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 예정이라 삭제 예정 전편들 묶어 올립니다.

 

자식 떠나보내는 부모님의 심정을 살짝 느낄 수 있었어요.

 

 

 

1

 

 

 

얀데레의 완성은 뭐냐니.”

 

반이나 태운 담배를 질겅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화면 속에선 실시간으로 글이 폭주하는 중이다.

 

얀데레와 관련된 커뮤니티 중 몇 안 되는 활발한 사이트.

그곳에선 한창이나 얀데레의 핵심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토론이라기엔 상남자들의 국회 콜로세움이 적절했지만 말이다.

 

느그 고조할아버지 탭댄스 추다가 쓰러진 영상을 뿌려버리겠다는 윾동.

이때다 싶어서 커뮤를 정복하려는 캬루.

난데없이 발 닦고 자던 완장 고로시에 들어간 분탕.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막고라를 연 고닉들.

눈물 흘리는 콘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완장까지.

 

어쩜 이렇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랄일까?

이미 튄 주딱과 본인도 모르게 징용당한 파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물론노예들에게 위로를 보낸 정도로 내가 분탕이 아니라고 한 적은 없다.

원래 이렇게 불타야 커뮤 할 맛이 나지 않는가.

그래도 선을 지키는 편이라 차단 먹은 적은 없다.

 

지금껏 수많은 얀데레 작품들이 나왔고그중 9할 9푼은 연중과 습작이다.

개꼴리는 작품을 발견하고 선호작을 누르자마자 실시간으로 작품이 사라지질 않나완결 낸다면서 3년 넘게 잠수 공지 하나 없는 경우도 흔하다.

이젠 삭제만 안 하면 선녀처럼 보인다.

 

사실 그 플랫폼의 지독한 고질병이지만 팩트는 팩트지 않는가.

내가 본 14,000,605개의 작품 중 온전한 완결을 내준 작품은 손에 꼽는다.

 

얀데레라는 태그가 붙어있으면 부처의 해탈한 마음으로 들어가 읽는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조차 없다.

아아이것이야말로 7년간 사료를 먹어온 누렁이가 깨우친 [무의식의 극의].

 

다들 이미 얀데레 작가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조교 당한 것이다.

 

아닐 것 같나?

 

부정(Denial) 작가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선호작 목록을 수차례 확인한다.

분노(Anger) 없는 쿠폰까지 끌어 후원했건만 튀어버린 작가님에게 5700자 사랑을 장전한다.

협상(Bargaining) 정보망을 동원해 찾은 작가님에게 매달려 애원한다.

우울(Depression) 연락하지 말아 달라며 차단당한 알림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좌절한다.

수용(Acceptance) 인생이란 허무의 연속터덜터덜 다른 작품을 찾아 나선다.

 

포보스 선정 가장 완벽한 얀데레 선호 독자 행동 양상 분석 글이다.

반박 시 금태양.

 

얀데레의… 완성은연중이다오케이.”

 

11자에 불과한 짧은 한 문장.

글이 성공적으로 올라간 것을 마지막으로 재떨이를 비우고 돌아온다.

돛대에 불을 붙이고 앉으니 커뮤의 시간은 내 글을 마지막으로 멈춰있었다.

 

데뎃?”

 

내 글 위로는 카오스 스턴 연계가 꽂힌 것처럼 그 어떤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지구를 뚫어버릴 드릴보다 매섭게 실시간으로 박히는 비추천.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나 권정혁은차마 이들에게 못 할 짓을 저질러 버렸다!

 

!”

 

하필이면 오늘이 전설의 얀데레 작품인 아카데미 얀데레들이 너무 강함의 기일이었던 것을 까먹은 것이다.

 

이들의 PTSD를 건들이는 것도 모자라 꼬챙이로 흐집어 꺼낸 뒤에 위에서 비보잉 탭댄스를 춰버린 꼴이다.

흑인들이 서로에겐 n워드를 써도 웃고 넘기듯 얀데레 독자들 사이에서도 연중이란 그런 위치였다.

 

하지만, ‘아얀강의 기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얀데레물은 BY, AY로 나뉜다.

비포 아얀강애프터 아얀강.

 

종말을 막는 헌터들이란 흔한 내용의 아카데미 물이었으나 작가의 귀신들린 필력은 스토리의 진부함을 전부 커버쳤다.

 

지능형육체형마망형강압형메가데레형 등

모두의 취향을 충족시켜줄 히로인들까지.

 

가히 성경 취급을 받던 아얀강은 작가의 개인 사정으로 휴재한다는 공지 하나만을 남기고 엔딩 바로 직전에 잠수 타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연중된지 3년이 흐른 날이었다.

 

암묵적으로 이날만은 연중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 예루살렘이 있듯이우리에겐 아얀강이 있었다.

다들 아얀강을 몇 번 정독했는지 자랑하며 작가님 복귀 기원제를 지니는 날.

 

오직 나만이 최초로 지엄한 태고의 율법을 어겼다.

 

위악 떨지 마라권정혁.”

 

불타는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히기 위한 농담이라고 글을 올리자마자커뮤가 폭발해버렸다.

이들의 날 향한 분노가 랜선을 타고 서버를 장악해 커뮤니티를 존나 폭파해버린 것이다!

 

… 미친.”

 

이런 흐름이라면 울트라메가그렌절을 박아도 백 퍼센트 처형이다.

