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놓고 얀붕이가 얀순이한테 잘 해주다가, 납치감금강간사지절단 순애 당한다? 이거는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라고 묻는거랑 다를 바가 없음. 칼 들고 협박을 하든, 사지를 자르든, 먹방을 하든 아 그렇구나~ 라는 진부함 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


근데 만약, 얀붕이가 평소엔 상당히 쾌활하고, 여자보다는 젖 달린 남자라고 평가받는 체육계 여선배랑 친해진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내심 쾌활한 모습 뒤에 숨기고 있던,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지탱해줬다 치자.


자 여기서, 얀붕이한테 여친이 생긴다.

여선배는 처음에는 얀붕이를 축하해주겠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의 안식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걸 깨닫겠지.


얀붕이와 방에서 편하게 넷플릭스를 보던 시간이,

얀붕이가 여친과 영화를 보는 시간으로 치환되고.


얀붕이와 같이 격투겜을 즐기던 시간이,

얀붕이가 여친과 함께 데이트를 다니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매일 같던 만남은, 주에서 4회로, 3회로, 2회로... 끝내는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날 수 없게 되고.


여선배는 점차 말라죽어갈거야.

얀붕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컸는지 깨달아가며.


그러다가, 어느날 여선배는 얀붕이 여친이 얀붕이 뒷담화를 까는 걸 듣게 돼. 얀붕이는 그냥 돈이랑 선물 뜯으려고 만나는 거라고.


듣는 순간, 여선배는 부정하고픈 쾌감을 느끼며, 곧바로 얀붕이에게 달려가지. 자신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고 희망하며.


하지만 얀붕이는 여선배의 말을 듣지 않아. 오히려 여선배에게 화를 내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얀붕이는 제 여친한테 껌뻑 죽었던거야.


자연스레, 얀붕이와 여선배는 다투게 되고.

끝내는 얀붕이가 말 없이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떠버려.


그 순간, 여선배는 무언가 잘못된 걸 알아버려.

안식처를 되찾으려 했는데, 반대로 걷어차버린 꼴이 된거야. 그리고, 사람의 온기란 마약과 같아서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는 법이지.


바로 다음 날, 여선배는 얀붕이한테 무조건 잘못을 빌어. 애초에 얀붕이도 이런 식으로 친한 선배랑 손절하고 싶지는 않았던더라. 쉽게 그녀를 용서해주지.


그런 식으로, 여선배는 안식처의 일부나마 되찾아. 그리고 남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그런데, 이 여친이라는 년이 보통이 아니었던거야. 다른 남자랑 붙어먹고, 얀붕이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바보로 만들고.


그 모습을 보며 여선배는 가슴이 얼마나 끓었는지.

성미를 참지 못하고 얀붕이한테 몇 번을 정신차리라고 말했는지,

심지어는 그 여친년한테 몇 차례나 경고를 했는지...


하지만, 얀붕이는 눈이 멀어 있었어. 

여선배가 얀붕이를 위해 나설수록, 얀붕이와 여선배는 다투기만 했고, 점차 멀어지기만 했지.


그러다가 끝내는 연락마저 드물어진거야.


천천히 손 틈 사이로 흘러가는 물을 보는, 사막의 순례자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여선배는 점차 피폐해져가, 


내가 저딴 년보다 모자란건가? 내가 훨씬 더 잘해줄 수 있는데... 내가 저딴 년보다 가슴도 큰데...


우울은 무거워져가고 억눌린 분노는 날 서가는데,

망상은 비대해지고. 욕망은 배를 불려가지.

그러다, 어느 날. 

제 우울만큼 술을 들이키고 거나하게 취한 날.


그리움인지 욕망인지, 누가 그었는지 모를 선을 따라, 여선배는 걸음을 옮겨. 바로 얀붕이의 자취방으로.


뭔 일이 있었을까?

확실하진 않아. 일어났을 땐, 얀붕이가 핼쑥한 얼굴로 해장국을 가져다줬거든. 여선배는 홀딱 벗고 있었고.


당연하지만 여선배는 매우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얀붕이에게 머리를 박아. 진짜로 미안하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착한 얀붕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용서를 받아들여.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고, 빈말을 하면서.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미안했다면서 여선배랑 같이 해장국을 먹기 시작하는 거야.


옛날처럼, 여친이 없었을 때처럼, 그 행복했던 시절처럼. 


여선배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행복했어. 아, 물론 그렇다고해서 다시 이런 범죄 행각을 벌일 마음은 없었어. 왜냐하면 그건 잘못된 일이잖아?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왜 알코올로 머리가 뱅뱅 도는 날이면,

그녀의 걸음은 어김없이, 얀붕이의 자취방을 향했을까?


