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결투표(自決投票)

 

(1) https://arca.live/b/yandere/19195399

(2) https://arca.live/b/yandere/19250159

(3) https://arca.live/b/yandere/19277921

 

 

0.

 

납치되고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아니, 밝았다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이곳은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으니까.

 

그러나 강문희는 어느새 이곳에 적응해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우울한 일도 금세 잊게 된다던데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시설은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침대 품질도 아주 좋았고, 욕실은 꽤나 돈 많은 집에서나 쓸 법한 고급이었다.

 

좀 어둑하고 할 게 없어 심심한 것만 빼면 썩 괜찮은 장소였다.

어젯밤에 큰맘 먹고 1000피스짜리 퍼즐도 사뒀으니 그것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것이다.

 

…사실 갑자기 허공에서 호박이 튀어나와 퍼즐 상자를 건네주고 갈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진짜 밥 하나는 맛있단 말이지.”

 

옆에서 투덜거리며 박선정은 그리 말해왔다.

노랗게 물들인 단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래도 멀쩡한 음식으로 만드는 거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강문희는 그녀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박선정은 그녀가 하루 만에 이곳이 그리 나쁘진 않다고 여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만약 모르는 사람들과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서로 의심하느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이 이야기를 나눠본 지인들이었기에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여행이라도 온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유일하게 저기 앉은 박루미라는 아이는 어제 처음 보긴 했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이제부터 친해지면 될 일이었다.

 

“그나저나 오빠는 아직도 자는 걸까요.”

 

그러다 문득 목소리를 낸 것은 백은하였다.

연인의 여동생인 그녀는 이 자리에 없는 백이란을 언급했다.

 

“그러게 말이야. 성란이도 밥 먹으러 안 왔고.”

 

빵을 크게 한 입 베어물며 이시연이 덧붙였다.

 

벌써 식사 시간이 끝날 때가 다 되어가는데 테이블의 자리는 둘이나 남아 있었다.

 

식사를 올려준 엘리베이터가 50분 후에 다시 내려간다고 하니

그때까지 식기를 반납할 필요가 있었는데 아직도 두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다.

 

“선생님. 접시에 빵 몇 개만 덜어주실래요? 나중에 일어나서라도 먹게 갖다주고 올게요.”

“그렇게 할래?”

 

결국 강문희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접시 두 개 정도는 점심 먹고 나서 반납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내 접시에 요깃거리 정도는 되겠다 싶은 양의 빵이 담긴다.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식기가 차근차근 정리되어갔다.

 

“언니, 들어줄게요.”

 

일어나며 그렇게 말해오는 것은 백은하였다.

 

사실 한손에 하나씩 들지 못할 크기의 그릇은 아니었지만

이 시설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옆쪽 패널에 손바닥을 가져다댈 필요가 있었다.

 

“아니, 괜찮아.”

 

그러나 강문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머리가 산발이 된 소녀에게로 향했다.

 

“루미야. 같이 가줄래?”

“…뭐, 뭐?”

 

조용히 식기를 쌓아 정리하던 그녀는 강문희의 말에 몸을 흠칫 떨며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같이 가자, 응?”

“…….”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결국 박루미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강문희가 굳이 그녀를 지목한 이유는 그저 이곳에서 친분이 없는 게 오직 그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음침하고 조금 꺼림칙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도 그렇고 묵묵히 식기 정리를 돕는 걸 보면서

그저 사람 대하는 게 서툴 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강문희 스스로는 그다지 자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동시에 집단에서 겉도는 사람을 함부로 두고보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기왕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박루미와도 친해져두고 싶다 여기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접시를 들고 벽 근처로 걸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루미 너는 취미 같은 거 있어?”

 

강문희는 일부러 조금 더 살갑게 다가가며 그리 물었다.

역시 사람과 말하는 게 많이 부끄러운 것인지 박루미는 시선을 돌린다.

 

“…글 쓰는 거 좋아해.”

 

사실 앞머리에 눈이 가려져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아서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맞는 듯 했다.

 

“어떤 거 쓰는데?”

“내가 좋아하는 거… 나한테 이뤄졌으면 하는 것들… 후힛.”

“그래?”

 

스스로 이야기를 하면서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음침한 웃음을 흘리는 그녀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다가 강문희는 발을 멈추었다.

 

어느새 홀 끝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문 앞에 있었다.

시설이 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게 맞나 걱정도 들었지만

다행히도 문짝에는 백이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 안쪽까지 전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쿵쿵 두 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리는 문.

