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불안감

1. J-프롤로그

2. 동명이인 비슷한

3. H-프롤로그

4. 흔한 이능력 배틀물


나는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사실 내 지능은 생각보다 낮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실수 했네요."

한번 더 몸이 휘청거렸다. 몇 푼 더 아끼겠다고 왜 생명을 담보로 맡았을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위험성이었다. 쥘은 처음부터 자기 나이를 밝혔다. 따로 재수나 그런 것 없이 정규 교육을 마치고 바로 대학으로 들어간 나이다. 그러면 운전 면허를 아무리 빨리 땄다고 해도 일 년은 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국제 운전 면허는 두 달 전에 땄다고 하고. 또 심지어 쥘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 제 인생 첫 운전 날이라서, 좀 휘청거려도 이해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5분 내로 가드레일에 4번 박을 뻔 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자기 차도 아닌 렌트카를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한 걸까.


"오,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요."

내가 볼 땐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지 지금 도로가 차도 막히고 직선도로라서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뿐이다.


"저 좀 잘하지 않아요? 처음 치고는."

설령 운전을 못해도 자기가 못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크게 상관이 없다. 쥘의 진짜 문제는 자기 정도면 경험에 비해 재능이 엄청 높다고 착각하고 있는 점이다.


"차가 막히는 게 좀 아쉽네요.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쌩쌩 달리고 싶은데."


게다가 성격까지 과격하다. 나중에 경찰이랑 추격씬을 벌이다가 잡히면 왜 도망쳤냐는 질문에 재미있으니까, 라고 대답할 것 같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런 게 오면 순순히 잡혀야죠."


아니 지금 운전에 집중해야 되는 사람이 남의 생각 읽는 여유가 되는 모양이다.

"아니 지금은 진짜 괜찮아요. 차 엄청 막히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집중한다고 해서 속도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아 면허 없으시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요."


이번에는 농담까지 해댄다. 하지만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말 집중할 필요가 없다면, 그것도 문제다.


"이제 슬슬 이야기해 볼까요. 기숙사 어디다 구하셨어요? 대학교 내부에서 직접 기숙사를 주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거 같고."

쥘은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냥 사람 북적거리는 지하철 역에 내려주면 알아서 갈게요."


라고 처음부터 말했지만 쥘은 그런 부탁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든 내 기숙사를 찾아 휴일에 놀러오려는 악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쨋든, 아까 절 도와주기까지 했는데 그런 식으로 버리고 떠날 수는 없죠. 최대한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줘야지. 훌리오씨가 아니었으면 전 진짜 말 그대로 묵살발이 나서 거기 있던 쓰러진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되었을거라고요."


솔직히 나를 그냥 냅두는 것이 최대한 도와주는 것이지만, 쥘은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가 먼저 어느 곳에 집을 잡았는지 알려드릴게요. 저는 앙방이라는 기숙사? 기숙사라기 보다는 도미토리라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거기서 4년짜리 예약을 잡아놨어요."


"네?"

하늘이 떨어지도록 불길하게도, 나는 앙방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것도 비교적 최근 몇 달까지. 바로 내가 숙박하기로 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 진짜, 미치겠네."

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쥘이랑 같은 대학교에 같은 학과를 다닌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끝나지 않고 기숙사까지 같다는 건, 만약 운명의 신이 있다면 상당한 미움을 샀나 보다.


"와 진짜 대박."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멋대로 읽는 쥘이니, 숨기고 모른척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이 정도면 진짜 하늘이 친구 먹으라고 맺어주는 거 아니에요? 아예 지금부터 말 놓을까요?"


난 그런 걸 다 받아줄 능력이 없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으로 쥘이 떠들게 놔뒀다. 이런 일을 4년동안 계속 할 리는 없겠지. 학교에 나보다 유쾌하고 활발한 친구들은 많을 거니까, 그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나랑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으로 옮겨야겠다. 그래도 소용이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표지만.


"진짜 제 차 타고 오길 잘 했네요 아무튼. 기숙사까지 금방 가잖아요."

"앞에 안 봐요?"


어느새 차는 뚫려 있었나 싶었더니, 교통체증이 해소된 게 아니라 아예 중앙선을 넘어서 달리고 있었다. 진짜 죽을 뻔 했다. 자기 차 타고 오길 잘했다고? 엿이나 먹어라.


"아 왜 넘어갈 수 있게 해 놓은 거야. 중앙선에다가도 가드레일을 설치했어야지."


내가 볼 땐 중앙선에 가드레일을 설치하는 것보다, 이런 놈에게 대학 입학 자격이랑 국제 운전 면허증을 주는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게 더 급하다. 다행히 중앙선을 돌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차는 원래대로 되돌려서 경찰이 오지는 않았지만, 잡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어쨋든, 네비게이션에 따르면 조금만 있으면 차 막히는 곳은 뚫리니까 좀 즐기죠."


그냥 다 포기하고 롤러코스터 타러 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나. 좋은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다.

.

"와, 도착이다."

도착했다. 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었다. 죽을 만큼 위험한 고난을 몇 번이고 헤쳐나왔다.


"다시는 당신이 운전하는 차는 안 탈 거에요."

나는 대놓고 그런 식으로 말했다. 쥘은 그래도 만족했는지 상관없다고 웃었다.

"제가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스릴을 즐기지 않는다면 좀 힘들긴 해요."


이건 스릴을 즐기고 어쩌고 이전의 안전 문제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가 아무리 끝내준다 해도 안전벨트 없이 타려는 사람은 없을 거다. 얘 빼고.


