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






"...어이 레오나르도, 저걸 봐. 굉장한 석양이야."



"정말이야...굉장한 색이로군."



""마치.....""






씨발.


두창 드리프트. 다른 말로는 BL 드리프트.


독자를 좆으로 아는 개호로씨벌러매새끼들만 한다는 뒤통수치기다. 그리고 그걸 내가 당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별것 없었다. 귀족 망나니로 살아가는 주인공 릭 로크. 신분 외엔 아무것도 없는 무지렁이지만 각종 사건사고를 겪으며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었다...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약간 모자란 양아치에서 영웅으로 칭송받기까지, 그 과정에 가장 많이 기여한 건 단연코 릭의 소꿉친구인 베라 알브레다.


베라 알브레, 주황색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미녀, 귀족 딸내미이자 경영/행정/회계에 조예가 깊으며 마법과 검술도 잘 하는 문무재색겸비의 엄친딸.


그러면서 귀족 특유의 오만함도 없고 소꿉친구인 릭을 어떻게든 사람 노릇하게 만들려고 동분서주하는 착한 성격이다.




그리고 릭 개새끼는 최종 보스전을 앞두고 너무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서 베라 너를 여자로 보기 어렵다는 말로 히로인에서 탈락시켰다.


아 참고로 이 씹새는 이 말을 할 때 이미 베라랑 섹스를 3번은 한 상태였다. 이유는 가관이다.


'너는 내게 너무 과분해' 이게 독백이었다. 이미 할 거 다한 새끼가 지랄. 이때 크게 불타서 어지간한 독자들은 다 떠났다.


정실 경쟁에서 승리해서 유일하게 몸까지 겹친 히로인을 갑자기 유기한다? 나는 그래도 결말엔 다시 연락을 이어 해피엔딩을 맞을 거라고 믿었다.


억지 감동을 위한 빌드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설마 했던 내 기대를 멋지게 깨부쉈다. 아니 하다못해 이전에 탈락시킨 히로인을 가지고 오든가.


릭은 자신과 함께 최종 보스를 물리친 친구 '레오나르도'와 함께 전우애를 나누길 택했다. 여태까지 여캐들한테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두근거렸다는 묘사는 어디로 팔아 처먹었을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베라를 탈락시켰을 때 이 소설은 좆망했다. 나만이 홀로 불타버린 세계에서 구원을 찾고 있던 것이다.


베라는 크든 작든 항상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따라간다는 설정이 있었는데, 향후 릭과의 결혼과 자식 계획을 불태우면서 우는 장면은 내 가슴도 불태우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암이 나았습니다.]


[저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그전에 퀴어축제에서 뜨거운 하룻밤 보냈던 사람입니다. 연재하신다던 작품이 이 작품이었군요.]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지금 항문 파열 때문에 수술받느라 외전 연재는 지연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 패드립과 상스러운 쌍욕으로 댓글창을 테러한 끝에 작가로부터 연락이 날아왔다.



[고소해버리기 전에 그만하십쇼. 강력히 경고합니다.]


[고소 넣어라 시발놈아. 우리 아빠가 검사다. 개새끼야.]



우리 아빠는 실제로 검사다. 학교 짼 거 걸렸을 때 죽도로 죽도록 처맞았었지.



[구매내역 보내주시면 개인 계좌로 환불해 드릴 테니 그만하시면 안됩니까?]


[내가 지금 그 돈 때문에 이러는 거 같냐? 내가 시발 주변 애들한테 재밌다고 영업질까지 했는데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든다 이 시발럼아. 하나만 묻자. 대체 왜 그랬냐?]


[나는 그저 성 정체성을 늦게 깨달았을 뿐이야...]


[개새끼야. 엔딩을 이따위로 쳐낼려고 베라를 그렇게 보냈냐. 시발 좆같은 똥게이새끼]


[말 좆같이 하네. 베라가 그렇게 불쌍해? 그럼 니가 가져]



이 메시지를 끝으로 작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씩씩대며 겨우 잠에 들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한때의 정실 캐릭터, 베라 알브레의 하인이 되어있었다.




*




'이거, 알브레 가문의 문양이다.'


낯선 풍경. 내 기억엔 없는 장소.


그리고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나.


그 옷에 붙어있는 배지의 문양은 베라의 일러스트에 나온 것과 동일했다.


