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곤 한다.

 

예를 들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야구공이 이리저리 튀다가

유리창을 깬다던가, 혹은 오래전에 헤어진 소꿉친구를 동네

쓰레기장에서 마주친다던가.

 

그리고 혹은,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여자애랑 코미컬 마켓에서

마주친다던가.

 

“...안...녕.”


“...네가 왜 여기 있냐?”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무더운 여름- 까진 아니어도 제법 더운 6월 어느 날.

 

나는 예전처럼 매 분기마다 열리는 코미컬 마켓에 놀러 갔다.

 

참고로 나 같은 오타쿠가 아닌 일반인을 위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자면, 코미컬 마켓이란 매 분기마다 서울 컨벤션센터를

일주일 동안 대여하고선 오타쿠들끼리 모이는 행사 같은 거다.

 

동인 만화를 팔거나, 굿즈를 팔거나, 오타쿠 형제자매끼리

모여서 담화를 나누거나, 기타 등등.

 

그리고 코스프레를 하러 오거나, 혹은 구경하러 오거나.

 

나의 경우 이것저것 다 하러 오는 케이스지만, 그중에서도

코스프레를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혹시 몰라 변명하자면 나는 매우 건전하게,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코스프레를 구경하러 온 거다.

 

즉, 여기서 이 여자를 만날 가능성 따윈 생각한 적도 없다.

 

‘강현랑 이 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뿐.

 

강현랑은 지금 내가 좋아하는 러브 코미디 애니메이션의

히로인 ‘쿠로카와 카미네’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늑대귀에 위쪽을 열어놓은 와이셔츠, 짧은 교복 치마.

 

...그리고 이런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원본이랑 거의

99%쯤 비슷해서 살짝 설렜다.

 

“다시 묻겠는데, 왜 여기 있냐고.”


강현랑이 당장에라도 때릴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

 

아니 근데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니지 않나...?

 

“저기, 난 가볼 테니까 잘 놀-”

 

“어딜 도망가!”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우린 근처에 있는 화장실 뒤쪽에 있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다.

 

“후우...”

 

그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설마 죽이진 않겠지?’

 

강현랑, 안순 고등학교 2학년 6반.

 

그리고 학교에서 가장 이질적인 녀석.

 

같은 반으로 지낸지 3달이 넘었지만, 나는 이 녀석에 대한

흉흉한 소문만 들어봤을 뿐, 대화조차 나눈 적 없었다.

 

“어이, 김영현.”


“넵.”

 

“오늘 네가 본 건 전부 잊어라, 알겠냐?”


“넵.”


잊으라면 잊어야지, 별 수 있나.

 

일단은 내가 남자지만, 내가 강현랑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단 덩치가 다르다. 내가 평균보다 조금 작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강현랑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여자 키가 182cm라니, 남자 중에도 꽤 드문 덩치다.

 

“씨발, 하필 걸려도 이놈이냐...”


강현랑이 뒤돌아본 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살짝 기분 나쁜데, 내가 잘못한 게 없잖아.

 

“쿠로카와 카미네 코스프레를 한 너에게 듣고 싶진 않아.”

 

“윽.”


내 말에 그녀가 양심이 찔렸다는 듯 몸을 살짝 떨었다.

 

“아니, 그보다 쿠로카와는 어떻게 아는 건데?”


“내 여친한테 잡아먹힙니다가 여성향 만화이긴 해도, 제법

재미있긴 하거든.”

 

난 잡식파다. 남성향이고 여성향이고 맛만 좋으면 그만.

 

그리고 내여잡은 성향을 감안해도 꽤 재미있는 만화다.

 

“그리고 좋아할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문제라고?”


쿠로카와, 아니 강현랑이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기분 나빴나? 

 

“...넌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남들은 아니라고.”

흐아아, 그녀가 또 한숨을 내뱉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잠깐 시간 있지?”


“그게-”


“시간 있지?”


거절은 거절한다, 이런 건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날 근처에 있는 카페로 데려갔다.

 

참고로 코스프레는 여기 들리기 전에 미리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온 듯 했고, 원래 모습대로 돌아온 그녀는...

 

‘무서워.’

 

무섭다. 응, 그래. 확실히 무섭다.

 

덩치도 덩치지만 팔 근육이...게다가 인상부터 사람 하나쯤

땅에 묻어봤을 것 같다. 

 

기가 세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일진 여자애들도 함부로

말을 안 거는 이유가 저 얼굴에 있었다.

