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아직 살고싶었을 때의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수업시간이 있다면, 아마 도덕수업 시간일 것이다.

 

창문 사이로 쨍한 햇볕이 새어들어오는 여름철의 고된 날씨와, 점심시간이 막 끝난 5교시의 수업시간은 현대의 저출산 문제와는 동떨어질 만큼 뺵빽하게 교실을 매운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매우 큰 고역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짝궁, 아니면 앞, 뒤의 아이와 시끄럽게 잡담을 하거나, 지루하듯 엎어지거나, 아니면 금방 먹었던 점심을 소화시키느라 쏟아져내리는 춘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잠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가 매주 5교시때 벌어졌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번, 이 시간대 만큼은 적어도 잠드는 아이들은 없었다.


굽 낮은 구두, 차분한 검정색의 치마와 군청색의 블라우스, 어두운 색의 안경테를 쓴, 50대의 여성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품있는 모습을 보이던 도덕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 짤막한 시간을 사용해 또래 아이들이 생각하기엔 이른 철학적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의견을 묻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주제에 대해 꽤나 흥미있는 대답을 하는 아이에게는 달콤한 사탕을 주곤 했기에, 특히 달달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곤했다.

 

간식이라는 것이 엄금으로 지켜지던 초등학교, 그리고 군것질에 맛을 들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건네주는 '합법적' 간식이라는 허울좋은 조건 덕분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시간에 비해 수업이 일찍 끝난 날.

 

도덕선생이 막 지워낸 칠판을 다시금 흰 분필로 커다랗게 써내려간 오늘의 주제는,[내일 세계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할 것 인가?] 였다.

  

듣기만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그 사람이 생각날 법한 이 주제의 상품은, 기가 막히게도 선생님이 항상 들고 다니시는 조그만한 비타민 통에서 꺼낸 사과사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어...놀이공원에서 줄 안서고 롤러코스터 타기? 일 것같아요."

 

"난 우리 집 앞에 있는 커다란 마트에서 갖고 싶은 거 마음껏 가져갈래!"

 

"야! 그건 나쁜 짓이잖아!"

 

"뭐 어때? 내일이면 다 사라진다잖아."

 

"그럼 난 너네 집가서 다 훔칠거다!"

 

"뭐? 그건 안돼!"

 

"난...엄마 아빠랑 우리집 강아지랑 하루종일 같이 있을래..."

 

"에? 시시해~"

 

세상이 끝난다. 라는 디스토피아적 질문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최대한으로 벌일 수 있는 일탈을 꿈꾸며 왁자지껄하게 입을 열었다.


"자~자~ 모두 저를 봐 주세요~"


해보고 싶었던 일, 다시금 하고 싶은 일, 같은 저마다의 주저없는, 철학적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쾌락적 사고가 담긴 말들이 계속해서 쏟아지자, 잠시동안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도덕선생님은 손뼉을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여러분들의 의견들 잘 들었습니다. 정말 창의적이고 다양한 의견들이였네요.

 

하지만 여기 다른 대답을 한 사람이 있었어요."

 

어느정도 아이들의 소란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던 도덕선생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과나무요? 어차피 내일이면 쓸모 없어지는데, 왜요?"

 

"사과가 먹고 싶은 거예요? 우리집 마트 앞에서 파는데, 그걸 사면 되잖아요!"


"바보네! 바보!"

 

지금까지 자신들이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쾌락적 사고에 물들여진 가운데, 뜬금없이 나온 사과나무, 라는 어이없는 주제에 아이들은 어리둥절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심심하면 책을 읽는, 꽤나 재미없는 아이였지만. 그 덕분인지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스피노자 라는 철학자가 말한 명언으로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했다는 말도 있고, 그 명언의 진실은 아직도 모호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요. 오늘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해도, 내일이면 사라져버릴 거에요. 주변인들은 그 행동을 아주 이상하게 볼 수 있죠.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하는데 왜 그런 헛고생을 하는 거야?'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선생님은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이들의 킬킬거림 속에서도, 도덕 선생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과나무를 심는 누군가는 있는 힘껏 운명에 저항하고는 해요.

 

누가 봐도 쓸모 없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죠.


그 사람의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 이예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을 살겠다. 라는거죠."

  

"선생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가는 아이들은 눈을 꿈뻑 거리며 '저게 뭔 소리야?' 싶은 표정을 지어댔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을 찬찬히 들으며, 스스로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높은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에 하찮은 우월감을 가지던 시기였다.

  

"어머. 설명에 너무 힘이 들어갔네요? 미안해라. 하지만 이것만큼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의 의미심장하다는 눈빛에 도덕선생님은 스스로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풍파를 격을 거예요. 때론 너무 힘들고,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일 때문에 여러분들이 해내던 모든 일들을 전부 쓸모 없어지게 만들어 버릴 수 도 있죠. '어쩔 수 없지.','더 이상은 해봐야 헛수고야.' 라며 좌절하고 쓰러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의지가 꺾여서는 안 되요. 다시금 일어서서, 운명의 상대로 저항하는 거예요. 다들 아셨죠?"

 

"네~에."

 

그렇게 일장 연설을 끝내신 선생님은 자신의 훌륭한 철학적 사고를 학생들에게 잘 전달했다고 생각해 뿌듯해 하며, 오늘의 답은 모두 훌륭했다며 아이들 모두에게 달콤한 사탕을 하나씩 건네주셨다.

 

아마 어린 아이들에게 포기는 옳지 않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알아줄 것이다. 같은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처럼 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상을 심어준다는 만족감을 얻는 행위가 아닐까…하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했다.

 

정작 아이들은 철학은 개뿔, 사탕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나는 앞에 앉은 아이가 뒤로 넘겨주는 사탕을 건네받으며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은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해는 됐지만 마음속에서는 따라주기 힘들었다.

 

정말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사실 그 사람은 정말 죽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가족이, 친구들이, 심지어 자신도 죽어버리지만. 자신이 살았던 것을 남기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손으로 쥔 포장지를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물든 포장지를 뜯자, 투명하면서도 은은한 살구색의 사탕이 모습을 들어내었다.


나는 그 사탕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입 속으로 밀어넣었다.

 

혀 끝에서 굴려진 사과사탕은 역시나 달콤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들에게 '혹시 죽고 싶으신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은 절대 아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죽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몰려 있거나, 현실에 지쳐 아주 힘들어 하는 사람일 것이고.


 

하지만 그들은 죽을 수가 없다. 어차피 죽을 거면 왜 이 질문을 듣고 있겠는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미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달아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었겠지. 

 

  

그들이 죽고 싶어도 세상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돈 이라던지(우습게도 사람들이 스스로 죽으려는 이유또한 돈인게 아이러니 하다), 가족관계 라던지. 그런 이유들 때문에 말이다. 