물고 있던 담배를 멍하니 필터까지 태워버려 매캐한 연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기침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f5를 눌러보지만

 

覆水不返盆

It is no use crying over a spilt milk.

한국어로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라는 뜻!이다..

 

- [연중박이(213.99)님이신가요?]

 

그때 갑자기 떠오르는 알림창.

이미 다운된 사이트에서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부터 의심해봐야 했으나이 당시의 나는 사고가 굳어버려 그러지 못했다.

 

- [완장임? 30만 원짜리 대회 열 테니 제발 한 번만 봐주면 안 됨진짜 그렌절 박으면서 타자치는 중인데.]

- [완장은 아니고이들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줄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요.]

- [제발 뭐든지 할 테니 한 번만 봐주세요진짜 목숨 걸고 다신 안 그럴게요.]

- [‘뭐든지후후좋아요그럼 제대로 보여주시길.]

 

뭘 보여줘?”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컴퓨터에서 쏟아져나온 빛에 휘감겨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쓰리스타 출몰 5분 전 생활관처럼 엄격한 분위기.

뒷짐지고 선 얼굴이 딱딱히 굳은 미소녀들이 주변을 채운다.

 

이들에게서 흥분이나 고양 따윈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얼굴엔 결의와 사명감두려움 등이 팽배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험악한 인상을 한 교관들의 고함만이 울린다.

 

각성자 남녀 성비 1:9

10년 복무 기간을 채운 각성자 전역 기준 생환율 10%에 불과한 악독한 세계관.

 

인류 최후의 방패에 온 것을 환영한다 병아리들아거기 너오와 열 맞춰어엇!”

 

27세 군필 모솔 아다 권정혁.

아카데미 얀데레들이 너무 강함의 엑스트라에 빙의해버렸다.

 

 

 

2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면서 눈만 정신없이 움직였다.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구긴 교관들이 폭행까지 써가며 대열을 맞추고 있다.

 

인류 최후의 방패

 

누군가는 비웃을만한 이름이지만 내가 정말 소설 속에 들어온 게 맞다면 방패란 의미가 지닌 무게가 달라진다.

 

2020년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고 수많은 국가가 사라졌다.

지도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 알맞지 않은 단어일 수 있으나 이계종이 잠식한 대지에는 생명체 하나 존재할 수 없다.

 

D급 이계종까진 교환비가 극악이긴 하나 인간이 보유한 화기가 통한다.

소설 초반에도 이와 관련된 설정이 나와 있다.

 

[게이트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응이 늦어 수많은 민간 피해를 보았으나 어찌어찌 제압할 수 있었다그러나 1년 뒤 C급 게이트가 출현하며 상황이 반전된다.]

 

독수리국한테도 비비려는 불곰국조차 국토 삼분지 이가 먹혀버렸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인간은 지구과학사회 시간에 죽어라 외우던 세계지도의 3할만을 지켜냈다.

멸망설신의 심판자연의 보복 등 온갖 찌라시가 난무했으나 각성자란 존재가 떠오르고 각국이 힘을 합친다는 흔한 설정이다.

 

그런 각성자를 담당하는 기관 중 불소불위의 위상을 지닌 단체가 바로 인류 최후의 방패다.

끊이지 않고 생성되는 게이트의 멸절과 인류 수호영토 수복이란 사명 아래에서 싸운다.

 

오로지 각성자만이 이계종과 싸울 수 있기에 그에 합당한 명예와 권력을 지녔다.

방패에 들어온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명패고 사실상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단 뜻이다.

 

“7년 뒤에 세상이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생도뚫린 입이라 그딴 개소릴 뱉는다면 아가리를 찢어 포 뜬 뒤에 철사로 꿰매주겠다.”

 

절망적인 상황 속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과 동시에 귀신같이 나타난 교관.

입을 꽉 다물고 완벽한 부동자세를 취하자 이마를 톡 치고 사라진다.

 

좆 될 뻔했네.’

 

지금 이 시각에도 최전선에서 죽어갈 각성자와 군인을 생각해보면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교관의 대부분은 퇴역 각성자이기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아까 느껴졌던 살기에 바지가 축축이 젖은 건 분명 땀이리라.

 

벌써 30분을 넘긴 교장의 연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귀를 쫑긋거리며 홀린 듯 듣고 있다.

뒤에선 울음을 삼키며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오니 나로선 환장할 따름이다.

 

내게는 이들이 지니고 있을 사명감자부심 그 어떤 것도 없다.

위쪽 빨간 국가가 회까닥 돌아버리는 상황을 제외하면 죽을 일도 없는 안전한 나라에서 살았다.

꽃다운 스물일곱 살을 데려다가 세상을 구하라는데 암담하기만 하다.

 

집에 가고 싶다.’

 

벌써 낡은 매트리스와 컴퓨터가 그립다.

 

*

 

이상생도 천오백 명 모두 방패에 속한 걸 환영한다.”

 

말이 끝나자마자 무수히 쏟아지는 박수갈채.

나도 눈치껏 분위기에 탑승한다.

 

손을 흔들며 교장이 퇴장하고그녀에게 경례한 교관들이 인솔하기 시작했다.

 

박하린정설아서지연레일라하쟌자우링총 정원 서른 둘, 1-F반으로리다이렌 

 

소설 속 메인 히로인들의 이름이 들리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입맛만 다시며 그녀들의 모습을 눈에 새긴다.

