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미 모를 고양감을 느끼고는 했다. 

“자, 다들 이 소설의 내용은 잘 들었죠? 방금 전의...”

교사는 이 소설에 사용된 문학적인 특징을 설명하며 칠판에 흰 분필로 글자와 선을 써 갔다.

반 아이들은 그에 따라 각자에 노트에 그 내용을 정리해 갔다. 나는 사각사각거리는 샤프 소리를 내며 노트에 교사가 정리하는 내용들을 필기하기 시작했다.

정갈한 글씨체로 난잡하지 않게 적절히 공간을 배치해 글자를 써 놓았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보다 필기를 해 둘때 더욱 성의를 들이는 편이었다. 

다음 교시는 영어, 한문이다. 오늘의 오후 수업은 전부 문학적인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단순히 시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누군가가 그 목적만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근거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번 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교실 안에 울렸다.

“그럼 다음 시간에 봐요. 모두 수고했어요.”

국어 교사는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교실을 나왔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자 억눌렀던 피로가 다시 몰려와 나는 책상에 엎드려 휴식을 취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욱 피곤함이 느껴진다. 방금 전 점심 시간에 소녀가 있는 서고에 다녀왔을 때부터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소녀가 나한테 질 나쁜 장난이라도 친 것일까. 하지만 난 소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나 무녀 같은 사람들처럼 영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없었기에 그 의문은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봄철이 되면 나른해지고 피로를 쉽게 느낀다는, 춘곤증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환경이 변화했을 때 몸이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라는 설명도 함께 떠올렸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학교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춘곤증이 찾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이 학교에 적응하면 이 증상도 사라질 것인데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책상에서 영어 교과서와 노트를 꺼내고 수업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1시간 50분만 참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졸음을 참기 시작한 직후 수업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방금까지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제자리에 돌아간 직후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드르륵, 하고 교실의 앞문이 열리며 영어 교사가 들어왔다. 깔끔한 양복과 교과서, 수업 자료를 든 ‘정선화’ 라는 이름의 여자 교사는 교탁 앞에 서서 우리들에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 아이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교사에게 인사를 했다. 나 또한 반 아이들처럼 교사에게 인사를 했다.

“자, 오늘 수업할 내용은...”

그리고 이내 교사는 교실에 달린 큰 모니터에 수업 자료를 띄워 놓고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교과서와 공책을 펴고, 반 아이들과 같이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는 누구도 수업 시간을 망치지 않는다. 누구도 친구와 수업 시간에 몰래 잡담을 하는 일은 없다. 조용하고 얌전하게, 어떠한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수업을 듣는다.

화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난이도의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그 난이도는 학교 밖의 사람들이 볼 때는 엄청나게 어려워 보이겠지만 나는 시험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그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스스로를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만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딱히 나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고 해도 이 학교와 다른 학교에도 나보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겸손한’ 태도로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뛰어난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금 전 국어 시간처럼 무의식적으로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고 있었다.

“자, 방금 전 나온 단어인 ‘mysterious’ 가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알고 있지요? 무슨 뜻인지 말해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항상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읽는 영어 단어장에 써진 ‘불가사의하다’ 라는 뜻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내 창가 쪽에 앉은, 방금 전 국어 시간에 소설을 읽은 ‘이연화’ 라는 이름의 갈색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일어났다. 물론 나는 이름을 제외한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불가사의하다, 라는 뜻이예요.”

“맞아요. 서희는 잘 맞춰 주었으니 이걸 줄게요.”

영어 교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의 책상으로 다가가 초콜릿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 놓았다. 아이는 살짝 미소 짓더니 그 초콜릿을 치마 주머니 안으로 집어 넣었다.

“방금 서희가 말한 것처럼, 이 단어는 ‘불가사의하다’ 라는 뜻 뿐만 아니라, ‘이해가 힘들다’, ‘신비롭다’, ‘말을 많이 하지 않다’, ‘비밀스럽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 뜻과 같은 다른 형태의 문장이나 단어로는 ‘pose a mystery’ 나, 문예체 형용사인 ‘sibylline’ 이 있지요.”

아이들은 그 내용을 노트에 적었다. 나 또한 교사가 이야기하는 내용들을 노트에 하나하나 정리해 가며 필기하고 있었다.

“이 단어를 문장에 넣어서 활용해 보자면, He had a ‘mysterious’ experience of seeing ghosts in an old library. 그는 오래된 서고에서 유령을 보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했다- 가 되죠.”

영어 교사는 ‘mysterious’ 와 ‘불가사의한’ 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순간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오래된 서고에서 유령을 보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했다.

혹시 영어 교사가 내가 겪은 일의 모든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 망상을 하기가 무섭게 내 이성이 발동해 망상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머릿속에서 빼내었다.

유령은 나에게만 보일 것이다. 그 소녀의 말에 의하면 날 볼 수 있는 인간은 오랫동안 없었다고 했으니 영어 교사가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을 확률은 낮다. 저 유령이라는 것은 그저 도시 전설에 흔하게 등장하는 것이니 수업의 이해가 쉽도록 넣었을 것이라고 나는 결론을 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망상이 가끔씩 튀어나오며 독백에는 마지노선이 없다. 나의 심각한 것 같기도 하지만 가벼운 결점이었다. 하던 일은 무의식적으로 지속하니 일상 생활에 지장은 없지만 조금 자제하고 싶었다.

평소에는 말 수가 그렇게 적으면서 혼자서 소리 없이 생각하는 독백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많은 것일까. 나도 참 별난 사람인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다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다른 문장으로 활용해 보자면, The ‘mysterious’ sight was hard to believe by sight. 그 ‘불가사의한’ 광경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라는 뜻이 되지요.”

그 이후로도 나는 방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독백을 자제해 가며 교사의 수업을 의식적으로 들어 가며 의식적으로 필기를 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끄집어내면 독백과 망상이 차지할 공간이 없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아 남은 수업 시간의 대부분을 독백과 망상 없이 끝내는 데 성공했다.

다시 수업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영어 교사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왔다.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고 다음 시간에 보도록 해요.”

다시 수업 시간의 분위기는 풀어지며 아이들은 각자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며 수다 소리와 여러 가지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교실을 둘러보았다. 다들 누군가의 책상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자신만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창가에 있는 내 자리의 서쪽에는 오후가 되면 햇빛이 비쳐 들어온다. 지금도 하늘은 변함없이 푸른 색을 유지하며 흰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태양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방금 전 영어 교사가 말한 그 말은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유령을 만난 내가 유령을 만났다는 내용의 글을 보고 들은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관여한 것일까.

물론 우연일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그래도 나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 소녀와 서고, 책의 제목과 영어 단어가 머릿속에서 뒤섞여 복잡해지자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책상에 엎드려 그저 오늘의 수업이 전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