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인평(仁平) 12년 신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신라군 이찬 아래에서 싸우던 병사 한 명이 고구려군 포로 수십명을 데리고 산 길을 걸어, 신라 땅 안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깊은 산 속에서 밤이 저물었으므로, 신라 병사는 모닥불을 피워서 몸을 덥히면서 산 속에서 자고 가기로 하였다.

밤이 깊어 먼데서 산짐승 소리가 들려오고, 올빼미, 부엉이 소리가 달빛을 가르고 느릿느릿 울려퍼지는 것이 수천번 수만번씩이니, 신라 병사는 두렵기도 하고 잠자리고 춥고 불편하기도 하여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깊은 밤 중에, 신라 병사가 누운 곳으로 문득 자갈돌 조각이 툭툭 떨어졌다. 신라 병사는 누가 자갈돌을 자기 얼굴에 던지는 듯 하여 아팠으므로,

"어떤 놈이냐?"

하며, 화를 내며 자갈돌을 던진 사람을 찾으려 하였다.

신라 병사가 보니, 밧줄에 묶인 채로 자고 있는 고구려군 포로들 사이에 병사 하나가 깨어 있는데, 그 고구려 병사가 발끝으로 자갈돌을 차서 신라 병사를 맞히고 있는 것이었다.

신라 병사가 말하기를,

"네 놈이 죽고 싶은 것이냐? 포로로서 이끌고 가는 병사를 해치려고 하면, 당장 목을 베어도 법에 어긋남이 없으니, 너또한 돌로 나를 해치려 하였으므로 내가 지금 너를 죽여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랬더니, 고구려 병사가 이렇게 답하였다.

"내 목을 자르면 목이 없어질 것이니 당연히 말을 하지 못하겠거니와, 지금 내가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대를 긴히 부르려고 돌을 던진 것이오. 그러니, 내 말을 들어보오."

신라 병사가 의아해 하여 다가 갔다. 그리고 엄히 말하였다.

"간교한 말로 나를 속이고 도망치려 해보아야 이 깊은 산 속에서 밤중에 뛰다가 호랑이 밥이 될 뿐이다."

그러니, 고구려 병사가 웃으면서,

"그럴리가 있겠소? 이제 지금 내가 발에 신고 있는 신발을 벗겨 보시오."

하였다.

신라 병사가 이상하게 여기고 가지고 있는 칼 끝으로 살짝 건드려 신발을 벗겼다. 벗겨보니 그 안에서 은으로된 팔찌 하나가 나왔다. 신라 병사가 신기하게 여기고 은팔찌를 집어 들자, 고구려 병사가 다시 말하였다.

"그것은 이제 그대의 것이오. 가지시오. 지금 나를 풀어주어 다시 도망가서 고구려로 가게 해 준다면, 더 많은 갖은 보물들을 그대에게 줄 것이오."

신라 병사는 은팔찌와 고구려 병사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물었다.

"속임수를 쓰는 것 아니냐? 내가 네 놈을 어찌 믿고 함부로 적병을 풀어 주리오?"

그러니 고구려 병사가 답하기를,

"지금 그 은팔찌가 묵직하니 벌써 이것이 그대가 나를 믿을 까닭이 되질 않소? 지금 나를 데리고 천리길을 걸어 대장군 앞까지 이끌고 간다한들, 잡병 졸개 포로 몇 명을 잘 데려 왔다고 하여 무슨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해주겠소?

그러나, 지금 이미 그대는 나 덕분에 일년치 밥값을 벌었으며, 나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 보다 더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신라 병사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였다. 그러더니, 고구려 병사의 손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 말하였다.

"내가 지금 너의 손을 꽁꽁 묶어 놓았으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도망간 후에 이빨로 물어 뜯고 끈을 잡아 당겨 줄을 풀도록 하라. 지금 너를 그냥 풀어주면, 네 놈이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뺏아 들고 설칠지 모르니, 이렇게 손을 못쓰게 한 뒤에 움직일 수만 있게 해 주마."

고구려 병사는 그 말을 듣고,

"고맙소."

하였다.

신라 병사는 고구려 병사의 손을 묶다 말고,

"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슨 병졸이기에 이와 같이 값진 물건을 갖고 있느냐? 너는 보통 병졸이 아닌 것은 아니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고구려 병사는

"병졸이면 어떠하고 내가 고구려 장군이면 어떠하고, 혹은 고구려 임금이라 하면 어떠하겠소? 어차피 나는 내가 가진 것을 그대에게 다 줄터이니, 그대는 괜히 이것저것 알아서 마음을 괴롭게하고 머리를 어지럽히지 마시고, 그저 멀리 알 것 없이 나를 풀어주시오.

