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한의사.


친해질 수 있을까?

싸우기만 할까?

만나기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대고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서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기만 할까?


뭐, 그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교통사고 피해자가 드러눕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병원에선

양-한방 의사들이 동업을 하며 협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은?”


“오늘도… 늦을 것 같아. 오전에 학회 가봐야하고. 병원 들어가서 수술 보조 해야해.

3건 예약되어 있어”


“내일은?”


“당직.”


“하아…또?”


“그래도 응급실은 아냐.”


출근준비를 하는 부부가 금주의 일정을 확인한다.


여자도 남자도 흰색 가운을 입는다.

다만. 목적이 서로 다르다.


젊은 나이에도 원장 명찰을 달고 

자신의 한의원으로 향하는 여자는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흰색 가운을 입는다.


아직 전문의가 되기엔 수련기간이 모자란 남자는

병원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고자

미리 흰색 가운을 입는다.


의사는

업무중엔 무조건 흰색 가운을 입는다.

한창 떠들석한 의료법으로 정해진 사안이다.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환자가 의료인이 아닌 사람에게

진료와 처방을 받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기도 하다.



고등학교때 같은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도, 반에서도 서로가 등수를 가지고 다투었다.


남자가 공부하는 시간엔 

언제나 여자도 같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의의 경쟁자 따위가 아니다.

꺾어야 할 대상, 목표, 대적자, 라이벌.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꺾기만 한다면

9등급이라도 상관이 없거늘.


하필 서로가 국내 최상위권의 실력을 가졌을 뿐이다.


호의삼아 건네주는 커피와 카페인음료에도

고깝게 생각할만한 의도와 오해가 담긴다.


‘힘들면 먼저 쉬어라. 난 조금만 더 공부할게’


고등학교 3년동안 하루 24시간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같이 보내는 사람이


가족도, 선생도, 친구도 아니고

이 라이벌이다.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가장 많은 정보를 공유하다보니

감정이 뒤섞이고 뭉치고 흩어진다.


섞이다 흐려졌다 진해지길 반복하다보니

부의 감정이 어느 순간 양의 감정이 된다.


옛날 8비트 컴퓨터에서

-255 까지 내려간 숫자에, -1을 더하면

가장 높은 수인 +255가 되던가?


대학을 들어가기 전부터 연애를 하고.

서로가 지망하는 다른 대학교, 다른 학과에 가서도 연애를 이어간다.


남자는 의과대학

여자는 한의대학


고백을 하긴 했던가?

어쩌다 보니 손을 잡았고, 

문제집 풀다가 입맞춤을 한거 같긴 한데…


변변찮은 데이트를 해보지도 못하고.

대학에 가서도 다시 공부만 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수업을 듣고, 실습을 나가고

카페와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한다.


각자의 과에도 수재들이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시험문제를 공유하지만

두 남녀는 무리 밖으로 삐져나온다.


가장 오랫동안 봐왔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과거의 라이벌과

같이 공부를 한다.


“뭐야. 너네도 해부학 생리학 배워?”


남자가 자신과 같은 교재를 들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뭐 배울 줄 알았는데?”


“음….동의보감?”


“하아…그것도 있긴 한데…”


여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을 한다.

현대의학도 당연히 공부한다.

동의보감도 공부하기는 한다.


자신의 남자친구를 포함한 뭇 사람들이

한의학에 가지고 있는 편견과 상식은

아직도 드라마 허준과 이제마에 멈춰있다.


그 편견을 깨부수자니

허준과 이제마의 이론을 공부하기는 한다.


저 위인들이 있어서

중국의 동의학과 한국의 한의학을 구분지을 수 있고

한의학도 한글처럼 동북공정을 온전히 피해갈 수 있다.


선동은 쉽다.


그 대신

왜 다르고

왜 필요하고

왜 배우는지에 대해 설명하는것은…


하아…


“그냥, 공부나 하자. 커피는 뭐 마실래?”


여자는 변명과 해명을 깔끔히 포기한다.


“에스프레소”


“취향 별꼴이야 정말”


“유럽에선 아메리카노 안마신데”


“그래, 그것도 TV에서 나왔지?”


“유튜브거든! 커피전문가가 그랬어”


여자는 남자에게

숏폼과 도파민중독, 정신의학등

여러 이론을 말해주고 싶지만


자신도 몸에 좋다고 말하기 힘든

당분 가득한 프라푸치노를 먹고싶다.


점원에게 민트초코 프라푸치노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한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처럼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남자와 공부하는데 보낸다.


똑같이 6년의 대학 생활을 보내고

국가면허시험을 볼 때까지는 그랬다.


