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의 아들, 카리엔은 터르바 왕국의 국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본래라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왕이 아닌 다른 왕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기사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 그는 제 무위와 상관없이 아직 수습기사에 불과했다. 둘, 그는 지금 혈혈단신으로 터르바 왕국에 방문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을 지적할 다른 기사들은 이 자리에 없다.


그리고 셋.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왕님."


"크핫, 그래,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다, 카리엔."


터르바 왕국의 국왕은 그의 삼촌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왕좌 - 라고 하더라도 식탁의 나무의자가 떠오르는 초라한 왕좌다만, 왕좌의 가치는 그 위에 누구를 모시냐에 따라 좌우되는 법.


쿠룬 터르바가 깔고 앉아있는 왕좌는 다른 왕국의 왕좌에 비해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용사파티의 일원이었으며, 터르바 왕국의 건국시조이자 대륙 최강의 수인, 수왕의 칭호를 가진 이었으니까.


그리고 카리엔의 삼촌이기도 했고.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진짜 삼촌은 아니었다. 


카리엔의 아버지인 용사, 정확히 말하자면 전직 용사는 이계인이고, 어머니는 용사 파티의 마법사였으니 혈통에 수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다만 각자 혼란한 대륙을 바로잡고, 왕국을 건설하게 되며 '우리 아이들끼리는 친하게 지내자'는 이유로 자주 만남을 가졌던 덕에 카리엔이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


용사와 마법사의 아들인 카리엔이 터르바 왕국에 방문한 것도 별다른 이유 없는 연례행사였다.


기사로서의 실력도 기를 겸, 또 오랜만에 삼촌 댁에 방문도 할 겸.


"부모는 잘 지내고?"


"예, 정정하십니다."


"에잉. 하여간 그 자식, 몸만 튼튼해서 말이지."


뭐,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하하하!


퍽-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큰 소리로 웃던 쿠룬은 매섭게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에 순식간에 움츠러들어 제 옆에 앉은 왕비의 눈치를 살폈다.


"여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카리엔 피곤하겠다."


"으,으음... 확실히.. 그래..."


쿠룬은 끊임없이 몸 깊숙한 곳으로 파고드는 등짝 스매싱의 여파에 등을 슬슬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모님도 잘 지내셨나 보군요.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후후, 카리엔은 더 듬직해졌구나. 기사다워졌어."


혜운, 용사파티의 권투가이자 '권왕'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여인.


지금은 아이를 셋이나 낳고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만, 모종의 이유로 손맛은 점점 매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등을 벅벅 긁는 쿠룬이 증명할 수 있었다.


2m를 넘기는 거구의 쿠룬과 비교하면 몸집은 작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190cm 정도 되는 전형적인 동양풍의 미녀였다. 


그리고 용사파티의 전원이 그렇듯, 시간이 비껴가는 듯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고.


"방은 정리해두었단다. 얼른 올라가서 쉬고, 이따가 저녁시간에 보자꾸나."


"네, 감사합니다."


"당신도 얼른 일어나서 저녁 만드는 거 도와요."


혜운은 아직도 얼굴을 찌푸린 채로 제 등을 긁어대는 남편의 목덜미를 콱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리엔은 그 사이 좋은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르바 왕국은 '왕국'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다만, 실질적으로는 필요에 따라 결성된 도시국가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각 종족 간의 사이가 나쁜 게 아니라, 사는 환경이 너무나 다른 탓에 인간들처럼 밀집한 국가를 이루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습한 곳에 살아도 괜찮은 종족이 있는 반면, 그런 곳에 살면 하루도 못 가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종족도 있다보니.


그러다보니 국왕인 쿠룬이 사는 왕궁도 단촐하기 그지 없었다. 2층짜리 작은 저택 수준에 손님을 접견하기 위한 작은 알현 시설을 별채로 마련해둔 정도.


세 아이가 모두 적당히 자란 지금에는 사용인도 최대한 줄이고 왕비인 혜운이 직접 가사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별채에서 나와 본채 2층, 아주 익숙한 방문을 열고 들어선 카리엔은-


휘익- 휘익- 휘익- 휘익-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이불과 그 틈새로 삐져나온 채, 이리저리 정신없이 휘둘리는 꼬리와 마주했다. 


"....음."


카리엔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짐을 정리하고 모른 채 방을 나오고 싶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위생에 예민한 그로서는 지금 당장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싶었으니까.


다만, 그랬다가는 이 저택에 머무는 내내 풀 죽은 이 녀석을 마주하게 될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나. 

 

그는 가죽 갑옷만을 벗어 가지런히 정돈해둔 뒤, 신발을 벗어 정리해두곤-


"읏차."