 

방패에 속한 생도 대부분은 여자다.

여성 각성자의 능력이 더욱 강력한 남녀역전 급인 세계관이니만큼 남자는 몇 안 된다.

내가 본 남자라곤 열 명 남짓이다.

 

호명된 생도들이 교관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끝까지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결국 나 혼자만 널찍한 강당에 남아있었다.

 

생도는 왜 이동하지 않는 거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아까의 교관이 뒤에 서 있다.

 

곰과 여우의 가죽을 기워 만든 듯한 코트가 인상적이다.

목에는 상어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송곳니 목걸이를 걸고 있다.

 

깊게 고인 다크서클과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관심하다.

관조하는 듯동등한 인간이 아닌 물건을 보는 시선.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설마...

 

바알?”

아까부터 느꼈는데 생도는 그 주둥아리가 문제로군.”

 

암흑 같은 생머리와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보랏빛 동공까지.

 

일러 하나 없는 소설이었기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으나 확실했다.

아얀강 속 비운의 캐릭터 중 하나인 바알이다.

 

게이트가 만들어 낸 사생아.

 

그녀는 S급 게이트의 언데드형 보스의 코어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함구령이 내려졌고 실험체로 사용되려는 그녀를 당시 공략대의 수장이자현 방패의 교장인 린이 데려와 키웠다는 설정이었다.

 

사실을 아는 이들은 소수지만 그중 대부분이 상위 각성자인 만큼 암살 시도부터 납치 등 온갖 사건에 휘말린다.

 

자기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는 린의 말에 상처 입은 바알은 그 뒤로 린에게 항상 차갑게 대한다.

린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바알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때부터 누구에게나 냉담하게 대하는 게 익숙해져 소설 중반부에선 큰 갈등을 겪기도 했다.

린의 그늘 아래서 자라와 린을 제외하면 의사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도 크다.

 

이계종의 피를 이어받아 압도적인 마력을 지녔다.

언데드형 보스였기에 저주생명과 관련된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제대로 그녀를 대우해줬다면 누구보다 든든한 전력이 됐을 텐데.‘

 

적어도 멸망을 늦추기엔 충분한 힘을 지녔다.

 

그러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협작질이 결정적이었다.

어머니 같은 린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오해로 인간과 대적하는 편에 선다.

 

이는 안 그래도 빠르게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가속화했다.

 

S급 각성자 둘과 셀 수도 없는 각성자를 잡아먹은 악마.

이성을 잃고 게이트화 된 그녀는 결국 린의 창에 심장이 꽤 뚫려 죽는다.

 

[너무 늦어버렸어요그저사랑한다는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뿐인데.]

 

린의 창에 꽂혀 죽어갈 때 나온 그녀의 대사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고좋아하던 캐릭터를 만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숨을 멎게 할 정도의 미모가 곁들여지니 더욱.

 

호명

됐다내가 알아내지.”

 

호명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려던 참에 바알이 손가락을 튕긴다.

순식간에 마법진이 연성 되며 내게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 피하려 했으나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읍읍!”

괜찮다십 분 정도만 지나면 풀리게 해놨으니 그동안 반성하고 있거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썩 맘에 들었는지 피식 웃는다.

그러고는 그녀가 품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조마조마하게 바알을 바라보았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첫날부터 이러다니.

 

날 무책임하게 보내놓고 이래도 되는 거냐

 

온갖 육두문자를 뱉어가며 날 보낸 그 새끼를 곱씹었다.

그러기를 한창바알이 침음성을 흘린다.

 

바알의 무뚝뚝한 표정이 일그러지기에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단말기를 조작하던 바알은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아 헬링턴넌 속한 반이 없다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새롭군.”

 

바알이 손가락을 튕기자 몸의 제어권이 돌아왔다.

돌아온 감각에 적응하지 못하고 넘어지려는 걸 바알이 잡아 일으켜줬다.

 

설마 이대로 퇴학은 아니겠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흐음기다리거라.”

 

날 흘끗 바라본 바알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잠하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장난하나난 분명 그 누구도 받지 않겠다고 말 했을 텐데.“

난 지금 충분히 차분하다아직 너에게 저주를 걸지 않았고 생도 또한 건들지 않았지.“

봤다고사실 아주 살짝 건드렸다하지만 이는 정당방위야안 그런가 생도?“

 

가늘게 날 노려보는 시선에 부서져라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서 휘몰아치는 저 검정 구체는 분명 저주다.

아얀강에서 유일한 저주술사인 바알이니 틀림없다.

 

들었겠지네가 저지른 오점을 왜 내가 치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아… 그래.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들어주지그러나 한 학기 만이다.“

 

전화 대상은 아마도 린일 테다.

린을 제외하면 동료도친구도 없는 바알이다.

 

바알은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내게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말아 빙빙 꼬는 습관은 나 화났어요라는 의미였다.

 

소설에서 비중 있게 다루던 바알이었으니 아얀강만 수십 번 읽은 내가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넌 이제부터 내가 가르친다버퍼라… 저주와는 상극인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교관님잘 부탁드립니다절대 귀찮게 하지

됐어제대로 따라오기나 하거라.“

 

손을 휘휘 젓는 그녀가 내 어깨를 잡는다.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당황할 새도 없이 몸이 조각나는 느낌이 든다.