가장 성적이 좋았던 남자와 여자가

각자 대학의 선발대로 

필기와 실기시험을 보았다.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수령했다.

각자의 학교에서 운영하는 대학병원에 인턴으로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인턴 시절에 

여자와 결혼식도 올렸다.


연애기간이 6년을 넘어가고

알고 지내던 사이는 10년이 가깝다.


고등학교 학부모회의에서 처음 만난 양가 부모들은

자녀들보다 먼저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기도 전에

결혼식 날짜와 신혼여행 장소가 정해진다.


정해진 가게에서 반지를 사고

정해진 샵에서 드레스를 고르고

정해진 집에서, 인테리어만 겨우 고른다.


그래도 행복했다.

행복할 줄 알았다.


항상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거니까.

 

그런데 일이 꼬인다.

그 중요한 시간이 나질 않는다.


한방병원이든 대학병원이든

연령 성별 상황 직업을 불문하고

아픈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전공의 시절을 보내는 동안,

당직 때문에 시간이 갈리고

학회 때문에 시간이 갈리고

주중도 주말도 휴일도 뭣도 없이

현장에 계속 투입되어 환자를 돌본다.


분명히 같은 집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얼굴 한 번을 보질 못한다.


하루에도 수 십번 생각한다.


그냥 다 때려칠까.

면허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어디서든 개원을 할 수 있잖아.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남자랑 오순도순 살아볼까.


하루에도 수 십번 생각을 하는데

주변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


선발대 출신 교내 수석 남녀.

이들이 전문의를 하지 않고

돈을 위해서 일반의나 한다면


대한민국의 의료계의 미래는 어찌해야 하는가?


각자의 병원 교수들과 선배들이

병원도 학과도 학문체계도 다른 양반들이


일목요연하고 똑같은 논리로 두 남녀를 설득한다.


‘조금만 기다려봐. 꽃피는 봄이 온다니까?’


‘꼴랑 면허만 따고 끝낼거야?

 자기 의원에 전문과목 명칭도 달아봐야지’


‘내과 외과는 돈 못벌어. 이비인후과랑 정형외과가 돈을 벌지. 내말 알아듣지?’


‘한의사도 전문의 없으면 돌팔이 약팔이야.

 동네 화타가 그냥 나오는줄 알아?’


이를 악물고

이를 갈면서 버틴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씻고

여자 혼자 킹사이즈 침대에 잠이 든다.


베게를 눈물로 적시고 일어나서

식탁에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하고

사랑한다는 메모를 남긴다.


여자가 나가고 나면

남자가 들어와 샌드위치를 먹고

메모지에 답장을 남기고

아직 마르지 않은 베게를 베고 잠에 든다.


그렇게 4년이 걸렸다.


인턴 1년과 전공의 3년을 보낸 여자가

먼저 전문의 명함을 다는데 성공했다.


한의학의 발전과 미래

의료경험

부와 명성

안정된 직장

나가면 편할줄 아느냐


온갖 감언이설로 한방병원에 남으라는

교수와 이사진의 설득을 단칼에 내려친다.


알음알음 병원에 출입하던 의료영업사원을 

대신 카페로 불러 이야기를 나눈다.


평생을 공부와 일만 해온 여자는 모른다.

하지만 영업사원은 안다.


전문의가 동네에 한의원을 개원하려면

대출을 어디서 받고

건물과 공간을 어디서 구하고

인테리어는 어디서 하고

간호조무사들은 어디서 구하고

광고는 어떻게 하고.

어떤 치료를 해서, 어떻게 건강보험 수가를 타먹어야 하는지.


영업사원을 불러다 놓고 온종일 사업구상을 한다.


돈도 되지 않는 외과에 지원한 남자는, 


인원이 부족하네

정말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네

히포크라테스 선서니 뭐니

선배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외과를 지원한 남자는


아직도 전문의를 달려면 1년의 수련기간과

2년의 펠로우 기간이 필요한 남자는


여자가 개원을 준비한단 이야기에

건성건성 대답했다.


“당신도 이제 원장이야? 축하해”


그리고 쓰러져 잠을 자다가.

밤중에 호출을 듣고 달려나간다.


여자는 개원을 하고

교통사고 환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보험판매원까지 끌여다가 광고비를 찔러준다.


동네 경로당마다 찾아가서

추나치료를 빙자한 허리안마를 

어르신마다 무료로 해준다.


그리고 한마디 더한다.


‘더 해드리고 싶은데, 장비가 없네요.

 저희 가게에 오시면 저렴하게 해드릴게요’


선배 한의사들 덕분에

침술과 추나와 첩약이 건강보험대상이 되었다.

여자는 의료영업사원의 말대로

가진 혜택을 최대한 활용한다.


