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은지 7일째 되었다.


사람은 죽게 되면 사후세계에 가게 되거나, 아예 없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건 아니었나보다.


죽음 뒤에는 사후세계도 없었고, 그렇다고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유령이 되어 세상을 둥둥 떠돌뿐이다.


뭐 이렇게 된것도 전부 내가 자초한것이겠지만.


남자친구가 한명 있었다. 키는 훤칠하고 인상도 밝으며, 성격까지 착한, 흠잡을 곳 없는 남자친구. 굳이 문제를 찾자면 나에게 있었다.


그는 착한만큼 순진했다. 주변에는 꼬리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그런꼴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여자들이 그와 가까이 할때마다 그를 질책했다. 그런것이 한번, 두번, 결국 열댓번을 넘어가기까지 그는 화 한번 내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사과할뿐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사소한 뒤틀림부터 시작된다.


아마 그날 술을 마셨던 탓일까. 아니면 그날따라 내가 더욱 예민하게 굴었던 탓일까.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내었다. 아니. 화를 낸것이라고 해봤자 울면서 억울함을 표한것이 끝.


하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잠시나마 품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평소 마냥 착하기만 했던 그가 나에게 화를 냈다는것이 납득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었던 곳은 유명한 여행지의 다리위. 술과 울분에 취해 비틀거리던 내가 내딛은 바닥은 다리옆 허공이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는 취했던 탓에 나를 붙잡을 수 없었고, 나 또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떨어지는 와중에 그의 비명섞인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으로 내가 본 세상은 끝이었다. 


아니,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장례식장 안. 새까만 상복을 차려입은 그가 내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모두 자기탓이라고, 본인이 그런 심한 말을 해서 내가 죽은 것이라고.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닿지 않았다.


내가 뻗어낸 손은 그의 몸을 허무하게 스쳤고, 내가 뱉어낸 목소리는 그에게 들리지 않는듯 했으며, 나의 모습은 그누구도 보지 못하는듯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안고서 나는 내가 재가되어 흩뿌려지는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모든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식장안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건 바라보는것 밖에는 없었다. 나는 이미 죽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세상에 나만이 존재한다는 고독감을 아는가?


처음 한달은 버틸만 했다. 두달째에는 평소보지 못한 구경거리들을 보았다. 세달째에는 부모님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네달째에는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일년이 되었고 이제 나를 떠올리는 이는 남지 않은것 같았다. 내가 세상에서 지워진것만 같았다.


거기에 끝을 알 수 없는 미칠듯한 쓸쓸함. 나는 반쯤 미친상태로 그를 찾아갔다.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는 보게 되었다. 그와 함께 웃고 있는 여자를. 그리고 나와 있을때는 볼 수 없었던 그의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미련하게도,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였다.







요즘들어 꿈자리가 사납다. 1년전 나 때문에 죽었던 전 여자친구가 자꾸 꿈에 나온다.


미신같은것은 믿지 않으면서도, 괜스레 신경쓰이는것은 어쩔 수 없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죄책감때문에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과 내가 그때 화를 내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감.


정신병원에 다니며 약도 먹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그때, 내게 다가와준 사람이 있었다.


"선배, 어디아파요?"


약통을 잃어버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진짜로 죽어버릴것만 같은 질식감이 느껴져 몸이 떨려왔다.


"약통이... 하아...하아.."


"어? 혹시 이거 말씀하시는 거세요?"


그녀는 내가 애타게 찾던 약통을 들어보였다.


"맞아.. 그거야... 어서.."


약을 삼키고나니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니가 왜 약통을 가지고 있는거야?"


"선배가 놓고 나가시길래, 돌려주려 챙겼죠."


'어쩐지... 찾아도 없던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저 때문에 한번 산거니까, 나중에 밥사줘요?"


애초에 약을 가져가지 않았으면 진작에 찾았을것을... 하지만 그런말을 함부로 낼 수 는 없었다.


며칠 후 그녀가 점심을 사달라며 졸라왔다.


그래서 최근 유행하는 맛집까지 찾아가며 식사를 하는 고생을 했건만...


"제가 냈으니까, 나중에 사요?"


이상하게도 본인이 계산을 하고는 나중에 다시 사달라고 하는 기행을 벌였다.


그런 그녀의 기행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어느덧 그녀와 나는 허울없이 대화를 나눌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때즈음 눈치채게 되었다. 더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숨이 가빠오지 않음을.


그리고 그녀가 고백해왔다. 나는 그녀의 고백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전여친과의 추억이 하나씩 그녀와의 기억으로 덮여갔다.


하나둘씩 나는 전여친을 잊기 시작했고 그녀에 대한 죄책감도 잊기 시작했다.


"후으..."


회상은 이쯤이면 되었다. 오늘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마지막 추억이었다. 아니, 추억이라기보다는 후회가 더 맞겠지.


마지막 후회마저도 그녀와의 기억으로 덮어버리기 위해, 오늘은 전여친을 잃었던 그 여행지로 다시 놀러가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격려와 위로 덕에 나는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걷기를 1시간.


그녀가 저 멀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를 보니 아침의 악몽은 조금씩 잊혀지는 듯 했다. 나또한 손을 활짝 흔들어 보였다.


'죄책감이나 후회따위 더 이상 가지고 갈 필요 없어. 나에게는 그녀가 있잖아.'


나를 다시금 바꿔준 그녀. 그녀에게 걸어가는 한발짝, 한발짝.


늘상 보는 사이 이지만, 왜인지 더더욱 달려가 힘껏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닿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 언젠가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그녀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어?"


그 외마디의 의문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쓰러졌다.


바닥에는 깨진 화분의 파편이 뒹굴었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119..! 119 좀 불러줘요!"


귓가에 전여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것만 같았다. 죄책감을 버리려 한 업보일까. 어쩐지 숨이 가빠오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될줄은 몰랐다.


그가 내가 죽었던 장소로 그여자와 여행을 간다는 것을 알게된 이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여자는 내가 그와 사귈때부터 곁을 맴돌던 여우였다. 그와 내가 싸웠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


두사람이 만나는 곳을 엿들어 그곳으로 먼저 가있었다.


설마 그가 오겠어? 거기가 어떤 장소인데. 따위와 같은 나약한 마음으로.


하지만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 그리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자 그런 약한 마음따위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저 여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여자의 머리위쪽에는 딱 밀기 좋은 화분이 있었고, 문득 그것을 '밀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들기시작했다.



그래서 밀었다.



맥없이 떨어진 화분은 여자의 머리를 강타했고, 피를 흘리던 여자는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여자보다 먼저 생각된것은 물건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었다.


이렇게 하나둘 돌아온다면, 언젠가는 산 사람이 될 수 도 있었다. 또 그에게 내 존재를 알릴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안좋았다. 그가 가장 약해져 있을때, 그때를 노린다.


저 여자가 그를 꼬셨다면 필시 그와 같은 방법을 썼을터이니. 나도 같은 방법으로 그를 되찾는거다.


지난 1년간의 고독은 나를 미치게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지금 맹목적으로 감정을 추구하는 정신병자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감정, 사랑과 분노가 눈앞에 있었다. 그에 지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를 되찾아와야 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조금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