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남자의 등 덕분에, 표정을 보지 않고도 그의 생각은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그걸 눈치챈건 나 혼자는 아닌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해서, 남자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채 일렬로 선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에.

하지만 단 한명만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긴장하는 지금, 홀로 여유롭게 미소를 걸고있는 여자.

모두가 곧 벌어질 일에 두려워 할 때, 홀로 기대감으로 설렘을 느끼는 여자.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실수를...”

“푸하핫. 채무를 갚지 않고 실수로 도망간 사람은 처음 보네요.”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회장이라 불린 그녀에겐 자신을 향해 일말의 자비조차 하사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녀는 남자에게 돈을 빌려줄 때부터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으니까.

단지 채무자를 괴롭히는 악취미를 즐기고 싶었을 뿐, 처음부터 그에게 돈을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남자도 아마 지금쯤 그 사실을 알았겠지, 부들거리는 등 너머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회장은 그를 보고는 씨익 웃더니 슬쩍 등을 돌렸다. 아마 남자를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으... 으아아악”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남자가 별안간 몸을 날리더니 회장을 붙잡았다.

지켜보던 우리들이 다가가려 했지만, 남자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우리를 겨누며 소리쳤다.

“씨, 씨발… 다 비켜 이 개새끼들아… 회장 모가지 따이는거 보고싶어? 비키라고 이 씨발놈들아!”

애처로운 발악이지만 남자 입장에선 꽤나 머리를 많이 쓴 모양이었다.

회장을 인질 삼아 이곳을 탈출하리라는 속셈.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는게 상식이니까, 여성인 회장이 무방비한 순간을 잘 노리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회장을 인질로 삼고나면 주변의 쫙 깔린 인원은 알아서 비켜주리라 여겼겠지만.

남자가 간과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로, 지금 회장실에 모인 인원은 일단 경호원이 아니었으며.

두번째는

“어…?”

애초에 회장은 경호가 필요한 몸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식간에 칼을 뺏긴 채 바닥에 고꾸라진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듯 웃은 그녀는 빼앗은 칼을 바닥에 버린 후 남자에게 다가갔다.

“으, 으아아아악!”

퍽 빠악 쩍 우둑 콰직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맨손으로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숴버리는 광경을 굳이 감상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몸은 내 의지를 잘못 이해했다.

단지 시각이 차단 되었다는 이유로 청각은 훨씬 예리하게 변하여, 비명소리와 피 튀는 소리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해 주었고.

그 생생한 소리를 이어받은 눈꺼풀은 그 안쪽을 칠판 삼아 지금의 순간을 열심히 그려 완벽한 이미지를 연성했다.

부질없음을 깨닫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는 팔다리가 제멋대로 꺾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푸르릇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과 코에서 피 섞인 숨만을 겨우겨우 토해내는 처참한 몰골.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침을 꿀꺽 삼키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두려워 몸을 떠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처형을 마친 그녀는 양 손을 툭툭 털며 손에 붙은 핏덩어리와 살점을 떨쳐내며 내게 물었다.

“비서, 이 남자 가족들은?”

회장의 말투는 사납지 않았고 눈빛은 유순했다.

하지만 엉겨붙은 피와 살점은 아직도 그녀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난 쉬이 평정심을 찾지 못하는 가슴을 잠시 가다듬은 뒤에야 그녀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네, 가족들은 현재 지하 창고에 가둬 놓았습니다.”

“다행이네, 적어도 가족들 품에서 죽어야지. 그 정도 도리는 지켜야 될거 아니야?”

소름이 돋는다. 그녀가 잔인한 표정을 지은건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으로 자비를 베푸는 듯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도덕심이 대체 어디까지 비틀려 있는건지, 그녀를 오래토록 봐 왔음에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들 뭐해? 얼른 치워.”

명령이 떨어지자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일사불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러진 남자를 들것에 싣고,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닦아내고, 더러워진 카펫은 새것으로 바꿔 깔았다.

10여분 정도 지나자 회장실은 본래의 정갈하고 깔끔한 모습을 온전히 되찾았다.