개원 2달만에 새 차를 뽑았다.

여자의 의원도 정상궤도에 오른다.


한의원의 광고는 인터넷에 하는게 아니다.


전단지를 경로당과 등산로 입구에 걸어라.

자잘한 것들은 무료로 풀어라.

어르신들이 하는 이야기는 

세시간이고 네시간이고 가만히 들어라.

잔돈을 챙기단 큰돈 못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영업사원의 이야기를

여자는 드디어 몸소 깨닫고 있다.


‘참한 처자가 새로 한의원 열었는데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치료도 잘 해주고

 약도 세게 잘 타주더라’


경로당의 입소문이

할머니들과 할머니들 사이를 타고 흐른다.


자주 오는 할머님들에겐

호칭을 바꿔부른다.


“언니 왔어? 오늘은 어디가 아프세요?

 저번에 수술한 고관절?”


“아휴 말도마, 수술한데가 꿈쩍도 안하는데…”


“침 놓고 부항 떠드릴게요.

 언니 소화는 잘 되요?”


“긍께… 어제 아들내미가 고기 사준데서.

 많이먹었더니 속이 더부룩 한것이…”


“잠깐 여기 누워봐요.

 어우 가스 찬 거 봐.

 안아파요?


“아..아. 아프다. 아프다”


“소화제도 하루치 드릴테니까

 계속 아프면 내일 또 와요?”


“그려 그려. 처자가 참 참하네.

 결혼은 했어?”


“언니도 참, 결혼 한지가 언젠데요.

 여기봐봐요. 결혼반지.”


“어머, 그라네. 애는?”


“애는…”


“안적 없어?”


“남편이 잘… 집에 안들어와서요”


“하이고. 애는 빨리 낳아야지.

 내처럼 쭈그렁 할매 되가지고 학부모 회의 나갈라고?


 남편은 뭣하는디?”


“남편도 의사에요.”


“허매. 양의사?”


“...네.”


“거 참, 돈 잘벌어와봣자 집에 코빼기도 안보이면

 남편이고 나발이고 암 짝에도 쓸모가 읎다니까.”


“어머, 의사선생님 결혼 했슈?”


이제는 다리에 침을 맞던 옆자리 할머니가

이야기에 껴든다.


“긍께, 결혼했는데 애가 없다잖여.

 남편이 집을 안들어온댜.”


“뭐시라꼬? 남편이 뭘하는디?”


“의사여 양의사”


“우짤라고 집에를 안겨들어와.

 우리 서방은 만날 집에만 있어서 속이 뒤집어지는데”


“서방 아직 살아있어?”


“잘 살아있지. 안적도 안죽었지라”


“그래도 건강해서 다행이네”


“꼴픈지 께이트볼인지 하다가 허리아프다고 그래가꼬. 한의원 같이 와보재도

 죽어도 안온다잖여.


하이고, 남정네가 언제쯤 여편네 말을 한 번이라도 쳐들어볼까”


“그니께말여. 우리 서방도 끊으라케도 담배만 꿈뻑 꿈뻑 펴대다가 폐암으로 죽었잖여 ”


“하하하…언니들도 참.”


여자는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요즘엔 좀…괜찮아?”


출근을 준비하는 남자와

같이 개원을 준비하는 여자.


여자의 한의원은 남자의 출근시간에 맞추어 영업을 시작한다.


“뭐…괜찮아. 오늘은 수술도 없고.”


남자의 초점이 공허하다.

뉴스에서 연일 난리다.


간호사의 의료 파업이 끝난지 몇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의사가 파업을 한다.


모양새도 대동소이하다.

간호사들은 처우 개선과 환자를 위해서 파업하고.

의사도 처우개선과 환자를 위해서 파업한다.


다른점이 있다면

간호사들은 다른 의료인과 의료기사들과 마찰을 빚었다면

의사들은 정부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마찰을 빚는다.


모든 사람들이 의사의 배가 쳐 불렀다며 욕한다.

정치, 경제, 언론, 대중이 한 뜻으로 모여

의사를 까내리고 욕한다.


의사들은 그럴수록 똘똘 뭉친다.

의사협회와 교수들이 연일 대학병원에 방문해서 연설과 선동을 한다.


그리고, 젊고 힘없는 전공의들에게

파업을 종용한다.

면허도 없는 대학생들에게 수업거부를 종용한다.


나이가 있는 자신들이 파업하면

약발이 안먹힌다나 뭐래나.


최소한의 인력을 남긴 채 파업을 하기도 하고.

무턱대고 전공의 전체를 파업시키기도 한다.


병원에 출근하지 않는 대신

온갖 시위현장과 세미나에 불려나간다.