 

“너 뭐 마실래?”
 
“내, 내가 살게.”
 
“삥 뜯는 거 같잖아. 내가 살 테니까 그냥 말해.”

 

“...그럼 아메리카노.”


“오냐.”


잠시 후, 그녀가 커피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눈에 띄지 않은 2층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햇볕이 들어와 눈이 조금 부셨다.

 

“2년쯤 됐나, 이러고 다니는 게.”


그녀가 카푸치노를 쪽 빨아 마신 후 말했다.

 

“설마 여기서 같은 반 녀석을 만날 줄은 몰랐지.”

 

“나도...보통 오더라도 6월은 피해서 오니까.”


덥거든. 한국은 6월만 지나도 섭씨 30도는 그냥 넘기니까.

 

실제로 오늘도 상당히 더웠다. 28도라니, 이제 6월 중순인데.

 

“그래서.”

 

탁,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 해주면 입 다물래?”


“어?”


“나도 눈치가 그렇게 없진 않아. 깔끔하게 정산하고,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자고. 알겠어?”


강현랑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노란색 지폐를...어...좀 많은데?

 

“50만원이면 충분하지?”
 
“아니, 그...”


“욕심부리지 마라, 그냥 존나 패서 입 다물게 하는 방법도

있는데 괜히 일 키우긴 싫거든.”

 

“안 받을 거라고, 그 돈.”


내 말에 그녀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럼 존나 맞을래?”


“아니, 아니! 왜 자꾸 때리려고 하는데!?”


“뭔데 그럼, 뭐 따로 바라는 거...씁, 혹시...”


강현랑이 팔로 가슴을 슥 가리며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나 그렇게 싼 여자 아니다?”


“...그런 것도 아니야.”


“아이 씨팔, 그럼 뭔데?”
 
“대가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냥 입 다물어줄게.”


그리도 의외였나, 강현랑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아니, 왜냐고 물어봐도...내가 말하고 다니면 싫잖아?”


“어. 그런데 왜냐고, 돈 준다니까? 너 돈 싫어해?”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분명 사정이 있는 거겠지.

 

나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돈을 뜯을 정도로 근성이

썩어 빠진 놈은 아니다.

 

‘어느 정돈 이해해, 서브컬쳐 인식이 얼마나 안 좋은데.’

 

남자가 오타쿠 취미가 있어도 인식이 씹창인데, 여자는?

 

요즘에야 조금 나아졌다곤 하지만 절대 좋은 인상은 못 준다.

 

거기다 강현랑은 딱 봐도 오타쿠니 서브컬쳐니 그런 거랑

담쌓고 산다는 인상이니까...

 

“...진짜 괜찮냐?”


“진짜 괜찮아.”

 

그제야 강현랑이 돈을 도로 지갑에 넣었다.

 

“그나저나 쿠로카와 코스프레, 엄청 잘 했던데?”


“윽.”


“아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본 것 중에서 거의

탑 3위 안에 들어갈 정도였어.”

 

복장이 단순해서 그렇지, 쿠로카와 카미네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우선은 키. 쿠로카와는 원작에서 키가 180cm란 설정이라

여자들이 그 키를 따라하기엔 꽤 어려웠다.

 

거기에 덩치도 있고, 무엇보다 특유의 흉포해보이는 인상은

화장이나 특수 효과만으로 따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강현랑은? 그냥 쿠로카와 그 자체다.

 

머리에 늑대귀만 달면 끝인 수준이라니, 완전 사기잖아?

 

“...뭐, 내가 공을 좀 들이긴 했지.”


그녀도 칭찬이 썩 듣기 좋았는지 피식 웃었다.

 

“근데 왜 200화 이전 디자인이야? 최신이 낫지 않아?”


“아, 새끼 뭘 모르네. 쿠로카와는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 날선 분위기가 매력인 거라고!”


“그것도 좋긴 한데, 뭔가 여자로서 각성하게 된 쿠로카와는

특유의 색기가...”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는 강현랑과 함께 내여잡 이야기로

무려 2시간이나 써버렸다.

 

처음엔 조금 쭈뼛거리던 강현랑도 조금 지나니 아주 신나선

내여잡의 칭찬을 입이 닳도록 했다.

 

“씨바 어! 내여잡 까는 놈들은 그림체가 어쩌니 그러는데

그림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씨발 꼴알못 새끼들!”

