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큰 슬픔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 사람마다 다르겠지. 어쩌면 아예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난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운이 나쁘게도.


그래서 미안한가 봐. 그 새끼들한테.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혼자 서 있는 것인가.


더 이상 제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뇌를 붙잡고 몇 번이고 되물어본들 대답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분명 그럴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가 말이지, 나 왜 살아있는 걸까?







ㅡㅡㅡㅡ




나한테는 유치원 때부터 같이 지내온 세 마리의 짐승새끼들이 있었다.



"넌 꿈이 뭐야?"


"음...난 전투기!"


"우와! 나도 하늘 날고싶어!"


"그럼 너도 나랑 같이 전투기 하자!"


"좋아!"


생각해보면 참 순수했던 아이였지.



"...넌 꿈이 있긴 하냐?"


"AV배우 딜도."


"...에휴. 너 어릴 때 꿈은 참 순수했는데."


"중 3때 바꿨어. 전투기는 딸을 못 치잖아."


"병신..."


저렇게 깨끗하던 아이가 한 마리 오크새끼로 변할 줄이야.




...





철푸덕!


"으으, 으아앙!"


"괜찮아? 많아 아파?"


"훌쩍, 응..."


"밴드 붙여줄게. 잠시만..."



얘는 참 어릴 때부터 남 치료하는 걸 좋아했었지.



"...뭐냐?"


"...?"


"씨발 두부로 뭘 쳐만든 거냐고."


"오나홀."


"씨발."


"써볼래? 방금 전까지 썼던 거라서 은근 따뜻해."


"지랄하지 마."


"성욕 처리는 전립선 건강에 필수니까."


어쩐지 학교에서 받은 두부를 안 먹더라니. 


넘치는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수학문제나 풀 것이지, 야자시간에 저딴 거나 만드는 고블린새끼가 될 줄이야. 아, 머리는 좋으니까 최면술사 고블린으로 바꿔야 하려나.




...




"으으음..."


"뭐 그리는 거야?"


"아, 이거? 고양이!"


"우와, 너 그림 되게 잘 그린다!"


"헤헤, 너도 같이 해 볼래?"


"좋아!"



얘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그리는 걸 좋아했었지.



"...어떤 새끼가 칠판에 야짤 그려놨냐?"


"누구긴 누구야. 저 새끼지."


"짜피 야자라서 우리밖에 없잖아. 그리고 무료로 그려주는 거면 오히려 감사한 거 아니냐?"


"넌 씨발 미대 준비한다는 새끼가 여기서 뭐하는 거냐..."


"너네 없으면 재미가 없다. 그리고 난 실기는 떡을 치는데 뭐."


"비틱새끼."


"내가 바로 럭키 히틀러다."



재능도 넘치는 놈이 구태여 야자까지 신청해놓고 야짤이나 그리는 히틀러새끼가 될 줄이야.





ㅡㅡㅡㅡ




뭐, 어쨌든 짐승새끼들이라도 19년을 같이 지내왔으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당연히 우리 넷은 서로 패드립을 면전에 갈기는 수준으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분명 킬딸 작작 치라고 했을 텐데."


"기모찌."


"씹년..."



뭐, 그 긴 세월동안 아예 안 싸운 것도 아니지만은, 그래도 그런 다툼 이후 화해를 하면서 우리가 더 강하게 결속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한 달만 늦게 오지. 내가 존나 갈굴려 했는데."


"바로 헌병대에 질질 짜면서 전화건다?"


"엄."


군대도 같이 가고.


"어이, 거기 비누 좀 주워줘."


"좆까 씨발."


"아쎄이... 기열!"


샤워실도 같이 써 보고.


"이야, 여기 천국이네."


"새끼야, 너 부상자 맞냐?"


"어, 애초 군대 온 것만으로도 난 매우 큰 정신적 부상을 입었으니까."


"나도 너같은 새끼들 때문에 정신적 부상을 존나 입고 있는데."


"알빠노."


"씨발... 이러려고 의대 간 게 아닌데."



기어이 의대 간 고블린새끼한테 치료도 받아 보고.



그리고...



"유서는 다 썼나?"


""썼습니다.""


"그래. 바로 차로 이동하자."


그래, 전쟁도 해 보고. 요즘같은 시대에 자소서에 영웅훈장도 없으면 허전하잖아.


...하.


하하. 지랄도 이런 지랄이.


요즘들어 뉴스에서 잡음이 많이 나오긴 했었다.


미사일 도발이니 ICBM 시연이니 뭐니, 꽤나 시끄러웠었지 아주. 


그래도 설마, 설마 그러겠어? 요즘같이 핵우산도 살 수 있는 시대에 빠꾸없이 전쟁을 하겠어?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전쟁은 그런 낙관적인 희망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얼마 안 가서 알게 되었다.


전쟁이 비참한 이유는, 바로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희망들을 다 갉아 먹기 때문이라는 것도.












"야, 형이 퍼블 보여줄게. 딱 대."


"너가 따인다고?"


"야, 닥쳐. 형이 전직 전투기여서 존나 잘 싸우거든."


"병신, 전직이 전투기면 뭐하냐. 현직이 딜도인 새끼가."


"총에 그림 그려도 되나?"


"되겠냐고."


"야짤 그려서 시선교란을 유도하는 전략이라고 설득해보면 될지도 몰라."


"오오... 병신같은데?"


"에잉... 낭만도 없는 것들."


"..."


"...야, 너도 입 좀 열어봐. 평소엔 그렇게 온갖 지랄을 하던 새끼가."


"...있잖아."


"뭐."


"우리 왜 이렇게 불쌍하냐."


"네 인생이 원래 좀 버러지같긴 하지."


"...에휴, 됐다. 너한테 뭘 바래."


"새끼... 이런 걸로 삐져선."


"넌 걱정도 안 되냐?"


"왜 안 되겠냐. 근데 걱정한다고 갑자기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고."


"..."


"살 수 있다. 아마."


"...그래."


"그래, 이 개년아. 그렇게 좀 나와야 야부리를 턴 보람이 있지."


"맞는 말도 할 줄 알았구나, 저 오크새끼. 그래, 그러면 나도 이거 끝나면 야짤 그려줄게. 살 이유가 하나 더 늘었지?"


"....그래."


"나도 리얼돌 만들어 줄게. 요즘 실리콘 가격이 싸서 은근 맛도리야."


"....좆까."


이런 실없는 대화를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를 테였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은 이제 곧 사격 후의 열기로 뜨거워질 테였고,


그에 맞춰서, 누군가의 뜨거웠던 몸은 차갑게 굳어가겠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난 살고 싶었다.


저 짐승놈들과 살아남고 싶었다.


총을 꽉 쥐었다. 여전히 차갑고 불쾌한 감각이 손을 감싸지만, 그럼에도.


...



"조심."


"..."


차에서 내려서 얼마쯤 갔을까.


군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것보다도 긴장감이 내게 더 큰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흠, 참호는 여기다 파면 되겠네. 빨랑 파고 빼자."


"예이."


엄폐물 구축. 전쟁에서는 흉해 보이는 모래주머니 방벽이 그 어느 것보다도 든든하게 보인다.


공격자 입장에서는 환장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오크새끼와 2인조로 담당 구역에 왔다. 


아, 1인 1돈 조라고 불러야 하려나.


나머지 두 마리는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다.


"제대로 파라고, 빨랑 끝내자."


"어제 밤새 딸쳐서 힘이 없다."


"병신새끼..."


작업을 하면서 저 새끼는 목숨이 두 개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그래도 이런 실없는 대화가 계속될 줄 알았다.


참호 파는거, 말 그대로 삽으로 파는 거니까. 총 안 쏴도 되는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일이었으니까.


