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불안감

1. J-프롤로그

2. 동명이인 비슷한

3. H-프롤로그

4. 흔한 이능력 배틀물

5. 기숙사 비스무리

6. D-프롤로그

7. 암살

8. 주머니에 손 넣고

9. 도전


그런 느낌이 있다. 뭔가 나 혼자 괜히 도망쳐야 된다는 느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나의 생명을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사실 아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렇다. 나는 지금 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드러누워 있다. 아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려는 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완벽한 은신이 아닌 건 알고 있다. 동물들의 냄새를 속이는 건 할 수 있지만, 이런 것까지 탐지할 수 있는 초능력이 없다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도 기어의 복장 정도는 알고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 적어도 늦지 않게 꼬리 말고 도망칠 수는 있다. 사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예 나를 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며칠 전에 그런 신문기사를 보았다.


"체인 내의 신입 조직원이 사망했다. 사인은 복부의 자상에 의한 과다출혈 및 쇼크로, 체인 조직끼리의 불화나 다툼이 주요 원인으로 추측된다."


내용만 보고도 내가 그 때 있었을 때 일어난 사건인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것, 아니, 제대로 조사할 마음도 없는 것도 알 수 있다. 웬만한 꼴통자식이 아니면 조직끼리의 불화나 다툼이 일단 있을 수 없는 경우니까.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에게 체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놈이라고 믿게 세뇌시키려는 의도만 다분한 기사다. 사실 틀린 것도 없나. 어쨋든 나도 누가 더 나쁘냐만 따지면 체인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니까.


그나저나 이 신문기사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다. 기어 놈들이라면 이렇게 기사로는 구라를 쳐놓고 어디서 함정수사를 펼칠지 모르는 작자들이니까.

어쨋거나 언론을 장악했다는 건 꽤 무서우니까.


하지만 진짜 걱정이 되는 건 체인 쪽이다. 체인 쪽에서는 이런 논지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일리가 없다. 기어와 사사건건 마찰을 일으키는 놈들이고, 이번에는 명백히 기어가 사건을 유기한 거니까, 조직원들이 아예 이를 갈듯이 범인을 색출해낼 거다. 게다가 범인이 확정되고 나면, 경찰이 하는 법적인 처벌보다 가혹한 처벌을 하겠지. 또 사건에 대한 조사도 물불 안 가릴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아마 나도 수사망에 오르겠지. 최초 신고자는 그 술주정뱅이지만, 그 사람을 면밀히 조사하다보면 내가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최초발견자가 의심을 사게 마련이니까. 그 상황 역시 주정뱅이가 보기엔 내가 죽였다고 충분히 착각할 법한 상황이기도 하고(실제로도 한 명은 내가 죽였으니까). 그렇다고 자수를 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사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조직원을 죽인 사람은 제가 죽였고, 일단 맨홀 뚜껑을 열이 밑의 하수도에 유기해 놨어요. 라고 말해서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게다가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만약 진짜로 조직원간의 불화라서 내가 죽인 사람마저 조직원인 거라면, 괜히 나만 멍청한 짓만 한 거다. 후폭풍도 적어도 몇 년은 갈거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 산의 밑에 누군가 와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를 찾으려는 사람인지 아닌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발견하게 되면 성가신 일이니, 사람이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어야겠다. 산을 내려오면서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이제 슬슬 일몰때가 되었고, 해는 바위산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벌레는 몇마리 기어다녔다. 흙은 밟을 때마다 살짝 으스러지나 싶더니 금세 단단하게 굳어진다.


예쁘다. 가능하다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게 제일이니까. 그 전에 기어와 체인에게 걸리지 않도록, 그 둘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과연 내가 수사망에 올랐을까 하는 것 말이다. 양쪽에게 들키지 않고 양쪽의 정보를 입수하는 건 꽤 곤란한 일이고, 한 번도 시도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성공한 적도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사실 이런 발상도 방금 해낸 거고 어떻게 할지도 감이 제대로 오지 않지만. 그나마 가장 접근성이 높은 건 신문을 읽는 거지만, 그것 갖고는 체인의 동향까지 알기는 힘들다. 그러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란 게 또 있어야 말이지. 소싯적에 친구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다 죽은지 오래됐으니. 이 참에 새로운 친구라도 사귀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산은 금방 내려왔다. 아무래도 산 밑에 있던 사람은 나한테 용무가 있던 게 아니라 그냥 등산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 일단 아까 생각하던 거에 이어서, 정보를 얻으러 다니는 게 낫겠다. 일단 사람이 많으면서도 적당히 한적한 곳으로, 은근히 가난하면서 거리는 또 활발한 그런 모순적인 장소가 제격이다. 그리고 기막힌 우연으로, 산을 내려오자마자 그런 장소를 찾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어떤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걸 훔쳐들을 수 있었다.


"야, 너 그 신문 기사 읽었니."

"아, 그 쪽에서 낸 거 읽었지. 뭐 믿지는 않지만."

"그걸 누가 믿는대. 속일려면 좀 기사를 믿게 속이던가. 저렇게 쓰면 우리 엿먹으라는 거 밖에 더 되나.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치. 그치."


처음엔 이렇게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쪽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 그 이야기 들었나. 이 사건 때문에 탐정 고용했다더라."