  

나는 그 후자에 택하는 사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남은 가족은 단 한 명도 없고, 그 누구도 나를 말릴 사람도 없다. 


아주 태연하게 창밖으로 몸을 날릴 수도, 굵은 끈을 하나 구해와 목을 맬 수도, 주방에 있는 식칼을 꺼내 목을 그어도, 그 누구하나 내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될 때 까지 알아챌 수 없으리라. 

 

단지 나는 [자살]하지 못한다는 것.

  

말 그대로 사고사, 병사, 자연사 등 자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환영이라는 소리다. 

 

그것이 뭔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물어봐야 그럴싸한 대답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극히 주관적인 이유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그런 대답이기도 하고.

 

아무튼 자살이 아니라면 어떤 죽음이든 원하는 나에게, 죽음이란 아주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혁씨? 듣고 계십니까?”

 

흰 가운의 옷 매무새를 만지작거리던 의사가 넌지시 말을 건냈다.

 

“아....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그의 말에 생각의 늪에서 벗어난 나는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누구도 보지 못하게 책상 아래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에서 벗어난 시아가 진료실 전체를 보여주었다.


3평 남짓한 진료실에는 흰색 테이블과 연식이 꽤나 오래 되어 보이는 컴퓨터와 모니터.


그리고 벽에는 하나같이 두꺼운 전문서적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가득 매워진 책장이 마찬가지로 벽 한면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천장과 벽 곳곳에 붙어있는 야광스티커였다.


매우 지적이고 차분한 공간에 어째서 어린이들이 좋아할법한 야광스티커가 붙어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겻지만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 먼저 진료실로 들어간 이들이 어린 남자아이와 부모로 보이는 여성이였기에 금새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저 같아도 한번에 이해하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니까요.”


내가 자세를 고치자 한 두뼘 남짓한 테이블 너머에 앉아있던 의사 또한 자신의 콧대에 올려진 가느다란 태를 가진 안경을 고쳐썼다.

 

“그래서…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얼마나?”


“크흠….그게…대략적으로 말씀 드리자면….약 3개월…하고 조금 정도 남아 있는 듯 합니다.”

 


3개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 

 

그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듯 했지만, 조금씩 일그러지는 미간의 주름과 멈칫거리는 말투는 그의 복잡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마치 이미 엎어진 물잔 덕분에 쏟아져서 다시 담을 수 없는 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의사라는 직종에 확신을 가지며 살아왔던 사람이겠지.

 

“…잠시 달력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예! 그럼요! 얼마든지.”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의사의 옆에 놓여진 작은 달력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약간 과장되는 표현을 하며 내가 손을 가져다대기도 전에 먼저 달력을 집어들어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 달력을 받아들여, 한손으로는 달력을 넘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펼쳤다 접으며 셈을 세었다.

 

“이것 참….저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나는 어느덧 마지막 장 까지 넘긴 책상달력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제가 죽는 날이 딱 크리스마스잖아요? 위대한 예수님의 탄생일에 죽는다면 아마 천국에 가겠죠?”


“...예?”

 

나는 마치 코믹영화에 나올법한 모습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농담-놀랍게도 웃음을 기대한 농담이였다.-을 내뱉자, 의사는 마치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머리를 내려친 것 처럼 잠시 얼빠진 얼굴을 지어, 농담을 뱉은 내가 더 웃음을 지을 뻔 했다.

 

".....그렇…겠네요.."


으쓱하며 올린 어깨를 내려놓고 잠시 침묵을 지키자, 의사는 매우 떨떠름하게 입을 열어 긍정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서는 당혹감이 배어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소견서는 어디 있나요?”

 

“....여기 챙겨 두었습니다.”

 

 잠시 적막해진 공기를 환기시키는 느낌으로 본론을 꺼내자, 의사는 미리 준비해두었다는 마냥 바로 옆에 새워진 파일을 하나 꺼내, 소견서를 꺼내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갑자기 죽는다고 회사를 때려치우면 미친 놈으로 보일 것 같아서요.”

 

“하하…그렇긴 하죠..”


소견서를 받아든 나는 이번에는 농담처럼 들리는 비아냥을 스스로에게 내뱉었지만,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어느덧 당혹감이 가득 들어찬 그 눈동자가, 어느새 동정심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마치, 암담하고 절망적인 미래를 차마 제정신으로 볼 수 없어 유머스럽게 꾸미는, 그런 사람을 보는 눈빛.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시선이, 그 눈빛이, 그 생각이 조소를 유발할 정도로 기분이 나빳기에, 나는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아닙니다. 해결법을 찾지 못해서….죄송합니다…”


그러자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사과를 전했다.


사과.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의사를 잠깐 바라보곤, 생각했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까지 사과 하는 걸까?


의사로서의 사명감?


그것도 아니라면 나에게 큰 연민감을 느끼는 걸까?


곧 죽어버리고 말 나에게.


의사 생활을 하면서도 수도 없이 겪어왔을 죽음에 덤덤하지 못하고 언제나 마음아파하는 의사의 모습을 머리속으로 뭉뚱그려보다 이내 박박 지워내었다.

 

그런 무겁고 착잡한 분위기에 넌더리가 난 나는 몸을 돌려 진료실의 문고리를 잡고 돌려 방을 나섰다.

 


희미한 약품냄새가 풍기는 병원 복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간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힘껏 바퀴를 굴리는 소년, 여러 링거를 줄줄이 달고 간신히 발을 옮기는 늙은 남자, 주사를 맞았는지 팔뚝에 알코올 솜을 갖다 대고 여간 문지르는 젊은 여자.

 

그 사람들 중 제일 멀쩡해 보이는 내가 속에는 시한폭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에 약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병원을 나서고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할부가 아직 15개월 남았는데, 이건 이거대로 이득이겠지.

 

“....죽는다. 라….”

 

핸들을 잡은 왼 손등에 빨간 점을 바라보며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내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날 아침이었다.


감겼던 눈을 뜨자,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정도의 탈력감과 후끈 달아오르는 전신.


그때까지는 그저 단순한 감기. 그렇게만 생각했다.


내가 누운 잠자리에서 어느정도 떨어진 휴대폰을 간신히 잡아낸 나는 회사에 병가를 내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기대는 순간까지 두번씩이나 무릎이 풀릴 뻔 했기에 곧바로 콜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를 태운 택시가 어느정도 도로위를 달리고 있을 시점이었다.


내 몸은 금방까지 고온으로 펄펄 끓었던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안정화가 되었다.


당혹해 하는 것도 잠시, 어느덧 목적지인 병원 앞까지 도착하여 택시비를 지불 할 때 즈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몸 상태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몸이 가뿐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 몸 상태에 의문감을 가지며 병원앞을 서성이며 이내 다시 택시를 불러 회사에 출근을 하려다, 이왕 병원에 왔는데 검진이나 받아볼까 싶어 발을 병원쪽으로 옮긴것이 이 결과였다.

