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조금씩 움직이는게 느껴져..."


"역시 당신은 절 선택해 주시지 않았군요."


"당신이 저에게 주시는 마지막 감정은 슬픔이군요.."


"저 같이 집착 심한 여자는... 싫으신거죠?"


"저는 당신밖에 없는데."


"당신이 날 한번이라도 봐줬으면 했는데."


"이런 결말 원하지 않았는데..."


"뭘까요.. 이 감정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는 무언가가.. 제 머리를 이상하게 만들어요."


"...어디선가 느껴본적 있는 감정이예요."











"......분노."








*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저에게 이런 감정을 주신 이유가 있을거예요."


"고작 저같은 미천한 엑스트라에게... 이런 감정을 주신 이유."


"끝까지 발버둥치라는 의미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아아.. 상냥한 당신의 마음이 저의 마음을 다시 움직여요."


"저.. 싸울게요. 마지막까지."


"다 죽일게요."


"저와 당신만의 시간을 망치는 모두를 죽일게요."


"저 걸레같은 년들 모두 죽이고 당신에게 다시 돌아올게요."


"가슴이 벅차올라요... 아아.. 이 느낌... 중독될거같아..."










*

아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던 천리의 주관자가 어느새 나의 앞에 도달해 있다.


"...어? 뭐야 너 방금까지는..."


"조용."


루미네의 모습을 한 천리의 주관자가 나의 얼굴에 살며시 다가와 나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읍...으읍?"


"푸하.."


천리의 주관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 몸이 직접 해주는 키스는 어땠는가?"


"..."


"부끄러운건가."


"여동생의 몸이야. 좋을거라 생각하냐."


"너의 아랫도리는 너와 별개의 생명체인가 보군."


천리의 주관자는 다시 조금씩 부풀기 시작한 나의 아랫도리를 눈으로 흘깃거렸다.


"...이건 단순한 생리현상이야"


"여동생의 몸으로?"


"..."


천리의 주관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언가 결심한듯했다. 


아까까지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쓸쓸함이 이제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2분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변한걸까.


"너.. 뭔가 분위기가 변한거같다?"


"...그렇게 보이는가?"


"아까까지 곧 죽을거같은 사람처럼 말하더니."


"미안하지만 난 죽을 생각같은건 추호도 없다."


"뭘 할 생각이야."


"마지막까지 발버둥칠거다. 내 존재가 소멸할때까지 나와 그분의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없앨 생각이다."


"너...!"


"6명 모두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처참히 짓밣아주지."


"그 애들한테 손하나라도 대봐.. 죽여버릴거야..!"


"...하하.. 웃기는군. 날 죽여서 너에게 좋은게 뭐지?"


"...뭐?"


"내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바로 모든게 복구되는게 아니야."


"그녀들의 광기어린 애정, 일그러진 소유욕, 독점욕까지 모든게 한번에 없어지지 않아."


"설령 그 소녀들이 날 죽이고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치자, 그 후엔 어떻게 되는걸까?" 


"이건 동화속 이야기가 아니야, 이방인.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없어."


"그리고 누가 알아 그 광기가 원래부터 그녀들이 마음속에 지니고있는 본성일지.."


천리의 주관자는 계속해서 건들고 있다. 내가 여태까지 걱정했던 모든것들을..


그 애들이 이곳에 도달한다면 과연 무슨일이 벌어질까.


과연 어떤 결말이.. 날 기다리고 있는걸까.


그 애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거부하지 못한 내가 그런걸 걱정할 자격이 있을까?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군."


천리의 주관자가 살짝 미소를 짓고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걸 받아들여라. 이건 무능하고 무력한 너가 감당해야하는 결말이다."








*

천리의 주관자가 나간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


바깥에서는 미친듯이 시끄러운 폭팔음이 나의 귀를 괴롭혔다.


땅이 계속해서 흔들린다.


내 몸이 떨리는건 과연 미친듯이 흔들리는 땅 때문일까?


아니면 이 진동이 끝나면 마주봐야 하는 이 이야기의 결말 때문일까?


머리가 어지럽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내가 그 때 엠버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내가 그때 천리의 주관자를 이겼다면.."


머리속으로 나의 과거를 후회하는 동안 날 괴롭히던 굉음과 지진같았던 땅의 진동이 멈췄다.












*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말소리없이 지면을 밣는 소리만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문 앞에서 그 소리가 멈췄다.





콰앙






이 방의 유일한 문은 무언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두동강이 나버렸다.


"여행자~ 여기 있어?"


내 눈앞에 비친건 피투성이가 된 루미네의 머리채를 잡은 채 웃고있는.... 모나였다.


"...루미네!!!"


모나는 루미네를 문앞에 내동댕이 치고 침대위에 묶여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이 년의 이름을 외치는거야?"

 

"죽여버릴거야.."


"... 방금 뭐라고 한거야..?"


"널 죽일거야..! 모나!!!"


내 머릿속은 온통 모나를 시체로 만들고 싶다는 집념 하나로 움직였다.


"어째서 그렇게 심한말을 하는거야?"


"나.. 여행자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죽일거야.. 죽일거야.. 죽여버릴거야!!"


"널 위해 열심히 했는데.. 왜 화를 내는거야.."


모나는 허공에 손을 저어 물을 만들었다.


모나가 만든 물이 마치 밧줄같은 형태를 갖추고 나의 입을 막았다.


"으읍!! 읍!!"


모나는 다시 루미네에게 다가가 루미네의 머리채를 붙잡은채로 질질 끌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 년이 걱정돼?"