서서히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쾅, 하고 어디서 쏜 건지도 모를 포탄이 여러 개 착탄한다.


산 너머인가, 하고 여유롭게 생각할 틈도 없이, 무자비하게.


"썅!"


"빼, 빼!"


"진짜, 처음부터 좆같게!"


착탄 소리는 계속된다. 저렇게 지속적인 사격을 할 수 있는 무기는 분명 자주포였고, 달리 말하면, 보병이 참호 파러 가져온 도구로는 절대 뭘 해볼 수 없는 무기였다.


그리고,


"끄학!"


"야!"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무기도 아니였다.


포탄은 막강하다. 폭발의 불꽃이 보이는 범위 그 이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 돼지새끼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운 좋게도 살상범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즉사 '만' 피했다는 소리다. 


충격으로 크게 튕겨져 나오는 오크새끼를 부축하러 갔다.  


"윽, 흐으, 씨발..."


"야, 이 돼지새끼야! 빨리 일어나!"


"썅, 다리 부러졌나 봐. 더럽게 아프고, 안 움직여."


"씨, 그럼 부축이라도 받아서 움직여야 할 거 아니냐!"


쾅!


소리는 더 커져만 가고, 이제는 흙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린다.


달리 말하면, 아마 다음 포격에 맞는 건 우리였다.


"야, 이대론 둘 다 맞아 뒤진다. 빨랑 먼저 가라."


"...지랄하지 마."


"형 안 죽어. 적어도 쓰리섬은 해 봐야지. 어련히 살아 돌아올 테니까, 가라고."


"퍼블 딴다며."


"내일 보여줄게. 그러니까 내일 살아서 돌아온다는 뜻이다 임마."


"..."


왜지. 왜일까. 왜 맨 처음부터 죽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할까. 


전쟁을 시작한 나쁜 새끼들이 아니라, 왜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할까.


포탄 소리는 계속된다. 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고 느끼게 된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었다.


"...빨리 가라고. 아니면 손 꼭 잡고 같이 뒤질까?"


"...진짜, 씨발새끼."


"그래. 미안하다."


"......"


더 이상 말을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뒤도 안 보고 뛰었다. 


그 새끼는 버린 채로.


어쩐지 더 잔혹하게 빛나는 핏빛 불꽃놀이를 뒤로 하고서.



....




"너는 왔고, 오크년은 어딨냐."


"걔 퍼블 땄대?"


"..."


"...아."


"...저 개 씨발새끼들..."


오래 지내면 좋은 점은, 굳이 자질구레한 말이 없어도 소통이 가능하단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의도치 않게 말해버리기도 한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셌더라면, 내가 그래서 그 새끼를 업고 뛸 만큼 강했더라면.


이젠 없는 그 새끼가 운동 좀 하라고 했을 때 진작 했었더라면. 헬스장이라도 한 달 가봤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바꿀 수 있었을까.


"...지랄 마라. 걔가 마지막에 너한테 뭐라 그랬던?"


"...살아서 돌아온다고."


"굳이 그런 말을 한 의도를, 화작 들었던 새끼가 모르진 않겠지?"


"..."


"...자책하지 마라. 너 신경써준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 아니겠니."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후."


왜일까, 왜일까. 왜 우리가 울어야 하는 걸까.


왜 나쁜 새끼들이 아닌 우리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걸까.


"...그 새끼가, 맨날 지 장례식에 콘돔 올려달라 했던 거 기억 나냐."


"...응."


"꼴에 귀신들이랑 해 본다고, 그 새끼 상판에 말이지."


"걔답네, 정말로."


"..."


"끝나면, 편의점이나 들러서 몇 개 사자. 그 정도는 해 주자고."


"그래, 콘돔도 한 번 못 써본 아다새끼 한은 풀어 줘야지."


"...."


"...진짜, 개... 좆같은 새끼..."


"개년... 제일 먼저 뒤져놓고. 보여준다면서."


"야짤 받을 자격 없는 놈이구만, 진짜 그 씹새끼..."



어째서 눈물은, 무고한 사람이 흘려야 하는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세상이 정해 둔 것이기에.




"11시 방향! 포ㄱㅡ"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사람은 말 그대로 사라졌다. 아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도망쳐야 한다. 도망친다고 반드시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


하지만 먼저 앞서가던 고블린 한 마리는 뒷걸음치지 않는다. 다만 그 미약한 몸 하나 이끌고 부상자를 찾으러 간다.


급하게 무전을 친다. 이 전쟁통에선 거리가 조금만 벌어져도 폭발음에 모든 게 묻혀 버리니까.


"뭐해 이 새끼야! 빨리 돌아와!"


"먼저 가! 사람은 살려야 할 거 아니야!"


"미쳤어?! 너가 의무병이라고 그렇게 막ㅡ"


"의무병이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거다! 지금 이걸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지지직거리는 소리.


무전 종료. 


그래. 총도 못 쏴 보고, 최소한의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된 채 그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게 우리 역할일 것이다. 


어쩌면 비명조차 지르게 못하게 된 채로.


쾅쾅거리는 이 지옥같은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 폭발음을 악기 삼고 비명을 화음 삼는 전장의 연주가 잠시 멈출 때쯤이면.



"...야."


"리얼돌... 만들어준다며."



그제서야 형태조차 제대로 남지 못한 채 사라진 친구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게 우리 역할이니까.


추모할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이.



"..."


"..."


"...살아보자. 적어도 저 두 놈들을 닮을 순 없잖아."


"...그래."


처음 살아보자고 한 사람들은 이제 절반으로 줄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게 인생일까.







퓩!


저 멀리서 들려온 바람을 가르는 소리, 아마 저격총이겠지.


그리고 나서 들리는 털썩, 하고 쓰러지는 소리.


"아, 으아, 이 씨발...!"


"....!"


그래. 마지막 남은 한 마리. 저 새끼라도 남아 있었기에 이 나락에서 기어이 질긴 목숨줄을 붙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마지막 남은 줄조차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달려나갔다. 다리를 움직였다. 최대한 빠르게,  본능에 따라서. 


지키고 싶었다. 내 몸에 바람구멍 몇 십개가 난들, 적어도 친구를 세 번이나 떠나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려나갈 수 없었다. 왜? 왜였을까?


"이 미친새끼야! 너도 같이 구멍 뚫려 뒤지고 싶어?"


날 막은 건 정녕 그들이었나. 아니면 내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새끼한테 다가갈 수 없었던 건, 내가 겁쟁이라서 그랬던 것이었을까.


"야... 오지 마. 넌 살ㅇㅡ"


전쟁은 잔인하다. 그렇지만 감정 또한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도 잘 안다.


언제, 어떻게 사람을 죽여야 제일 아프게 죽일 수 있는지를.


퓩, 하는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리고.


마지막 남은 내 친구는 그렇게 대강 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구멍이 두 개 난 채로 사라져 버렸다. 제 할 말도 다 못 한 채.


"...아."


"..."


"...나중에, 인식표는... 너가 챙겨라."


아무 생각도 안 났던 것 같다. 마지막 친구가 그렇게 무너지고 나서부턴. 그의 시체에 있던 총에는 자그마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전문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야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지만.


그저 웃는 얼굴 넷 그려져 있던 것이었지만, 그렇기에 내 마음을 무참히 난도질해버린 그림이.


웃음이 나왔다. 즐겁다. 행복하고 싶다. 즐거웠다. 기쁘다. 즐거웠나? 기뻐하고 싶다. 행복하다. 기뻤던가? 즐거울 것이다. 행복했나? 기쁠 것이다.


의미도 없는 질문들은 중추신경을 따라 뇌로 전달되었고,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저 웃고 있었다.


그래. 나는 결국 웃고 있었다.


아주 순수한 감정으로, 목 놓아 원없이 웃었다.



