나 또한 그대와 같이 처자식이 있어서, 애타는 마음으로 집에서 기다리며, 밤마다 달과 별을 보고 오늘은 싸움터에서 죽지 않았는지, 내일은 고되고 힘겨워하는 모습일망정 집으로 돌아와 싸리문을 열고 '나왔소'하고 나타나지는 않을지 끊임 없이 가슴을 아파하며 밤을 지새우지 않겠소? 내가 누구라 한들, 어찌되었건 지금 그대에게 부탁하여 돌아가려 하는 까닭은 그것 뿐이니, 그대는 그저 어떤 군사가 있어서 집에 가고 싶어서 빌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더는 묻지 마시오."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신라 병사는 밧줄을 묶던 것을 멈추었다. 신라 병사는 다시 아무 말 하지 않고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문득 구름에 가리어져 있던 달이 구름 사이로 나타나, 달빛이 환히 비치었다. 그러자, 눈물이 글썽글썽한 고구려 병사의 얼굴이 보였으며, 또한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팔찌가 보였다. 이에, 신라 병사는 다시 고구려 병사의 손을 묶고, 몸을 풀어 주었다.

고구려 병사는 도망가면서,

"해가 질 때에 내가 앉았던 자리 안에 보물들을 묻어 두었으니, 그대는 그 흙을 파보면 되오."

하고는, 깜깜하기만한 수풀사이로 걸어 내려갔으니, 다만 너댓걸음을 걸어가는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알 수 없게 되었다.

신라 병사는 고구려 병사가 말한 곳을 파보았다. 파보니, 과연 여러 금은붙이와 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여럿 있었다.

신라 병사가 성으로 돌아가, 포로들을 돌려 보내자, 신라의 장군은 있어야 할 포로가 하나 보이지 않는다면서 안절부절하였다. 장군은 신라 병사를 계속 다그치며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캐 물었다. 신라 병사는 땀을 뻘뻘흘리며 이리저리 둘러대느라 괴로워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빌며 말하였다.

"장군, 저는 시골에서 소먹일 풀이나 베고 다니는 무식한 자로, 겨우 잡병입니다. 천리길 몇십명 포로를 끌고 오는 사이에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잘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제가 멍청하게 일을 하여 잘못한 일이 있을 것이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비록 재주는 이와 같이 비루하나, 오직 장군만을 따르고 믿고 섬기는 마음은 깊고도 또한 높습니다. 이러한 제 마음은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제가 모시는 장군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는 신라 병사는 고구려 병사에게 받았던 보물 중에 가장 좋은 것 서너가지를 숨겨 놓고, 나머지를 꺼내어 장군에게 바쳤다. 그러자, 장군은 고심하다가 그것을 받아 챙기고 신라 병사를 풀어 주었다.

신라 병사가 장군에게 바친 것들 중에는 두루마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두루마리의 주인이었던 고구려 병사가 무엇을 하는 누구였는지, 장군이 애초에 무엇 때문에 포로들 사이에 어떤 병사가 있는지 애써 찾아 보았는지는, 이후로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장군의 손에 들어온 두루마리는 널리 알려졌다. 장군은 이것을 무척 자랑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두루마리는 비단에 황금을 녹인 물로 글씨를 쓴 것이었는데, 황금으로된 글씨가 기이한 모양이 있어서, 무릇 한 번 재미난 구경거리로 볼만한 모양이 있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 두루마리에 쓰인 이야기가 퍼져 나가서 지금껏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 눈을 감는다.

너는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숫자를 헤아리며, 이런저런 것을 떠올려 보기 시작한다.

너는 이제 하늘과 땅의 모양과 멀리 붙어 있는 별들의 빛깔과 비치는 모양에서만 잠깐씩 보았던 네 스스로의 얼굴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나 너는 하나, 둘, 셋을 눈을 감고 헤아리는 사이에, 문득 주위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너는 주위가 깜깜한 것을 안다. 처음에 너는 이것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네가 깊고 어두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다시 둘러본 즉, 너는 자신이 어느 돌로 지어 놓은 어둡고 깊은 굴과 같은 곳 속에 와 있는 것을 깨닫는다.

굴의 입구에는 무겁고 큰 돌문이 있는데, 돌문을 닫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너는 놀라서 그 사람들에게 뛰어가서 묻는다.

"이 곳은 어디이며, 왜 제가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고구려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너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지, 그저 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너는 당황하여 일단 돌문을 비집고 이 굴 속을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고구려 사람들은 너를 막고, 너를 밀쳐서 굴속에 가두어 놓으려 한다. 저 바깥에 있는 하얀 옷을 입고 길게 솟은 고깔 모자를 쓴 사람 한 명이 너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고구려 사람이 아니고, 옷차림과 말투도 이상하니, 필시 어느 외국의 사람일 것이라. 아마도 왜국에서 흘러들어온 자가 아니겠는가?

그대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바라는 사람인지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스스로 이 깊은 곳에서 홀로 머물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오직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갈고 닦을 것이라고 하였다. 너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비록 네가 마음을 바꿔 먹고 갑자기 굴 속에서 나오려고 해도, 결코 보내주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였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와서 마음을 고쳐 먹는다하여도 돌아갈 수는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