"나.. 이년을 죽이려고 악취나는 걸레들이랑 맺기도 싫은 동맹을 맺었는데."


"굉장~히 힘들었어. 이상한 기둥같은걸 쏘고 말이야."


"싸울 때 다른 년들은 눈치못챈거 같지만.. 이 년 안에 있는 힘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난 느꼈어."


"난 그 때 우리가 이길거라고 확신했어."


"그래서 동맹을 맺은 다른 걸레들을 한명씩 죽이기로 결심했어."


"목적을 달성해서 동맹이 끝나면.. 어차피 서로 죽일거잖아? 그러니까 미리 하기로 했어."


"노엘은 보호막이 조금씩 사라져갈때 발밑에 물을 몰래 끼얹었어."


"꼴사나웠지.. 미끄러져서 날아오는 기둥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콰앙!"


...노엘이.. 죽었어?


"읍!!읍!!!!"


"피슬은 오즈가 사라질 때 물로 파동을 만들어서 기둥이 날아가는 쪽으로 살짝.. 아주 살짝 밀었어."


"아하하하! 엄청 웃겼어! 균형을 못잡고 쓰러지면서 안면에 기둥이 꽃혔다니까?"


말도 안돼....


"그보다.. 진 그년은 정말 머리가 비었어."


"바바라를 죽이려고 바바라에게 환각을 조금 보여줬었거든?"


"바바라가 환각을 보고 기둥이 날아오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때에 진 이년이 구해줬어."


"하하하하!!! 꼴에 언니라고!"


"이 싸움이 끝나면 널 얻을 수 있는데 멍청하게말야"


진단장...


"바바라는 그런 진단장을 붙잡고 울다가 기둥에 상체가 뚫리고.."


그만..그만해..


"엠버 개는 정말 골 때리는 애였지."


"내가 그렇게 한명 한명 몰래 죽이는 걸 보고도 못본채했어."


"거기서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갔어."


"힘이 떨어져가는 이 금발머리년에게 최후의 한방을 날렸는데.. 그 때 내 뒤에서 날 저격하더라?"


"결과는....알지?"


"읍...으읍..!!"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거야?"


"이제 그만 포기하고 날 사랑해줘."


"모두 널 위해서 한거야."


"너가 다른 걸레년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넌 이제 나밖에 없잖아..?"


"나만을 바라봐줘."


모두가 죽었다.


모나의 손에.. 한명 한명..


그만..그만해..


다 꿈일거야.. 현실일리가 없어.. 이런게...


"근데 이 금발머리는 아직 살려뒀어."


어..?


루미네가 아직 살아있어..?


"힘이 다 빠졌을 때 기절만 시켜뒀어."


"왠지 너랑 닮아보여서 말이야."


"...너가 계속해서 찾고있던 여동생이지?"


난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네만은.. 살릴 수 있을거란 생각에 난 온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여행자.. 아아.. 사랑스러워.."


"여행자가 그렇게 원하면.. 여동생은 살려두도록 할까?"


난 다시 온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것만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동생의 목숨만은.. 지켜야한다.


"너무 귀엽잖아...❤"


모나가 피로 뒤덮힌 손으로 나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때 처럼 나에게서 도망치면.. 그땐.. 여동생도 그년들이랑 같이 가는거야."


난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사랑해줄거지? 다른 년들한테 준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해주는거지?"


난 고개를 다시한번 끄덕였다.


"우리 착한 여행자.. 사랑해...❤"




















*

몇년이 지났을까...


이 방에서 지내는 생활도 익숙해져갔다.


모나는 딱히 날 묶어두고 속박하지는 않았다.


고문도 하지 않았고 그 때 처럼 나의 팔다리를 터뜨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내가 함부로 방에서 탈출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거겠지.


사실이다. 


난 지금도 내 앞에 보란듯이 열려있는 문 밖으로 뛰쳐나갈 생각조차 안한다.


나에겐 지켜야할 사람이 있으니까.


이런 날 유일하게 괴롭게 하는건 매일 밤 꿈을 꿀때마다 들리는 목소리들이다.


자기를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추궁하는 엠버의 목소리


나를 기다리겠다고 속삭이는 노엘의 목소리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피슬의 목소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라며 속삭이는 바바라의 목소리.


나를 믿는다고 말하는 진단장의 목소리.


악몽같이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들은 아침마다 나를 부르는 모나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 사라진다.


"여행자~"


그래.. 이 목소리.


"잘 다녀왔어?"


"응, 여보!"


"꽤 빨리왔네."


"응! 우리 여보랑 레인 보고싶어서 빨리 왔지."


레인, 나와 모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 날 이후 난 착정당하듯 모나에게 미친듯이 정액을 빨렸고 그 결과가 레인이다.


이 방을 탈출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내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사람.


"후후.. 우리 딸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모나가 아기의 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레인이 태어났을 때 모나가 나에게 뭔가를 말해줬었다.


지금와서는 기억도 안난다.


...뭐라고 했더라.


그냥 이젠 모든걸 잊을거야.


모나와 함께 행복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며 우리 딸이 커가는 걸 지켜보는것.


그것만이 나의 삶의 이유다.


"그보다 여행자. 저기 있는 쓰레기 말인데.. 슬슬 치워도 될까?"


모나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뼈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왜 저런데에 뼈같은게 있을까.


"그래. 우리 아기가 있는 방에 저런게 있으면 안돼."


난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봉투안에 담았다.


모나가 뒤에서 갑자기 날 끌어안았다.


"...여행자.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너와 함께하는 이 삶을.. 언제나 꿈꿔왔어.."


난 나를 감싸안은 모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도 사랑해 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