사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처음의 황홀함이야. 그걸 못 잊어서 계속 그 짓을 반복하는거지.


하지만, 얀붕이의 인내심은 점차 한계에 달하고 있었어. 

사실 얀붕이는 매번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결국 당하는 입장이었거든. 게다가, 여선배의 사과 또한 진부해지고 있었고.


결국, 얀붕이는 어느날, 하기 싫다고 반항을 해. 여친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난 여친을 사랑한다고. 꺼지라고 화를 내지.


만약, 여선배가 제정신이었다면, 여선배는 곧바로 사과했을거야. 바로 물러났겠지. 왜냐하면, 여선배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


근데, 알코올이란 건 정말 빌어먹을 물질이야.


여선배가 체육계가 아니었으면 더 나았을까?

아니면, 얀붕이가 그 좆같은 여친년을 그만 좀 들먹였으면 더 나았을까?


얀붕이를 때려눕히고, 아니, 강간하면서 패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당연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여선배는 대경실색했어. 온갖 죄악감이 그녀를 목 졸랐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멍 투성이인 얀붕이의 얼굴이라는 형태로 드러난거야.


여선배는 얀붕이한테 울면서 미안하다고. 진짜 미안하다고. 앞으론 다시 안 나타겠다고. 울고 불고 온갖 생난리를 쳐서 용서를 빌어. 왜냐하면 여선배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든. 사실 그리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얀붕이도 그걸 아는 터라, 결국 끝내 그녀를 용서해줘. 경찰도 없이 합의도 없이. 하지만, 다시는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여선배는 당연히 그 조건을 따라. 왜냐하면 이번엔 그녀가 정말로 큰 죄를 진거니까. 당연히 따라야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처음의 황홀함이야. 여친과 얀붕이를 향한 분노의 해소와, 알코올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 


그래도, 여선배는 참아. 그건 범죄잖아. 말이 안되는거잖아. 자위라도 하면서 참는 거야. 베개를 마구 두들겨 패면서 자위라도 하면서 참는거지.


잠깐, 여선배가 찾는 건 마음의 안식처가 아니었냐구? 왜 갑자기 정욕에 미친 사람이 되었냐고? 글쎄, 이미 구름 위를 맛보고 왔는데 굳이 안식처에 머무를 이유가 있을까?


여튼간에 여선배는 생각보다 금욕생활을 잘 해내.


얀붕이가 여친이랑 깨졌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정확히 여선배는 뭘 기대한걸까? 

분명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마 여선배는 실감이 없었던 걸꺼야.

생각보다 말은 가벼워서, 그 의미를 온전히 담아낼 때가 드물거든.


여선배는 그날 처음으로 얀붕이가 화를 버럭 내며 꺼지라고 하는 걸 보았어. 서럽다기보다는 멍한 채로 자기 자취방으로 걸어가. 


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잠깐, 뭐가 잘못됐던 거지?

어라? 나 설마... 걔한테 손절당한 건가?


그리고 다음 주에 인스타에 얀붕이가 새 여친을 사귀었다는 소식이 떠오른거야. 여선배랑은 전혀 다른 인상의 귀엽고 깜짝한 여자애였지.


그제서야 여선배는 얀붕이가 완전히 자신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걸 실감했던 거야.


그리고 그거 알아?

옛날 영국에서는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 살인자도, 도둑도 똑같이 교수형에 처했대. 그러니까, 어떻게 됐는줄 알아? 어차피 들키면 죽는 건 매한가지니까, 도둑질 하던 사람이 살인도 저지르는거야.


사람을 움직이는 건 공포가 아니야.

잃을 게 없다는 실감이지.


여선배는 다시 한번, 만취한 채로 얀붕이의 자취방으로 향해. 마지막으로 얀붕이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너 없인 못 산다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지.


하지만 술 처먹고 사람을 패면서 강간한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얀붕이는 차갑게 거절해. 경찰 부르기 전에 나가라고.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뻔하지?


참고로, 여선배가 가지고 있던 아픈 과거는, 알코올 중독자인 여선배의 아버지였어.



암튼 이렇게 절대 얀데레 아닐 것 같은 여자가, 천천히 망가져가면서 얀데레 타락하는 것이 진짜 얀데레의 꼴림이이라고 생각함. 요즘은 대놓고 얀데레라고 써 있으면 오히려 팍 식음.


얀데레의 진가는 의외성과, 그 발달 과정에 있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