시간은 흘러간다. 나도 마찬가지도 흐른다.


전쟁은 얼마 안 가서 끝났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전쟁인 만큼, 그만큼 명분도 적었으니까. 국제 연합의 평화군은 이런 명분 없는 전쟁을 끝내라고 있는 것이니.


시간은 흘러간다. 나도 마찬가지로 흐른다.


도심부는 멀쩡했다. 경제와 인프라가 집중된 구역이니만큼 온갖 힘을 기울여서 최대한 외곽 쪽에서만 싸움을 하도록 유도했으니까.


여전히 마천루는 햇빛을 머금고 화려하게 빛나며, 자동차가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애들이 모여서 떠드는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평화롭다. 적어도 지난날보다는.


그러고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흐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약하다, 그리고 무력하다. 


살 이유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난 이미 원없이 웃어봤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싶지도 않다. 그 새끼들이 계속 떠오르기에. 그래, 그 얼굴들이.


돈도 그리 많지 않다. 나라에선 돈도 거의 주지 않았다. 애초 바라지도 않았지만. 


질렸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겁쟁이에, 친구도 없고, 삶의 의미조차 빼앗긴 이에게 세상에 다시 설 기회를 준다 한들 부질없을 테니까.


난, 친구들 죽게 내버려두고도 철판 깔고 살아가진 못하는 그런 나약한 부류니까.


한 마디, 한 마디. 그런 생각을 곱씹는다. 그 박자에 맞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계단을 따라 내딛으먼서.













난 밤이 좋았다. 고요하고, 말로 못 표현할 어렴풋한 낭만이 좋았다.


칠흑같이 검은 것처럼 보이기도, 청량한 푸른 빛을 띠기도 하는 밤빛이 좋았다.


어릴 때는 줄곧 친구들과 하늘을 바라보며 그 신비로움에 빠져들곤 했다.


누구는 말장난을, 누구는 책을, 누구는 스케치북을 꺼냈던 추억이 내 머리에 선명하다.


다만 이젠 떠돌이 하나만이 모든 걸 잃은 채 서 있을 뿐.


우스웠다. 어린 시절의 찬란한 기억은 지금의 나와는 어지간히 달랐으니까.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바닥을 문득 내려다보니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아까 전에 비가 오더니만.


이런 내 처지가... 너무나도 좆같기 그지없었다.


너무도 아름다웠던 밤하늘은, 갈 곳 잃은 나의 모습과 대조된다.


초라했다. 고작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내 얼굴을 보기가 싫었다.


그러자 새로운 수평선은 밤하늘의 경계를 타고 내려가고,


그리고, 그 끝에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옥상 문은 저 사람이 열었던 건가,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인가.


아무래도 어려 보였다. 몸이고 마음이고 다 망가져버린 나와는 다르게. 


"어린 애가 이런 데서 뭐하냐."


홀린 듯 말을 걸었다. 어째서일까, 말을 걸고 나서도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려나.


"...뭔가요."


그녀는 말한다. 뒤돌아 선 그녀의 모습은 나와 다르다.


세상 살 거 다 살았다기엔 앳된 티가 난다. 나와는 다른,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채로.


아름다웠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했다.


돈이 없다기엔 옷이 멀쩡하다. 수험생이라기엔  지금은 여름이다. 학교폭력을 당했다 치곤 몸에 외상이 없다.


그러나 그녀가 뭘 할지 대략 보였다. 바람을 쐬려면 이런 옥상까지 올 필요가 없다. 난간 너머에 서서 쐴 필요는 더더욱.


꼴에 정은 많아서, 혹은 나처럼 바보같진 않길 바라서일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말리고 싶어졌다.


"아직 성인도 안 되보이는 게. 내려가라."


"지도 같은 생각 했으면서."


"난 되고, 넌 안 되지. 그게 세상 이치야."


친구들에게 그랬듯이, 되도 않는 농담을 던지면서. 


"지랄......"


"넌 그래서 여기 왜 올라왔냐."


"죽으려고요."


"누가 모른대. 왜 죽냐고."


"당신부터 말하면 알려줄게요."


고민된다. 어짜피 죽을 거면 뭘 더 가리고 말고 할 것 없다. 그저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기가 싫었다.


그래도 말해 본다. 적어도 놈이 왜 죽으려는지는 알고 싶었다. 자기보다 별 것 없는 이유라면 말릴 이유가 생기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전쟁 났던 거 알고 있냐."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래. 거기 끌려갔다. 친구놈들도 같이 갔는데, 음, 그래. 지켜주질 못 했거든."


"소중했던 사람들인가요."


"그러니까 여기 왔겠지."


대충 요약해서 말했다. 구태여 자세히 떠올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넌 왜 여깄냐."


"저는 뭐 하는 사람 같나요?"


"글쎄, 그냥 학생 아니냐."


"뭐, 학생이죠."


"어딘지는 말 안하겠다만, 나름 대기업 사장 딸이에요."


"그런 놈이 왜 죽으려 하냐. 돈도 많으면서."


"질려서요. 말 돌려서 말하기도 싫고, 가식떠는 것도 싫고, 다 마음에 안 들어요. 가업이 뭐가 중요한지."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싫고, 친구도 없고, 차라리 마지막으로 빅엿 날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러냐."


"그런 거죠."


사람은 각자 자기 삶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갖는다. 아마 통합사회 시간인가,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므로 서로를 굳이 말릴 이유도, 말려질 이유도 없다.


다만 괜히 나는 또 막아서고 싶다. 왜일까. 위선자처럼. 어째서 소중한 사람도 지키지 못했던 이가 생판 처음 보는 남의 생명은 소중이 여기는 것인가.


애써 속에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죽진 마라."


"왜요."


"친구가 있다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거든."


"그 친구들 다 죽고 나서 그런 말을 하나요?"


그 말을 듣고, 잠시 뇌가 기능을 멈춘다.


컴퓨터가 재부팅하듯 갑자기 모든 게 암전됐다가, 천천히 정신이 돌아온다.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적어도, 아주 재밌는 표정일 테였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른다니. 


"죄송해요. 실언이었네요."


"...됐어. 그래서 난 죽으려 하는 거고. 근데 넌 아직 만들지도 못했잖아."


"그렇죠."


"적어도 즐길 만큼은 즐기고 뒤져라. 난 이미 그걸 잃어버렸거든."


"...친구 만드는 법도 모르는데."


그녀는 나와 달랐다.


난 더 이상 친구라는 명사를 입에 담기도 싫고 담을 자격도 없지만, 그녀는 아직 친구를 만들어 본 적도 없다는 점에서.


즉,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서.


잠시의 고민을 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할래?"


"지랄. 성희롱인가요."


"어짜피 네 말마따나 주변에 믿을사람 하나 없잖아. 여차하면 같이 떨어져 죽자고. 서로 똑같은데."


"난 어릴 때는 웃기라도 했는데 넌 아니잖니. 어릴 때 뭘 교육받았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재밌진 않았을 것 같거든."


"안타까워서 그래. 딱 한 번, 웃고 죽어라. 그럼 나도 안 말릴 테니."


"....마음대로."


"연락처 좀 주세요. 전 막 쏘다닐 수도 없는 몸이라."


"그래. 가능한 즐겁게 죽자."


그리 말하며 나는 마음을 고쳤다. 적어도, 저 놈 하나는 웃는 얼굴 만들고 죽자고. 


그게 비록 위선적인 행동이란 걸 알지언정.


ㅡㅡㅡㅡㅡㅡㅡ


그 날 이후, 억지로 살아만 있는 생활이 이어졌다.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짜피 저축할 계획도 없어서 절약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나름대로 남은 실낱의 삶을 즐기려 노력해봤지...만, 그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래방에 가 봤다. 마이크의 감각은 오래간만이다.