"그럼 전 주차하고 있을 테니까 먼저 들어가실래요? 할 수 있으면 제 꺼 까지 해주면 좋고요."


나는 차에 내려서 건물과, 내가 들고 있는 예약 증서를 번갈아가면서 봤다. 듣기로는, 이걸 기숙사라고 해야 하나. 원래는 평범한 원룸 방이지만, 딱 3층 한 층, 5개의 호실만 대학 손님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걸 구태여 신경쓸 필요는 없다. 니는 짐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짐이라고 해봐야 여벌옷이랑 세면도구가 들어있는 캐리어, 종이가방이 전부다. 3층에 올라가자마자 복도에 책상이 하나 있었고, 한 노인이 그 책상에 앉아 있었다. 미리 지금 쯤 오겠다고 연락을 했었으니 지배인이 미리 마중나와있는 거겠지.


"안녕하세요. 훌리오 박이에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탓인지 내 이름을 듣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예약 종이 있나. 그거 출력해서 갖고 오라고 하는 그거."


설마 그걸 안 갖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꼭 출력해서 갖고와야 한다고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던데.

"여기 있어요."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스마트폰과 나, 그리고 종이를 번갈아가면서 봤다. 적어도 사진은 평범하게 찍었고, 혹시 몰라서 그 때랑 같은 옷까지 입고 왔다.


"일단 오케이."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한테 열쇠를 건네줬다.

"서로 친하게 지내."

주인은 내가 열쇠를 확인하기도 전에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이미 두명 와 있으니까, 세세한 건 직접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더 좋을까 해서."

"아, 네."


그 때, 저 밑에서 누가 힘겹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아까 렌트카 트렁크에 짐을 넣을 때부터 고생을 하던데. 4년이 아니라 40년을 살아도 다 못 쓸 것 같을 양이었다. 이럴 땐 무시하고 재빨리 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


방은 생각보다 넓었고,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넓어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딱히 보관할 것도 없었고 하니 오히려 편했다. 앞으로 할 일은 많겠지만, 대학교에 본격적으로 다니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일단 오늘은 쉬기로 했다. 진짜로 급한 빨래나 샤워 같은 건 굳이 내일 해도 되는 거니까.


"저기?"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쥘은 아니었고, 아까 그 지배인도 아니었다. 나는 습관처럼 방 문 쪽으로 몸을 기댔다. 이 문에는 창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 밖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목소리로 파악할 수 있는 건 파악해야 한다.


"지배인 분 한테 들었어요. 새로 오신 분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 때, 갑자기 긴장의 실이 풀렸다. 생각해보니 여기는 콜롬비아같은 무법지대가 아니다. 일단 안전하기로 따지면 전 세계에서 수준급으로 꼽히는 동네가 한국이다. 설마 그 인간들이 내가 여기에서 조용히 살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고.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그나츠라 이난이라고 하고, 이 친구는 조제프에요."

"네."


둘 다 외국인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나도 이 곳을 기숙사로 정한 만큼, 외국인들도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이다. 정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두 명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아까 온 분이랑 아는 사이신가요? 방금 온 여성분이 좀 찾으시는 것 같던데."

"아니요. 오기 전에 잠깐 차 빌려 타긴 했는데, 그렇게 친하진 않아요."

"오, 신기하네요."


이그나츠, 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저희 둘도 일주일 전에 같이 들어왔는데, 처음 만나는 사이였거든요."


아니, 그건 딱히 궁금한 건 아니었다.

"아, 혹시 피곤하거나 그러시나요. 그러면 세탁기랑 화장실만 어디 있는지 대충 알려드릴게요. 자세한 것들은 내일 알려줘도 충분하니까요. 내일 뭐 딱히 일 있는 건 아니죠?"

"네."


"그럼 화장실은 문 나가서 왼쪽으로 끝까지 가면 있고요. 세탁기는 그 옆방에 있어요.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 구분은 딱히 없으니까 노크는 무조건 하고요. 원래는 여자 없었지만 이제 있으니까. 샤워실은 화장실 넘어가야 있어요."


대충 설명해줬지만 하나같이 듣고 이해 못할 건 없었다. 애초에 큰 지식이 필요해보이지도 않았고.

"그럼 급한 건 알려줬으니까 잘 자요. 내일 좀 더 자세한 거 필요하면 알려줄게요."


그리고 방문을 닫았다. 역시, 쥘이 엄청 수다스러운 거지 평범한 사람은 대화를 빨리 끝낸다. 하지만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희 술 마시러 가요!"

앞의 방문이 갑자기 열리고, 쥘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 양반은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마침 네 명 다 있네요."

"아 그런데 훌리오 씨 피곤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괜찮으세요?"

"아유 뭔 소리에요. 비행기에서 내내 잤는데. 7시간은 잤을 걸요."

그러면서 쥘은 자기와 내가 비행기 내내 옆자리에 있었고, 차도 같이 타고 왔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 짐 정리는 다 했고요?"

"네. 물론이죠."


쥘은 미소를 지으며 뒷짐을 졌다. 하지만 10초만에 그 짐을 다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짐은 내일이나 모래 풀어도 되잖아요. 게다가 짐 정리는 다음 이사할 때까지, 라는 말도 있고.


우선은 4명 모인 김에 술이나 먼저 먹으러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훌리오씨, 괜찮으세요?"


4명 모인 김에 술, 이라는 말에 요르고스와 이그나츠도 넘어갔는지 나에게 물어봤다. 안 갈려면 뻐팅기고 안 갈 수 있기도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았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순문학은 많이 써봤으나 이런 류의 소설은 어디다 감평받을 기회도 별로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