한 사람이 뼈가 부러지도록 맞은 사실을 추리하는게 불가능해질 만큼.

들것을 들고 빠져나간 이들을 마지막으로, 회장실엔 나와 그녀 단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얼추 일이 마무리 되었음에도 난 결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심하게 타고 오르는 초조함에 고개마저 뻣뻣히 굳어갔다.

“왜 그리 멍 하니 서 있어? 편하게 앉지”

그녀가 소파를 가리킨다.

남자를 향해 짓던 차갑고 무감정한 비소가 아닌,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와 함께.

“죄송합니다. 회장님”

“뭘 미안해 하고… 그리고 단 둘이잖아? 그냥 편하게 말해”

“어? 아… 그래, 알겠어”

잠깐 뾰루퉁한듯 입을 내밀던 그녀는 이어진 나의 말을 들은 뒤에야 환히 웃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내 뺨 근처까지 들이댔으나, 손틈 새로 핏물이 뚝 떨어지는걸 보고는 도로 거두었다.

아마도 그 손으로는 날 어루만질 수 없다 생각한 모양새였다.

“아무튼 편하게 있어, 난 씻고 올테니까 좀만 기다려”

다시금 환한 미소를 보여준 그녀가 샤워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쏟아지는 물소리에, 다리가 힘없이 풀린 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소파는 마치 크림처럼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품고있던 푹신함을 아낌없이 토해주었지만.


딱딱하게 경직된 몸은 그 안락함을 만끽조차 못했고, 끊임없이 지끈거리는 머리는 긴장을 놓칠 않았다.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큼 잔인한 성품의 그녀와 단 둘이 있게 되어서는 아니었다.

남들 앞에선 절제를 모르는 광인이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다정한 그녀다.

어떤 경우였든 폭행은 커녕 성질 한번 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이 이토록 긴장되어 호흡 조차 빠듯한 이유는, 오늘은 반드시 전하리란 다짐으로 품고 있는 한 마디 때문이리라.

그녀가 부디 더 이상 광기를 휘두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간언.

‘진작 했어야 하는건데...’

그래, 이제와서 이러는 것도 너무 늦었다.

진작에 그녀가 이렇게 되지 않게 막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무감정하고 잔인한 광인이지만 아무 이유없이 이렇게 된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그녀는 모두에게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다.

또래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욕을 먹고, 얻어맞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부모가 없다던가, 기분 나쁘게 생겼다던가, 분위기가 짜증난다던가 등 여러 이유가 따라오긴 했지만.

늘 그렇듯 괴롭힘에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나랑 같이 놀자”


그리고 난 괴롭힘 당하던 그녀와 친하게 지냈다.

“...왜?"

처음으로 다가갔을 때, 그녀는 초췌한 눈으로 내게 의문을 표했다.

아마도 난데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같이 놀자는 아이를 경계한 것이겠지.

그녀와 친해지고 싶던건 내가 모든 이를 품을 만큼 특별히 성격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사실 나도 너 때린 애들한테 맞고 오는 길이거든. 그냥 우리 끼리 같이 놀자”

그저 나 역시 가난한 고아 출신이었던지라, 그녀 만큼은 아니지만 따돌림 당하는 신세였기에

비슷한 신세인 그녀와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다가간 것이다.

그런 나를, 스스로의 속내를 대놓고 드러낸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풉… 푸하핫...”

바람이 빠지는 듯한 힘 없는 웃음을 흘리곤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 같이 놀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녀에게 친해지고 싶다며 다가온 사람은 꽤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엔 그녀에게 잘해주었으나, 사실 그건 희망에 젖은 그녀를 후일 더 크게 비웃기 위함일 뿐, 진심으로 친구가 되어주진 않았다.

그런 사건들을 여러번 겪은 후엔 더 이상 사람을 믿기 않기로 한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받아들였다.


훗날 그 사유를 물었을 땐

“왜 믿었냐고? 너에겐 동정심 같은게 전혀 안 느껴졌어.”