....



삐이이이이ㅡ


"이 씨발아! 스피커에 마이크 갖다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기모찌."


"에휴... 야, 너네. 뭐 부를 거냐?"


"나 먼저 할래. 이번에는...."



....




"...씨발."


나지막한 욕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냥 중간에 나왔다. 여기 더 있으면 계속 그 새끼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버리니까.


멀미한 건가, 아니면 체한 건가. 불쾌한 느낌이 든다.






다음으론 PC방을 갔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LED와 청축 사운드는 익숙한 풍경이다.





....




"한 입만."


"꺼져, 이 돼지새끼야. 너 예전에 찜질방에서 컵라면 한입컷 내던 거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데."


"한 입만."


"아, 꺼지라고!"


"한 입만."


"아니, 다른 놈들 것도 있잖아. 왜 하필 내 건데?"


"저 새끼들은 내가 뺏어먹을까봐 일부러 순한 맛 시켰다고. 꼬우면 너도 그거 시켰어야지."


"꼬우면 아시죠?"


"아, 저 개새끼들..."


"감사~"




...




땡그랑!



"...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젓가락이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새 젓가락은 아무래도 필요 없을 것 같다. 지금 이걸 내 위에 우겨넣으면 그대로 토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


그 외에도 여러 군데를 가 봤다. 하지만 그다지 재미를 볼 순 없었다. 가는 곳마다 전부 거지같았던 기억이 내 뇌를 헤집어 버려서. 


그저 멍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찰나, 휴대폰이 울린다.


얼마 전 연락처 받은 걔다.


'올 거면 와요.'


짤막한 말과 지도가 전부였다.


"..."


할 것도 없으니, 그냥 시키는 대로 가기로 했다. 내버려 두면 또 어디 옥상에 올라가 있을 테니.













도착한 곳은 어느 지하철역 앞이었다. 


딱히 유흥거리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주변에는 통유리로 된 건물들만이 즐비하다. 


발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본다.


"뭐, 잘 지냈나요."


뭔, 지가 불러놓고 지가 늦게 도착하면 어쩌자는 거냐.


"아니, 지루해 뒤지겠다."


"저돈데. 그래서, 뭐 재밌는 건 있어요?


"그건 나보다 너가 더 잘 알지 않을까. 난 틀딱이라 요즘 애들 몰라."


"하루종일 방 안에만 처박혀서 공부만 했을 사람한테  잘도 그런 걸 물어보네요."


맞네, 생각해보니까.


"뭐, 그럼 놀아본 적이 아예 한 번도 없어?"


"글쎄요, 틀딱들 비위 맞춰가면서 회의하는 게 노는 거라면 놀아 봤다만."


"...허."


뭐, 굳이 계획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이리저리 쏘다니기로 한다. 어짜피 나에게 시간은 남아도는 것이니.


"뭐, 그럼 아무 데나 돌아다니자."


"진짜 계획없네요."


"뭐 어떡하냐, 너가 한 번도 못 놀아 봤다는데. 그럼 아무 데나 먼저 찾아가 보는 거 말고 다른 방도가 있겠니?"


"...그렇긴 하네요. 뭐, 아무데나 가 보죠 그럼."





ㅡㅡㅡㅡ



다시 노래방을 갔다. 약간씩 느껴지는 두통을 참으며 자리를 잡고 들어가 돈을 넣는다.


"뭐, 부를 줄 아는 건 있고요?"


"보여준다."


물론 개뻥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성취도평가 B도 못 받았던 기적의 음치니까.


이걸로 참 놀림 많이 받았는데.


...이미 지난 추억이다. 지금은 떠올리지 말자.


같이 온 사람도 있는데, 분위기를 망칠 순 없다.


"...혹시 청각장애인이에요? 음정을 뭔 이따위로..."


"닥쳐, 내 목이 이 지랄인 걸 어떡해?"


그리고 그 결과는,



"...47점..."


"니미."


"저 귀 먹게 하려고 데려온 거에요?"


"이거 기계 망가진 것 같은데. 이렇게 낮을 리가 없어."


"망가진 건 당신 목청이고."


"야, 그럼 너가 불러보든가."


"뭐... 발라드릴게요, 그렇게 원하신다면?"



뭐, 결과는 뻔했다.



"지랄하네."


"뭐, 50점이면 많이 쳐 준거지, 그 실력에."


"당신보단 나아요."


"허, 마이크 줘 봐. 쳐발라주마."


"귀 막고 있어도 될까요?"


"닥쳐 임마. 보여준다니까?"


그 뒤로도, 서로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불러댔다.


물론, 둘 다 60점 넘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 노래 한 번도 안 해봤냐?"


"처음인데 이 정도면 재능있는 게 아닐까요."


"육갑을 떤다."


"아, 뭐요. 노래 못 부를 수도 있지."


"누가 뭐랬냐."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거리를 걸었다.



"근데 넌 진짜 놀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냐?"


"뭐, 없죠."


"도대체 지루해서 어떻게 살았냐."


"그래서 죽으려 했잖아요."


"그렇...네."


"뭐, 됐어요. 지금은 나름 재밌으니까."


"그럼 다행이네."




그 다음으론 피시방을 간다.




"게임할 줄은 알아요? 아까 노래 부르는 거 보니까 영..."


"거 참 취급을... 아, 이거 어떠냐. 2인용이라는데."


댓 테익스 투. 작년쯤에 유행했던 게임이었지. 


걔네들은 네 명이서 같이 할 수 있는 거 아니면 안 한다고 해서, 기억에서 잊어버렸던 물건이었다.


이 게임은 미리 안 해봐서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중간에 발광해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름이 딱 2인용 게임이긴 하네요."


"그럼 내가 살게. 같이 해 보자."


그리고...


"...우리 저 청소기 몇 번째 보는 거냐?"


"씨발..."


"어허, 착한 말."


"아, 지랄하지 마요!! 당신이 먼저 뒤지니까 못 깨잖아!!"


"너가 더 잘 했어야지."


그녀는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난 쌍뻐큐를 날린다. 저런 손가락욕은 나한텐 일상이었다고.



...



"결국 못 깼네요."


"난 잘했는데."


"뒤질래요?"


"너 죽으면 같이 죽을게."


"지금 당장 죽으러 갈래요."


"임마, 너 죽지 말라고 이 짓거릴 하는데."


"누가 그러래요?"


"에휴..."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중간에 거리에서 아이스크림도 샀다. 


너무 달았다.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탈은 어떻더냐?"


"..."


"물어보면 답을 해라 임마."


"...그냥 그래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그렇냐."


"...잠시만 고민할 시간을 줘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시간 나면 연락할게요. 일주일동안 연락 안 오면 따라 죽으시면 돼요."


"에휴, 죽을 생각뿐이더냐."


"지는."


"그래라, 그럼."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놈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이젠 또 혼자다.


기약없이 며칠을 더 연명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린 건 덤이다.


"씨, 어디서 자야 하냐..."


묵을 곳도 찾아야 하네. 거 참, 어떻게 이 목숨 하나가 이리 질길 수가 있을련지.



ㅡㅡㅡㅡㅡ



대충 아무 값싼 모텔에다 자리를 잡았다. 딱히 뭘 들고 온 것도 아니라서 가볍게 돈만 내면 된다는 게 큰 이점이었다.


그는 그렇게 기다린다. 다른 것도 안 하고 굳이 여기서 이럴 이유는 없지만, 이상하게 갑자기 또 모든 게 재미없게 느껴졌다.


노래방을 다시 한 번 가 봤다.


그 때 골랐던 노래를 똑같이 부른다.


다른 건 없었다. 점수가 올랐긴 했다만 47점이나 53점이나 비슷비슷한 것으로 느껴졌다.