의사협회 간부들의 연설에 맞추어 시중을 든다.


다 의료시장의 미래와

전공의들의 미래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며

핏대를 세운다.


전문의를 시키기 위해 설득하던 말들을

아직도 남자는 교수들에게 듣는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한거다’


밖에서 의사라고 신분을 밝히면 욕이나 푸짐하게 먹는다.

흰색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하지만 입지 않으면 선배네 교수네 하는

개원의들의 욕을 한다.


‘의사 면허가 부끄러워?’


자기들은 뭣 하나 손해보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은 이권마저 포기하지 못해 핏대를 새운다.


남자의 전문의 면허 취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 말대로라면

전문의만 따면 개원을 할 수도 있고.

대학병원에서 진료실 하나를 배정 받을 수도 있고.

제약회사나 바이오회사의 연구소에 억대 연봉으로 채용될 수도 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이야기를 믿으며

6년을 버텨왔다.


“오늘 일찍 들어오지?

오랜만에 저녁 같이 먹을까?”


“아냐… 당신 먼저 먹어.

밤늦게 들어올거 같아. 먼저 자.”


“그..그래. 몸 조심하고”


한의사협회에서 무책임한 양방의를 욕하는 성명을 냈다.

비슷한 내용의 공문이 여자네 한의원에도 내려왔지만. 여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의사의 이권이나 행태나 명분에 큰 관심이 없다.

그냥. 빨리 해결되어 남자가 제때 집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여자가 뽑은 차를 몰고

남자를 대학병원에 내려주고.

여자도 자신의 의원에 가려는 찰나.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돌아온다.

차 문을 두드린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오늘부터, 무기한 파업이래”


“이미 파업중이잖아”


“나도 나오지 말고, 집에서 있으라네”


“정말? 언제까지?”


“정부하고 협상할때까지.”


“자..잠깐만 기다려봐.”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건다.


“아. 김쌤? 네, 오늘은 임시휴업할게요.

팻말에 오늘 진료 안본다고…


네. 네. 갑자기 그래서 죄송해요.

네. 부탁드려요.


음.. 일주일?  

일단요. 그러죠. 급여는 그대로 드릴게요.

다른분들에게도 전달 부탁드려요.”


“당신… 뭐해?”


“오늘부터 휴가다!”


“뭐? 의원은 어쩌고”


“내가 사장님이야. 어쩔건데?”


“...”


“자, 선생님. 어서 차에 타세요

 도시를 탈출하자구요”


남자가 안전벨트를 매고

여자가 라디오로 노래를 챃는다.


학창시절 듣던 클론의 도시탈출을 튼다.


“떠나요. 푸른 바다로~”


“언제적 노래야”


“당신은 이노래 몰라?”


“아니. 하하.. 알긴 하는데.”


“룰루랄라 룰루랄라 벗어 던지고”


“지금 이 일상에서 벗어나~”


—--


“의원 한 일주일은 닫아 놨으니까.

 우리도 길~~게, 머~~얼리 다녀오자.


 뭐 하고 싶은거 있어?”


“글쎄… 잘 모르겠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생각해봐, 얼마 없는 기회잖아.”


“그냥 아무것도 없는데서… 편하게 쉬면 좋겠”


[지이이이잉]


남자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수신된다.



[금일 파업에 참여한 전공의들은

즉각 수련 병원에 복귀하시길 바랍니다.

-보건복지부]


[전공의 여러분! 국가의 협박에 굴종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투쟁은 협상이 끝날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대한의사협회]



“하하…뭐 어쩌라는거야 씨발.”


남자가 고개를 쳐박고 욕지거릴 내뱉는다.


평생을 남의 선택에 따라 살아왔다.

공부도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대학도 주변 어른들이 골라주는 곳으로 갔다.

결혼도 신혼여행도 정해주는데로 하고

전문과목의 선택과 파업의 참여도

모두 선배와 교수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는 서로 상충되는 명령이

남자의 핸드폰으로 수신된다.


한 쪽은 당장에 병원으로 나오라 그러고

다른 한 쪽은 나오지 말라 그런다.


뭐가 옳고 그른지도 모르겠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아픈 환자들?

당장 죽겠는건 자신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핸드폰 줘”


“응?”


여자가 조수석의 남자에게 손을 뻗는다.


“핸드폰 내놔. 얼른”


“어어..”


남자의 스마트폰을 뺏어든 여자가.

차량의 창문을 연다.


고속으로 달리는 창문의 밖으로

휴대폰을 집어던진다.


“당신 뭐하는거야?

연락 오면 어쩌려고.”


“저런거 신경쓰지마. 알았지?”


“아니. 그래도…”


“생각해봐.