 

“아...하긴 그림체로 제일 많이 까이긴 하지. 작가가 음,

여자라 그런가 선이 좀 얇은 느낌이긴 해.”

 

“그게 좋은 거라고, 그게! 한 번 그리라고 하면 반도

못 따라올 새끼들이 아주 그냥 입만 살아선~”

 

그리고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얘 나랑 취향이 너무 비슷하지 않나...?’

 

내여잡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강현랑과

나의 취향은 겹치는 곳이 많았다.

 

설마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강현랑이랑 취향이 비슷하다니,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묘했다.

 

“하- 아, 벌써 다 마셨네.”

 

강현랑이 세 번째 카푸치노 잔을 치우며 말했다.

 

“말 이렇게 많이 한 게 얼마만이야, 흐흐흐.”

 

“그러게, 나도 목이 좀...크흠.”


“아.”

 

그때, 강현랑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남자랑 이렇게 말해본 것도 처음이네.”


“그래? 남자애들이랑 친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그야 얼굴도...”


나는 무심코 그녀의 얼굴을 칭찬할 뻔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깨닫고

입을 확 다물었다.

 

“내 얼굴이 뭐?”
 
“아무것도 아냐.”


“내 얼굴이 뭐!? 나 궁금한 거 못 참는단 말이야!”


그녀가 내 뺨을 쭈욱 당기며 웃었다.

 

“빨리 말해, 빨리!”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끄아!”


“아무것도 아니면 그냥 말하면 되잖아!”


“예쁘다고! 됐어!? 아야야...”


그러자 강현랑이 헛기침을 큼큼 했다.

 

“아 스애끼, 내가 좀 예쁘긴 하지. 키히히.”


다행히 기분 나쁘게 듣진 않은 모양이다.

 

혹시 기분 나쁘다고 때릴까 봐 말을 못했지...

 

“아이고, 내 얼굴.”


“엄살은, 쯧쯧. 마 꼬추 떼라!”


“남의 꼬추를 왜 멋대로 떼는데?”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확 떼버리면 되는 거 아냐?”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이 녀석.

 

공산당을 좋아하고 항상 병원에 누워있는 심씨 성을

가진 배우처럼 매일 내가 고자라니, 하고 외치고 싶진

않단 말이다.

 

“아무튼 난 가봐야겠다.”


강현랑이 먼저 일어서며 가방을 챙겼다.

 

“계산은-”


“내가 다 했어, 짜샤. 그냥 고맙습니다, 누님이면 돼.”


“아, 고마워.”


“누님은 어따 팔아먹었냐?”


그녀가 파하하 웃으며 걸어갔다.

 

“그...내일 보자.”


그리고 떠났다.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내일 보자고?”


내일이 월요일이니까 만나긴 할 텐데.

 

왠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강현랑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대충 내던지고,

그녀의 커다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히히.”


그리고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웃으며 수영하듯이

다리를 위아래로 휘저었다.

 

처음이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난 것은.

 

물론 코스프레를 하다 보면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모-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무서운

외모 때문에 아무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대화를 시작해도 이어지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이해받기를 포기했고, 아예 입을 다물고

혼자만의 세상에 숨어버리기로 했다.

 

“친구...라고 해도 되겠지?”

 

친구...라.

 

강현랑에겐 여태껏 친구가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하지만 오래 가질 못했다.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남들보다 힘도 훨씬 셌고, 남들보다 훨씬 조숙했다.

 

같은 반 여자애들이 마법소녀가 그려진 가방을 단체로

메고 다닐 때에도, 그녀는 투박한 검은색 사우스페이스

가방을 메고 다녔다.

 

안 어울리니까. 그런 건.

 

어쩌면 지금 이 오타쿠 취미들도 그때의 결핍이 만들어낸

집착일지도 몰랐다.

 

“친구, 친구.”

 

낯간지러운 단어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포근한 단어였다.

 

“키히히.”

 

그녀가 베개를 껴안고 뺨을 비벼댔다.

 

아마도 처음이자, 어쩌면 유일한 친구.

 

강현랑은, 아주 오랜만에 행복했다.

 

 

 

 

 

 

 

 


 

 

 

강현랑이 덮치기까지, 앞으로 99일.












다들 친구부터 시작해서 부부로 가는 거다 이거야...

내가 망상글 올려봤자 아무도 안 쓰니까 걍 직접 우물을 파왔다

그래도 더 쓸지 어떨지는 나도 잘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