피시방을 다시 한 번 가 봤다.


그때 했던 2인용 게임 말고 다른 게임을 해 본다.


이번엔 배틀로얄이다. 실드를 충전하고, 궁극기를 활용하는 하이퍼 FPS.


...중간에 하다가 그냥 나왔다. 게임은 무난했지만, 그냥 총 갈기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때와 같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샀다. 저번만큼 단 맛이 나진 않는 것 같다. 이미 한 번 먹어서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렸다. 재미가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연락을 기다렸다.


그때의 약속이 마지막 남은 미련이었으니.


얼마 안 가서 우웅, 하고 폰이 울렸다.


'안 죽었죠? 저번이랑 같은 데로 와요.'


"...그렇게 죽을 것마냥 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뭐, 잘 지냈어요?"


"심심해 뒤지겠다."


"저도요."


"그래서, 오늘은 뭐하냐."


"그런 건 시간 남아도는 당신이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젊은 놈이 웃사람에게 배려를 보여야지."


"틀딱."


그때랑 똑같았다. 둘 다 심심한 것도, 뭘 할지 모르겠는 것도. 


이번에도 노래방을 간다.


"그렇게 못 부르면서 여길 또 와요?"


"니 목소리 웃겨서 그거 들으려고 왔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또 발라드려요?"


"지도 50점대면서..."


이번에도 번갈아 부른다. 여전히 엉망이다.



"...제가 보기엔, 당신 성대는 연구 대상이에요. 어떻게 목에서 쇠창살 긁는 소리가 나오지?"


"반사."


"병신..."


"무지개반사."


"어휴..."


...


"너도 공부를 했으면 영어는 좀 잘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


"썅, 윗대가리들 회의장에는 저런 욕이랑 줄임말이 안 나와요."


"공부했어야지."


"좆까세요."


....



결과는 그래도 저번보단 올랐다. 난 55점,


쟤는... 61점.


"좆밥."


"기계 망가진 거 확실하네."


"좆밥."


"야 씨, 한 번 더 할래?"


"좆밥."


"에휴..."


"좆밥."



그 다음으로 피시방을 갔다.


저번에 샀던 2인용 게임 말고 조만간 했었던 하이퍼 FPS를 한다.


수송기에서 내리고, 무기를 줍고, 실드를 충전한다.


청축 키보드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제법 탄속과 낙차까지 구현해 둔 게임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프로게이머처럼 상대를 학살한다. 


"...너 이거 해봤던 게임이냐?"


"해봤겠어요?"


"너 벌써 6명 죽인 건 알고 있지?"


"꼴에 친목질하러 왔다 하고 기싸움 거는 거 보면 아구창에 총 갈기고 싶거든요. 그거 덕에 잘 하는 것 같은데."


"너 군인해라. 내가 보기엔 너 재능있어."


"당신 쏠 수 있으면요."


"너가 발릴 것 같은데. 나 나름대로 현직 종사자였다."


쨍그랑, 하고 실드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킬로그에 내 아이디가 떴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선 맨날 저보다 먼저 죽어요?"


"응애."


"에휴..."


...사실, 그냥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울려댈 때마다 내 손도 덩달아 떨렸으니까. 


이런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




"이거 재밌네요."


"...이거 60인 게임 아니였냐."


"그래서요?"


"팀도 없이 혼자서 너가 15명을 죽였어."


"죽이고 싶은 놈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아요. 이 정도로 뭘."


"...군필여고생이라도 해볼래?"


"오... 좆까는 소리하네."


"얌마."




....



"왜 맨날 아이스크림만 먹어요?"


"뭐, 삼각김밥이라도 사 줄까?"


"별로."


"새끼가, 그럼 뭘 사달라는 건데."


"그냥 말해본 거에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거리를 걸어간다. 이전에 그랬던 것과 비슷하다.


"...음."


"...?"


"그거 알아요? 제가 자의로 두 번 이상 만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란 거."


"...? 진짜로?"


"진짜라니까요."


"...허, 너도 꽤나 힘들었겠구만."


"어떻게 알죠?"


"아니,넌 애초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단 거잖아. 안 외로웠냐?"


"글쎄요, 이미 익숙해서."


"허...어린애한테, 참 가혹한 것 같네."


"...그런 게 익숙할 수가 있을 리가 없잖아."


"...네?"


"혼자 있는 것과,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건 다른 거야."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랑, 사방이 적인 사람이랑 모두 말주변 없는 건 똑같지. 그런데 둘은 딱 봐도 다르잖아."


"너가 딱 후자 아니냐. 그것도 아주 어린 나이에."


"그래, 많이 힘들었을 게 보여서. 대충 봐도."


"...동정하는 건가요?"


"뭐, 그런 쪽에 가깝지. 내 처지도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


"...친구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글쎄, 거창한 건 없지."


"서로 놀리고, 욕하고, 괴롭히지만, 동시에 믿음직하고, 듬직하고, 따듯한... 그런 거."


"서로 놀면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친구지. 다른 게 또 뭐가 있겠어?"


"...가식 없이?"


"음... 적어도 나는 그랬어."


"...당신은 저랑 있으면서, 진심으로 웃었던 건가요?"


"뭐, 난 연기를 못 하니까."


"..."


침묵.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참, 좆같네요."


"웃고 싶었는데. 딱 한 번이라도."


"아직 어린애이고 싶었는데."








"...아."



"...오랜만이네요. 울어보는 것도."


"...저, 왜 이럴까요."


하나 둘, 감정은 응어리져서 떨어지고.


나는  그 칼날이 되어버린 통곡을 감싸쥔다.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진다.


"...내가 해 줄 만한 건, 이 정도밖에 없겠지만..."


"맘껏 울어라. 너 하나 정도는 받아줄 수 있으니까."


...가슴 부근이 젖어가는 게 느껴진다. 따듯하고, 구슬프게.


불운하게도, 아마 난 조금 더 살아 있어야 할 것 같다.













"...미안해요. 안 좋은 모습을 보였네요."


"전혀. 차라리 소리내서 우는 게 혼자 썩어들어가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런가요."


"아무렴."


...


"...저기. 이름이 뭐에요?"


아 맞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안 했구나.


"알아서 뭐하게?"


"튕기기는. 그럼 앞으로도 계속 병신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에휴, 그럼 너부터 까."


"이런 게 뭐라고... 시라아시라 불러요."


"아시모라고 불러."


"이름이 특이하네요. 까먹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러냐."


"제가 기억하는데 당신이 까먹으면 안 되겠죠?"


"내가 왜? 잊어먹을ㅡ"


"뒤질래요?"


"아니, 뭔 이름 하나 가지고..."


"뒤질래요?"


"아오 씨, 알았다고."


"제 이름 뭐라고요?"


"시라아시라며, 이년아."


"기억해 줘요."


"알았다고."














그 날 이후로, 어찌저찌 이어지는 삶이 계속되었다.



....


'아시모'


'몰폰이란 게 이렇게 재밌는 거군요?'


                                                              'ㅋㅋㅋㅋㅋㅋ'


'아 ㅣㅆ버ㄹ'

                                                                                 

                                                                                  '?'


'후'


'들킬뻔'

                                     

                                                             '조심해라 임마'


'ㅌㅋㅋㅋ 이따 연락할게요'

                                               



.....



"아시모."


"왜."


"...아니 뭐, 그래. 변명이라도 들어봅시다."


"뭐."


"아니, 서로 공유하는 계정에 야겜을 깔 거면 적어도 뒷처리를 할 생각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대답 안 해?"


"나는 존나 무결하다."


"지랄하네."


"너가 남자라면 저 찌찌를 참을 수 있겠냐."


"...저 정도면 종양 아니에요? 머리보다 큰데?"


"그게 매력이야."


"...변태새끼."