 

백일초.

 

하루에 하나씩 점들이 생겨나는 병이다.

 

그렇기에 의사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은 내 남은 수명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점들은 하루에 걸쳐 피부와 내장까지 뿌리를 내리고 빨간 점을 남긴다.

 

그 점들이 백 개가 되면 몸 속의 뿌리들이 터져서 순식간에 세포기능들이 정지가 된다고 한다.


내과수술로 제거를 하려고 해도, 뿌리들은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바로 터져버리고, 제거를 한다고 해도, 다시 생겨나는 불치병이다. 

 

마침 내 진료 담당 선생님은 여러 희귀명에 대한 논문을 작성 중이셨다고 한다.

 

내 빨간 점을 보자마자 엑스레이를 찍어 볼 것을 단호하게 언급하시던 선생님 덕에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내 수명을 뒤늦게 알아채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죽는 순간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죽음에 별 저항이 없는 것이 다행인 걸까?

 

나는 이 상황이 꿈도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을 이미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올린 생각이라고는

 

내가 사망보험을 들어 놨었나? 였다.


정작 미리 보험을 들어 놨었어도, 그걸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 나는 확실히 죽음의 대한 공포가 결여되어 있는 듯 했다. 

 

다른 사람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그랬다.

 

나는 갈대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이 불면 그저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그저 지금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불합리하게 괴롭힘을 받을 때도, 내가 작업해 온 프로젝트를 회사 동기가 가로채도,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를 느낀다는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이면 하고, 못하는 일이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 의지대로 무언가를 해보았던 적이 있었나?

 

꿈? 미래? 하고 싶은 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역시 나는 머리가 맛이 가버린 듯 했다.

 

사실 시한부 판정 덕분에 충격이 너무 커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닐까?

 

죽음이 친절하게 느껴지다니.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르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곤란한 손님보다는 언제 올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손님이 더 신사답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엑셀 페달에 발을 올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니…하…그러니까…죽는다고? 98일 뒤에?”

 

  

요란한 타차 소리도, 서류를 뽑아내던 복사기도, 이 좁은 사무실의 소리가 순간 정적을 맞이했다.

 


그 대신 칼칼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던 부장님과 그 앞에 서 있던 나에게 사무실 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부장님을 대신해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전화로만 연락을 취하고 싶었지만, 다른 직장 동료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서 일단 얼굴을 보이는 편이 나아 보였다.


사실 그 어떤 관심이 없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직장 동료들일 뿐인데도 말이다.


난 그 누구에게도 내 개인적인 일로 인한 피해를 끼치는 것이 싫었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받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일종의 두터운 선을 그은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죽기 직전까지 폐를 끼치지 않고 이 직장에서 매일같이 일을 해야 하겠지만, 뭐.


죽음이 바로 내 등 뒤에 있는 이상,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으니 두텁게 그렸던 선 또한 희미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선 건너편에서 벽을 치는 나날들도 지친다.


이젠 오직 오롯히 혼자 이 고요함을 간직할 예정이다. 

 

처음엔 질 나쁜 농담으로 생각하던 부장님은 역정을 내며 분노를 표출했지만, 내가 챙겨온 의사 소견서와 처방전 등등을 보여주니, 아무래도 사실인 것을 알게 된 듯하다. 

 

“사표처리는 바로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퇴직금은 제 계좌로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바로 제 개인 물품들을 깔끔하게 치워놓겠습니다. 그럼.” 

 

“그…그래…” 

 

무미건조한 어투로 해야 할 일을 말하자 얼떨결에 대답한 부장님의 말에 나는 종이 상자를 꺼내 내 자리로 돌아가 개인 물품들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지급된 컴퓨터-이것은 간단히 내부 파일만 정리하는 것으로 그쳤다.-, 자잘한 것들이 적혀있는 포스터 잇, 책상 위 쌓인 여러 서류들과 공책, 여러색상의 볼펜들.

  

 

지금 보니 내 개인적 물품들은 거의 없었기에 이 정도면 차리리 작은 가방정도면 될 텐데 싶어졌다.

 

달그락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상자에 대충 짐들을 구겨담았다.  

 

소리가 시끄러워서 일하는 데 방해가 되든, 안 되든, 알 바인가.  

 

어차피 이젠 다시는 오지 않을 공간인데.  

 

그렇게 내 짐들을 정리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그렇게나 익숙하게 느껴지던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나 프린트기가 종이를 출력하는 소리같은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배려. 라기 보단 모두들 숨을 죽이고 모든 의식을 나에게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모든 짐들을 상자에 담은 나는 그 덩치에 비해 가벼운 상자를 들어올리며 사무실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어어…그래..”  

 

그러자 여전히 내가 전해준 의사가 처방해준 소견서와 사표를 쥔 손을 멍하게 바라보던 부장은 고개를 화들짝 올리며 떨떠름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려던 찰나. 

 

“저…저기! 김 대리!”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상당히 급박한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지며,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담배…한 대 피우겠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손으로 닦아낸 남성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정 과장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

 

 

 

“후…”

 

“........”

 

 

 

회사 내부의 흡연실의 환기팬은,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청소를 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손수 소매를 걷어서 치우기도 싫고, 구차하게 민원을 넣기도 귀찮았기에 언제나처럼 검게 물든 팬이 윙윙 돌아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괜찮나…?”

 

“...네…뭐…”

 

 

 

담배 한 까치가 전부 타들어갈 때 까지 그저 묵묵히 담배를 태우던 정 과장은 두번째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내가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 지 잘 모르겠네…..나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니까…”

 

“.......”

 

“....가족은…아나..?”

 

“...예.”

 

 

내게 가족은 없지만, 굳이 구차하게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그저 긍정으로 넘겼다.


 

“...남은 시간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아니..하…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

 

 

정 과장은 입에 물었던 담배에 불을 붙히는 것도 잊어버리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싸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저기.”


“흡…! 그래, 할 말이 있는…”

“왜 그렇게까지 저에게 신경을 쓰시는지?”



토기가 올라올 정도의 역겨움과 짜증이 소용돌이 치다, 이내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이해하기 힘들다.

 

 

저 인간은 어째서 내 죽음에 이렇게나 연연하는 걸까.

 

그렇게나 가식을 떤다고 해도, 지금은 사무실 직원들이 있는 장소도 아닌 단 둘만이 있는 흡연실이다.


오늘이면 나는 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인데, 이런다고 자신에게 득이 될 무언가가 없을텐데.

 

아니면, 끝까지 나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나를 통해서 누군가를 비추어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나와 같은 20대의 아들이 있다고도 했으니, 내 신새와 자신의 아들을 대입해서 비교하고 있는 걸지도.

