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주일, 그리고 지금은 겨울을 알리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저녁. 추운 날씨에 자크를 한층 더 올리던 하루는 문득 집의 불을 끄고 왔는지를 생각했다. 그까짓 전등 몇 시간 더 켜놓는다고 해서 3만원 내던 전기세를 5만원 내거나 하지는 않을테지만, 그래도 하잘 것 없는 생각을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그 이유야…


“지루하네.”


 옆을 나란히 걷던 예지의 말대로였다. 평소에는 합이 죽어라고 안 맞다가 이런 순간에만 마음이 통한다는 게 좋은 지 어떤건 지, 하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그 잠깐 사이에 그녀의 머릿 속에서 형광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내일 해 먹을 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응? 아… 뭐 그렇지.”


“이건 뭐 물어볼 필요도 없었구나.”


 서로 피식, 웃으면서 발을 뻗는 순간.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하루의 머릿속은 다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루하기 짝이 없어도 함께한다는 건, 그만큼 사이가 좋기 때문일까. 아니면 켜켜이 쌓인 시간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였을까. 하루는 예지와의 관계를 마냥 친구라고 마냥 단정짓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인인걸까? 그 질문에도 하루는 고개를 젓는다. 참아낼 수 없는 외로움이 두 사람을 덮쳤을 때, 서로에게 한 번 응했다고 해서 단번에 사이를 급진전시키는 것은 싫었으니까. 필요할 때마다 편하게 부를 수 있는 형편좋은 사람. 이건 이거대로 매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뭐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렇다 말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낸 지 햇수로 10년이 지났다. 처음 만난 곳은 불꺼진 동방의 안. 


 겨우 거머쥔 청춘을 구가하는 청년들이 으레 그렇듯이 하루는 죽어라 마시고 이른 새벽까지 몸 누일 곳을 찾아 동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망할 버스는 끊긴지 오래. 그렇다고 좁은 방에 부대끼어 자는 건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그녀에게 외부 건물에다가 24시간 개방된 영화 동아리의 동아리실은 딱 쓰기 좋은 곳이었다. 실상 방만 빌려쓰는 유령부원이지만, 그래도  회비를 만원씩이나 내지 않았던가. 하루는 양심의 가책같은 건 훌훌 털어버리고 동방의 문을 열었다. 적막이 감도는 실내, 그리고 누워 자기 좋은 소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같은 신입생인 것처럼 어린 사람. 얼굴은 조금 예쁜 편. 어쨌거나 저쨌거나 잘 자리를 뺏긴 하루는 혀를 차고 벽에 기대어 웅크려 앉았다. 동이 터오기를, 아직은 추운 밤이 지나가기를.


 그리고 이른 새벽, 겨우 뜬 눈에 비친 소파는 텅 비어있었다. 남아있는 거라곤 어느샌가 덮인 담요와 함께 적혀있는 예지라는 이름의 메모.


“있잖아요, 사실 돌려받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하루가 메모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취한 건 나흘이 지나서였다. 상대 2호관 앞 벤치에서.


“늦게 연락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그 뭐라 해야될까… 바닥에 닿기도 했고, 결국 남이 쓴거니까 빨아서 돌려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이제야 연락을 드린건데 이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어쩔 수 없이 돌려주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램과는 달리 빙빙 꼬여버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루,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죄다 변명처럼 들렸다. 그래도 인연인데, 첫 인상부터 이렇게 안 좋게 보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탄식을 겨우 삼키고.


“그 때 덮어주셔서 감사해요, 예지 씨.”


 하루는 겨우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아뇨, 무사히 돌려준 제 쪽이 오히려 고맙죠. 그런데 예지 씨, 라.”


 그리고 그에 따르는 예지의 대답은.


“그 쪽도 신입생인 거 아니에요?”


“예… 뭐 일단은 그렇죠.” 


“그러면 지금부터 친구하는 걸로. 이름이 뭐야?”


 두 사람을 내일로, 내일로 끌고 가 지금에 이르렀다. 그 때의 하루는 예지에 대해 터놓고 친구라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건 예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마음이 새삼 울렁거린다. 지금은 그렇게 말 할 수 없어 과거를 되짚기만 할 뿐인데. 분명 싫은 건 아니다.


“이번에는 뭔 생각을 또 그렇게 하고 있어?”


 그냥… 뭔가 진 기분.


“별 거 아니고 그냥… 우리도 뭐 늙었구나, 싶어서.”


“뭔 꼰대같은 소리를… 그것도 금단증상이야?”


“담배 끊는다고 헛소리가 늘어나는 건 아니지. 그리고 애시당초 완전히 끊은 것도 아니고.”


 어느새 하루는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찰칵거리고 있엇다. 


“그냥 피는 빈도만 줄인다고 했잖아.”