"으헤헷~!!!!"


이불더미로 몸을 던져넣었다.


처음에 느껴지는 것은 부드러움, 그리고 부드러움. 흐르는 강물의 겉조차도 이리 부드럽지는 못할 것이다.


두툼한 이불의 부드러움 안에 숨겨진 다른 느낌의 부드러움이 그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를 덮치는 역동적인 움직임-


이불 안에 숨어있던 매복자가 카리엔의 몸을 휘감았다. 


"잡았다, 오빠!! 방심했구나!"


"....푸하- 아리에나, 잘 지냈어?"


"에헤헤, 잘 지냈지! 오빠는 아직도 안일하구나!"


마침내 이불 너머로 습격자의 얼굴이 뿅 하고 튀어나온다.


카리엔보다 한 살 어림에도 아직도 개구쟁이 같은 눈빛을 가진 소녀 - 아니, 이제는 처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장성한 아리에나였다.


얼굴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반반 닮은 듯한 성숙하면서도 날카로운 미녀의 상이었다만, 그 속에 담긴 해맑은 미소는 아리에나의 나이를 3살은 더 어려보이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속아버렸네. 얼마나 기다리고 있던 거야?"


"10분! 오빠가 집 들어오는 거 보고 바로 숨었어!"


10분이라. 아리에나치고는 굉장히 오래 기다린 편이었다.


카리엔은 불편한 몸을 애써 움직여 아리에나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중간 중간에 손 끝에 걸리는 귀가 손을 즐겁게 해주었다.


1살 어리다고 하더라도 몸은 완전히 큰 성인. 카리엔의 키를 훌쩍 넘기는, 2m에 가까운 장신의 아리에나의 머리에 닿는 것만 해도 카리엔에게는 나름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 그래. 오빠 이제 씻고 싶은데, 놓아줄 수 있어?"


"싫어! 나 10분 기다렸으니까, 오빠랑 1시간 동안 이러고 있을래!"


꾸욱-


그렇게 카리엔을 더욱 거세게 안아오는 아리에나였다.


물론 그리 안아온다고 해서 카리엔이 압박감을 느낄 리는 없었다. 그는 수습기사라고 하더라도 용사의 아들이며, 기사로서 길러졌으니.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가 어쩔 수 없는 남자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으음...!"


카리엔은 입을 꾹 다문 채, 쿠룬 터르바의 얼굴을 떠올렸다.


근엄하고,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푼수 딸바보가 아닌 '수왕'의 면모를 드러내는 아리에나의 아버지의 얼굴을.


침묵을 유지하다가, 고심 끝에 입을 열곤-


'죽인다.'


라는 한 마디만을 남겼던 그의 얼굴을.


그제서야 카리엔은 힘겹게 제 남성성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제 몸을 짓누르는 아리에나의 부드럽고 뽀얀 살결, 이불 너머로도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아니, 아니지, 쿠룬 삼촌의 얼굴을 떠올려. 이 이상 상상해선 안 된다!


그런 카리엔의 심경도 모른 채, 아리에나는 그저 오랜만 - 이라고 하더라도 고작해봐야 반년만- 에 만난 제 사촌오빠를 껴안은 채 머리에 제 뺨을 부비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똑똑똑-


예의를 갖춘 노크 세 번 뒤, 전조 없이 문이 열렸다.


"오라버니, 오랜마...안...."


"...아, 플로리아. 오랜만이야. 아하하.."


참을 수 없는 정적이 잠깐 지나간 이후, 아리에나는 다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제 동생에게 말했다.


"플로리아도 낄래? 오빠 위에서 누르면 되겠다!"


"안해요! 아니, 애초에 왜 그러고 계신 거에요!"


"나도 의문이야, 플로리아. 좀 구해줄래?"


"언니! 공주로서의 품격을 지키시라고요! 제가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싫어! 나는 오빠랑 이러고 있을래, 플로리아는 공주해! 1공주해, 1공주! 나는 필요없어!"


"이익...! 저도 공주 관심없어요! 해야 하니 공주로 사는 거지!"


"음. 얘들아, 일단 나부터 놓아줄래?"


"오라버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언니, 그리고 레이디는 다른 사람 방에 방문할 때 노크를 하고 예의를 갖춰서 방문하는 거에요!"


"부우~ 나랑 오빠 사이에 무슨 노크야."


"아니, 노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지던 설전 내내 카리엔은 아리에나에게 붙잡힌 채, 그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소신을 늘어놓고 난 뒤.


플로리아와 아리에나가 마침내 모든 말싸움의 종착지, 자매 간의 몸싸움에 돌입하고 나서야 도망치듯 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와."