'그렇게 불쌍하면 네가 가져'라더니 이곳으로 떨어뜨린 건가.



"아이크, 응접실로 다과를 가져오세요."



"..."



"아이크?"



누군가가 등을 툭 치길래 뒤돌아봤더니, 대단한 미녀가 있었다.


어버버하고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이 여자가 다시 한번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 아닌가.



"아이크!"



"...저 보고 말씀하신 건가요?"



"어디 아픈 건가요? 지금 손님이 와 계시니, 응접실로 다과를 가져오세요."



"네..."



얼굴과 옷, 그리고 말투를 보아하니 이 여자가 베라.


그리고 반응을 보아하니 이곳에서의 내 이름은 아이크. 아마 소설에서 딱 한 번 나왔던 이름일 거다.


따지고 보자면 빙의된 건데도 내 얼굴 그대로인 걸 보니 아무런 설정이 없는 엑스트라 그 자체인 것 같다.


일단 길거리에 떨어진 것보단 백배 천배 낫다. 이곳의 정보를 수집해 보자.




*




베라. 내가 좋아한 히로인. 소꿉친구 릭에게 헌신하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끝내 버림받은 히로인.


릭이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인 말을 혼자 착각해서 가슴 설레하고, 아파하는 캐릭터이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베라는 자기보다 부족한 남자에게, 나는 나보다 뛰어난 여자친구에게 헌신했다는 것.


...씨발년. 존나 사랑했다...ㅠㅠ


어쨌든 베라는 릭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물심양면 지원하여 릭을 성장시킨 지고지순한 히로인이다.


그러나 릭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개 같은 년이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차가 밍밍하네요. 몇 년을 일했는데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해요?"



"저번에 밍밍하다고 했더니 이번엔 쓰게 탔네요? 지금 시위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내가 차를 타 봤어야 알지...



"여긴 청소를 하지도 않았네요. 일하기 싫어요?"



"눈빛 봐라? 한대 치겠어요 아주?"



'후...썩을 년...'



소필패라는 용어를 아는가? 소꿉친구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얘기다.


베라가 히로인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 소필패 클리셰가 깨졌다며 독자들이 환호했고, BL 드리프트를 했을 때 소필패는 과학이라며 분탕들이 출몰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릭은 어쩌면 이년의 본성을 알고 거리두기를 시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아...릭,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또 멍 때리네. 왜 그래요 요새? 몇 주 전까지는 시키는 대로 묵묵히 잘만 하더니."



아무런 설정이 잡혀있지 않은 엑스트라. 특징이 없으니 눈에 띌 일도 없지만, 그렇기에 일을 눈밖에 나지 않을 만큼은 했다는 뜻인가.


대충 그랬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지랄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이년 말을 들어보니 이전까지는 완전히 로봇이었던 것 같다.


잘하던 놈이 갑자기 반항기 보이고 일 좆같이 하면 빡치겠지. 아무튼 이렇게 깨지면서도 나름 수확은 있었다.



'지금 시점은 소설의 초반부다.'



베라가 릭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일단은 소꿉친구이자 미래의 사업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릭에게 빠지게 되는 계기는 릭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시험을 치르다 조난 당했을 때다.


그리고 일주일 뒤면 아카데미로 들어가게 된다. 다행히 나도 따라간다.


이년이 그래도 나름 정은 있는 건지 나를 쫓아내진 않았다.


짜증나지만 그래도 좋아했던 캐릭터고, 여기서 쫓겨났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이 녀석의 비위를 맞추는 것? 한국 군대에서 간부랑 선임 눈치 보는 것보다야 할만하다. 왜냐면 얘는 몸뚱이가 하나니까.


그리고 돈도 생각보다 잘 준다. 내가 복역...아니 복무했을 때 병장 월급이 최저시급 반의 반도 안 됐던걸 생각하면 적어도 한국 군대보단 상식적인 곳이다.




*




귀환 스크롤을 찢어먹어서 조난당하는 일을 방지했다. 베라 짐에다가 한 장 몰래 챙겨놨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아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던데 하기 싫으면 걍 하지 말지.


아직 이 정도로 안심하긴 이르다. 지금은 미연시로 치자면 호감도 상승 이벤트 하나만 날린 꼴이다.


