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느냐에 따라 이 자취방에서 머무를 수 있을지 아닐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애초에 자식 집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외간 여자가 있다는 걸 순순히 믿는 어머니가 너무 관대한 것이다. 최소한 의심이라도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머니와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머니의 사람 좋음은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았다. 


뭐, 지금 이 상황에 처한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물론 현실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면 지금의 나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무단으로 자택을 침입한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자취방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여자의 말만 들으시고는 차 맛이 좋다는 둥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뭐가 그리 좋으신지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엿보였다. 처음 본 여자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말이다….


불초 아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어머니….


…아니지.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냐. 


나는 힐끔거리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뭔지 모를 기대가 가득해서 마주보고 있는 나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아, 이런. 눈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는 아예 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대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아이구, 아가씨 다시 봐도 참 이쁘구만. 어떻게 내 아들 녀석이 이렇게 참한 여자를 꼬셨을꼬?”

“아하하하하…….”


그래도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함함한다더니.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처음 보는 여자라는 사실을 신경쓸 새도 없이 마냥 좋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정작 아들은 복학 준비는 커녕 자취방에서 등골이나 빼먹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대학에서 여자친구를 사귄다니, 이만한 개소리도 없다. 대학교는 커녕 대학로도 안 나간지가 벌써 1년이 다 되가는데 무슨. 


애초에 연애도 접점이 있어야 가능성이 있는 법이다. 여자는 커녕 사람 자체를 안 만나는 인간이 어떻게 여자를 사귀겠는가. 


물론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어머니 앞에서 한 적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어머니한테는 자랑스런 자식이었다. 물론 실상은 반대였다. 실제 내 위치는 속된 말로 프로자식, 혹은 등골 브레이커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 자신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


…어쩌면 어머니 입장에서는 잘된 일인지도.


“저….”


여기서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 될지 생각해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머니와 대면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운을 뗐다.


“오…빠는, 학교에 볼 일이 있다고 잠깐 나갔어요.”


일단 어머니는 나를 1학년 새내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어머니의 오해를 충분히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오빠라고 얘기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는가봐?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도 내버려두고.”

“하하….”


여기서 공부한다고 바쁘다 노래를 불렀던 내 코스프레가 먹힐 줄은 몰랐다. 실제로 공부는 커녕 매일 롤 삼매경에 빠져있는 건 전혀 모르고 있을 어머니였다. 나는 마냥 웃기만 했다.


“뭐, 별 건 아니고. 반찬 좀 전해주려고 잠깐 들렀다 가려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우리 집에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호호, 미안해 학생. 아줌마가 너무 주책이지?”

“아, 아니에요.”

“그럼 여기 반찬 준비한 거 두고 갈게요. 아이고, 내가 좀 시간이 있을 때 왔으면 밥이라도 한 상 차려줬을 텐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그렇게 말하시더니 어머니는 가지고 온 종이봉투를 들고 방 한구석에 놓인 냉장고에 반찬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방이 작아 굳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도와야 말아야 하나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어머니가 냉장고를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


“얘는 뭘 먹고 사는지 원.”

“아, 그건 두시면 제가….”

“됐어. 나중에 아들이랑 같이 먹어요. 알겠죠?”

“네….”


정리를 마치고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어머니는 괜찮다면서 한사코 자리에 앉히시려고 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현관까지 어머니를 배웅했다.


“그럼 학생, 나중에 또 봐요?”

“안녕히 가세요.”


탕.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문을 닫았다. 나는 어머니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마 한동안 어머니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남자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아마 평생일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됐어. 일단은 잘 넘겼으니까.”


괜시리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고. 생각보다 훨씬 스무스하게 끝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 보면서 대화도 했고. 무엇보다 이제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들을 날은 한동안, 어쩌면 영영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내가 꿈꿔왔던 독립이 아닌가? 이젠 눈치 안 보고 탱자탱자 놀 수 있다고! 


난 이제 자유야! 자유라고! 야, 신난다!


띠리리리.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적막한 방을 울렸다. 세 번 정도 울린 뒤에야 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액정에 ‘엄마’라는 표시가 보였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아들 목소리라도 들어보자는 심정에서 거신 모양이지.


“…….”


벨소리가 끊기기 전까지 나는 핸드폰을 부서져라 꽉 쥐고만 있었다. 여자인 내가 받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도 당연히 변했으니까. 이제 어머니가 아끼시는 자랑스런 아들은 없었다. 아홉 번 정도 울린 뒤에야 전화는 끊겼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나기는 개뿔.


정말, 엄청나게 우울했다.







마음 같아서는 우울에 빠져 하루 종일 이불 안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아마 또 다른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10분 뒤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온 전화를 받았을 때 내 우울함이 분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룰루에요!”


1년 365일을 롤에 빠져 사는 인간이라면 그 대사를 잊을 리가 없겠지. 하물며 그 대사가 실제 게임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완벽하게 똑같다면 말이다.


“야, 이 개 시ㅂ….”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욕이 튀어나왔다. 


거의 본능적인 내 발작에도 굴하지 않고 룰루는 멋대로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룰루에게 욕을 한창 퍼붓느라 전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한참 욕을 하는 동안 룰루도 멋대로 자기 할 말을 내뱉었다. 겨우 이성을 끈을 붙잡은 내가 들은 것은 마지막 몇 마디 뿐이었다.