 

“……어?”

 

그리고 그 안의 모습을 본 순간 강문희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땡그랑.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헐벗은 채 침대에 누운 두 남녀였다.

 

어째서?

 

강문희의 연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1.

 

무거운 잠에서 의식이 깨어난 것은 희미한 인기척 때문이었다.

 

막 깨어난 머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뒤늦게 천천히 어제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백이란은 방에 숨어있던 성란에게 범해졌다.

어쩐지 하반신이 축축했고, 오른팔을 끌어안은 여체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어제의 행위는 쥐어짜인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 침대 위에는 정액으로 된 작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그가 자각은 못하고 있겠으나 이 상황은 능력의 영향이었다.

손이 잘려나갔을 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치유 능력이 손목을 접합시켰듯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한계에 달했을 그의 성기가 계속 회복해버린 탓이었다.

 

서로 반쯤 쾌락에 취해 마구 행위를 반복하다가 기력이 다해 쓰러진 것이 최후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시야의 초점이 맞아왔다.

뒤이어 귀가 익숙한 목소리를 붙잡아왔다.

 

“…뭐야, 이거.”

“……!”

 

문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두 여성이 백이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은 정돈되지 않은 머리의 소녀.

아마 키는 그와 비슷할 테다. 여성 평균보다 조금 작다는 소리였다.

분명 박루미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또 다른 여성 쪽이었다.

 

강문희, 그의 여자친구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반신을 드러낸 남자, 완전히 알몸이 되어 그를 끌어안은 여자,

이제 누구의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이 뒤섞인 액체들로 더럽혀진 시트…….

 

강문희와 눈이 마주친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감나질 않는다는 듯 손을 더듬거리다 벽을 붙들고 몸을 기댄다.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더럽혀졌어.”

 

그런 그녀의 의식을 되돌린 건 백이란의 해명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역시도 패닉에 빠져 변명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박루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혼란에 빠져있던 강문희를 다시 현실로 이끌었다.

 

“이란이가 더럽혀졌어.”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란이가 더럽혀졌어. 이란이가 더럽혀졌어.”

 

박루미는 금세 마구잡이로 토해내는 듯한 상태가 된다.

 

“루, 루미야?”

 

마치 자신의 분노조차 대신 집어삼키고 불태우는 것만 같은 모습에 강문희는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았다.

 

“청소해야 해. 청소, 깨끗하게 해줘야 해.”

“으…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박루미가 침대 쪽으로 달려든 것과 성란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근육이 탄탄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작은 몸에서 어찌 그 정도의 속도가 나오던지

강문희는 상황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청소, 청소할 거야…!”

“히익?!”

 

성란이 상체를 일으켜 눈을 뜬 순간 시야에 비친 것은 광기를 품고 그녀에게로 달려드는 소녀였다.

 

“내, 내가…”

 

박루미는 순식간에 침대 위로 올라타서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득.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팔이 명백히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며

인간의 팔에서 나선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박루미는 스스로의 오른팔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쓰러진다.

 

“뭐, 뭐에요?!”

 

갑작스러운 습격, 그리고 징그러울 정도로 꺾인 팔에 성란은 기겁하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란아. 내가, 내가 지켜줄게.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러나 장본인인 박루미는 자신의 팔의 상태를 무시하고

엎드린 채 기어서 백이란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그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흠칫 떤다.

그러나 이내 어제 성란을 밀치려고 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폭력 금지 조항에 의해 팔의 움직임이 막혔던 감각.

만약 그때 그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힘을 줬더라면 이런 꼴이 되었으리라.

 

백이란은 일단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제 손목이 잘렸던 경험, 그리고 몇 번이고 본의 아니게 성기가 되살아났던 경험 탓에

능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는 몸이 파악하고 있었다.

 

질척한 무언가를 비트는 소리와 함께 박루미의 팔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그녀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앞머리가 살짝 옆으로 흘러내려 한쪽 눈동자가 드러난다.

의외로 그것은 푸른빛을 옅게 띠고 있었다.

 

그 안에는 왠지 모를 기쁨이 담겨 있었다.

이내 그녀의 팔이 완전히 되돌아오고 그것을 놓아주자

박루미는 자신의 오른팔을 마치 소중한 것을 대하듯 끌어안았다.


조금 전의 분노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란아.”

 

그리고 이내 그에게로 걸어온 것은 강문희였다.

그녀의 눈빛은 생각보다도 차분했다.