얘가 릭을 친구로 여기는 이상 계속 붙어 다닐거고 그럼 이후의 이벤트를 겪으면서 호감도가 늘어나게 될 거다.


일단은 계속 이벤트를 분쇄해야 한다. 마치 지금처럼...



"...왜 끼어들었어요?"



"모시는 주인을 지키는 게 하인의 의무입니다."



"그래도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건데..."



릭이 아카데미의 양아치와 시비가 붙는 이벤트 분쇄.



"어머멋!! 도둑이야!! 끼야아악!!!"



"으악!!"



도둑 이벤트 분쇄.



"어이구. 마침 마차가 부서져서 말을 직접 타고 가야 되는데..."



"제가 돌아올 때 쓰려고 산 스크롤이 있습니다."



승마 이벤트 분쇄.



많은 이벤트를 분쇄했다. 여전히 베라는 릭을 그냥 물가에 내놓은 애새끼처럼 보고 있다.



"흐응~당신. 준비성이 그렇게 철저한 타입은 아니었는데..."



고마우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밥맛 떨어지는 말투를 꼭 써야하나? 주둥이에 딱밤을 갈겨버리고 싶다.



"...그냥 좀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준비해뒀습니다."



호감도는 박살을 내는 동시에 나는 릭을 뒤에서 몰래 도와주었다. 이러나저러나 소설 속에선 영웅으로 끝난 놈.


저 새끼가 큰 사건을 막지 못하면 내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이 펜던트는 당신을 보호할 겁니다. 못 믿겠다면 마법 감정도 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명을 지켜줄 단검입니다. 품 속에 감추어 불시의 습격에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뭐야 이 쪽지는? 남자새끼가 왜 나한테 이걸..."



빨리 네 성 정체성을 깨달아라. 씹새끼야. 


불쾌함을 거의 안 느낀 채로 내가 준비한 물건을 챙겨가는 걸 보면 이미 싹수가 보인다.


원작대로 저 새끼는 똥게이인 것이다.




*




"뭐라고요?"



"못 들었어요? 릭 따라간다고요!"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귀족이 좋은 일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지 않던가.


이것도 그런 느낌이다. 릭과 베라는 아카데미를 졸업함과 동시에 마물을 퇴치하는 여정을 떠난다.


일종의 봉사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릭은 그냥 모험이 좋으니까 가는 거고 베라는 릭이 좋으니까 헤롱헤롱해서 따라가는 건데.


지금이라면 내가 플래그는 다 때려 부숴서 좋아할 일도 없는데, 그런데도 따라간다고?



"왜 가시는 겁니까?"



"당신도 아카데미에서 봤겠지만...녀석은 애 같아서 마음이 안 놓여요. 어차피 좋은 일 하러 가는 거 겸사겸사 제가 도우러..."



아니, 네가 그놈 엄마라도 돼?


시발 아카데미 졸업했으면 성인이란 말이다. 성인.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그 여정에서 베라는 쓸모가 없다.


괜찮은 검술, 우수한 마법 실력. 하지만 아티팩트도 없고 특출난 혈통도 아니며 기연도 못 먹었다.


초반에야 릭보다 세지만 중반만 돼도 쓸모 없어져서 비전투원이 된단 말이다.



"아가씨. 그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좋은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은 이해하나, 그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제발 헛짓거리 하지 마라. 이건 내가 같이 갈 수도 없는 거다. 플래그 분쇄가 안 된다고!


지금까지 기억을 더듬어 가며 엮일 건덕지를 차단해왔는데, 그 시간과 노력을 공중분해시키겠다고?



"...이상하네요. 언제부터 저한테 뭔가를 요구할 수 있었죠? 당신 꿈자리 얘기하는 거 좀 받아주니까 제가 좀 편해 보여요?"



시발 다 니 잘 되라고 하는 얘기인데 썅년아! 말을 찰떡같이 해줘도 개떡같이 알아처먹으면 어떡하냐고!



"아가씨, 릭 도련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분을 따라갔다간 평생 독수공방이나 하셔야 됩니다!"



"...뭐라고요?"



이제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아니, 지금 무슨 망언을...저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들으신 그대롭니다. 릭 도련님은 동성애자입니다! 평생 각방 써야 된다고요!"



"그만!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 내 친구를 모욕하다니 제정신..."



"...어우 시발..."