 우리 결혼하고나서

 제대로 같이 있던 적이 얼마나 있었어?


 그냥 즐겨. 괜찮아.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잖아.”


“...”


“당신, 오늘 뭐하고 싶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어떻게?”


“아무도 없는데서. 그냥 가만히 쉬고싶어.”


“강원도로 가자! 거기서 텐트 하나 펴놓고.

 물종고 공기좋은데서

 고기나 구워먹고”


“우리 아무것도 없는데?”


“가면서 사면 되지.

 그깟 텐트 얼마나 한다고”


“정말?”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도 신경쓰지도 말고

우리 둘이서만 있는거야.”


여자는 영동고속도로를 향해 차를 몬다.



“남정네가 힘아리가 이리 없어서 우짤꼬.

 텐트 하나도 못펴서 언제 밥먹을래?”


“그러니까 내가 원터치로 사자 했잖아”


“바람 훅 불면 부러지게 생긴걸 왜 사?

 일주일은 쓸건데 튼튼하고 큰걸 사야지”


티격태격 뚝딱뚝딱

둘이서 큼지막한 6인용 리빙쉘 텐트를 친다.


캠핑용품점에서

텐트와 의자부터 식탁과 아이스박스까지 사고.

농협에서 돼지고기가 소고기를 쓸어담고.

트렁크도 모자라서 뒷좌석에 숯과 맥주를 한가득 싣는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초보 캠퍼들은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아. 김치 안샀다.”


“그냥 먹자. 다 귀찮다.”


“맥주는 많으니까. 마셔 마셔. 짠.”


천날만날 환자들에게 술과 고기를 줄이라 말하는 의사들이


캠핑장에서 술과 고기를 들이붓는다.


“하아…좋다.”


“그러게. 너~~~어무 좋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격정적으로 아무 것도 하기 싫다.”


평일 캠핑장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남자에겐 핸드폰도 없다.

누군가 의사라고 알아보지도 않는다.


매일같이 사람들에게 치어 살았는데

이곳에 사람이라곤 캠핑장 관리인 한 명 뿐이다.


하늘이 높고

나비가 날고

새가 지저귀고

녹음이 저 멀리 산자락까지 펼쳐진다.


“고마워”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뭘. 이정도 가지고.”


“사랑해”


“이 사람이. 술 벌써 취했어?”


“그냥. 당신말대로, 

당신하고 이렇게 이야기 해보는게 얼마만인지.”


“흐음. 고마우면, 어깨좀 주물러봐.”


“저… 선생님, 전 물리치료사가 아닌데요?”


“누가 의사선생님한테 시키는줄 알아?

 남편한테 시키는거잖아.

 빨리. 사랑하는 만큼 꾹꾹 눌러서!”


“하아. 이쪽으로 돌려보세요”


“개원의가 편할거같지?

 아. 거기. 살살. 살살. 아파.

 맨날 어르신들 집안이야기나…


 아. 아..아앗. 으흣.”


“쫌!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밖에 다 들린다.”


“추나 하고, 부항 뜨고. 

 아 거기. 거기. 좀만 더 아래.

 그게 다 어깨 허리 힘으로

 거기. 거거거. 거기.

으…으으으읏. 으흥”


멀리서 들썩이는 텐트와 야릇한 신음소리를 듣는 캠핑장 관리인은 혀를 쯧쯧 찬다.


평일 대낮부터, 그것도 야외에서. 

경우가 없기는.



3일째.


“연락온거 없겠지?”


남자는 물이 끓는걸 기다리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없을거야. 있으면 또 어쩔건데?”


“뉴스기사에선 뭐래?”


“똑같지. 최후통첩이다. 복귀해라.”


“협상은?”


“아무것도 안됐네요.”


“하아…”


“신경 하나도 쓰지 마.

 다음주에 내가 병원 데려다 줄테니까

 알았지?”


“이러다 대학병원에 잘리는거 아냐?”


“퍽이나. 당신 자르면, 당신 일은 누가 하고.

 정형외과 지원자는 있데?”


“...”


“아무 일도 없어. 괜찮아.

 의사협회에서도 쉬라 그랬다며.”


“그렇긴 한데…”


“벌써 휴가 3일째라고!

 빈둥빈둥 아무것도 안해야 하는데

 벌써 절반이 지났단말야.

 억울하지도 않아?”


캠핑은 놀랍다.

놀라울정도로 시간이 잘 흘러간다.


뻣뻣한 텐트 안에서 기지개를 편다.

아침엔 귀찮으니까 라면을 끓여먹고.

설거지 하고 커피 한 잔 하고.

멍하니 있다 보면 점심 먹을 시간이다.