 

내 말을 들은 정 과장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야…같은 직장에서, 지금까지 몇 십번, 몇 백번이나 얼굴을 마주한 사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죽…는다니,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지.”


“...”


그런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그래, 고생…했어.”

 

 

나는 입에 꼬나문 담배를 거칠게 비벼서 끈 뒤, 흡연실 의자에 올려둔 짐을 챙겨들고 고개를 숙이며 복도로 나왔다.

 

버튼에 불도 잘 들어오지 않는 구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곤, 주차장 입구에 마련되어있는 쓰레기장에 상자를 처박아 버렸다.

 

굿이 챙길 필요도 없는 물건이며, 내 집까지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곤 회사에서 나서기 전, 차에 기대어 담배 한 까치를 물었다.

 

지하주차장에서는 금연 이라고는 하지만, 뭐. 상관없나.

 

폐 속으로 빨아들인 연기를 후 하고 뱉어냈다.

 

갈아 끼운지 오래되어 깜빡 거리는 주차장 형광등의 불빛에 담배연기들이 한 순간 반짝이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평상시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던 사람이 [그래도 나는 당신을 걱정해 주고 있어요] 라는 반응이 달갑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역겹다.

 

지나갈 때 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만 숙이며, 일과 관련된 것 말고 진중한 대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상사와 후임 사이지만, 그래도 자주 본 사이니까 당연히 걱정해야 한다는 건가.


그 당연하다는 표정이, 당황했지만 곧 죽을 사람이니까 너그럽게 이해한다는 반응이.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을 당연하다고 느끼는 점에서 짜증이 더욱 솟구쳐올랐다.


더욱 짜증난다는 점은, 오래전의 나 또한 강 과장과 마찬가지의 인간이었던 점이다.

 

이 회사에서 나에게 좋은 일들이 있었나?

 

잠깐 좋은 추억이 있었나 머릿속을 뒤집어가며 회상해 보았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어느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발로 짓이겨 불을 꺼뜨렸다.

 

시커먼 담뱃재가 주차장 바닥에 얼룩을 새겼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익숙한 동작으로 열쇠를 꽂고 돌리면 내 집의 현관문이 열린다.

 


5층짜리 작은 빌라의 3층.

 

 

개인 방 하나, 화장실 하나,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과 이어지는 주방.

 

딱 혼자 살기에 좋고, 집값도 적절한 집이다.

 

담뱃재가 묻어있는 정장을 대충 털고는, 거실 구석에 던져놓고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다지 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찝찝해져서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겸사겸사 편의점에 들러 사온 맥주와 육포를 꺼내 tv앞에 걸터앉았다.

 

막 사온 맥주는 아직도 겉면에는 송글송글한 물방울들이 곂곂이 매달려 있었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며 안착한 채널은 이미 수 번은 본 영화를 틀어주는 채널.

 

 

 

절망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점차 그 감정들을 이겨내며 인간승리를 이끌어내는, 전형적인 동기부여 영화.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영화였다.


맥주를 들이켜가며 그저 멍하니 보다 보니, 어느새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운명적인 만남. 조금씩 쌓여가는 희망.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두 사람. 깔끔한 해피엔딩.

 

몇 십일 뒤에는 외로이 세상 하직할 나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

 

담배를 꼬나 물고, 불을 붙였다.

 

 

빨간 불꽃들이 종이와 담배를 태워가며 길이를 좀먹는다.

 

 

타 들어간 담배는 내 폐를 거쳐, 입으로 나와선, 아늑한 연기가 되어 방안을 뒤덮었다.

 

 

그렇게 담배를 다 태워버린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든다.

 

 

 

죽음. 

 

 

 

담배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담배를 꺼내면 되니까.

 

 

 

다 태워버린 담배 따윈, 짓이겨서 재떨이에 처박으면 된다.

 

 

 

이 담배처럼 내가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힘없이 웃음을 지은 나는 또 다른 맥주 캔을 꺼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렬한 빛이 눈을 찌르는 감각.

 

 

 

천천히 눈을 떠보자,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온 방을 비추었다. 

 

 

 

숙취 때문인지 모래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찌그러져 구석에 박혀있는 맥주 캔들의 개수를 세어보니, 취할대로 취해서 이불도 꺼내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기지개를 피며 술에 찌든 몸들을 풀어주었다.


 

휴대폰을 보니 아침 9시.

 

 

 

아침 9시?

 

 

 

지금 씻지 않고 그대로 나간다고 해도 완벽한 지각.

 

서둘러야만 했다.


 

“…아! 그만 뒀지…”

 

급하게 몸을 일으킨 내가 허겁지겁 바닥에 던져진 넥타이를 줍기 직전, 어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우려다가 만 넥타이는 그대로 바닥 한 켠을 차지하고, 구겨진 옷을 벗고 새 와이셔츠를 꺼내는 대신 아늑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마치 주말과 평일을 헷갈려 하는 일. 지각이라는 긴장상태에서 순식간에 안정되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일어난 거,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쇼파에서 일어나 다 마신 맥주 캔들을 줍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세수하며 눈꼽을 뗀다.

 

 

 

-빨간 점이 오른쪽 팔뚝에 하나 생겼다.-

 

 

 

이 점들이 내가 죽을 시점엔 전신을 뒤덮는다고 생각하니 약간 소름이 끼쳤다.

 

 

 

젖은 얼굴을 닦아 내며 주방으로 들어가서 평일에는 바쁘게 집을 나서고, 주말에는 점심까지 푹 자느라 그다지 써먹지 못한 커피머신을 작동시켰다.

 

 

 

칙칙 거리며 커피를 내리는 냄새가 주방을 중심으로 방 전체에 퍼져나갔다.

 

 

 

토스터기에 빵을 꽂고, 프라이팬을 달궈 달걀프라이를 구웠다.

 

 

 

잘 구워진 빵과 달걀을 접시에 담고, 내려진 커피도 컵에 담아왔다.

 

 

 

버터도, 잼도 다 떨어져 간단히 만든 단순한 토스터였지만, 우물거리며 잘 먹었다.

 


 

그나저나 냉장고를 살펴보니 먹을 만한 게 달걀밖에 없는 건 좀 그렇네.

 

 

 

커피를 후룩거리며 슬슬 장이라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깔끔하게 비워진 접시를 설거지 하고, 베란다 창문을 열고 기대어서 담배를 물었다.

 

 

 

내 아래로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걸까?

 

 

 

죽음이 선물해 준 여유로운 아침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쇼파에 누워서 휴대폰을 뒤적거리거나, tv를 보다 보니 어느새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시한부 생활 3일째.

 

 

 

누가 봐도 어처구니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대로 남은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죽어갈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쌓여만 가는 우편물을 누군가가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해서, 결국 이미 사람이 아닌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신고하겠지.