 

아마 백이란과 마찬가지로 충격이 더 큰 충격에 덮어씌워져버린 탓에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은 것이리라.

 

“…문희야. 다 설명해줄 수 있어.”

“응. 믿을게.”

 

강문희는 약간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믿을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었으리라.

 

뒤이어 발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문을 열어둔 채로 이렇게 떠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란을 들은 모두가 백이란의 방으로 찾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

 

이야기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백이란이 그녀가 옷장에 숨어 있었던 것, 자는 동안 습격당했던 것,

그리고 폭력 금지 조항 때문에 저항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던 것을 말하자

다들 그의 결백을 믿어주는 모양새였다.

 

자신이 살면서 타인에게 쌓아온 신뢰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여겨져서

백이란이 살짝 감격을 느낄 정도였다.

 

성란은 합의한 일이라고 변명했지만 발견 당시 옷장이 열려있던 점을 추궁하자 금세 물러났다.

그의 피가 묻은 옷을 옷장에 가지고 들어가 자위행위에 사용했음이 밝혀진 것도 그때였다.

 

다만 아무래도 이러면 왜 옷에 피가 묻어있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괜히 불안감을 주지 않으려 숨겨뒀던 서랍의 트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다친 걸 숨겼던 백이란은 잔뜩 혼났다.

 

박루미의 폭주 건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다가와준 사람의 연인을 범한 성란에게 격분하여 폭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정도의 일로 정리가 되었다.

 

뒤늦게 찾아온 사람들이 가진 정보로 판단할만한 건 그 정도였고,

얻어맞을 뻔한 장본인인 성란은 타인의 상황을 신경쓸 겨를이 아니었다.

 

박루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성란을 ‘암캐년’이라고 중얼거린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은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백이란과 강문희는

그녀에게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감정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작은 불안감 정도에 불과한 일이었기에 생각을 접어두었다.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장면을 연인에게 보고 보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사정까지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이유가 가장 컸을 터다.

 

두 사람은 사실상 그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계속 흘러갔다.

 

당연히 성란은 가장 먼저 탈락할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탈락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4일차가 되어야 했기에

그녀의 재범을 억제하고자 오늘의 규칙으로 ‘백이란과의 성행위 금지’를 제정하기로 결론이 났다.

 

박선정이 강하게 주장한 결과였다.

‘너도 덮치려고 그러냐’라고 하며 이의 자체를 봉쇄해버렸고

여친인 강문희조차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그런 흐름이 되었다.

 

그들은 투표에 대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내 다시 갈라졌다.

그것은 첫날의 만남에 비하면 너무나도 어색한 분위기였다.

 

 

3.

 

“…….”

 

방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어둑한 침대에 걸터앉은 것은 두 남녀.

 

강문희와 백이란은 서로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않은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안해.”

 

축 가라앉은 그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이란이었다.

 

“괜찮아.”

 

그 목소리에 담긴 침울함에 강문희는 무심코 피식 웃고 말았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풀죽은 아기 고양이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댄다.

 

그는 강문희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작았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다 앉은 자세라 차이가 줄어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죄책감에 잠긴 모습이었다.

 

강문희는 그때 보았던 시트의 상태를 떠올렸다.

한두 번의 정사 정도로 더럽혀질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쾌락을 느꼈다는 것 자체를 자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리현상이었잖아. 어쩔 수 없어.”

 

사실은, 그다지 괜찮지 않았다.

 

설령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곤 해도 자신 이외의 여자와 몸을 섞었다고 상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녀보다 더욱 심적인 고통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것을 내버려두고 자기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괜히 더 밝게 행동했다.

 

강문희는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다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백이란과 서로 눈을 마주친다.

 

“…사랑해.”

“…나도.”

 

이어서 그의 뒷덜미에 가볍게 손을 뻗고 얼굴을 들이민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것인지 백이란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입술이 겹쳐진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저 접촉할 뿐인 행위.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느끼며,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 둘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호흡이 섞이고, 이내 서로의 입이 떨어진다.

 

두 사람 사이의 첫 키스.

 

성란에게 남자친구의 처음은 빼앗기고 말았으나,

그녀의 입맞춤에서도 끝까지 지키고 있던 무언가를 넘겨받은 기분이었다.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강문희는 당장이라도 그를 눕혀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오늘 밤이 지나면 규칙이 추가되어 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터였다.

 

“정 마음에 걸리면 매일 키스해줘. 그러면 용서해줄게.”