돼지고기를 숯불에 굽고

대낮부터 맥주를 한 잔 걸치고.

또다시 쌓인 설거지를 니가하네 네가하네

미루고 미루다가 낮잠을 자고.


다시 눈을 뜨면 해가 져간다.

저녁을 뜨끈한 국물에 소주를 한 잔 걸치고.

한 명은 설거지감에 비누거품을 묻히고

한 명은 헹구길 반복한다.


돌아가면서 샤워를 하고

갈아입을 속옷과 수건을 빨고 널고.

불멍이나 쬐면 사르르 잠이 온다.


아무것도 안하고

밥먹고 자기만 하는데 시간이 숨풍숨풍 지나간다.


여자는 억울하다.


“아직 절반이나 남았잖아.”


“그래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요”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본다

커피 잔을 들고. 여자가 남자에게 기댄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컵에 물이 한모금이나 남았네”


마지막 휴가 아침,

입이 대빨 나온 여자는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얼른 먹자. 퇴실시간 얼마 안남았어.”


텐트를 접고, 쓰레기를 버리고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기 까지 해야한다.


도로 한가운데 굴러다니고 있을 핸드폰을 대신할

새로운 스마트폰도 하나 사야한다.


“하아. 일하기 싫다.”


“사장님. 가게 대출금이…”


“그만! 제에에발 휴가 마지막날에 그런이야기는 그만!”


여자는 컵라면 앞에서 오열을 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보며 웃는다.


정부의 최후 통첩 기간이 한참을 지났다.

협상의 결과가 어떠한지도 모른다.

남자는 이제 이런 파업에 관심이 없다.


개원을 할 지도 모르겠고.

대학병원 진료실이나 배정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전공의 신분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돈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고.

의사 면허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어쩔건데.

휴대폰은 잃어버렸고.

머리가 아파서 요양차 아내랑 1주일만 캠핑다녀왔다고.


감봉이든 뭐든 감내해주겠다.

꼬우면 자르시던가.


대기인원이 많고 경쟁률이 높은 내과나 피부과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정형외과다.

그나마 24시간이 비상대기인 흉부외과가 아니란 점에서 

환자에 대한 죄책감도 적다.


응급환자는 잘난 교수님들이 알아서 처치했겠지.


당당하게 출근해서

시말서부터 반성문까지 써 내고

일년 정도만 버티면 된다.


지금도 운전석의 아내가 말한다.


“괜찮아. 별 일 아냐”


남자는 혼자가 아니다.


—-


출근준비를 하는 부부가 금주의 일정을 확인한다.


여자도 남자도 흰색 가운을 입는다.

다만. 목적이 서로 다르다.


젊은 나이에도 원장 명찰을 달고 

자신의 의원으로 향하는 여자는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흰색 가운을 입는다.


아직 전문의가 되기엔 수련기간이 모자란 남자는

병원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고자

미리 흰색 가운을 입는다.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여자가 남자의 등을 두드린다.


보건복지부 협박성 공고는 보았다.

그나마 다행히 의사면허를 뺏기지 않았다.


끝까지 파업에 동참한 전공의 56명.

대한의사협회에선 이들을 장렬한 죽음을 선택한

의사와 의인으로 포장한다.


다행이 명단공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

처벌도 문책도 결정된 사안이 없다.


여자는 남자를 병원 앞에 내려준다.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는 터덜터덜. 대학병원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남자를 잠시 지켜보다가

자신의 의원으로 향한다.



“어머나. 오늘은 열었네?

 의사가 병원은 안열고 어딜 싸돌아 댕긴겨?”


단골 할머님 한 분이

아침 댓바람부터 한의원 문을 연다.


“안녕하세요~ 남편이랑 잠깐 여행좀…”


“그 의사한다는 남편?”


“맞아요. 언니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세요?”


“기냥. 잘 살아있나 궁금해서 와봤제.”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조오치.”


의료영업사원의 조언.

작은 돈을 아까워하지말고

어르신들 말씀은 세 네시간이라도 들어라.


여자는 돈도 내지 않는 첫 손님에게

커피를 내어준다.


“어디 댕겨 왔어?”


“강원도요. 물 맑고 공기좋은데.”


“흐미. 내는 산자락은 이제 징글징글혀다.”


“언니 고향이 어디신데요?”


“저짝에, 철원. 쌀농사만 짓다가 상경해서 미싱돌리고. 남편 만나고, 애 낳고”


커피 한 잔에 할머님의 인생사가 줄줄줄 흘러나온다.


1주일동안 쉬었더니 손님이 그새 뚝 끊긴다.

한참이나 있다가 두번째로 온 손님은…


“여…보? 병원은?”