극한의 어지러움과 통증이 덮친다.

 

우웨에엑

정말이지… 맘에 들지 않는군.“

 

정신을 차리니 강당이 아닌 다른 장소였다.

 

바알답게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이들만 사용할 수 있는 텔레포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수십 개가 넘는 플라스크에 담긴 이계종의 사체들.

해부하던 중이었는지 초록 피가 뚝뚝 흐르는 테이블.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피가 뚝뚝 흐르는 각종 도구까지.

 

바알은 잔뜩 쫄아 굳은 날 보며 스산하게 웃었다.

 

"내 공방에 온 걸 환영한다병아리."

 

이상하게도 내 심장은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3

 

 

 

아얀강에서도 바알의 공방은 몇 줄 언급이 끝이다.

 

[바알의 공방은 전쟁터 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실험실과도 견줄 만하다.

정설아는 그녀가 저주의 일인자인 만큼 공방 또한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과장만은 아닌 것이 실습 나온 마법사 생도 중 비위가 약한 여럿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초반에 나온 짤막한 묘사다.

사실 소설로 읽을 때는 대충 분위기만 떠올랐으나 눈으로 직접 보니 그럴 만하다.

아니기절만 한 게 대단하다.

 

저거 설마 살아있는 겁니까?”

그래숨이 붙은 상태에서 해부해야 마나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

 

바알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제되어 덜렁거리는 날카로운 여섯 개의 다리

수십 개의 겹눈이 끊이지 않고 움직인다.

1m는 돼 보이는 거미 모양의 이계종이다.

 

검은 마력으로 둘러싸인 못이 거미의 몸통과 다리에 박혀있다.

생명 유지의 기능도 있는지 끊임없이 초록색의 피가 흘러내리지만 죽질 않는다.

 

껍질은 모두 벗겨져 징그러운 내장들이 전부 내비친다.

내장들에도 거뭇한 아지랑이로 덮여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고정돼있다.

 

그때겹눈이 온전히 나를 향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고문받던 요원이 제발 죽여달라는 대사를 치를법한 분위기다.

 

박아놓은 벽이 흔들릴 정도로 발작하는 거미.

바알이 손을 휘젓자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진다.

 

내가 이계종에게 동정심을 느낄 줄이야.

 

기절하면 골치 아팠겠지병아리 주제에 조금 마음에 드는군.”

 

고개를 끄덕인 바알이 날 보며 살짝 웃는다.

벽으로 다가가 거미의 껍질을 쓰다듬는다.

 

귀엽지 않나하찮은 미물이 죽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걸 보고 있으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게 울컥울컥 올라온다린에게 말했더니 한숨만 내쉬더군병아리넌 아닌 것 같아 기쁘다.”

하하… 감사합니다.”

“7년간 방패에서 지내면서 마음에 든 병아리는 처음이야바알의 호감을 얻었다는 건 자랑할 업적이다따라오거라린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컬렉션을 보여주겠다.”

 

아무나 제발 살려줘.’

 

*

 

[방패의 첫날엔 생도 수준 파악담당 교관 배정숙소 확인 등 간단한 일과로 짜여있다.

1기부터 이어진 것으로한 시간 내에 끝내주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기 때문이다.

생도들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방패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생도의 감시와 보호를 목적으로 특별 케이스가 아니라면 외출이 불가능하기]

 

우웨엑시버럴.”

 

속에 든 모든 것을 비워내고 배정받은 숙소 침대에 누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7.

 

1시간은 커녕 9시간을 넘게 잡혀있었다.

탈주각이 몇 번 잡히긴 했으나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처음엔 관심 없는 척 무뚝뚝하던 바알이 갈수록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건강을 위해 컬렉션은 하나도 보지 않았다.

 

오로지 기뻐 보이는 바알의 모습을 보며 간신히 버텼다.

그녀의 외모는 그로테스크한 장소에서도 빛났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유리창을 깨서라도 탈주했을 것이다.

닌닌!

 

(어떻게 생각하느냐솔직하게 말하여도 어떤 위해조차 가하지 않으마.)

(정말 아름답습니다교관님.)

(으음… 고맙구나그럼 이건 어떻느냐?)

 

내가 보기엔 지옥에서 몇 천 년 썩은 시체도 그녀에겐 소중한 것인지 얼굴을 붉히며 소개한다.

(), (저주를 몇 대 몇으로 조합해 보존했으며어디가 매력적이고언제 잡았는지 등

 

초등학생 꼬마가 학교에서 백점 맞은 받아쓰기를 부모에게 자랑하는 것처럼 들떠있었다.

 

여태껏 꽁꽁 감싸둔 취향을 친구처럼 들어주고 리액션까지 해주는데 바알이 신날만하다.

친구도 없었기에 아마 몇 배는 더 기쁘지 않을까.

 

멘탈을 대가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봤으니 만족한다.

독자 시절 항상 그녀가 행복해지길 바랐기에 아닌 것 같으면서도 뿌듯했다.

 

마치 애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차갑고 까탈스러우면서도 은근 귀여운 백치미 타입의 딸.

 

딸이 나를 손짓 한 번에 죽일 만큼 강하긴 하지만 부모가 자식보다 강할 필요는 없잖아?

대신 자식 심기 잘못 건들면 훅 간다.

 

실없는 망상을 하자 침식된 정신이 조금 회복되었다.