"괜찮아. 넌 볼 것도 없다."


"야."


"죄송."


.....



"왜 자꾸 어울리지도 않는 발라드를 부르냐."


"제 맘이죠."


"연애도 한 번 못 해봤을 놈이..."


"지는."


"난 해 봤는데?"


"....진짜요?"


"....?"


"물어보잖아요. 진짜냐고."


"아니, 너 왜 갑자기ㅡ"


"먼저 질문한 건 전데요."


"아니 뭔, 당연히 구라지. 이 면상에 해 봤겠냐?"


"...진짜죠?"


"진짜라고 이년아. 갑자기 지 혼자 빡쳐서는..."



....


쨍그랑!


"저 누웠어요."


"아니, 그러니까 왜 지 혼자 날아가서 뒤지고 지랄인데."


"말은 그래놓고 몸은 저 살리러 오는데요?"


"썅년아, 너 죽으면 나 혼자 게임해야 하잖아."


"아, 저 없으면 안 되겠어요?"


"당연하ㅡ 아니 잠만, 어감이 이상한데?"


"고백인가요?"


"꺼져 이년아. 난 찌찌가 큰 게 좋아."


"...이거 팀킬 되나?"


"안 되니까 이런 말을 씨부리겠지?"


퍽!


"끼야아악!!"


"아, 현실에서는 되는 걸 까먹으셨나 봐요?"



....




'아시모.'


'아시모?'


'대답해요.'


'아ㅣ모'


'아시ㅣ모'


'빨리'


'보라고'


'아ㅏㅣㅅ모'


                                                                              '?'


'아'


'다행이다'


                                                                           '???'


'됐어요 병신아'


'혼자 뒤질생각 말고'


'제가 연락하면 10초 안으로 봐요'


'걱정되니까'


                                                                            '아니'

                                                          

                                                           '자고 있었는데'


'그냥 시발'


'빨리 대답하라고요'

            

                                                                          'ㅇㅋ;'




.....  



"아시모."


"왜."


"저 오늘 꿈에서 당신 봤어요."


"으... 징그러. 왜 내 꿈 꾸냐."


퍽!


"아, 왜!"


"....그래. 이게 당신답지."


"뭐래는겨. 아무튼, 뭐 내가 꿈에서 무슨 말 했냐?"


"저보고 꼴린대요."


"지랄하네. 그거 나 아니ㅡ 악!!"


"다시 말해 봐요. 뭐라고요?"


"난 찌찌 큰 눈나가 좋다ㅡ악! 아악!!"



....








꽤나 웃을 만한 일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적어도 둘 모두 처음 만날 때보단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웃는 만큼이나 점점 더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왜, 왜 안 도와준 거야? 난 널 믿었는데ㅡ'


'추워, 배가... 아파... 찢어질 것 같아...'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


'살려줘! 살려ㅡ'


'살고 싶었는데. 그림 더 그리고 싶었는데.'


'왜, 왜? 왜 너만 살아있는 거야? 우린 다 죽었는데ㅡ'






'언제 죽어? 언재 죽어? 언제 죽어? 언제 죽어?'


'행복하니? 행복하니? 행복하니? 행복하니?'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위선자.'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만? 왜 너ㅡ'







벌떡!



"아..."


또인가. 또 이 꿈인가.


어느샌가, 이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가 위선자라는 걸 일깨워주듯.


난 결국, 친구들을 죽게 내버려 둔 그런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듯.


처음에는 견딜 만했다. 두 번째에는 고통스러웠다.


세 번째에는 일어나 보니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네 번째에는 아무 죄도 친구들을 원망했다. 나를 도대체 왜 괴롭게 하냐고.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대신에, 무고한 친구들을 탓하는 자신을 보니 자연스레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꿈은 반복되었다.


수도 없이 친구들의 시체를 본 후에야, 문득 다시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가 웃을 자격이 없다는 걸. 


죄인은 감히 행복할 자격이 없기에 이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걸. 꿈을 꿀 자격조차 없다는 걸.


우웅!


...시라아시인가.


'오늘 만나요! 나흘만에 보는 거니까 존나 놀자고요!'


이제 저 메세지 너머의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적어도... 전보단 더 밝아진 모습이 말이다.


어쩌지. 난 갈수록 더 죽어가기만 하는데.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한 번, 웃고 죽으라고.


적어도 그녀는 이제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이크를 들기 힘들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토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게임에서 들리는 총소리가 고통스럽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고, 아프고, 그립다.


'그래'


어지러운 정신을 강제로 부여잡으며 답변을 보낸다. 


거기에 뭔가를 더 끄적여 본다.


'이게 마지막으로 만나는 걸지도.'


"...아니다."


마구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 할 테니까.












"아, 재밌었다."


"너 아무리봐도 군인 해야한다니까? 에임이 미쳤어."


"지랄하네. 내가 거길 왜 가요? 사람 대우도 안 해주는데."


"맞긴 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면서 거리를 걸어갔다. 


진심으로 웃으면서. 마지막까지.


해가 저문다. 하늘은 이제 어두운 장막을 칠 것이고,


그건 곧, 내 역할의 끝을 알리는 것일 테였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더 이상, 친구들의 찢어지고 상처받은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다.


"그래, 요즘 어떠냐?"


"맨날 좆같죠. 다를 게 뭐가 있나요?"


"아니, 그거 말고."


"요즘은 어때. 살 만해?"


"...뭐. 덕분에요."


"평생 웃어 본 것보다 올해 웃은 게 더 많을 정도로요."


"...그래. 그럼 됐다."


"왜요, 갑자기?"


"아니, 그냥."


"설마."











"이제 와서 죽으려고요?"


"...아니."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뭔데요."


"그냥 말해본ㅡ"


"아시모, 내 눈 똑바로 봐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거칠게 내 얼굴을 감싸쥐는 손이 날 억지로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게 만들었다. 


"똑바로 보라고."


목소리가 달라진다. 단호하게, 차갑게.


그 날카로운 어조는 나를 베어내는 듯 했다.


"아시모, 지금 뭔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어요."


"설마 지금 나 웃을 수 있게 만들어 놨으니까 죽겠다고 지랄하는 거면."


"내가 손수 톱 들고 와서 평생 못 움직이게 팔다리 다 갈기갈기 찢어발길 거니까."


"그딴 지랄맞은 소리 내 귀에 안 들리게 해요. 알겠어요?"


"...알겠어."


"...씨발, 괜히 기분 잡치게..."


"미안."


"알면 됐어요."


"그래서, 이제 갈 거냐?"


"가야죠. 그럼 뭐, 재워주시게요?"


"나 잡혀가."


"변호팀은 이미 있으니까 상관 없어요."


"아니, 그 말이 아니잖냐."


"진심인데."


"에휴... 가라."


"에잉, 떠먹여줘도 못 먹어요 아주."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건넨다.


"아, 죽으려 하지 마세요? 진짜 잘라버릴 거니까."


"알았다고 이년아."


아, 작별인사가 아니라 경고인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지하철역 아래로 걸어 내려간다.


이젠... 또 나 혼자다.


밤하늘은 이제 어둡다. 


어째 약간 쓸쓸하다.


바람이 불어온다. 내 뺨을 스치며 날아가는 한 줄기 맑은 산들바람이.


마치 내가 해야 할 게 뭔지 알려주는 것처럼.


"...미안."


누구에게 전하는지도 모를 사과를 한다.


"나는,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삑ㅡ



"8,700원입니다."


"네."



딸랑ㅡ


바람이 여전히 선선하다. 적당히 쓸쓸한 게 썩 좋았다. 


편의점을 들렀다. 산 물건은 콘돔 한 박스.


딱히 의미가 있는 물건은 아니다. 그냥 그 녀석이 생각나서 샀을 뿐이었다.