황망한 얼굴의 남자가 가운도 벗지 않은채로

여자의 한의원 유리문을 밀어서 연다.


“잘렸어. 나.”


“뭐? 그게 무슨소리야”


“복귀 안한 전공의들은 병원 나오지 말라네.

 전문의까지 1년 남았는데.

 이제 다 끝이야.”


“이리 와서 앉아봐. 서서 있지말고”


“의협도 연락했는데, 해줄게 없데.

 우리를 팔아서, 지들만 산거야.”


“괜찮데두. 의사면허가 없는것도 아니잖아.

 그냥 외과 하나 열어서…”


“개원도 못해. 

 보건복지부에서, 마지막 56인은 끝까지 추적 할거래… 개원 못하게…”


전문의도 아닌 일반의가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다.


하나는 개원의.

잡다한 진료과목의 의원을 열어서.

비급여 미용 시술이나

수가가 높은 주사처방이나 하며 돈을 번다.


목이 좋고 실력이 쌓이면 돈을 쓸어담는다.

건강보험 재정을 벗겨먹고

보험사 실비보험 상품을 벗겨먹는다.


사회에 축적된 의료 재정 자체를 야금야금 벗겨먹으며 부를 축적한다고 욕을 먹지만

한 달동안 벌어들이는 소득은 대학병원 교수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다른 하나는 페이닥터. 월급쟁이 의사.

일반의는 종합병원에서 진료실 하나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응급실, 야간병동, 요양병원 등등

의사 자체는 필요한 현장이 많다.


일은 많고 몸은 힘들고

급여도 그리 많지 않은

지금까지의 전공의와 다를 바 없는 생활.


한적한 시골에 노인들 노령연금을 벗겨먹으며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는 요양병원에 취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가 이미 이 도시에서

대출이 한가득인 상태로

개원의를 하고 있다.


자신에게 남은 선택지가 없다.

병원에서도 쫓겨나고

의사협에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갈 곳이 없어서 여자의 한의원으로 들어온다.


눈 앞이 깜깜하다.


“어쩌지…어떡하지?”

남자가 눈물을 뚝 뚝 뚝 흘린다.


6년의 개고생이 헛짓거리가 되었다.

남자는 의사면허만 반짝이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도 마음이 착잡하다.

안일하게 자신이 버려버린 핸드폰이

나비효과가 되어 남자의 인생을 부수어버렸다.


저 착해빠진 남자는 그럼에도 아내 탓을 하지 않는다.


남자를 먹여살리는 것 쯤이야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남자에게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짜서 여자 일이나 도우면 쓰것네”


커피를 홀짝이던 할머님이 말을 얹는다.


“네…네?”

훌쩍이던 남자가 할머님을 쳐다본다.


“사내가 울기만 하고 자빠져 있으면 쓰나.

여기 한의원에 엑스레이라도 찍어주면 되것구만.


나가 여기 고관절 수술한게 아파 죽겄는디

엑스레이 찍을라면 딴 병원 가야 한다잖여”


“어..언니..”


“여기서 남편이 그거 해주면 쓰것네.”


남자의 얼굴이 구겨진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의사다.


여자를 무시하는건 아니지만

한의학 커리큘럼의 전문성과 수련기간은

현대의학에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

여자가 전문의를 하고 개원을 하는동안에

자신이 아직 수련의 신분인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현대의학은 수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여서 완성시킨다.


간호는 간호사가

잡무는 간호조무사가

의료기기는 의료기사가

그리고 진료와 처방은 의사가

약은 약사가


의료기사가 하는 일을 의사가 할 수는 있지만.

의료기사나 하는 일을 굳이 자신이 할 필요는 없다.


“언니…정말…”


남자의 반응을 보고

여자가 한달음에 할머님에게 달려간다.


6년의 세월과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의 된 남자에게


여자네 병원에서, 그것도 한의원에서

의료기사들이나 하는 엑스레이 촬영기사를 하라니.


정말…



“언니 천재야? 대박. 나 그런 생각도 못해봤는데.

그래. 그러면 되겠다.


언니도 여기서 엑스레이 찍구.

아픈데 콕 찝어서 내가 침도 놔주고.

여차하면 스테로이드 주사도 우리가 놔주고”


“으이? 그거 여기서도 놔줄 수 있어?

 정형외과 가면 그 주사 하나를 못놔준다고 

 을매나 어깃장을 놓던지”


“우리남편. 외과의잖아. 그런거 잘해.

그치. 여보?”


“어…어?”


“봐봐 할 수 있다잖아.

이럴게 아니라. 영업사원 불러봐야겠다.