눈을 감고 소설을 떠올렸다.

수십 번이나 돌려 읽었기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난다.

 

[린은 오래전 끊은 술을 따랐다.

각성자 전용 높은 도수의 술이 잔을 가득 채운다.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바알을 달래다 지쳤다.

내일 숨겨둔 알사탕을 잔뜩 주면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계종을 탐구하며 좋아하는 딸을 보자 한숨만 흘렀다.

 

"친엄마는 아니지만 나라면 걱정할 자격이 있어."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우울하게 혼잣말을 흘렸다.

꼰대도 아니고 그녀가 이계종을 연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안 그래도 게이트의 사생아라며 모욕받는 처지에 저런 취향이 밝혀진다면 그것들이 얼마나 물어뜯을지 훤하다.

아니, S급 보스의 피를 받았으니 저 정도로 참아주는 것에서 고마워해야 할까?

 

달밤 속 린의 한숨은 깊어져 갔다.]

 

바알이 이계종을 모으는 것은 내재된 폭력성과 잔혹성이 혼합된 결과물이다.

그녀도 모르게 무의식에선 이계종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

 

지금은 린을 위해서 억누르는 것 같지만 나는 저게 터지게 된다면 일어날 일을 안다.

해야 할 일들의 윤곽이 천천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내 정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몸을 살펴본다.

 

매끄러운 피부탄탄한 근육질의 몸매여자 여럿 울렸을 얼굴이다.

석양의 무법자에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약간 동양식 상남자 느낌을 섞은 분위기였다.

 

내 외형 묘사를 공들여할 필요가 있을까저게 최선이다.

 

"적응 안 되네."

 

침대로 돌아와 걸터앉고 단말기를 꺼낸다.

눈을 가릴 정도로 수많은 창이 떠올랐다.

 

원래라면 화면에 뜨는게 다지만 빙의자 나름의 특전이라 생각했다.

당황하길 잠시떠오른 창들을 정리한다.

 

[이름 로아 헬링턴] [나이 : 23]

 

근력 : 9

체력 : 8

민첩 : 8

마력 : 12

정신력 : 17

매력 : 15

 

평균적인 성인 남성이 2, 3대 500 정도면 수준이다.

후반부에서 작중 최강의 암살 계열인 전지아의 민첩 스탯이 50이었다.

 

스탯에 관해선 아직도 토론이 끊이지 않으나 인간 한계는 50이란 것이 정설 취급이다.

아예 망캐로 넣어놨으면 암담했겠지만보낸 새끼도 다행히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특성

 

[위태로운 인형사(H)]

 

벼려진 칼날 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광대.

끝엔 엉킨 실타래 위에서 목이 매달린다.

 

오로지 당신만이 타인의 심리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심상 관련 버프 특화정신오염 면역특정 행동 보정 강화가 적용됩니다.

 

강자는 당신에게 알 수 없는 호의를약자는 당신에게 기묘한 끌림을 느낍니다.

 

결핍된 부분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결핍을 충족시켜준 상대에게 약한 의존을 불러일으키며 당신의 행동과 연관되어 점차 강화됩니다.

 

조심하십시오지독한 극독과도 같아 대상을 깊은 심연에서부터 망가트립니다.

 

존나 위험해 보이는데.’

 

처음 보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 따위는 본 적이 없다.

 

소설 속 유일한 H랭크는 성장형 마법 계열 특성인 옭아매는 침식뿐이다.

특성의 주인공인 정설아는 지금쯤 꿈나라에 빠져있겠지.

 

하나 확실해졌다.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사실이 말이다.

 

주인공이 없어.”

 

아얀강에는 김한우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호명되는 이름에도방패 첫날 교관과 말다툼을 벌이는 이벤트도 없었다.

 

처음 보는 특성처음 듣는 로아 헬링턴이란 이름.

나의 등장으로 인해 소설이 틀어졌던 게 확실해졌다.

 

그 새끼 없으면 세상 어떻게 구하라고.”

 

고자 고구마의 전형적인 얀데레 소설 주인공이었으나 무력만은 독자 모두가 인정했다.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는 맹세와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싫지만 멋진 새끼.

 

적당히 히로인들 돌봐주고 주인공 버스나 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나 홀로 일궈내야만 한다.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았다.

 

전역 날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휴지를 찾으러 일어서려니 작은 까마귀 하나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어릴 적 바알은 처음으로 창조한 소환수가 까만 까마귀라 까미라 이름 붙였다.

D급 각성자와도 견줄만할 소환수의 이름이 까미가 된 이유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뭐.

 

까마귀는 자연스럽게 어깨에 앉더니 물고 있던 쪽지 하나를 뱉었다.

바알의 소환수가 내 방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싶었지만 종이를 펴봤다.

 

{병아리잘 들어갔는지 모르겠군오해하진 말거라절대 걱정하는 건 아니고 그냥 순수한 궁금증 때문에 쓰는 것이다오늘 얘길 들어줘서 고마웠다생도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지사실 많이 고맙진 않으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배려는 갖추어야이다바쁘지 않다면 짧아도 좋으니 답장 부탁하마.}

 

진짜 귀엽네.”

 

바알 특유의 얼음장 같은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글동글한 글씨체.

수차례나 지우고 썼는지 눌린 자국들이 울퉁불퉁하게 느껴진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바알답다.