 

 

 

그렇게 나는 뉴스의 한 장면에 떠오르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약 5분에서 20분 정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가차없이 폐기되어 버릴 것이다.

 

 

 

약 몇 백만 명의 머릿속에 잠시라도 남는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실없는 망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폰 덕에 화들짝 놀란 나는,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이승환]

 

 

 

이런 나 같은 녀석과 아직까지도 알고 지내는 유일한 사람.

 

 

 

“....”

 

 

 

나는 약 30초 정도 전화를 받을 지, 말 지 고민하다 이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끌시끌한 고깃집에서 그 녀석은 마치 내가 지금쯤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삼겹살을 요령 좋게 구워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찍 퇴근 한 건지, 양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해외여행이 처음인 사람이 입을 듯 한 촌티나는 야자나무 무늬가 그려진 티셔츠와, 새파란 반바지가 이상하게도 그와 잘 어울려 보였다.

 

 

“초저녁부터 술이냐?”

 

“뭐 한번쯤은 괜찮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소주를 까며 잔을 건넨 승환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승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은 살고 싶었던 시절의 내가 있었던) 누구나 들으면 아는 거대한 기업의 면접실 이었다. 

 

막 다린듯한 뻣뻣한 정장에 대기번호를 붙인 입사 지원자들 예상질문을 프린트 한 인쇄물을 달달 외우거나, 애써 긴장감을 지우기 위해 옆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거리는, 그야말로 불안감과 긴장감에 휩싸여져 있었다.

 

 

그의 대기번호는 42였는데, 나는 41이었기에 바로 옆에서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면접실의 공기가 답답한지, 목 단추를 하나 풀어 헤치고, 이어폰을 꽂은 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과도한 긴장감에 정신을 놔 버렸거나, 어차피 떨어질 거, 막 나가기로 결심한 사람으로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달랐다.

 

 

 

그의 언행은 자신이 반드시 이 회사에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이 차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그런 그와 같이 면접관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복장을 깔끔하게 정돈해 놓았다.) 고리타분 하게 생긴, 늙은 남자 셋이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들어오는 우리들을 힐끔 쳐다보며, 종이에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형식적인 질문 몇 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반복하고 난 뒤, 면접관은 오늘에만 이미 수 십번은 한, [이 회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지원자들에게 건넸다.

 

다 거기서 거기인 단정한 스타일을 가진 36번부터 40번의 사람들의 말들은 외견만이 아닌 말도 비슷비슷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좋은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고 싶다.] 라는 말을 최대한 그럴 듯 하게 포장한 대답들을 들으며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나도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에 강한 역겨움이 들었다.

 

나도, 그들도 마찬가지.

 

이 회사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커다란 기계의 나사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나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저 작은 기계보다 더욱 거대한 기계의 나사가 되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삶의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런 나를 지금과는 다르게 보아주실테지.

 

그런 망상을 하며 41번. 그 사내를 힐끔 바라보았다.

 

너도 결국엔 똑같지 않느냐, 그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런 자신에게 취하고 싶은 것 아니냐 라는 감정을. 그는 단 한마디로 종결시켜 버렸다.

 

“저는 이 회사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저를 뽑지 않는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는 너무나도 당당하게도 나의 망상을 화려하게 박살내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요?”

 

예상한 답변과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은 그에게 당황한 것인지, 흥미가 생긴지 몰라도, 면접관 들은 고리타분하던 얼굴을 집어 던지고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며 그 이유를 물었다.

 

“저는 저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그는 이 기업의 핵심주제를 파고들고, 거침없이 개선점을 몇 가지나 들어 보였다.

 

그의 개선점은 정말 당연하지만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근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완전 바꾸어 버리는 의견을 내 놓았고, 면접관들의 금융적, 시간적 반박을 들고 덤벼도 그 문제점을 완벽하게 보완할 의견을 뽑아 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보았다.

 

그는 우리 같은 나사 같은 삶을 던져 버리고, 이 거대한 기계장치의 중심을 진심으로 노리려는 그의 모습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번에는 하와이에 가보려고.”

 

그리고 너무나도 어이없이 승환은 내 예상을 화려하게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승환은 어느새 취기가 올라 빨개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는, 자신의 티셔츠에 그려진 무늬를 나에게 들이밀며 웃었다.

 

“그저께 유튜브를 보는데, 우연히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영상을 봤는데, 크….굉장하더라?

티없이 맑은 바다속에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물고기들이 헤엄치는데…마치 초저녁의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박힌 것 같았어! 굉장하지 않냐?”

 

“....일은?”

 

“아, 말 안했나? 나 지금 백수야, 백수. 뭐…아직 모아둔 돈은 넉넉하고…멋진 여자들이 넘치는 하와이를 떠올리니까, 어느샌가 내 손이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있더라고? 바로 내일 떠난다.”

 

“....”

 

그는 언제나 이랬다.

 

첫인상과 현인상이 완벽히 일치하는 이상한 녀석.

 

그는 정말로 유능했고 다재다능했지만, 정말로 기분파에 제멋대로였다.

 

그때 처음으로 만난 면접에서도 나는 떨어지고 그는 합격했지만, 몇개월 뒤에 재미없다며 때려치웠던 녀석이다.


아마 인연을 맺게 된 계기 또한, 면접을 끝낸 나에게 빙긋 웃으며 다가오던 것이 계기였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굳이 누구에게 다가갈 필요를 못느끼는 인간이니까, 그런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되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아주 가끔, 이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히는. 그가 신나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면, 나는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그렇구나.’ ‘음.’ 같은 재미없는 맞장구에도, 그는 더욱 신이나서 자신이 최근에 겪었던 일들을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그렇게 나는 승환의 아랫집 사람이 매일 아침마다 공원에서 기묘한 스트레칭을 하며, 굉장한 애묘인이라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런 녀석.

 

사는것이 즐거워보이는 녀석.

 

나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성격이지만, 이상하게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야.”

 

그래서, 괜시리 궁금해졌다.

 

“너는, 네가 곧 죽는다면. 어쩔래?”

 

만약, 네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진다면, 어떨까?

 

정말이지 시시하고 재미없는 질문.

 

나조차도 내뱉고 나서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신기하네..”

 

허나, 그는 내 질문에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듯이 신나게 떠벌거리며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네가 나에게 먼저 질문을 건네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술기운이라고 생각해.”

 

그런가,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와 지내면서 먼저 솔선해서 이야기를 주도한 적이 없었구나.

 

더욱 더 아직까지 나와 인연을 맺고있는 승환의 머리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아무튼….뭐라고 했더라..? 내가 곧 죽는다면…?”


“정확히는…죽기까지 96일 정도 남았다. 고 한다면?”


“쓸데없이 디테일하네, 이거 무슨 심리테스트야?”


“아니, 그냥. 궁금해서.”