그냥 처음부터 내가 뭘 하든 답이 없었나 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이미 입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야이 시발년아. 어차피 이제 쫓겨나서 얼어뒤지든 맞아뒤지든 할 건데 그전에 내가 이 말은 꼭 하고 뒤져야겠다."



"사람이 걱정해서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좆같은 년이 뒤질라고. 내가 니보다 오빠인건 알기는 하냐?"



"너 씨발 릭한테 차이고 여기 와서 질질 짜기만 해라. 내가 옥수수를 죄다 뽑아버릴라니까."



가슴이 시원하다 못해 싸늘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여기서 뒤지면 지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베라가 다가온다. 이제 나를 죽이려 하겠지.


부디 그간 충성한 세월을 봐서 고문만은 하지 말아다오.



'짜악!'



그 소리와 함께 내 시야가 돌아갔다.


그래. 뺨을 맞은 것이다.



"...주인에 대한 무례는 이 정도로 넘어가겠어요."



"...?"



"...풉. 아하하핫!"



실성했나?



"뭐야. 당신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예전엔 엄청 딱딱하더니 요즘엔 맨날 우물쭈물하고. 지금은 화도 내네요? 이제야 좀 사람같네."



"그게 무슨..."



"여기가 내 방이라 방음 결계가 있어서 망정이지, 밖이었다면 정말 쫓겨나야 했을걸?"



"그냥 넘어간다고?"



"존댓말 하세요. 어쨌든 당신 덕에 도움도 받았고. 진짜로 나 걱정하는 말인 건 알고 있으니까."



"...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확 바뀌어서 수상해서, 일부러 좀 예민하게 굴었어요. 그건 좀 미안해요."



그래서 일 못한다고 구박을 주면서도 아카데미로 데려갔구나. 날 감시하기 위해서였나.




*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름대로 사교계 경험이 풍부해서 사람 눈을 보고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베라.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베라가 릭과 어떤 일을 겪고 어떤 결말을 맞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막았는지. 다만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을게요. 얼버무리는 거 보니 대답하기 곤란한 거겠죠.


...아무튼 고마워요."



나도 처음엔 애정캐 구하자는 취지였고, 지금은 미운 정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어쨌든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인생 하드모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좀 찝찝하지 않겠는가.


다 자기만족이고, 그 대가는 돈으로 충분히 받고 있으니 감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다.



"으음...동성애자라니. 본인이 좋다면야 상관없지만 약간 혼란스럽네요."



"이해합니다."



친한 친구가 게이? 도저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제 계획이 망가졌네요. 최소한 일 년은 붕 떠버렸어요."



"어차피 그 계획대로 하셨어도 또 깨졌을 겁니다."



"후후. 그런가요?"



"잘된 일입니다. 졸업장도 취득했으니 정식으로 승계 절차를 밟아서 영지를 돌보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로운 일입니다."



"으...벌써부터 귀찮네요."



미친놈의 망상이라 치부하지 않고 내 말을 믿어줘서 다행이다.


감정의 골도 풀리고 베라는 이제 나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좋은 의도로 행동했다는 걸 알고 오히려 상냥해졌다.


신분 차이 때문에 로봇처럼 구는 사용인들.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은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는 릭 밖에 없었다고.


거기에 내가 추가된 것이다.




*




릭과 베라는 어쨌든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므로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고, 정기적으로 만남도 가졌다.


그리고 때에 따라 내 입김이 들어간 조언을 통해 일행을 모두 남자로만 채웠고, 릭이 가질 보물도 무사히 떠먹여줬다.


그렇게 베라의 포지션을 다른 히로인 중 하나가 차지하는 일을 막아냈고, 세계의 위기 또한 해결했다.


만약 막지 못했다면 가슴에 큰 짐으로 남았을 것이다. 베라를 가장 좋아한 것뿐이지 다른 히로인들도 좋아했으므로.


이제 본래의 히로인들은 정실대전은 커녕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알아서 잘 살겠지.


릭은 이제 일행들과 해산하고 레오나르도와 흩어진 잔당을 퇴치하러 떠난다고 한다.


...아마 내가 보기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고, 찝찝한 부분을 남기지도 않았으며 그동안 모아둔 돈까지 있다.


설마 히로인들이나 베라가 또 게이를 좋아한다면...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볼 때가 왔다. 내 기억대로라면...