밀려오던 근심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저 또한 오늘 바알 교관님의 강의를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이만 줄이겠습니다.}

 

생도를 받지 않는다곤 했으나 은근 지도에 관한 욕심을 갖고 있던 바알이기에 강의라는 단어를 써줬다꽤 뿌듯해하리라.

 

한두 줄만 쓰면 뭘 잘못한 건가 혼자 끙끙거릴 테니 적당히 쓴 편지를 까마귀의 입에 물려준다.

 

까악!”

잘 전해줘.”

 

까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자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알이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힘을 얻고 나머지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

 

[일렁이는 감정선] - 성장형 D

 

대상의 기분에 보정을 부여합니다.

버프 시전 당시 드러내지 않는다면 상대가 알 수 없습니다.

 

조심하십시오해당 스킬을 감지할만한 특성을 지닌 이는 간파해낼 수 있습니다.

 

[신의 사도] - 성장형 C-

 

강화 버프 계열에 한하여 마력의 200%를 발휘합니다.

마력 고갈 시 빠르게 회복합니다.

 

[은밀한 엿보기] - 특성 연계 성장형 스킬

 

당신에게 특정 수준 이상의 호감을 느끼는 대상에 한하여 대상의 능력치와 스킬을 일부 빌려올 수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호감의 정도에 따라 효율이 증가합니다. (1차 한도 : 10% )

상대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더 넘겨봤으나 마지막 페이지였다.

단말기를 끄고 고민에 잠겼다.

 

얻어야 할 것.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급하지 않은 것.

급한 것.

 

차분히 정리해나간다.

침대에 털썩 누워 복잡한 생각을 마무리 맺었다.

 

이렇게 흘러간다면 꼭 가져야 할 보상이 있다.

원래라면 원작의 주인공이 얻을 보상이지만 내가 얻어야겠다.

 

절대 안 포기해.”

 

마음을 다잡는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종말을 막으리라.

 

한 달 뒤에 시작될 1차 생도 시험에서 나는 지원 계열이 아닌 전투 계열로 참가한다

 

 

 

4

 

 

 

방패의 일정은 대학교와 비슷하게 짜인다.

 

거너 특성이라면 화기 담당 교관에게탱커 특성이라면 탱커 담당 교관에게버퍼궁수도적마법사 등.

묘하게 익숙할지도 모르는데 작가가 연재 당시 모 게임의 직업군을 베이스로 삼았단다.

 

특성 특화 수업은 필수다.

대학 과 전공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특이한 점은 비전투 계열도 방패에 속해있다.

보통 전략가나 연구원 등 각성자이지만 전투 특성이 아닌 보조에 가까운 이들이다.

 

특화 수업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자율이다.

 

탱커가 버퍼 수업을 들어도 무방하며궁수가 마법사 수업을 들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아카데미도 속한 생도가 학구열을 불태울수록 좋으니 권장하는 편이다.

 

대신 실기나 필기 둘 중 하나라도 성취도 C를 넘겨 받아야 한다.

 

교양 수업처럼 이계학게이트 분석학각성자 탐구학 등 다양하다.

요리외국어골프 같은 여가 수업도 있다.

 

정리하자면 일단 버퍼 수업 하나는 필수란 얘기다.

 

원래라면 일리아라는 교관이 버퍼 담당이지만 특이하게도 바알이 맡았으니 고민이다.

 

제 역활을 하는 버퍼는 귀한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무려 열 명도 안 되는 A급 버퍼다.

 

대부분 전선에서 활동 중이나 마력 회로에 큰 타격을 입은 일리아는 퇴역 대신 교관을 선택했다.

 

전성기 때와는 많은 차이가 나겠으나 10년이 넘게 전쟁터를 구른 그녀의 조언과 이론적인 부분만 배우더라도 엄청난 이득이다.

 

특성 특화 수업을 두 개나 듣는 셈이지만 분명한 호재다.

 

아직은 버퍼에 관련된 걸 아무것도 모르므로 기본만 갖추고 신청할 예정이었다.

 

나머지는 내게 도움이 되면서 히로인을 만날 수 있는 수업을 고르기로 정했다.

 

그러기를 한창스산하게 깔린 목소리가 들린다.

 

병아리설마 내 강의 중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절대 아닙니다강의 내용에 대해 심오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나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다시 손가락에 검은 마력을 두른다.

 

공중에는 어제 보았던 거미 이계종이 둥둥 떠 있다.

바알이 손가락을 휙휙 움직일수록 실시간으로 해체되는 중이다.

 

배가 불렀군지금까지 내 강의를 들을 기회를 얻은 생도는 하나도 없었다네가 처음이란 말이다내가 생도에 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죄의 의미로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해체 쇼를 바라보았다.

눈에선 피가 흐를 것 같지만 바알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인다.

 

태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기다렸을 C-급 이계종의 수정체다세포가 변화한 섬유로 만들어져 투명한 양면볼록의 구조지만 이계종의 경우엔 다르다그로 인해 곡률을 바꿀 필요도 없고 넓은 시야를 유지하지한번 만져 보겠나?”

 

바알이 검은 마력으로 둘러싸인 수정체를 내게 날렸다.

표정을 관리하며 내 눈앞에 고정된 수정체를 건네받았다.

 

뚝뚝 흐르는 초록색 점액질.

산성인지 점액이 떨어진 테이블이 조금씩 녹는다.