 예지는 하루의 대답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멈춰 서 미간을 좁힌 채로 생각하기도 잠시. 꽤 빨리, 그랬던 거 같기도, 라는 결론이 지어졌다. 지금은 더 트집잡는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하루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은 채로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마주했을 때.


“마냥 헛소리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까 그거.”


 예지가 말했다.


“점점 몸이 굳어가는 것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피곤함이 앞서서 몸을 움직일 기운이 안 나는 것도. 다 늙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 핑계라면 한도 끝도 없을 걸.”


 두 그림자가 가로등의 주황빛이 비치는 시멘트 벽을 지나친다.


“뭐, 그런가.” 


 잠깐 멈추는 발걸음.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엄두가 안 나. 이건 너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떤 의미로?”


“연애적인 이야기지.”


 하루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한창 코로나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조차도 사랑의 열꽃을 피우기도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그 사람과 얼마 못 가 헤어진 이후로는 쭉 홀로 남아있다. 헤어진 이유는 지금에 와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에도 담배 몇 개비와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을 정도로 사소했었겠지. 그런 하루는 예지의 말에 달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네.”

 

 그 이후로 달리 사랑을 하지 않은 건, 예지와 같은 이유였을까. 하루는 어떻게 확신은 하지 못하고 대답을 떠넘겼다.


“생각해보면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나던 사람 있지 않았어?”

“기억 안 나? 금방 헤어졌잖아. 그만큼 금방 만난 사람이었지만.”


“아, 그래.” 


“말고 제대로 사귀었다고 말 할 사람은 글쎄, 언제였을까?"


 그리고 화두는 자연스레 하루에게 넘어왔다.


"그걸 나한테 물어도…"


 예지가 만나던 사람이라. 하루의 시선은 자연스레 허공으로 향한다. 그녀로서도 예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 수는 없다. 단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자세하게, 아주 조금 더 깊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하루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예지가 마지막으로 사귄 사람이 아니라 가장 깊게 사귄 사람.


"나야 선배말고는 인상에 남는 사람이 없네."


"선배? 아… 언제적 얘기를 하는거야."


"내가 또 누구를 알겠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어가지만 사실 선배라는 사람과 하루의 관계가 썩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좋은 인종이었지만 하루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절조없는 카사노바같았던 여자여. 알음알음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지금은 오스트리아인가 오스트레일리아인가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했었나. 


"그 사람과 연이 제일 깊었잖아. 아니, 길다고 하는 게 맞을까?"


 하루는 선배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가 없지.”


 예지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하루는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도 선배랑 잘 어울린다고 보고 있었는데.”


 답은 오로지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마냥 그런 건 아니야. 나랑 선배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어긋나 있었으니까.”


“소유욕이 강한 편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 그래도 이미 그런 이유로 헤어져 본 사람이 다른 말을 하는 건 좀 그렇나.”


“역시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다른 사람을 속박할 위인으로는 안 보이는데.”


 그리고 그 사소한 것에 불편을 느껴 예지를 멀리한다는 것도, 하루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잖아. 그런 걸 생각하면… 나랑 선배는 원래 진작에 헤어졌어야 했어.”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겨우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때의 예지는 오랜 기간 함께한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슬픔을 견디지 못했다. 그런 나날의 사이에서 예지는 요구하고, 하루는 그 요구에 응해주고.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밤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지금 역시도 한 번의 밤이었다. 외부에 조성된 공용 주차장으로 들어섰을 때, 하루는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일 힘들겠네.”


“아니, 모레가 귀찮지.”


 쭉 뻗은 하루의 손가락 끝에는 붉게 빛나는 십자가가 있었다.


“내일은 쉬는 날이잖아.”


“출장간다며. 그거 준비해야 되잖아.”


“그거야 간단한 일인걸. 내가 이 일을 몇 년을 했는데.”


 그에 예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에 맞춰 하루는 라이터의 불을 켰다. 그녀가 태우는 건 담배 한 대. 이윽고 하늘로 연기가 솟구친다. 아스팔트에는 재가 쌓인다. 그리고 하루의 머릿속은 어지럽혀진 채로 남아있었다.


 그러기를 얼마간.


“...아까부터 생각했던 건데, 역시 아예 끊는 게 좋지 않을까.”


“응? 뭐를?”


예지는 어리둥절한 하루를 가르치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입에 물고 있던 건 아직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 한 개비. 그렇다면 방금 예지가 한 말의 의미는… 어떻게 손도 댈 수 없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어떻게 정의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지난 10년이다. 당장의 하루도 걷잡을 수 없는 상상의 나래 끝에 지리멸렬해지는 건 다를 바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정해져있었던 답, 서로에게는 그를 위해 한 발 내딛을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내일은 주일, 지금은 깊어진 밤. 그리고 하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