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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 돌아왔다. 11주 만이다.
부모님은 주말동안 내게 해주실 식재료 중에서 빠진것들은 산다고 나를 집에 내려주시고는 바로 마트로 가셨다. 집은 썰렁했고, 내 방에서는 LED등 특유의 있는 듯 없는 듯 한 소음만이 오디오를 채웠다.

임관식을 마치고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하니 어느덧 저녁 10시, 온 몸에서 숯불갈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거... 이래서야 의자 밑에 넣어둔 보람이 없잖아?''
집 앞 상가에 세탁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모항에 부임할때 입어야 하니 세탁할 수 밖에.

세탁소에 옷을 맡겼다.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어, 에디야~ 나 얀수 형이다. 임관식 마쳤나?''
''아, 형님. 안녕하셨어요? 지금 임관식 마치고 본가 왔습니다.''
''그래그래, 고생 많았다. 니는 뭐 진짜 재입대를 해뿌노?''
''ㅋㅋㅋㅋ 인생 뭐 그렇죠. 아, 형 혹시 지금 본가 계세요? 시간되시면 술이나 한잔 하시죠.''
''오 그래, 니 임관했는데 내가 함 사야지! 어디서 만날래?''
''해수욕장 쪽에 XX이자까야 어때요? 지나오면서 봤는데. 지난번에 얻어 먹었으니 제가 쏠게요. 아, 영재형 출국 하셨어요? 계시면 같이 먹죠.''
''영재 담주 출국이다. 아마 한동안 호주에 있을껄. 그럼 불러낸대이?''
''네넵 그리하십쇼. 한 30분 후에 뵐게요.''
''그래, 고맙다! 좀 있다 보제이~''

얀수형과 재영형.

둘 다 내 중학교 1년 선배들이다.
얀수형은 내 전임 학생회장이었고, 그때 내가 방송부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형이다. 지금은 얀산광역시 거점국립대학인 국립얀산대 경영학과에 늦게 입학한 학생신분.

재영형은 얀수형과 다른 방송부 선배의 친구다. 나도 큰 편인데, 재영형도 나만한 키다. 형은 군대 갔다가 워킹홀리데이 하시고는 어떻게 잘 해서 호주 영주권을 따셨다.

타 지방 거점국립대학인 국립얀주대에서 수학한다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졸업후 사회복무요원 생활로 다시 연락이 닿아 종종 만나서 어울리곤 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 외에 사회사람들을 만나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다. 집에 잠깐 들러서 씻고, 한동안 입지 않을 동근무복을 착용했다. 개리슨 모 각 잡는데만 5분이 걸렸다. 원래 입으면 안되지만 지금의 나는 신분은 있으나 직속상관이 없는 희안한 상태. 즉, 적당한 수준의 일탈은 문제거리가 안된다. 한번정도는 내가 나고 자란 이 거리에서 이렇게 번쩍거리며 입어보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를 터벅터벅 걸어 나가니 내가 나온 중학교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바로 옆에 해수욕장이 있고, 덕분에 학교 주변은 술집과 식당, 유흥시설이 꽉 차있었다.

흠... 해안가.... 요즘 시국에 좋은 환경은 아니다. 세이렌들로부터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다.
너무 평화롭잖아. 좀 기분이 묘하다.

집에 돌아오던길에 봐둔 이자까야.
댕그렁~
''어서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나이 지긋한 여자 사장님.
가게 안은 그냥 저냥 평범하게 손님들이 있는 정도다. 적당한 창가자리를 잡아서 앉았다.

''주문은 뭘로...어?''
낯선 목소리다. 아니, 정확히는 낯이 익은 목소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얀민이가 있었다.

얘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야...? 쟤... 명문여대 가서 학교생활 하거나 졸업하고 자리잡아야 되지 않나?
하긴... 학문의 전당이 아닌 페미 양성소가 된 명문여대, 요즘 취업도 잘 안된다고 들었는데 진짜 그런 모양이네.

서로 1초간 아무말 않고 쳐다본다.
당황한 눈치다.
''...혹시...김얀민...?''
''아...그, 그게...아, 주문 도와드릴게요.''
''...''
그런 드문 눈매를 가진 미인은 드물었기에 잊을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피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봤네요. 콜라 한병이랑 마른 안주세트 주시고, 나머지는 다른 일행들 오면 시킬게요.''
''알겠습니다!''
호다닥 뛰어가는 얀민이.