“흐음…….”


“.............”

 

의외다.

 

분명, 승환이라면 ‘뭐, 죽기 전 까지 흥청망청 놀면서 보내지 뭐!’ 라며 호쾌하게 웃을 줄 알았는데, 그는 마치 중대한 선택이라도 하는 듯 매우 고심하며 신중하게 내 질문에 맞는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승환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내가 어느새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삼겹살을 불판 위에서 꺼낼무렵.

 

“아마…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기 전 까지 집에 틀어박히지 않을까..”


“...아무것도.?”


“그렇겠지.”

 

이건 정말로 의외였다.

 

이렇게나 활발한 그가, 어떻게 보면 현재의 나와 전혀 다를바 없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무섭잖아. 응…그렇네. 


나는 말이지….인생은 단 한 번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래서,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도 있으니, 오늘이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라는 모토를 

가지며 살아왔어.


그런데, 갑자기 내가 죽을 날이 정해진다면?


내 죽음이 불확실하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닌, 그렇게 정해진다면?


그 순간, 내 인생이 의미가 있어지는걸까?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네. 응. 그래.”


“.....그렇지.”

 

너 또한, 그런가.

 

그는 나와 취하는 행동은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삶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해져버린 운명에 대해 엄청난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삶’. 이것이 지금까지 나를 괴롭게 만들어왔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에서, 하루하루 살아오던 나에게 이 병은 정말로 좋았다.

 

“하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는데? 자, 일단 잔 좀 채우자!”

 

그는 애써 유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비어있던 내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혹시 모르지? 그….어디서 봤던 명언처럼, 사과나무나 심을지?”


“.....사과나무?”


“왜, 그…있잖아. 그…나는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런 말.”

 

“아…”


잘 알고있다.

 

내가 이 병을 진단받을 당시, 떠올렸던 말이니까.

 

그 뒤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가 또 다시 그 말을 상기시켜주었다.

 

“뭐, 이왕이면 나는 야자수를 심으련다!”


“그래. 그러면 좋겠네.”

 

기막힌 우연이 있네.

 

나는 호쾌하게 들어올린 잔에 내 잔을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요일 점심은 항상 그런 느낌이 든다.

 

겨우 화요일인가. 주말까지는 한참 남았구나.

 

그만큼 늘어지기 좋은 요일.

 

그래도 사람들은 작은 사무실에 갇혀, 자판을 두드린다.

 

거리에는 급하게 점심을 먹으려 달려나가는 남자와, 남은 점심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싶어하며 한 손에는 프렌차이즈 커피를 들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여자, 회사동료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모두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나는 지금 사회의 일부분이다.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며칠 전 만해도 저 사람들과 같은 사원증을 목에 매고 있었다.

 

마치 없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넣었을까?

 

초록 불빛이 들어온 신호등에 따라 차를 몰았다.

 

나는 지금, 농장으로 향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술에 취하고 난 다음날.

 

적당히 취했다면 몰라도, 가끔 과하게 술이 들어가면 필름이 끊켜버리고는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오랜만에 만나 탠션이 오를대로 오른 주정뱅이가 잔이 비워질 때 마다 술을 가득 따라주었고, 그 결과가 이렇다.

 

필름이 끊기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나는 도대체 어젯밤 무슨짓을 했던 것일까? 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나는 지금 농원으로 가고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초등학교 시절 특이한 도덕수업에서 들었던 한 명언.

 

술에 취해 의지가 흐려졌던 것일까, 승환과 거하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깨어난 뒤, 반쯤 감기는 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바라보자,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덮쳤다.

 

술에 취했던 어젯밤의 내가, 사과나무 묘목을 주문했던 것이다.

 

심지어, 배송도 아니고 직접 실어서 가져가기로.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현실에 나는 곧바로 지난 밤 까지 같이 있었던 승환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혀 받지 않았다.

 

아, 그는 현재 비행기 내부에 있을 터였다.

 

어젯밤, 희미한 기억속에서도 그가 바로 오늘 하와이로 떠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린 나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겠구나 싶어 통화를 끊었다.

 

사과나무.

 

점차 감기던 눈이 선명하게 떠지고, 어느덧 머리가 냉정해졌다.

 

지금 취소를 하면 위약금이 들까.


그럼 얼마나 내야하지.


나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술에 취했던 걸까.

 

일단 지금은 곧바로 주문을 취소하고…..

 

“...하 미치겠네.”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주문취소를 누르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

 

‘혹시 모르지? 그….어디서 봤던 명언처럼, 사과나무나 심을지?’

 

오랜만에 만난 승환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_____________________

 

드넓은 땅덩어리에 구석구석 박혀있는 사과나무들은 마치 평지에서 숲을 만나는 듯한 풍경을 이뤘다.

 

그곳에서 만난 농원사장은 밀집모자, 체크무늬 남방, 근육질인 팔뚝에 비해 툭 튀어나온 배.

 

마치 농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 이걸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이 녀석이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은 과실주. 라는 녀석입니다. 잎사귀도 깔끔하고 가지도 튼실한 게, 아주 좋은 녀석이죠. 물론 키우는 게 좀 까다롭긴 하지만요. 하하!”

 

“...그렇군요?”

 

묘묙을 고르던 나는 한 내 허리춤에 올 정도의 높이에 가벼우면서 튼실해 보이는 묘목을 고르자, 사장님은 털털한 웃음을 지어내며, 내가 고른 사과나무 묘목의 뿌리를 내가 옮기기 쉽게 봉투로 휘감기 시작했다.

 

아주 빠르지만,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짓.


얼마나 이런 일을 반복해 왔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일은 할 만 하신가요?”

 

그런 뒷모습에 무심코 말이 나왔다.

 

“…글쎄요.”

 

그 말을 들은 사장님은 잠시 멈칫 하더니 계속 손을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벌레들이 사과를 파먹기도 하고, 그걸 대비해 치는 농약 값도 만만치 않죠. 태풍이 와서 사과들이 죄다 상하면 그 해 장사는 물 건너간거나 다름없습니다.”

 

어느새 포장이 끝난 묘목을 차 트렁크에 실어주시며 사장님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지나 빨갛게 물들은 사과들을 하나, 하나씩 정성스레 포장 할 때면 생각하곤 하죠. 내가 기른 것들이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준다면…하고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일을 하기 잘했다. 고 허허!”

 

또 그 눈빛이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고맙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네..그럼.”

 

사장님과 악수를 끝내고, 곧장 차를 몰아 농원을 나왔다.

 

그 눈.

 

열정과 자부심이 넘치는 눈.

 

회사 동기도, 의사선생님도, 승환도, 금방의 사장님도, 모두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충실하고, 미래를 나아보는 그 눈.

 

나와는 정 반대의 그 눈을 보고 있다 보면, 구역질이 나왔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인생은 소중하고, 나는 더욱 나아갈 거라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나 따위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작아져 버린다.