"후..."


별빛이 보인다. 도시답지 않게, 꽤나 선명히.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잔혹할 정도로 말이다.


"...뭐, 가는 길 배웅해주러 온 건가."


그래, 적어도 외롭진 않겠네.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간다.


굳이 시끄럽게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지금이 제일 마무리하기 좋을 때였다.


"...곧 만나자. 새끼들아."


혼잣말을 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ㅡㅡㅡㅡ



터벅 터벅. 


계단에 발소리가 울린다.


결국 처음에 올라왔던 빌딩으로 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처음 죽으려 했던 곳이 여기였기 때문일까.


계속 걸어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옥상이었다.


어째서 이 앞의 철문이 그렇게 굳세 보이던가.


오만 생각이 교차한다. 혼란스럽다.


내가 겁쟁이라서? 아니면 아직도 시라아시와의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인걸까? 



...잡념은 그만. 머리 복잡한 상태로 가고 싶진 않잖아.


어떻게든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워가면서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ㅡ








"...아, 왔어요?"






"....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라아시도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구도다. 지평선을 타고 내려오는 곳에 서 있는 채로, 난간 너머를 기대고서.


세상 어떤 곳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그 나락의 문턱에서, 시라아시가 입을 열었다. 


"...사실,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요즘 노래방에서도 계속 손만 떨고 있고, 마우스도 제대로 못 누르고. 이것 말고도 놀라가는 곳마다 자꾸 그러시던데."


"심증만 가지고 있다가, 오늘 말하는 거 보고 확신했죠."


"......"


"뭐, 그렇게 입만 닫고 있을 거에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내 진심을 짜내서 내뱉는다.


"나... 좀 힘들거든."


"알아요."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


"뭐, 그럴까요?"


그런 말을 하면서 그녀는 난간을 손으로 잡은 채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난간을 잡고 있는 그 두 손은, 정말 불안정해 보였다.


"......"


"우리 처음 만날 때 생각난다. 그렇지 않아요?"


"그때 내가 죽겠다고 했던 거, 당신이 말리고. 그래서 꾸역꾸역 살아봤는데, 의외로 또 재밌는 거 있죠."


"아시모, 그 때 당신을 만난 게 제겐 축복이었어요."


"당신은 너무 착하고 순진하거든."


"생각해 봐요. 세상 제일 기싸움 심하고 정이라곤 좆도 없었을 곳에서 살아왔을 사람한테... 하는 말이 고작 친구하자, 라니."


"자기도 힘든데, 꼴에 제가 불쌍하다면서 아픈데도 어떻게든 즐겁게 놀아주고."


"그냥 보이더라고요. 당신이 제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제가 고통스러운게 당신에게 보이는 만큼이나... 제겐 당신이 아프고, 또 그 순수한 모습이 보였어요."


"......"


"여기 올라온 걸 원망하진 않아요. 아까 전에는... 솔직히 꽤나 당황했거든요. 그래서 말이 거칠게 나왔던 것 뿐이에요."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럴 생각을 할까, 이걸 생각 못 해봤으니까요. 와, 나 되게 이기적인 년이다. 그쵸?"


...



"...아시모."


"..."


"아까 말했다시피, 아시모가 힘든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 당신의 선택에 뭐라 할 자격도 없고요."





"...근데, 저 되게 이기적이라라서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할게요."


"제가 죽어도 상관 없으면, 아시모도 죽어도 돼요."


"하지만, 절 살리고 싶다면, 제 손을 붙잡아야겠죠. 당연히 당신도 떨어지지 못할 거고요."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 자유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난간에서 뗐다.


"...잠깐, 멈춰 봐."


그녀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만 몇 초 간격으로 손수 자신의 운명을 끊어갈 뿐.


왜지. 난 왜 고민하는 걸까. 애초에 처음에 만났던 약속 그대로잖아. 


한 번 웃고서 죽자고.


대체 왜? 처음에 했던 말 그대로 서로 웃었으니까, 이젠 죽어도 괜찮잖아.


근데 왜? 난 왜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왜일까. 이것 또한 나의 이기심일 뿐인 걸까?


뇌는 점점 사고을 멈추어 갔다. 무의식, 어쩌면 꿈과 같은 몽롱함에 빠진 채로.


뭘 해야 하지? 대체 왜 난 마지막까지 위선자인 거지?


나도 어짜피 따라 죽는 거잖아. 애초 이렇게 끝날 인연이었잖아. 대체 왜 집착하는 거야?


무엇이 그리워서? 도대체 왜 예전 친구들은 그렇게 버려놓고 또 친구라는 관계에 집착하는 거야?


애초에 여긴 죽으려고 올라온 거잖아. 왜 고민하는 거야?


대체 무엇이 그렇게나 미련스러운 거야?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들은, 마침내 내 뇌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뿐.










탁!


"...역시, 당신은 너무나도 착해."


그래. 위선적인 선택을 말이다.



"...씨발년."


"...미안해요."


"......"


"...사실, 이건 제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었거든요."


"당신이 날 붙잡았다면 그건 날 소중히 여긴단 뜻일테고, 그렇지 않았다면 전 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올라와라."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래요. 당신 손... 정말 따뜻하거든요."


"......"


바람만이 고요하게 부는 옥상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ㅡㅡㅡㅡ







달빛이 밝다. 어지간히 밝다. 황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람도 분다. 꽤나 맑게 느껴지는 바람이.


고요한 분위기와 맞물린 이 꼭대기, 아름다운 옥상에 사람 둘이 있다.


"아시모."


"...왜."


"고마워요."


"..."


"저 소중하게 여겨줘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감싸줘서."


"진심으로 웃게 만들어 줘서."


"..."


"아시모."


"...말해."


"기왕 나쁜 년 된 김에, 부탁 하나 더 할게요."


"....뭔데."


그렇게 말하면서, 시라아시는 내게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시라아시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러고선 툭, 하고 살짝 밀쳐서 나를 넘어뜨렸다. 


아무 저항도 없이 쓰러진 내 위로 그녀가 올라왔다.


달을 배경 삼아서 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숨소리만이 들리는 고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 무렵, 아무 말도 없이 시라아시는 내게 입을 맞춰 온다.


저항하지 않는다. 들어오는 대로, 내게 향하는 마음을 받아들인다.


울분과 고통으로 망가진, 상처받고 버려진 이들끼리 서로 보듬는다.


상대를 갈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싶기에.


뇌가 어지러워진다. 깨질 것만 같다.


그렇다고 시라아시를 놓진 않는다. 마음을 찢어발기는 고통이 심해질수록, 더욱 세게 껴안는다.


그녀 또한, 나를 점점 더 세게 안는다. 사력을 다하는 듯이, 처절하고도 간절하게. 


그런 상황이 몇 분 지나고서, 시라아시는 입술을 뗐다.


둘 사이를 잇는 은빛 다리가 달에 비친다.


"......"


"......"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라아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요하다. 바람소리만이 간간히 들린다.


이런 침묵이 영원하다고 느껴질 때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아시모."


"......"


"...그리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픈데도, 그 고통을 못 끊게 붙잡아 버려서."


"그런데... 그런데... 당신이 죽어 버리면, 전 또 다시 혼자가 되어버려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그녀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하고 눈물에 틀어막힌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난 위선자에, 친구를 버린 배신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악몽으로 고통받고, 기억에 시달릴지라도.


하지만, 자신과 같이 고통받고 있는 이가 있다면, 외톨이라는 고통을 몇 십년을 겪어온 이가 있다면.


자신이 유일한 친구였으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곁에 있어줘야 한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난 결국 마지막까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는가.










"...시라아시."


"...미안. 나도 참 이기적인 인간이다."


"멋대로 너가 멀쩡할 거라고 착각하고, 멋대로 관계를 끝내 버리러 했으니까."