얀민이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온 소꿉친구다. 어렸을 땐 퍽 친했다. 내가 운동을 하면  얀민이는 옆에서 하루종일 구경을 했었고, 나와 같이 보드게임도 자주 했었다. 하지만 점점... 나와 멀어졌다. 나중에는 고등학교도 다른 곳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단절됐다.

''얀민씨, 4번 테이블 주문!!''
''!''
거봐, 김얀민 맞네. 고마워요, 사장님.
그러길래 뻘쭘해질 짓을 왜 하는 거야?
딱히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다.

오히려 난 그녀가 싫다.
'내가 이정도로 달라졌다. 어때, 부럽지?' 라고 보이고 싶은 사람중 하나다. 그녀는 자신의 소꿉친구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껄렁거리는 양아치같은 애들과 어울리는 걸 선택했으니까. 그냥 가던 길 가주면 나야 고맙다. 이제 와서 별로 엮이고 싶지도 않다.

''여기... 주문한 음료 나왔습니다... 그.... 미안해. 아깐 경황이 없어서 잘못 말했어. 잘 지냈니?''
''...그럭저럭, 덕분에.''
''...그 옷은 뭐야?''
''...나, 해군 소위야. 오늘 임관했어.''
''다시 군대 간거야?''
''...응.''
''... 잘 어울리네, 군복.''
얀진이는 대답을 듣지않고 자리를 떳다.

얼마 안되서 얀수형이랑 영재형이 왔다.
''아이고 김소위님 아닙니까?''
''오오, 김에디 소위, 좀 멋지십니다. 근데 개리슨모 왜 그리 썼어? 우리는 눌러썼는데 해군은 세우나 보다?''
각자 군생활 얘기, 장교대 썰, 사는 이야기 등등등 하다 보니 막바지에는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도 우리 에디, 내가 말했제? 니 분명 많이는 못해도 한번 하면 제대로 연애할 꺼라고. 이번에 부임하면 분명히 함선들 중에 네 짝 나온다.''
''크으... 아니 뭐 처음 하는 연애가 하렘이야? 부럽다, 하렘마스터!ㅋㅋㅋㅋㅋㅋ''

쨍그랑-
냄비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다.
쟤 부엌 들어가더니 뭐하냐?

''하하... 솔직히 면역력 없어서 어찌해야할지 잘 모르겠슴다. 애초에 저 군 복무하려고 간거라서... 연애도 그닥 관심 없어요.''
반은 진짜다. 하지만 스물 중후반까지 연애다운 연애 한번 못해본 나로서는 관심이 없는것도 아녔다.

그렇게 시덥잖은 소리를 조금더 주고받다가 계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는 얀민이가 있었다.
''...75,000원.''
''일시불.''
부로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취준생은 신용카드 발급받기도 어렵지?
''계산 다 됐어. 그... 몸 조심하고.''
''...? 그래. 잘 지내라.''

뭔데.

왜 갑자기 몸 걱정을 하는데? 낯 간지럽게.

2차 타령을 하는 형들을 겨우 보내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술 안 먹었는데 왜 이리 피곤하지? 이게 분위기에 취한다는 건가. 부모님은 기다리다 지쳐 잠드셨나보다. 씻고 자자.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의젓하고 모범적이었다.
어른스러웠다.
초등학생때의 나는 그가 그냥 좋았다.
이 눈치도 없는 놈은 그걸 몰랐다.
바보.

중학교 1학년.
그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진 않았다.
그냥 키 크고, 덩치 크고, 조용한 평범한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학생.

나는 이미 반에서 인간관계의 중심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시작은 내가 그리 되고 싶어서 그런건 아녔다. 얄팍한 잔머리 굴리며 사람 가지고 노는 주제에 성적 좀 좋다고 평가질하는 여자애들, 축구와 게임, 그리고 여자애들 밖에 없는 양아치 남자애들. 피곤했다. 하지만,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그들을 끊어낼 순 없었다.