20년 썩혀 고약한 냄새가 나는 하리보 같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자 의외로 나쁘지 않은 감촉이다.

바알이 옆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은근 도움 되는 정보가 많아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띠링띠디딩~

 

의대생인지 버퍼인지 헷갈리던 와중 기다리던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시계를 흘끗 본 바알은 아쉬워하며 머리카락을 빙빙 꼰다.

 

… 아직 보여줄 게 많은데 3시간은 너무 짧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느냐린에게 부탁해볼까.”

 

제발 린이 거절해주기를 기도하며 짐을 정리한다.

 

내가 짐 싸는 모습을 구경하던 바알은 수정체를 만지작거리다 선심 쓰듯 건넸다.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내가 싫어할까 봐 긴장한 건가.’

 

이렇게 되면 안 받을 수가 없다.

가불기를 이렇게 쓰다니!

 

결국 심심할 때 갖고 놀라며 선물로 받아버렸다.

냄새 때문에 안 될 것 같다며 완곡히 거절하려 하자 지독한 냄새가 손짓 한 번에 사라진다.

 

역시 마력이 최고다.

 

책상에 걸터앉아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알이 입을 열었다.

온종일 공방에만 틀어박혀 연구하기에 내가 조금만 더 머무르길 바라는 것 같다.

 

다른 강의는 뭘 신청했나 병아리.”

 

무심한 척 물어보지만귀는 연신 쫑긋거린다.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역으로 질문했다.

 

생각해둔 건 몇 개 있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됐다못 들은 거로 하거라.”

 

바알의 가면에 살짝 금이 갔다.

내가 살짝 웃으며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빨개졌다.

 

설마 삐지진 않겠지만 괜히 바알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 진짜 삐지는 거 아니겠지.

 

농담입니다마력 기본과 전략 기본을 신청했습니다.”

흐음… 전략이라면 몰라도 마력이라면 해줄 수 있단다아니내가 그 잔챙이들보다 몇 배는 더 잘 알고 있지.”

 

바알이 설마 자기가 해주겠다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마력 기초 따위보단 바알의 몇 마디가 훨씬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정설아와 친해질 기회이기에 어쩔 수 없다.

 

바알이 저주와 생명력을 다룬다면 정설아는 범위와 대인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그리고 정설아는 아얀강에서 가장 빨리 무너져 타락하는 히로인이다.

 

바알과 정설아가 내 1차 목표다.

예상처럼 흘러간다면 둘은 성장에도 큰 도움이 돼줄 것이다.

 

내가 대답을 않자 바알이 손을 꼼지락거린다.

 

방패에선 제일 낮은 등급의 교관조차 B-.

지극히 오만한 발언이지만 바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미 초반부터 그녀는 39라는 괴랄한 마력 스탯을 갖고 있다.

게이트화 된 상태에선 60을 넘어서는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교관님의 경지를 존중한다면 기초라도 배우고 부탁드리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무나.”

 

헛기침한 바알이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 가면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니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바알은 우아하게 걸음걸이를 내디뎠다.

공방 말고는 갈 곳도 없으면서 일단 자리를 비우고 싶은 모양이다.

 

문턱에서 멈춘 바알이 살짝 고개를 돌려 마지막 말을 건네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얼른 커서 내게 부탁하거라 병아리한숨이 나오는 수준이지만 나는 네 예상보다 훨씬 관대하다.”

그러겠습니다.”

 

나도 슬슬 일어나야지.

그녀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읊조렸다.

 

고마워 바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마력 기초 수업 강의실로 향했다.

 

끼에엑.”

 

텅 빈 공방에는 거미만이 처량하게 매달려있었다.

 

*

 

[마력 기초 수업]

 

단말기에 뜬 강의실을 찾아 들어간다입구부터 북적북적하다.

 

 

삼백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강의실이다천오백 명 중 비전투 인원 삼백을 제외하면 사 분의 일이 모여있단 뜻이다.

 

근접원거리보조를 가리지 않고 가장 기초가 되는 마력이기에 이해되는 규모다방패에서 생도를 뽑을 때 현재의 능력만이 아닌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도 확인한다.

 

엘리트들만 모인다던 방패에서 왜 기초 수업을 하나요라는 질문에 답변이 되었으리라.

 

내가 아는 것이라곤 소설에 나온 묘사와 이름뿐이다메인 히로인인 만큼 비중 있게 다뤘으나 정설아는 톡 튀는 인물도 아니었고 수백 명 사이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자리를 구하려던 차에 단말기가 부르르 떨렸다.

 

[이름 정설아] [나이 : 21]

 

게임 지도 인터페이스처럼 붉은 선이 공중에 생겼다당황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지 이곳 한 번 쳐다보지 않았다.

 

붉은 선의 끝에는 여자 생도 하나가 앉아있었다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거리더니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소심한 태도와 푸석한 머리카락누진 와이셔츠 한 벌.

누가 봐도 빈궁해 보이는 소녀는 정설아가 분명했다.

 

그와 동시에 단말기에서 창이 떠오른다.

소설 속 정설아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불쌍한 바알그들을 믿나요?”

아직은설아야 늦지 않았다내 손을 잡아라바알이 책임지고 널 지켜주겠다.”

 

거뭇한 저주와 바다와도 같은 푸른 마력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서로의 지배력에 주변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 압력에 짓눌려 고깃덩어리가 되어간다.