죽을 뻔했네. 


카리엔은 갈아입을 옷을 몰래 챙겨 1층 욕실로 향하다가 문득 제 방에서 들려오던 소란이 잠잠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선 저택 안에 울려퍼지는 크고 날카로운 소리 두 개. 짝- 짝-


이 저택 안에서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모님이 잘 마무리해주셨구나.'


아마도 저녁준비를 얼추 끝내고 난 뒤, 이 소란의 근원지는 어디인가 하고 찾아나서셨겠지.


그리고는 카리엔의 방에서 치고 받고 싸우던 자매의 등짝에 한 대씩 '잠잠해지는 약'을 처방하신 거겠고.


카리엔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매번 터르바 왕국에 놀러올 때마다 이런 일을 겪는 것 같다.


카리엔은 욕실에 도착해 옷을 벗어 바구니에 넣어둔 뒤, 욕실에 입장했다.


쿠룬을 비롯한 낭인족은 목욕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질색하는 편이었지.


그럼에도 저택에 이리 몸을 담굴 수 있는 욕탕이 있는 이유는 왕비인 혜운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선혜야."


"네, 오빠."


카리엔은 다급히 몸을 돌려 욕실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보다 제 사촌동생이 카리엔을 붙잡는 속도가 빨랐다.


"오빠도 씻으러 오신 거 아니신가요?"


".....살려줘."


카리엔은 중요부위만을 가린 옷 - 아버지가 '수영복'이라고 부르던 옷을 입은 선혜에게서 시선을 애써 돌렸다. 


욕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진작에 수건으로 제 중요부위를 가리고 있었다만, 엄연한 옷을 입은 선혜와 달리 언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긴급조치에 불과했다.


"왜 여기 있는거야, 아니,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선혜는 카리엔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아니,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집요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방금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 전에 몸을 씻으러 들어온 것 뿐인데요."


그게 어쩌다가 오빠랑 겹쳤네요. 아니, 아닌가?


"오히려 오빠가 제 알몸을 보고 싶어 이 시간에 욕실을 급습하셨다...?"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는 선혜의 눈가는 초승달처럼 휘어 그 끄트머리에 진득한 장난기를 흘릴 듯 머금고 있었다.


그 요망한 모습에 카리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선혜, 세 자매 중 가장 막내이자 혜운을 가장 닮은 아이. 


키가 크거나 비슷한 아리에나와 플로리아와 달리 키는 카리엔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아담하다만, 지금처럼 영문을 모를 정도로 과감한 일을 종종 벌이곤 하는 아이였다.


어릴 때는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쑥쑥 자라더니 어느새 이렇게 무서운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선혜야. 일단 욕탕에 들어가자, 응?"


"어라, 오빠는 욕탕 안에서 하는 게 좋으신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카리엔은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자신보다 3살 어린 아이가 이렇게 짓궂으면서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 게다가 그 장난이 제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참아야 한다.'


카리엔은 욕탕에 겨우 몸을 담군 채, 눈을 질끈 감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아버지, 용사. 


대륙의 최강자이자, (본인 왈) 과거 여심의 파괴자. 


물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술주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심하다는 듯 '여심의 파괴자는 무슨, 나 말고 만나줄 사람도 없었으면서'라며 바라보곤 했다만, 아무튼.


그런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들키지 않으면 장땡'- 아니, 아니지. 이게 왜 튀어나와. 이거 말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결혼 금지다. 애가 생기면은, 뭐, 어쩔 수 있냐. 책임져야지.'- 아니, 아버지. 당신 아들한테 뭐 이리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셨어. 이것도 말고.


그렇게 기억 속을 헤매다가 갑작스레 다시 찾아온 쿠룬 삼촌의 강렬한 한 마디, '죽인다' 덕분에 이성을 되찾은 카리엔이었다.


그리고 선혜는 그리 필사적으로 제 시선을 피하는 오빠를 보며 다시금 조용히 소리내어 웃었다.


오빠를 향한 이런 장난이 그저 장난만은 아니었다.


유혹에 가까웠지.


다른 두 언니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태어난 선혜는 두 언니보다 타인의 감정에 더 민감했다.


아버지의 둔감함에 가까운 아리에나 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중간 정도 되는 플로리아 언니와 달리 자신은 카리엔 오빠의 감정을 아주 능숙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선혜가 본 카리엔의 상태는 그야말로 한계 임박.


지금이야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만, 그것도 조만간임이 틀림없었다.


수습기사니, 용사의 아들이니 해봤자 한창 때의 남자에 불과하니. 