에디와 어울리고 싶어도, 내 주변의 애들이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잘난 것도 없는데 잘난척 한다고. 부모님도 내가 더이상 에디와 엮이는걸 바라지 않았다. 착한데 도움은 안될테니 지금 친구들과 잘 지내라고. 그래서 난 내 소꿉친구를, 짝사랑을 버렸다.

중학교 2학년.
그는 점점... 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나 없이도 잘 생활 하고 있었다.
성적도 쭉 쭉 올라서 영재학급에 들어왔고, 방송부에서도 메인 스탭으로서 선배들과 후배들, 그리고 선생님 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난...
난 널 버려서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데...
너는 왜 이렇게 잘 사니?
내 마음을 왜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하는 건데?

중학교 3학년.
결국 그는 방송부 부장에다가 선생님들의 추천을 받아 학생회장까지 나갔고, 당선까지 되었다.
외유내강, 어른스러움과 성숙함은 학생들에게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교내 방송과 행사에서,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눈이 부셨다.

방과후에 아이들이 다 빠지길 기다렸다.
그의 사물함을 열었다.
그의 체육복을 꺼냈다.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았다.
그의 품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인기척이 들렸다.
에디가 통화를 하면서 오고 있었다.
급하게 사물함을 닫고 자리를 피했다.
집으로 달렸다.
와보니 내 손에는 그의 체육복이 있었다.
그 체육복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킁킁댔다.
아찔했다.
아직 그 체육복을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이 됐다.
그는 근처 남고에, 나는 근처 여고에 가서 완전히 떨어졌다.
그를 잊기 위해서 더 공부하면서도 잘 때나 힘들때는 그의 체육복에 어김없이 얼굴을 묻었다.
에디는 에디대로 3년동안 반장을 하면서 열심히 산다더니 얀주대 항공공학과를 갔다고 한다.
그렇게 비행기 좋아하더니, 결국 원하는대로 갔구나.

나는...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려 문과로 갔다.
딱히 뭔가 꿈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일류 여대인 명문여대, 그것도 문과 탑인 경영학과를 갔다. 그럼에도... 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부러웠다.
나 없이도 자신의 꿈을 쫓아 가는 그가.

회색빛 학교를 졸업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에서 눈치만 볼 수도 없었다.
그나마 구한 알바자리.

그곳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얀톡 프로필로만 지켜보던 그가.
세상에, 이십대 후반에 이렇게나 잘 생겼다고?
살 쪄있을때도 나쁘진 않았는데 살빠지고 근육까지 붙어서 더 멋있어.
이렇게 보니까 진짜 180 중반이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다.
그리고 저거 지금 제복? 군복인가?
너무 멋지잖아.
이 눈빛은 뭘까. 날... 날 기억해주는 걸까?
잠시나마 멈춘 시간이 다시 흘렀고, 당황해서 거짓말을 해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일지.
사장님 덕분에 내가 나란걸 알릴 수 있었다.
내 말에 답하는 그에게서 싸늘함이 느껴졌다.
아, 나 미움받는구나.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일 하면서 그와 일행의 대화를 엿들었다.
저 사람들, 나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기억에 어렴풋이 남은걸 보니 중학교때의 인연인가 보다.

''...하렘 마스터...''
문득 들려온 단어.
그리고 보니 요즘 해군은 좀 다르댔지?
함선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들로 싸운다고...

생각하다 설거지 하던 냄비를 놓쳤다.
...
하렘 마스터?
!
그... 주지육림 같은거 아냐?!
안돼.
그건 싫어.
왜.
나한테는 기회 한 번 없이 멋대로 행복해지려고 하는건데?

나 너 좋아해.
나 너 사랑해.
너 너 부러워.
그리고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나만 바라봐줘.
모든걸 다 해줄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내 사람이 되어줘. 나만 바라봐줘.
이제... 놓치지 않을꺼야.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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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붕이들 하이~
스토리 가지고 며칠을 고민하다 좀 바꿔서 다시 썼어.
그 과정에서 두 번 정도 글을 지웠는데 봐줬던 얀붕이들한테 너무 미안해.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써볼게.
잘 못 쓴 글 항상 읽어줘서 고맙다.
그리고 다음화에 드디어 김에디 소위 거제모항에 부임하니까 기대해줘!
아마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중 올라갈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