사람물건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 마력의 격류는 작은 점으로 압축되었다.

 

민간인사명대로 그녀를 막아선 군인수만 명을 지킬 수도 있었을 각성자.

 

수천의 영혼이 떠올랐다령이 그녀의 코어에 흡수되면서 마력은 크기를 불려 나간다.

 

있잖아요바알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요내가 죽기조차 두려워 자학할 때 누군가 따듯한 손을 뻗어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실없는 망상을요.”

내가 네 곁에 있어 주겠다아무도 없었다면 내가 너의 처음이 되어주겠다.”

 

정설아는 씁쓸히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애고아였던 정설아가 유일하게 좋아했던 풍경.

 

힘들 때괴로울 때슬플 때기쁠 때즐거울 때위로받고 싶을 때.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높고 푸르던 하늘은 붉게 찢어져 괴롭게 울린다.

 

생명체의 영혼을 먹이 삼아 성장하는 저주받은 특성.

옭아매는 침식이 성대한 만찬에 폭주하며 그녀를 지배하기 위해 맥동한다.

 

이미 몸이 조금씩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알지 못해요당신의 곁에는 항상 리엔이 있었죠저는 그 누구도 없었어요사랑이 알고 싶었지만 이젠 궁금하지 않네요.”

설아야돌이킬 수 없다넌 여기서 바스러져선 안 되는 존재란 말이다.”

 

아마 마지막일 바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차가운 척하지만 누구보다 따듯하고 여린 사람그녀가 조금이라도 버티게 해준 고마운 사람.

 

그리고불쌍한 사람.

 

고마웠어요.”

 

바알을 강제로 텔레포트 시켰다.

 

그녀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역시 힘들겠지.

 

바알이 치고 있던 장막이 사라지자 대기하던 각성자들이 들이닥친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비참하게 만드는데 특이 성벽이라도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더라면 몇을 제외한 모두가 저런 죽음을 맞이하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더럽게 어두워서 살아남기조차 힘들다.

방패에서 지낼 3년이 끝나면 지옥 시작이다.

방패도 마냥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계종이 판치는 전장보단 훨씬 안전하니까.

 

그래도 시발생환율 10%가 말이 돼?’

 

독자일 땐 흥미진진하게 읽었지만 내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울분이 차올랐다.

작가 새끼를 생각하며 이를 갈자 앞에서 개미보다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 ... 자린데... 비켜... 드릴까요...”

죄송합니다.”

 

단말기에 정신이 팔려 정설아의 앞에서 계속 서 있었나보다.

 

울먹거리던 정설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지만 바로 옆에 앉았다.

 

히엑!”

잘 부탁드립니다.”

 

오들오들 떨며 상처 입은 다람쥐 같은 표정을 짓는 정설아.

싫은 말 하나 못하는 성격이라 안절부절못하는 데서 멈춘다.

 

비켜달라고 하면 상처받을 텐데 내가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지금 꽉 차서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그녀의 생각이 들리는 듯하다.

또르르 맺힌 눈물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모르는 척 앞만 바라보고 있자 히끅거리며 눈물을 닦는다.

나중에 친해지면 꼭 풀어줘야지.

 

강의실 문이 열리자 소란이 멎는다.

 

좆 같이도 떠드는군 버러지들아내 수업에 들어왔으면 지켜야 할 일을 알려주지닥치고자아를 죽인 뒤에따라와라.”

 

처음부터 병신 같은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교관.

 

이름이… 류 즈쉬엔 맞나.

너무 띠꺼워 소설에서도 건너뛰었던 부분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인물 대부분이 선악으로 구별할 수 없는 입체성을 갖는 아얀강이지만 쟤는 백 퍼센트 악역이다.

중국의 압력으로 린이 할 수 없이 넣은 교관.

온갖 허풍을 부리지만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이다.

 

그런 주제에 열등감으로 가득 뭉쳐 정설아를 지독하게도 괴롭힌다.

그녀의 타락에 적어도 이 할은 관여했을 만큼 개새끼다.

 

스스로 마력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나꿈 깨라 벌레들아너희가 가진 모든 상식은 잊어라내가 가르치는 것만 제대로 학습해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생도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원래라면 저놈이 들어오는 게 아닌 제대로 된 마력 특화 교관이 따로 있다.

뇌물청탁 등 더러운 수작질로 원래 교관을 밀어내고 차지한 것이다.

 

그 교관도 만나봐야 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아직 수뇌부가 멸망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린의 권력이 약한 시점에서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일어난 결과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즈쉬엔은 적당한 먹잇감을 물색하며 강의실을 쭉 돌아봤다.

 

아직 배우는 단계인 생도에게 대중 앞에서 모욕을 주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지독하리만치 더러운 수작질이다.

 

소설대로라면 첫날의 먹잇감은 정설아다.

 

그러나 즈쉬엔의 예상과는 다르게 천재인 정설아는 바로 마력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그때부터 그녀를 괴롭혔다.

 

악독함은 교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거기생도앞으로.”

 

어떻게 해야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마력구를 만들지 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예 버프를 주며 제대로 만들어보라고 얘기해볼까.

 

생도안 들리나그래나오라고!”

 

시발?’

 

너무 어이없게도 걱정할 이유가 사라졌다.

즈쉬엔이 부른 건 지명 받은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정설아가 아닌 옆에 있던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