 

그저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나를 비웃는듯한, 나에 대한 혐오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아아.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고 싶어.


지금 이 핸들을 휙 하고 돌려버리면 그럴 수 있을 텐데, 가드레일을 박고,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럴만한 용기조차 없는 나는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이 어서 나에게 찾아오기를.

 

어서 나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기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찌르르 거리는 풀벌레들의 연주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닌 숲 속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초승달이 떠오르는 어두운 밤에 등산을 한다고 하면 누구나 미쳤다고 할 테지.

 

그것도 한 손에는 묘목, 다른 한 손에는 삽을 들고 오른다면 말이다.

 

정확히는 양손에 묘목, 삽은 팔로 간신히 받쳐가며 등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묘목이 가볍기는 했지만, 뿌리가 상하지 말라고 흙과 비닐로 감싸져있었기에, 무게가 좀 있었다.

 

이대로 묘목의 기둥을 한손으로 들고 올라갔다가는, 금새 부러질 것 같아 결국 고생을 배로 하며 길을 나아갔다.

 

그래도 대낮에 사과나무 묘목과 삽을 지고 등산로를 올라가는 사람은 존재 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기에는 충분해 보였기에, 차라리 밤이 나았다.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되어 싫기는 하지만, 우리 동네 뒷산은 나이 많으신 분들도 편하게 오를 수 있을 만큼 완만한 것도 있었기에 최종목적지는 뒷산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묵묵히 발 밑을 주의하며 오르기를 30분. 잠시 묘목과 삽을 바닥에 내려두고,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가닥을 꺼내 물었다.

 

산에서는 금연이지만, 휴대용 재떨이도 챙겼고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을 방패로 조금 내 멋대로 하는 감이 적지 않았다.

 

담배에서 타들어 가는 새빨간 불꽃이 횟불인 마냥, 어두운 숲을 약간이나마 밝혀주었다.

 

그제서야 어느새 표지판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 보이는 표지판, 그 뒤로 나뉘어 지는 두 갈래길.

 

오른쪽은 정상으로 향하는 길, 왼쪽은 둘러 둘러 하산하는 길이다.

 

나는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서 불을 끈 뒤, 잠시 내려놓았던 묘목과 삽을 들어 오른쪽 길로 향했다.

 

정상으로 가냐고? 글쎄. 딱히 등산에 취미는 없다.

 

오른쪽 길로 오른 지 약 10분쯤 되면 작은 나무의자가 하나 있다.

 

그 나무 의자 뒤쪽으로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면, 풀과 가지들로 가려져 있지만, 숨겨진 길이 하나 나온다.

 

사정없이 철썩 거리며 내 뺨을 괴롭히는 잎사귀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공터 비스무리한 넓은 공간이 나왔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시원한 밤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드렸다.

 

상쾌한 바람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말려주었다.



이제 공터 적당한 곳에 대충 묘목을 심어두고, 집에 돌아가 찝찝한 옷을 집어던지고 따뜻한 물줄기에 몸을 씻어내고 싶었다.



묘목을 바닥에 내려두고, 적당한 위치에 삽을 가져다 대다가, 이런 산에 내 마음대로 묘목을 심어도 괜찮은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곧 죽을 사람인데 그런 사소한 법 하나쯤은 어겨도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삽을 든 팔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렇게 완만한 땅을 찾아 파내려던 순간이었다.





“.....?”



소리.


아니, 정확히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수풀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누가?


어째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등산을 하는 취미를 가진 괴상한 사람이 아주 우연히 이 곳 근처까지 다가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숲의 경비일지도 모른다.



그런 경비가 만약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늦은 시간에 삽을 들고와서 사과나무 묘목을 심으려는 수상한 남성.



당연히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나는 다급하게 땅을 파던 행위를 멈추고,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겼다.



수풀에 몸을 던지고 나서야 묘목을 감추는 것을 까먹었지만, 적어도 나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저 인기척이 빨리 이곳을 떠나기를 기다리길 수분.


어느새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오고, 거칠게 쉬던 숨이 진정되기 시작할 때 즘.




무언가가 이상했다.


인기척이 멀어지기는 커녕, 이제는 인기척을 넘어 요란한 소리가 반대편 수풀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둔탁한 무언가가 단단한 물체를 두들기는 소리.




저기서 도대체 무엇을?


처음에는 혹여나 내 행위를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던 심정은, 어느새 저 반대편 수풀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커져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경비가 아니고 나같이 어이없는 이유로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면… 누가, 어째서, 왜?



그 뒤로 5분 뒤, 나는 아주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 수풀밖으로 나왔다.



최소한의 소리를 내기 위해 삽은 그대로 내가 몸을 숨겼던 수풀 속에 놔두고, 나는 아주 천천히 인기척이 느껴지던 반대편으로 행여나 발 아래 무언가를 밟아 소리를 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발을 옮겼다.


이상했다.


어째서 나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걸까?


괜히 내 존재를 드러내어 누군가가 나를 발견한다면, 귀찮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 아닌가.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편하게 보내게 될 하루하루들이 순식간에 무너저 내릴지도 모를만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다른 이들과는 깔끔하게 벽을 치고 살아온 내 신조와는 무척이나 다른 행동에 나 스스로도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구차하게 변명을 내어보자면, 시한부 인생으로 돌변하게 된 내 심정이 변덕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어느새 눈 앞을 가리던 수풀과 나뭇가지들을 치워내며 나아가자, 묘목을 심으려던 곳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넓은 공간이 나를 반겼다.


바로 옆 쪽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내가 주변을 슬며시 바라보자, 곧바로 내 신경을 모조리 헤집어버린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여자.


한 여자가 거칠게 삽을 들어올렸다.


이 넓은 공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자라난 나무 바로 밑을 거침없이 파헤치는 실루엣이 보인다.


달빛조차 잘 들지않는 구석에 자리잡아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땅을 파헤치며 나풀거리는 긴 머리카락 때문에 곧바로 여자라 어림짐작 해볼 수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장발의 남성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한 팔다리는 내 추측에 확신을 더해감과 동시에 저런 가느다란 몸으로 용캐 땅을 잘 파내려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팍. 팍.


삽이 움직이고, 흙이 공중에 흩날린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이 한밤중의 어두컴컴한 숲에서 땅을 파고 있는 걸까.


그녀또한 나처럼 “무언가”를 묻으려는 걸까?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 누구도 찾지 않을 어두운 밤의 깊숙한 숲.


그 곳에 무언가를 묻으려는 사람이 보통의 사람인걸까?


오싹. 하며 불길한 낌새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전신에 차가운 피가 빠르게 맴돌며 신체가 움직이기를 재촉한다.