언니. 정말… 정말 고마워


나 방금까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무너지긴 뭘 무너져

 나가 625때 엄니 손잡고 철원에서 부산까지 걸어갔다 왔잖여. 

 암것도 아녀 이런거”


할머님의 여자를 보고 씨익 웃는다.


“대출은…어쩌고. 그 엑스레이 기계가 얼만데.”


“얼마 안해. 1억이면 사잖아

 빨리 그 의료기사 불러봐야겠다.


 언니 커피 한잔 더 타드릴까요?

 아니면 침 맞으면서 잠깐 쉬고 있을래요?”


“아까 고관절 말한데가 아픈디…”


괜찮다던 양반이 그새 골반에 손을 짚는다.


“김쌤! 여기 손님 핫팩 먼저 준비해주세요~”


여자는 간호조무사를 크게 부른다.

남자를 진료실로 끌어당겨 앉힌다.

의료영업사원 전화번호를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건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급해서 그러는데.

 오늘 와주실 수 있으세요?”


[어…오늘은 좀 힘들구요. 뭐때문에 그래서요?]


“빨리요. 엑스레이 기계 저희가 한 대 살게요.

새걸로. 취급하시죠?”


[그거 한의원에서는 못쓰잖아요. 아시면서]


딱 봐도 영업기사 목소리가 건성이다.

어디서 대리수술이라도 하는건지

여자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편이 외과의에요. 의사. 면허도 있어요”


[어.. 원장님. 제가 금방 갈게요.

 1시간이면 도착할거 같은데.]


“30분 드릴게요”


[네 네. 30분만에 갈테니까.

 다른 영업사원 부르지 마시고. 아셨죠?]


“30분만 기다릴거에요. 

아니면 다른 회사 전화번호 찾을겁니다”


여자의 눈이 반짝반짝 거린다.

남자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거?

의료협회의 꼬리자르기?

파업? 정부지침? 의료법 개정안?

밥그릇 싸움? 수가? 필수의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이 자그마한 의원에서

남자와 다시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고등학교때도 항상 붙어서 다녔다.

대학교때도, 같은 카페와 도서관을 다니며 붙어다녔다.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 까지만 해도

꿈같은 결혼생활을 즐길 줄만 알았는데.


나이가 먹어갈수록 남자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만 한다.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다시 예전처럼 돌릴 수 있다.


남자와 같이 흰색 가운을 차려입고.

아침에 같이 이 의원으로 출근해서


남자가 엑스레이를 찍고, 소염제와 주사제를 처방하고.

여자가 침을 놓고, 부항을 뜨고. 추나치료를 하고.


세가 커지면 도수치료를 하는 물리치료사를 들여놔도 좋고.


저녁이 되면 같이 셔터를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길에 데이트를 즐기고.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든다.


48시간 72시간을 남자와 같이 붙어다닐 수 있다.

꿈만 같았던 강원도에서의 캠핑을

평생토록 이어갈 수 있다.


“자..자기야.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볼게.

이렇게 무리해서 할 필요 없어.


다른 병원에서 전공의로 받아줄 수 있는지 알아보고…”


“괜찮다니까! 뭐하러 전문의 힘들게 달어.

그럴필요 없어”


“그래도. 당신한테 기대기만 하면…”


“남자가 쫑알쫑알 시끄럽네. 괜찮다니까?

 여기 손님이 하는 말씀 못들었어?


 그쵸? 언니? 남자는?”


여자가 진료실에서 큰 소리로 할머님을 찾는다


“어무이! 마누라! 그…뭐시다냐.

그래 네비게이숀!”


고관절을 핫팩으로 지지던 할머님이 당당하게 소리친다.


“맞아요 어르신. 남자는 세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된다니까요.”


핫팩의 위치를 조정하던 김쌤도 한 마디 거든다.

원장님에게 잘 보여서 나쁠건 없다.


“...”

주변 여자들의 합동 공격에

남자가 할 말을 잃는다.


나중에 동기들이 보면 뭐라고 말할까?

아내가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엑스레이 기계나 다루고 주사제나 처방한다고.


남자는 모른다.

10년 쯤 뒤에는 남자의 가구 소득이

전문의가 된 동기들 서너명은 합친 것보다 많아질 것이란걸.


모두가 한무당과 결혼한것도 모자라

한의원에 엑스레이를 집어넣는 도구로 전락한 남자를 욕하면서.


예쁘고, 능력좋고, 돈 잘벌고, 개원의에, 

남편을 힘들게 부려먹지도 않는 아내가 있는

그런 남자를 부러워 한다는걸.


남자는 모른다.

언제나 자신의 인생은

지금처럼 남이 결정해준대로 살아가니까.

남자는 지금의 선택이 바른 결정인지 분간의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