릭 일행이 여정 중에 발견한 고대의 폐허가 지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암시가 존재한다.


여긴 마법과 기적이 있는 세계관이니 그곳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다.



"사직서입니다."



"네?"



"이 이후는 저도 모릅니다. 이제는 제가 아가씨한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차도 못 끓이고 청소도 어설픈 쓸모없는 하인이 된 겁니다. 민폐가 되기 전에 스스로 나가려 합니다."



"아이크...당신 저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미쳤냐?"



'전혀 그런 적 없습니다.'



이런, 입이 먼저 튀어나가버렸다.



"...아직 사직서 수리 안 했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머릿속에서 환청이..."



"그런 생각 할 필요 없어요. 저를 떼놓고 보더라도 당신의 지식과 조언으로 영지민들은 풍요로워졌고 충성을 맹세한 세력은 늘어났어요."


"저에게, 그리고 알브레에 기여한 것으로 이미 당신은 단순한 사용인이 아니게 된 거예요."



이미 그건 성과급 받았잖아. 나는 이제 나가야 한다고.



"마음은 감사하지만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이미 그 보답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하고요."



"...아이크, 정말로 나 안 좋아해?"



친해진 이후로 가끔 사적인 얘기를 나눌 때는 말을 놓곤 했다.


말을 놨다는 건 알브레의 가주 베라가 아닌 친한 여동생 베라로서 나를 잡겠다는 의미다.


떠난다니까 아쉬운 건 알겠는데 밑도 끝도 없이 좋아하냐는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도대체 그런 착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거냐?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감이 안 잡히는데."



"안 좋아하는데 그렇게 발 벗고 나서서 나를 도와줬어?"



"아니 그건 씨...내가 하인이니까 그런 거고!"



"앞으로도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지켜줬잖아. 이제는 위험할 일도 없고, 위험하더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계속 내 옆에 있겠다고 했던 건..."



"완결...아니 내가 아는 지식으로 도울 수 있을 때까지."



"약골 주제에 나가서 뭘 하려고? 그냥 내 옆에 있어."



"말할 수 없어. 진짜 중요한 일이야."



"...정말 나 안 좋아해?"



"좋아하지도 않지만, 좋아해서도 안돼. 너도 잘 알잖아?"



"그럼 안되는데..."



거참. 뭐가 안 된다는 건지. 퇴직금이나 주고 잘 가라고 하면 될 것을.


혼자 멋대로 착각하는 나쁜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구나.




"이대로면 내 계획이 엉망이 된단 말이야."



"또 무슨 계획을 혼자 멋대로 짠 거야."



"너랑 결혼하고 자식 볼 계획까지 다 세워놨는데..."



"뭐...라고?"



내 동의도 없이 이상한 계획을...아니 원래 그런 성격이었지.


눈물이 맺히고 있다. 저 녀석 정이 저렇게 많은 성격이었나?



"...못 보내줘."


"주인을 아프게 한 괘씸한 하인은 교육을 받아야 해."



파지직...



베라가 전격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다.


...잊고 있었다. 베라는 릭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인인 내 의지는 안중에도 없고, 힘으로 찍어누르려 하는 거다.




베라가 다가오고 있다. 저 전격을 맞았다간 엄청 아프겠지.


생각하자. 생각. 베라는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아마 나를 '교육'시키고 결혼하고 애도 낳고...


어라?




"야! 잠깐만!"




"헛소리하면 더 아프게 할 거야."




그림의 떡이라 그런 시선으로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베라는 미인이다. 환승한 그 썅년보다 더.


원래도 돈이 많았지만 내가 알려준 미래시로 재산도 더 불렸다.


여기는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없을 뿐이지 마도 공학 덕분에 위생 환경도 현대 사회 못지않다.


게다가 북쪽에 돼지 새끼가 설치지도 않고...나는 이미 여기 온 지 5년 넘었으니 거기선 사망처리일거고...


릭한테 호감 가지는 것도 차단했으니 심기체 처녀론에 입각한 완벽한 처녀지.


...개꿀인데?




"사실 결혼반지 사서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사랑해 베라! 나랑 결혼해 줘!!!"




"...읏! 바보!"






*


그 이후로 애 셋 낳고 잘 먹고 잘 삼.


약간 미친 놈을 써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