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붉게 타오르는 불길, 그 열기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피가 쏟아지고 있는 지옥의 중심부.

세계를 파멸시키겠다는 추악한 욕망을 가졌던 대악마가 무릎을 꿇는다.

 

“이 몸이, 인간. 한낱 미물에게 패배한다니, 말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단 말이다!”

 

입이 4개나 되는 탓에 그 시끄러움도 4배인 대악마가 울부짖는다.

동시에 녀석의 몸 안에 있는 섬뜩한 기운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죽음의 직전, 말 그대로 혼신을 전부 쏟아부어서 쥐어 짜낸 공격. 맞는 순간 죽는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를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그 대악마가 내지르는 최후의 일격인데 때려봐 이 새끼야 하고 맞아줄 수는 없지.

 

저 대악마를 꿰뚫을 천둥을 머릿속에 그려낸다.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텅텅 빈 이미지. 그 공란에 온갖 지식과 해괴망측한 그림으로 이루어진 술식을 뼈대 삼아 세운다.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빈틈에 마력을 채워 넣는 것으로 완성한 마법을 이 세상에 실체화한다.

 

울부짖는 번개.

 

400년을 산 마녀, 땅 밑의 탑을 지배하는 자, 대마법사 등 온갖 이름을 가진 여성에게 선물 받은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뇌광이 질주한다.

신속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가공한 속도, 대악마가 공격을 하기도 전에 푸른 빛은 놈의 몸통을 꿰뚫고 태웠다.

 

“크아악!”

 

거대한 비명만큼 번개 마법이 주는 고통이 엄청났는지, 배를 부여잡은 대악마가 휘청거린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길고 긴 여정의 끝을 보기 위해 나는 지팡이를 쥔 반대쪽 손에 들린 검을 휘둘렀다.

 

거울 호수 밑의 환상 세계, 온갖 신비로 가득한 곳을 지키던 기사의 보검. 그 녹빛의 칼날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온다.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 세상을 베어버린다는 전승대로는 안 되더라도 대악마 하나는 베어버릴 수 있다. 그를 증명하는 듯 검기에 닿은 대악마의 몸이 갈라졌다.

 

“크르워어어...”

 

그런데도 아직 살아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세로로 갈라졌는데, 저 빌어먹을 대악마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오, 진짜.”

 

짜증이 깃든 말을 토해낸 나는 보검을 집어 던진 뒤, 허리춤의 칼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오로지 핏빛만이 존재하는 이 지옥에서 그 존재감이 유독 드러나는 백색의 칼날, 설산의 정상에 군림하는 백룡의 심장을 녹아낸 장검.

죽어서도 그 거대한 마력이 깃들어 있는 물건을 촉매 삼아 마법을 사용한다.

내가 가는 길을 전부 태워버리겠다고 했던,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르는 백룡의 브레스.

거대한 마력이 용의 몸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재앙을 내 마력과 마법으로 대체해 재현한다.

 

“이젠 좀 제발 뒤져라.”

 

세상이, 지옥이 백색으로 뒤덮는다.

시뻘겋던 불길도, 어디서 흐르는지 그 근원을 모를 끈적한 피도, 반으로 갈라져도 죽지 않는 대악마의 몸도 모두 집어 삼켜졌다.

 

[축하합니다. 세상에 파멸을 가져오는 대악마 테라로스를 쓰러트렸습니다.]

 

그 빛에 나까지 삼켜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메시지에 나는 웃음 지었다.

 

 

 

 

 

 

***

 

 

 

 

 

본래 나는 전설의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영웅도,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들을 다른 차원의 세계, 화면으로 바라보며 조종하는 게임을 즐겨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강제로 끌려오기 전까지는.

 

[이야기의 끝을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소원이 이뤄질 겁니다.]

 

이야기의 끝, 게임 속의 최종 보스, 온갖 귀찮은 퀘스트와 잡몹, 중간 보스들을 처치해야만 만날 수 있는 지옥의 방구석폐인 대악마 테라로스를 잡아야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막막하게만 여겨졌던, 그 거대한 목표를 나는 이뤄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목숨의 위험 따위 없는 잠을 청해야 했을 텐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안락해야만 하는 내 원룸도, 그 히키코모리 대악마의 아늑한 지옥도, 심지어 현대의 길거리도 아닌, 새하얀 공간이었다.

 

[축하드립니다. 1회차의 세계를 구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2회차 세계에 도전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2회차 세계를 구원하실 경우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대마법사, 400년 산 마녀를 독살하고, 거울 호수의 기사를 불태우고, 백룡의 심장을 꿰뚫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 끝낸 이 세계는 1회차란다.

그리고, 나는 이 다음. 2회차의 세계를 구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 시발.

 

너무나도 거지 같고 좆같았다.

그 힘겨웠던 일들을 또 해야 한다고? 분노에서 우러나오는 욕보다 그냥 자살할까. 라는 말이 먼저 나올 정도로 앞날이 막막했다.

 

[2회차의 세계에선 무작위로 특전을 얻은 채 시작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게임에서처럼 2회차는 난이도가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나한테 특전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 시발, 어디 한 번 해보자. 이번에야말로 그 세상과 거리를 두는 대악마를 족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특전을 설정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던 와중, 눈앞의 메시지가 돌림판 형태로 변하더니, 마구잡이로 돌아간다.

 

그 모습이 어째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뭔가 무서웠다. 특전이라면 좋은 거만 달려있을 텐데 왜 내가 이러는 거지?

스스로 되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을 의문에 허덕이던 와중, 돌림판이 멈추면서 내가 얻게 될 특전이 밝혀졌다.

 

[특전 : 호감도 MAX를 채운 이성의 호감도를 유지한 채로 회차 시작.]

 

“……뭐?”

 

다시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개소리에도 열리지 않던 입이 자동문처럼 당황을 내보낸다.

 

-사명이 그리 중요해? 더 깊은 마법의 끝을, 나를, 다시 이 탑에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정도로?

 

-가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없는 이 세계는, 별빛으로 가득했다고 해도 너무나도 어두워요.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인간. 내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인 너를 놓치기 싫다. 그러니 네가 나를 떠나기 위해 걷는 길을 전부 태워버리겠다.

 

처음에는 대악마와의 전투에 필요한 아이템을 얻으려고 호감도를 올렸으나 끝내 하나같이 나를 가두려고 했던 마녀, 기사, 백룡.

대악마에게 도달하기 위해, 회차의 끝을 보기 위해선 필수로 만나야 하는 존재들.

 

“그 망할 놈들이 처음부터 미쳐있다고?”

 

시발, 그게 뭔 특전이야. 패널티 중에서도 SSS급으로 좆같은 패널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