무엇보다도 선혜가 읽었던 책 - '남자를 유혹하는 99가지 방법'에서는 젊고 건강한 남성일수록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했다.


눈을 질끈 감은 카리엔을 바라보던 선혜는 그가 볼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유혹은 자고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법이니.


*


다음 날 아침.


카리엔은 멍하니 면 셔츠를 걸쳐입었다. 


어젯밤에 세 자매에게 시달리느라 잠을 영 설치고 말았던 탓이었다.


아리에나는 오빠, 같이 자자! 라며 베개를 껴안고 쳐들어오질 않나.


플로리아가 아리에나를 말리겠다고 왔다만, 그 복장이 이브닝 드레스인 탓에 이곳저곳이 자꾸 비쳐보이질 않나.


또 다시 몸싸움으로 이어질 기미가 보인 탓에 시선도 돌릴 겸 후다닥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더니, 바로 아래에 숨어있던 선혜가 나타나 팔을 붙잡곤 제 방으로 끌고 가려 하질 않나...


결국에는 다시 혜운 이모님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준 뒤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후암..."


검집을 허리춤의 벨트에 끼운 뒤, 카리엔은 저택의 뒷마당으로 발을 옮겼다.


뒷마당에는 이미 세 자매와 혜운은 물론, 다른 수인들도 잔뜩 모여있었다.


카리엔이 터르바 왕국을 방문하는 또 다른 이유인 '기사행'을 구경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늦었구만, 꼬맹아."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설쳐서."


카리엔은 별 생각없이 한 대답이었다만, 생각 외로 그 대답이 쿠룬의 복창을 뒤집어놓았다.


잠을 설쳐? 그래? 잠을 설치실 거면 왜 남의 소중하고 눈에 넣어도 안 예쁜 딸들이랑 한밤중에 그리 시끄러우셨대?


그래, 용사 아들이다 이거지? 그 새끼도 남 속 긁어놓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더만, 그 아들 놈도 똑같네.


으드득- 


...물론, 카리엔과 쿠룬의 관계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카리엔은 쿠룬을 삼촌, 또 어쩌면 예비 장인 어른으로 모실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예를 꾸준히 지켰으니.


다만 그건 삼촌과 조카의 관계인 거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세 딸들을 모두 노리는 늑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서는 카리엔이 전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전혀. 아주 전혀.


쿠룬은 전조 없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카리엔 역시 이미 검을 뽑아놓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어 그 주먹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기사행'이 시작되었다.


콰창- 챙- 캉-


맨몸과 검이 부딪히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쇠와 쇠를 맞부딪히는 소리가 뒷마당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검을 주먹으로 쳐내고, 반격을 날리고, 그 반격을 회전하듯 피해 다시금 검을 내리긋고, 그리고 수왕이 다리를 뻗어 머리를 노린 발차기를 날리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싸움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 그 싸움에 전혀 집중할 수 없는 여인이 셋이었다.


땀을 흘리며, 아름다운 검격을 휘두르며, 무려 그 '수왕'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는 남자. 용사의 아들이자, 차기 용사 - 더 나아가 대륙의 최강이 될 정도로 우수한 남자.


그런 남자를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는 여인들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셋.


하나는 헤헤 웃고 있었다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회색 머리카락의 키 큰 짐승.


그리고 하나는 거짓된 미소를 지은 채 하나하나, 남자를 눈독들이는 여인들을 내리찍듯이 바라보는 공주.


마지막으로는, 평범한 여인들에게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은 채, 자신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를 빼앗으려고 하는 언니들을 노려보는 음흉한 책사까지.


검무와 권무, 한 폭의 그림 같던 대련이 내리던 비가 그치는 것처럼 자연스레 끝이 나자 그 자리에 있던 관객 모두가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셋을 뺀 관객 모두가.


단 세명만은 박수를 치지 않은 채, 그 남자에게 슬금슬금 다가가서는 그 남자를 보살폈으니까.


마치 이 남자는 내 것이다, 너희의 것이 아니며 그럴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과시하듯이.


카리엔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아지경에서 갓 빠져나온 탓에 땀을 닦아주는 손길이나 물을 건네는 손길을 그저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


다만 쿠룬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아주 생각이 넘쳤다. 생각도 넘치고 화도 넘쳐나기 시작했다.


세 딸에게 보살핌을 받는 카리엔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알싸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때맞춰 난입한 혜운이 쿠룬의 야성을 잠재우지 않았다면, 카리엔은 영문도 모른 채 수왕의 분노 어린 권격을 마주할 뻔했다.


물론 그랬다가는 쿠룬은 세 딸의 분노를 마주했을 것이기에, 어찌보면 그의 아내의 개입이 또 그를 살려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