"...미안해.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해줘서... 고마워."



그럼에도 난, 거짓말쟁이가 되기를 택했다.


그 말을 조용히 듣던 시라아시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씨발. 나쁜 새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진짜... 아시모... 이 나쁜 새끼야..."


"...흑, 으아, 으아아앙ㅡㅡ!!"


그리고, 아프고도 날카롭게 응어리진 감정을 쏟아냈다.


부서질 것처럼 우는 그녀를 살며시 토닥였다.


"...미안. 시라아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흘러 넘치는 통곡만이 있을 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달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또 아름다웠다.


어딘가 있으면 좋겠을 친구들에게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사과를 전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좀 더 살아 있어야 할 것 같다고.


































"...근데 넌 내가 여기 올라올 줄은 어떻게 알았냐."


"당신 성격이면 돌고 돌다가 그냥 처음 왔던 곳으로 갈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런 짓 할 만한 고층 빌딩 중에서 옥상 개방한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까요."


"아, 그래서 두 번 갔을 때 모두 열려 있었던 건가."


"뭣보다도, 그냥 제가 몰래 따라다녔거든요. 편의점 들를 때 확신했죠. 보통 사람은 세상 다 잃은 얼굴로 편의점에 들어가진 않으니까."


"그래서 바로 당신보다 먼저 거기 올라간 거죠."


"허...똑똑하네."


"아시모가 뻔하게 움직인 거에요."


"뭔 칭찬을 해 줘도... 아오."



서로 한참을 울고서, 서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무도 없는 새벽녘의 거리를 걸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도 나누면서.


"아시모."


"왜."


"근데, 콘돔은 왜 산 거에요?"


"아... 친구 하나 있었거든. 걔 부탁이야. 장례식에 놔 달라 하더라고."


"아..."


"됐어, 그 새끼 얼굴에는 귀신도 못 따먹어서 쓸 데도 없을걸."


"...친구한테 그런 말 해도 돼요?"


"그 정도로 친했으니까 이런 욕도 하는 거야. 그러는 너도 게임할 때 나한테 욕 박으면서."


"...그런가요."


"아무렴. 적어도 기분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 말 이후로, 약간의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시라아시가 먼저 그 적막을 깬다.


"아시모."


"왜."


"..."


"뭐야. 뭔데ㅡ"


"사랑해요."


"아까전에 옥상에서도 한 말이지만, 진심이에요."


"한 번 더 말하고 싶었어요."


"고백이냐?"


"맞아요. 대답해주세요. 빨리."


...


"...이미 그렇게 키스까지 해 놓고선. 내가 거절할 수 있겠냐고."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너 미성년자잖아."


"다 크고 나서 와라. 나도 그럼 미련없이 받아줄 테니까."


"...약속한 거에요?"


"그래."


참, 이 인생 참 질기다. 


정말, 쓸데없을 정도로 질기네.




















"회장님, 말씀드리신 서류 정리해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의자에 앉은 회장님은 바로 정리된 서류를 체크하기 시작한다.


"어라, 중요한 게 하나 빠졌네요?"


"네? 그럴 리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괜찮아요. 여기 있네요."


팔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리자, 회장님이 어떤 서류를 흔들고 있는 게 보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장 핏도 쩌는데, 얼굴도 예쁘다. 남자라면 한 번에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일도 잘하고, 인성도 좋고, 다 좋은 팔방미인 회장님인데...


"...이 미친년아! 업무서류에 자꾸 혼인신고서 쳐넣지 말라고! 다 빼내야 하잖아!!"


"아 왜요! 어짜피 볼 장 다 본 사인데!"


"싫어! 꺼져!"


"빼애애애액!!"


그래. 혼인신고서로 암살하려는 것만 빼면.




그 날 이후로, 정말로 시라아시는 독하게 살았다.


드디어 자기 가업에 쓸 만한 구석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렇게 시라아시는 성인이 되었고, 어엿하게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래. 존나 큰 가업.


"오늘의 주요 속보입니다. 국내 대규모 기업인 칼레이도스코프의 부회장이었던 시라아시 부회장이 오늘부로 회장으로 정식 취임하는데요ㅡ"


"....저거 너냐?"


"저죠, 그럼."


"..."


"뭐요. 놀랐어요?"


"아니... 너 진짜 거물이었구나."


"벙찐 얼굴 되게 웃기네요."


그렇게 시라아시는 기업 대표직을 정상적으로 물려받았고.


나는...


"그래서, 나보고 비서를 하라고?"


"왜요.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


"아니, 이거 그냥 낙하산이잖아. 나 착하게 살고 싶어."


"역시 너무 착해도 탈이라니까. 그리고 누가 낙하산 소리 듣게 한대요? 공부 존나 시켜서 제대로 일하게 만들 거라고요."


"아니, 그런 거 이전에 나도 다른 게 하고ㅡ"


"아, 다른 데에 신청서 넣을 생각하지 마요. 어짜피 어지간한 건 다 추적 가능하니까."


"..."


"무슨 말인지 알죠? 얌전히 내 옆에 있으라고요."



그래. 그 회장님 직속비서 한다고 존나 뛰었다.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도, 어찌저찌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손 안 움직여? 그렇게 느려서 저 도울 수 있겠어요?"


" 그 ! 아 ! 아 ! 앗 ! "


아니, 강제로 적응하게 되어버린 거려나.


뭐 어찌됐든, 나도 어엿하게 시라아시 옆에 설 만한 비서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상처는 흉터가 되어 우리를 쓰라리게 했지만, 적어도 둘 모두... 이전보다는 삶에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악몽을 안 꾸는 것도 아니고, 그 녀석들이 그립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 내겐 의지할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봐요. 내가 어디가 모자란데요. 얼굴이 안 받쳐줘? 아니면 돈이 없어?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찌찌가 없잖아!!"


아 잠깐만. 좆됐다.


"......"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


좆됐다. 어떡하지.


"...아시모."


"네."


"제가 요즘 많이 봐주는 거 알죠?"


"...네."


"요즘들어 자꾸 다른 여자들한테 말 거는 것도 눈감아줬는데."


"...그건 순전히 업무ㅡ"


"쉿."


시라아시가 검지손가락으로 제스처를 취한다.


자동으로 입이 다물어진다. 그 정도로 지금 그녀가 무섭다.


"안 그래도 뭐라 하고 싶었던 거 꾹꾹 참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도발을 하면..."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내게 서서히 다가온다.


무섭다. 살려줘.


시라아시가 내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무 저항없이 내 몸이 그녀에게 이끌려간다.


"...아무래도, 그때 했던 교육이... 또 필요하신 것 같은데요?"


아니야. 필요없어. 또 탈수 걸려서 기절하고 싶지 않아.


"아니오. 괜찮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ㅡ"


"야."


"...네."


"이게 지금 질문하는 걸로 보여?"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가 아니죠?"


그렇게 말하면서, 시라아시는 바로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일 출근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요."


"...네."


...얘들아. 오늘 만나러 간다.





















'쟤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 저러다 진짜 복상사하겠어.'


'그러게... 벌써 저게 몇 판째냐?'


'이야, 저게 순애지.'


'저러다가 곧 우리 만나겠는데?'


'그러면 안 되지 임마.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야지.'


'복상사면 행복한 죽음 아닌가?'


'...그런가?'









'...그래도, 저렇게 살아있는 모습이 보기 좋잖아. 안 그래? 난 저런 순애물이 좋더라.'


'역시 순애가 진리지. 이야... 쟤 내일 허리 못 움직이겠다. 사모님이 아주 진심으로 찍어 누르시네. 너무 거칠게 하면 음경골절 나는데...'


'사랑받는구만... 행복해라 아시모. 이 형 몫까지 하고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