나로썬 이해하기 힘들던 연유였지만, 어쨋건 나와 그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릴 향한 괴롭힘은 점차 줄어들었다.

처음엔 오히려 괴롭힘 당하는 것들 끼리 어울린다며 손가락질을 당했으나

이전엔 욕을 하면 가만히 듣고, 때리면 얌전히 맞던 그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끼… 한번만 더 내 친구 건드려봐… 그땐 진짜 죽여버릴거야”

특히나 나를 향한 괴롭힘엔 자기 일 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당연하잖아? 넌 내 품에 유일하게 날아든 인연인걸. 그 누구도 흠집하나 내도록 만들 순 없어“

나를 지켜주려다 살이 찢어지도록 맞은 후 미소를 지으며 건네준 대답이었다.

당연히 난 부디 그러지 말아달라고, 그녀가 아픈건 보기 싫다 하였지만

그녀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날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나를 안아주는 품에서, 나를 지켜주는 행동에서,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있었던적도 없는 가족의 아늑함을 느껴버린 탓에.


비겁하게도 그녀의 사랑에 숨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나만을 위해 살기로 마음 먹은 순간을, 아무 생각없이 내버려 둔 나의 안일함이.

“나… 사람을 죽였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는건 몇년 걸리지 않았다.


”왜?“

”널 괴롭힌 놈이었어...“

“그걸 물은게 아니야...”

당시의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 일이다.

그녀가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힌 놈 따위, 속으로는 일천번도 넘게 죽였다.

어느날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되면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줬구나 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살인을 고백했다.

살인자와 가까이 하고싶지 않은건 상식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살인 전과를 듣고도 계속 곁에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살인을 듣고 같이 좋아해 주리라 예상한 것일까.

두려움을 간신히 걸러내 의문을 던진 순간


그녀는 촛점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네가… 내 곁에 남으면 안되니까…“

당연히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인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면


내가 그녀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떠날수도 있다는걸.

그렇기에 더욱 사실대로 말한 것이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살인자 따위랑 같이 지내게 냅둘 순 없었으니까.


“그냥... 말해주러 온 것 뿐이야”


말을 마친 그녀가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눈에선 더 하고싶은 말이 느껴졌다.


그러나 촛점을 흐릿하게 바꾼 그녀는 미련없이 뒤돌았다.


그 순간 느꼈다.


지금 그녀를 보내면, 다시는 그녀의 정면을 보는 일이 없으리라.


“왜... 잡는거야.”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내 소중한 인연이었다 한들, 살인자가 된 그녀에게선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그럼에도 멀어지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등을 끌어안았다.


나에겐 가족이나 다름 없어진 그녀를, 나를 위해 무슨 짓이든 했던 그녀를, 도무지 내칠 수 없었다.


처음엔 움찔하며 놀란 그녀였지만, 이윽고 몸을 돌려 내 품으로 안겨들었다.


옷을 눈물로 흠뻑 적셔가는 그녀를 토닥여주는 동안, 난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가 죽인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그녀가 아니었어도 죽었을지 모른다는 합리화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녀가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을테니 앞으로는 괜찮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점차 절제를 잃어갔다.


살인이라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행위마저 용서받았으니까.


나를 위한다는 목적 하에선 무슨 짓을 해도 전부 괜찮을것이라 여긴 것 처럼 사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는 이제 뒷세계의 거물이 되었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악인 중에서도 최악을 달리는 인물이 되었다.


나를 위해, 나로 인해


그릇된 도덕심이 심겨진 것이다.


“무슨 생각 중이었어?”


“어? 아, 아냐 그냥...”


화들짝 놀라는 태도부터 더듬거리는 말투 까지 여러모로 수상쩍은 나의 반응이었지만


그녀는 일체의 추궁 없이 미소만 지으며, 목에 걸쳤던 수건을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왼팔을 들어 내 등에 걸치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감싸쥐어 은근슬쩍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느껴지는 부들거리는 아늑함은 갓난 아기를 뉘일 요람과 같았으나, 피부에 스치는 근육의 질감은 끌어안은 존재를 안전하게 지켜줄 벙커처럼 탄탄했다.