 

그러나 그것을 참아내고서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이런 식으로 남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몸을 겹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백이란은 귀여움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를 정복하겠다는 이 마음을 품은 채 행위에 들어간다면 어쩌면 상처를 입힐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참을 수 있었고, 참았다.

 

“아, 맞다. 나 퍼즐 샀는데 같이 맞출래?”

 

이 게임이 끝나고 나면 다시금 사랑을 나누자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4.

 

달그락.

옮겨온 그릇을 전부 엘리베이터에 집어넣었다.

 

일을 끝마치고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 이시연을, 박선정은 바라보았다.

 

딱히 당번을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성격 탓인지

몇 번의 식사 동안 주방에서 그릇을 옮기는 것은 이시연, 강문희, 백은하 셋 중에서 두 사람이었다.

 

그것은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돌려놓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이번에는 이시연과 강문희가 그릇을 옮기려고 했다.

 

“후배 배려도 해주고, 너 생각보다 좋은 아이구나?”

 

그리고 그런 강문희에게 남친이랑 시간 좀 보내라며 박선정이 정리를 자처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식사 운반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 이시연은 미소를 지었다.

 

본래도 정장에 비녀라는 보편적이진 않은 모습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심지어 환자복과 비슷한 복장이기까지 하니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머리 염색하고 다니길래 나는 뭐랄까… 그, 양아치 같은 애라고 생각했지 뭐니.”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 안에는 멋쩍음이 섞여 있었다.

 

“─범인, 선생님이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박선정은 그녀와 친목도모나 하려고 이 일을 자청한 게 아니었다.

팔짱을 끼며 그녀를 차갑게 노려본다.

 

“범인이라니?”

“어제 투표에서 두 표 집어넣은 사람.”

 

모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 투표와 관련된 화제도 나왔다.

그때 언급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중복투표였다.

 

성란은 어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백이란의 방에 숨었다.

두 사람의 방이 바로 옆이라서 자연스럽게 행동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일단 말이 된다.

 

그러나 그 부분을 생각해보면 어제 찬성표가 일곱이나 나온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시에는 성란이 통화만 하지 않았을 뿐 투표에는 참가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이 밝혀졌다.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카드를 여러 장 투입하면, 중복투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내일이면 투표권이 다시 복구되겠다 시험삼아 죄다 쏟아부어보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만약 투표에 따른 금액 지급이 개별적으로 적용된다면 꽤나 금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박선정이 지금 관심이 있는 건 그게 아니었다.

 

중복투표의 화제가 이제야 나왔다는 게 문제였다.

 

분명 중복투표자 본인은 어제 개표 결과를 보고 이미 그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정보를 은폐한 것이다.

 

누군가, 진지하게 우승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

 

“…왜 나라고 생각해?”

“이런 생각이 가능한 건 선생님뿐이야.”

 

숨길 이유가 없는 사람, 숨길 능력이 없는 사람.

그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남은 것이 그녀뿐이었다.

 

…이시연은 분명 백이란과 강문희에게 협력적인 척 하며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백이란을 몰래 노리고 있던 건 성란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하, 그래서였구나? 어쩐지 규칙 이야기를 할 때도 이상하다 싶었어.”

“선생님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합의되지 않은 성행위 금지’처럼 조금 더 널널한 규칙을 추가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백이란에게 ‘성행위 금지’라는 강한 제약을 걸어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소꿉친구가 그녀의 유혹 정도로 넘어갈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지만

여기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만약 그녀가 최면 같은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러니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 무슨, 자기가 덮쳐버릴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줄 알았지.”

 

그런 박선정을 바라보며 이시연은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박선정은 가볍게 이를 갈았다.

 

“무슨 수를 써서도 선생님 하려는 짓은 막을 거야.”

“그래, 알아서 하렴.”

 

이시연은 항복이라는 듯 양손을 가볍게 들더니 문으로 향하다가 박선정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기대해. 이란이를 범할 때는 너랑 문희 앞에서 끈적하게 과시해줄 테니까.”

 

주방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5.

 

2일차 규칙 제정 투표.

 

‘백이란과의 성행위를 금한다.’

[찬성] 27

[반대] 0

 

이변은 없었다. …적어도 당장은.

 

 

6.

 

『게임 2일차』

 

[규칙]

 

1.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백이란과의 성행위를 금한다.

 

 

[탈락자]

없음

 

 

[백이란]

- 소지금: 100,000

- 투표권: 0



아마도 탈락자 투표 개시가 사실상의 본편 시작.

야스 금지 규칙이 추가되어도 어떻게든 야스는 나오니까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꼴려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