여기부터는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 좀 더 귀를 기울였다.

"그래. 고용해야지.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

"아니. 나도 만나본 적은 없는데. 근데 위에서 하는 말로는 옛날에 경찰이었던 적이 있었다더라."

"그럼 배신하고 체인에 붙은 거야?"


"아니, 그것도 아닌가봐. 그렇다고 해서 아직 경찰과 친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무슨 사건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경찰과 척을 졌다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우리 쪽으로 오지는 않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탐정일은 한다더라."

"아,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저번에 그 여자랑 똑같은 사람 아니야?"

"여자? 너 만난 적 있어?"


나는 거기까지 듣고 자리를 떳다.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긍정적인 정보는 아니었다. 그 체인 조직이 탐정을 고용했으니 이 사건은 그 사람에게 전권 위임할 그런 조직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실이 말단들에게까지 알려지면 서로 질세라 범인 추격전을 벌이겠지. 게다가 그 탐정까지 가세한다. 탐정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도 못하니 대비를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 수 없다. 여자라는 것 까지 알고, 체인 조직원도 일부는 아는 눈치였지만, 알아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무튼간에 탐정의 미행이라니, 사자 앞에 이빨을 드러내는 꼴이나 다른 게 없다. 머리가 가렵지는 않았지만 벅벅 긁었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탐정 양반이나 다른 사람이 나를 조사할 때에 대비해 거짓말이나 준비할까. 그 술취한 사람이 불었을 때 나름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그 때, 저 멀리서 한 사람이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여자였다. 불안한 느낌. 괜히 조바심이 들었다. 마치 방금 이야기를 들은 것 때문에 저 사람이 탐정으로 보이는 그런 불안함. 하지만 아닐 것이다. 탐정이 저렇게 눈에 띄게 행동한다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뭐,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다. 사실 눈이 마주쳤는지도 모른다. 그럴 정도로 멀리 있었으니까. 그대로 성격이 더러운 사람에게 걸려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만 아니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열 번은 넘게 벌어지는 작은 해프닝이니까.


"저기, 잠깐 시간 되나요."

"꺅."

그런데 여자는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초능력을 쓴 건지, 순간이동이나 다름없는 속도였다.


"갑자기 다가오면 놀라잖아요."

말은 최대한 조용하게 했지만 진짜로 놀라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오죽하면 온 몸의 반사신경 때문에 몇 걸음 물러났을까.


"아, 그건 죄송해요."

여자는 웃었지만, 아무래도 그 웃음은 어딘가 어색해보였다. 한 번 훑어보았지만, 아까 멀리 있을 때 들고 있던 종이는 더 보이지 않았다. 당환한 눈치도 없는걸 보니 아마 일부러 숨겨놓은 것 같다.


"왜요."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럴 듯한 증거는 없고 억측에 가깝지만, 나는 이 사람이 탐정일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뭔가 좀 달라보인다는 인상은 가끔 느끼지만, 그걸로 말을 걸 정도는 아니다. 그 사건 외에 나에게 질문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낙관적인 예측일 거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요."

 큰일이다. 아직 그럴듯한 핑계나 거짓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몰래 죽여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순간이동할 수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혹시 체인에 소속된 사람인가요."

갑자기 이상한 일을 물어봤다. 그래도 넘어가면 안된다. 처음에는 아무 관련 없는 질문을 하다가 나중에 사건과 연관되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질 셈일 수도.


"네?"

"아,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들킬 위험이 높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낫다. 사실대로 말했다.


"네, 알겠어요."

그녀는 나를 계속 쳐다봤다. 혹시 독심술을 가지고 있을까도 생각했지만 일단 순간이동 비슷한 걸 했으니 그 가능성은 지워도 될까. 물론 초능력이 한 가지 뿐일거라고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까지 가정하기엔 생각할 게 많다.


"그럼, 이름 알 수 있을까요?"

왜 갑자기 이름을 묻지. 게다가 더 할 말이 없던 건, 나는 이름이 없었다. 저번에 쓴 적이 있는 이름은 쓰지 못한다. 행정적인 무언가에 갈고리가 엮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걸리지 않을 괴상한 이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름, 설마 없나요."

"디요."


"네?"

"영어로 디(D)."

순간적으로 말했는데, 결국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디 호적에 적히지 않겠지. 설마 가명이냐고, 본명이 뭐냐고 물어보진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진짜 이름 따위 멋 옛날에 잊어버렸으니까.


"뭐,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마치 내 속을 다 읽고 속아주겠다는 얼굴을 했다. 괜한 자존심 때문에 기분이 살짝 상하긴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한다. 속아준다면 그보다 고마울 일은 없다.


"그럼, 가볼게요."

그대로 여자는 떠나갔다. 사라질 때도 나타날 때와 비슷하게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갔다. 아무래도 순간이동이나, 비슷한 종류의 힘이다. 아니면 염력이 그 정도로 강한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그 정도까지 가려면 힘에 제한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 말 그대로 세계 정복도 불가능하지 않은 정도의 힘이기 때문에. 그나저나, 그 여자는 왜 나한테 접근한 거지. 탐정인지도 지금 와서는 애매하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순문학은 많이 써봤으나 이런 류의 소설은 어디다 감평받을 기회도 별로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