단련된 여성 특유의 독특한 품이었다. 나를 편안하게, 또 안전하게 만들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곧 그녀의 육체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마냥 만끽할 수는 없다.


그녀가 이런 몸을 만든 건 나를 지켜주고 싶다는 일념 뿐 아니라


도구보다 맨 몸으로 고문하고 죽이는게 더 즐거워서기도 하니까


그녀가 이렇게 되도록 가만히 내버려둔 책임은 내게 있다.


더 이상 그녀가 망가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실은, 할 말이 좀 있어”


“응? 뭔데?”


“있잖아, 앞으로는 아까 같은 일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잠시 멈칫 하던 그녀는, 이내 턱을 내 어깨에 얹고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약간은 굳어진듯한 말투, 귓가를 타고 두려움이 스친다.


그녀가 내게 위협을 가한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만약에라도 날 해하려 든다면 막을 방도는 없다.


사실, 그게 그녀를 말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그녀의 눈 밖에 났다간 내가 죽을테니까. 생존본능이 일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바로잡아야한다.


“솔직히 말할게. 너 요즘… 너무 막 나가고 있어.


대외적으론 숨긴다곤 하지만… 저지른게 너무 많으면 소문이 퍼지는걸 막을 순 없어.


그것들이 쌓이다 보면 회사 운영에도 분명 차질이 생길거야.“


뭐가 됐든 그녀는 내 말 이라면 잠시라도 경청해준다.


그러니 그 사이에, 단어 하나하나를 최대한 신경쓰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리 없는 선에서 문장을 만들어 나갔다.


반응이 바로 돌아오진 않는다.


숨통을 조이는 듯한 침묵이 초를 넘고 분을 바라본다.


차마 고개를 돌리진 못했다. 혹여나 그녀가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진 않을까, 두려움이 샘솟는다.


눈을 감은 채 속으로, 그녀가 부디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찰나.


“푸흐흡…아하핫…하하하...”


순간 귓등을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와 함꼐 난데없이 내 몸에 파고드는 그녀


살갗을 어루만지는 의아한 촉감에 당황해 하던 그때, 그녀가 내 볼을 감싸쥔다.


“드디어, 나를 신경 써 주는구나.


정말… 너무 보고 싶은 표정이었어“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내 앞에서 중얼거려댄다.


영문을 알 수 없음에, 되물음이 절로 나온다.


“...뭐?”


그리고 그녀는, 내 뺨을 여전히 어루만지며 자연스레 대답했다.


“기억나? 내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날….


너를 떠나려던 나를,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붙잡아 준거


그 품을 아직 기억해. 나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한 너의 아늑함이 가슴깊이 녹아 있어.


내가 왜 미치광이라 불리면서까지 이렇게 사는지 알아?


다시 그 품을 느끼고 싶거든.


나를 걱정해서든, 위로해줘서든, 어떻게든 네가 날 다시 안아줬으면 싶었어.


나를 향한 너의 사랑을, 무엇보다 확실히 느끼고 싶으니까.“


그녀의 말이 쏟아져 나올수록, 나는 당혹감에 먹혀들어갔다.


설마 지금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온 이유가


그런 모습마저  안아준, 그 기억 하나 때문이었다니.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그녀를 본다.


누구보다 애정을 갈구하는 표정, 누구보다 사랑을 바라는 몸짓.


나의 그 작은 관심에 절절히 목메어 살아온 그녀가 내 눈앞에 녹아내린다.


벌벌 떠는 내 빈약한 품에 파묻힌 그녀가, 자그맣게 속삭인다.


“역시 넌… 날 사랑하는구나… 히히...”


그 눈빛과 행동에서 많은게 느껴진다.


나만을 바라보고 산 그녀가, 혹여나 무너져선 안됨이 실감된다.


결국, 일말의 계획은 모두 접어둔다.


그저 지금의 그녀를 억지로라도 쓰다듬고


나를 향해 짓는 미소를, 미소로 받아주며


내 품에 안겨즌 그녀를, 차갑게라도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