“그래서 거기 화장실 지갑에 카드 넣어뒀거든? 민증도 뒀으니 알아서 잘 지내보라고. 아, 카드에는 충분히 돈 넣어 놨으니까 말이야. 그럼 이만~.”

“뭐? 야, 이 미친년아. 지금 뭐라고 하는…!”


뚜-. 뚜-.


내가 더 욕을 퍼붓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는 공허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번 더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그래도 60만원이나 주고 산 핸드폰인데.


“허.”


…이 상황에서도 결국 돈 타령이라니.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한 건지 깨달았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능하게 한 녀석에게 내가 무슨 반항을 한단 말인가. 적어도 제대로 이야기는 들었어야 했다. 헛웃음은 병신 같은 나를 향한 자조였다. 


당장이라도 다시 걸고 싶었지만 당연히 발신번호까지 제한된 번호에 다시 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카드가 어쩌고 했지.”


내가 가진 카드라곤 농X 체크카드 하나 뿐이다. 화장실에서 뻗어있을 때 떨어져있던 지갑 안에 있던 그 카드였다. 아마 여자로 변한 내 민증과 나란히 준비해뒀을 심산이 컸다. 


그렇다면 그 카드도 아마 여자 강수진 소유의 카드라는 확률이 높은데….


일단 언제까지고 여기에 죽치고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나가야 했다. 나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안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경우를 상상해 보자. 


일단 배 째라 이 방에서 틀어박혀 있다가는 연락되지 않는 아들 걱정에 애가 탄 어머니가 다시 이 방을 방문하실 것이다. 그리고 방구석에서 여자의 몸을 만끽하던 나는 가택을 무단으로 침입한 죄와 여자친구를 사칭한 죄(어쩌면 음란죄까지도)가 밝혀져 쇠창살에 들어갈 터. 쇠창살에서 아동성애자인 노숙자와 끔찍한 하룻밤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후 고아라는 신분(아마 고아일 터)이 밝혀지고 어딘가의 소년원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녀라는 가녀린 몸의 내가 거친 소년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갱ㅂ….


음.

어쨰 망가 시츄에이션밖에 안 떠오르는군.


망가를 많이 본다고 현실에서 그런 걸 겪고 싶을 만큼 망가진 인간은 아니지만…그리고 실제로 소년원에서 미성년자들끼리 섹X파티가 벌어질 리는 없을 터이지만….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소년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애초에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거길 왜 가! 난 여자로 변한 게 다라고! 나는 그냥 방구석에서 딸치는 걸로 만족할 뿐인 선량하고 소시민적인 방구석폐인이란 말이다!


아무튼 내가 방구석에서 밍기적거리게 된다면 이후 유쾌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츄리닝에 적당한 자켓을 하나 걸친 채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춥네…."


가을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민증과 카드는 당연히 챙겼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남겨진 것들을 조사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히리라. 애초에 남은 것에 매달리는 거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떠나기 전 나는 나온 집을 한 번 뒤돌아 보았다. 

이제 이 집에 돌아올 일은 없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는 정도는 해 두고 싶었다. 10초 정도 응시한 뒤 나는 시원하게 뒤돌아섰다. 그게 끝이었다. 그게 내 나름대로의 작별인사였다.


"카드 번호는 똑같겠지….“


딱히 혼잣말을 하는 습관은 없었지만 여자로 변한 뒤에는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됐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확 바뀌니 현실감이 영 없었던 탓이었다. 익숙해지고자 습관적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 목소리지만 솔직히 기분 좋은 여자 목소리이기도 하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는 게 바로 이런 거겠지.


정말 여자가 됐구나. 


생각보다 추위를 느끼는 몸을 사리고, 목소리를 듣고, 그리고 집을 나선 뒤에야 나는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으음….”


문득 고개를 숙여 가슴을 바라보았다. 


여자 치고는 조금 납작하지 않을까 싶은, 하지만 남자라기에는 충분히 튀어나온 봉긋한 가슴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여자로 변하고 가슴 한 번 안 만져봤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격렬하게 가슴을 주무르고 싶어졌다.


“……그만두자.”


아무리 집 앞이라고는 해도 밖에서 주물거릴 수는 없지. 그리고 내 가슴을 주무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질까봐 무섭다. 그건 여자를 떠나서 인간으로써 격이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나는 편의점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집은 대학로는 커녕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조용한 동네였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여자로 변했기 때문인지 괜히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작 여자로 변했다고 길을 걷는 게 이렇게 느낌이 확 달라질 줄이야. 괜스레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딸랑.


“어서 오세요.”


5분 거리의 편의점을 들어오자 알바가 인사했다. 고개만 끄덕이고 곧바로 ATM기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은 듯했다. 계좌조회와 비밀번호를 누른 뒤 나는 잠시 기다렸다. 룰루 그 년이 얘기한 이 곳에 어떤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금액과 관련된 번호 자체가 남자로 돌아오는 힌트라던가. 그 때의 나는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0이 열 개가 넘는 돈이 찍혀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이 말이다.


“어어어어억?!”


10,000,000,000.


3개의 숨표와 하나의 마침표와 열 개의 0과 하나의 1.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다리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