평소와는 다른, 자그마한 일탈은 이제 여기까지가 적정선이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곧바로 떠나서 마저 묘목을 심자, 그리고 집에 가서 어지러웠던 오늘 하루를 갈무리하며 남은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자.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좋은 선택지 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리를 들어,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옮겼다.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어둡고 바닥도 고르지 못한 숲속에서 뒷걸음질을 치는 건 바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상당히 빠르게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탁.


묵직하고 둔탁한 소음이 발뒤꿈치에서 울려퍼졌다.


당혹감을 느낀 내가 곧바로 소음의 발생원을 살펴보자, 미쳐 보지못한 돌덩이가 최악의 형태로 나를 반겼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느껴지는 분노와, 제발 이 조그마한 소음이 미쳐 삽질 소리에 묻혔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금방까지 세차게 움직이던 삽이 멈췄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치솟은 삽을 든 손이 천천히 내려가며 삽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상당히 거칠게 숨을 내쉬는 듯 그녀의 전신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분명 지독한 어둠 덕분에 얼굴조차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어느새 숨을 고른 듯, 잠잠해진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지쳤는지, 살짝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임에도 아주 명확하게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곧바로 뒤돌아 달려가면, 빠르게 도망친다면 얽히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지금까지 수줍게 구름 뒤편에 숨어있던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저 높으신 신께서 신탁이라도 내리는 듯, 은은하지만 강렬한 달빛이 정확히 그녀를 향해 비추어주었다.


처음으로 어둠 속에 숨겨진 모습이 아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첫 인상은, 그녀의 외모가 상당히 앳되어 보였다는 것이다.


긴 속눈썹과 오똑하게 선 콧날 위로 덮여있는 바래진 반창고. 가늘지만 선명한 눈썹위로 그어진 흉터자국. 오밀조밀하지만 푸르게 식어있는 입술.


땅을 파내느라 흙먼지가 얼굴 이곳 저곳에 묻어있지만, 감히 그런 것으로는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고, 아름다운 미모가 눈에 띄었다.


눌러쓴 검정 캡 모자가 거친 움직임으로 인해 반쯤 벗겨져 있으며, 9월 말의 늦가을 날씨를 막아줄 두둠한 후드집업이 눈에 띄었다. 


상당히 더웠는지 양 소매를 걷어낸 상태였는데, 그 위를 수많은 붕대가 뒤덮었다.


신장은 평균은 되는 모양인지, 기대어있는 삽이 어깨 아래정도 높이까지 오는 듯 보였다.


털썩.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순간, 그녀가 기대는 듯 버티던 삽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눈.


눈이 마주친다.


새카만 동공이 흔들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쬘 정도로 늦은 밤에 으슥한 숲속에서 무언가를 묻으려다가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희한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소란스럽게 굴지도 않았고,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는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녀는 그저 천천히. 내동그라진 삽을 스치듯 지나치며 발을 옮겼다.

 

사그락 사그락거리며 발목 넘게 올라오는 잡초들의 허리가 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도대체 왜? 어째서? 라는 생각과,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선택지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저 검은 동공이.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눈썹이. 소름끼치도록 텅 비어있는 듯 한 시선이.


마치 내 전신을 꽉 잡아서 묶어두고 있는 것 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내 앞까지 걸어올 동안,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바로 내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내 발치에서 그 거침없는 걸음을 멈춰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 가까이서 보니, 피부가 더욱 창백해서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인다.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계속해서 아무 말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한 순간 순간이 마치 영원하면서도 찰나 같은 순간들이 여러번 이어졌다,


감각적으로 한 7번 정도 그 순간이 끝난 뒤, 그녀가 쪼그려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공허한 눈동자가 마치 나를 빨아들이는 것 처럼 보였다.


멍해지던 정신이 당혹감을 물들고, 점차 사고회로가 돌아오던 순간.


내 배 쪽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시선을 아래로 숙이자 마치 물감을 잔뜩 칠한 것 처럼 검붉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식칼이 내 옷깃을 스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맥없이 푹, 하고 박힐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식칼이 달빛을 가득 머금어 발하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다시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쉿.”


그녀는 식칼을 들지 않은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5평짜리 작은 방.



그것이 내 첫번째 기억이다.



내 부모님은 소위, 미혼가정이었다.



어린 십대의 성적 호기심과 쾌락. 그리고 그 부산물이 바로 나였다.



아직 학생이었던 어머니는 내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초기에 깨달았으며,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나를 지워야한다며 어머니를 다그쳤다고 하셨다.



그것이 옳았다.



그때의 부모님들은 아직 자신의 앞가림조차 하기 힘든 학생이었으며,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버지였더라 하더라도 당장 지워야 한다는 판단이 옮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지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의 신체를 이어받은 생명이라는, 하찮고 볼품없을 정도의 작은 정 때문이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론이 어떻게 되었든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의 가정에서 나오게 되었고, 어머니는 계속해서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아르바이트를,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는 공사판을 전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아주 하찮고 작은 정 때문에 이렇게나 끔찍한 결과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기 쉬웠을텐데 말이다.



어머니는 나를 키울 때 참 조용한 아이라고 하셨다.



아직 갓난아기임에도 그다지 칭얼거리지 않고 매일같이 잠에 빠져있었다며, 살만했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우리 가정의 소비는 더욱 증폭되었다.



아무리 조용한 아이라고 한들,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침6시에 일어나던 기상시간을 새벽4시로 바꾸셨고, 어머니는 알바 시프트를 더 늘렸다.



그럼에도 형편은 언제나 넉넉치 못했고, 우리는 곰팡이가 슬대로 슬어 눅눅한 향이 진동하는 벽지와 좁디좁은 단칸방에 서로를 부여안고 잠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냥 좋았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내가 어느정도 크자, 어머니는 가끔 공짜로 얻어온 그림책같은 것들을 자기 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읽어주었다..



어머니가 읽어주던 책들은 대체로 밝고, 명랑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 중, 가난한 가족이 고생끝에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를 읽어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책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다른 책 대신 매일 그 책을 읽어달라고 조를 정도였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는 무척이나 피곤한 몸을 이끌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몇번이나 읽었던 책을 마치 처음 개봉한 뮤지컬에 올라간 배우처럼 매일 색다르고 즐겁게 책을 읽어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를 듣다가 잠들다보면, 꿈속에서 그 동화책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나는 동화의 주인공이었으며, 부모님은 주인공의 가족이다.


힘들고 고된 악재에도 굴복하지 않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서, 마지막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성에서 낡은 브라운관 티비의 영화에서나 나오던 맛있는 음식들을 부모님과 실컷 먹으며 행복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꿈들을 꾸면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는 꿈을 품고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무럭무럭 자라 7살이 되었고.



그 해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따로 준비중인 소설의 파트1 부분을 가져와봤습니다.
언젠가 꼭 완성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