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식도 지나고 백수가 되었다.

아무생각 없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이 되었더니 아무도 반겨주지 않아 학식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친구랑 정신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놀다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가 나의 머리카락을 늙게했다.

27살.


삼성은 커녕 지방의 중소기업도 노릴까 말까하는 스펙으로 취업 하는것은 어려웠다.

결국 엄마의 소개를 받아 엄마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병원에 간호조무사로 들어갔다.


**


"잘부탁해. 간호과 과장 이수진이야."

"어?"

"잘부탁해. 선배한테는 존대가 기본 아닐까 싶어."

"네. 잘부탁드립니다."


이수진.

학식생활때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한때는 의대를 희망한다고도 알려질정도로 성적이 좋았으나, 실패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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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하루였다.

어느 환자는 내게 뒷돈을 주고 수명을 늘려달라고도 했으며,

어떤 조현병 환자가 칼부림을 부려 손을 베일뻔 하기도 했다.


사실상, 간호조무사는 간호사랑 직무는 다를것이 없다.

직무는 거의 같지만 간호사에 비해 취급이 좋지 않다.


모두 얼마나 힘든 일을 하든 돈은 똑같이 받는다.

이제 이 세상에서 '돈'을 목적으로 하는 일은 없어졌다.

수명만이 남았을 뿐.


간호사복을 벗으러 탈의실로 항할때, 간호과장 이수진에게 전화가왔다.

아, 이수진 님.


"나현석."
"네 과장님?"
"너 그거 알지? 우리 자는 숙소동이 따로 있는거."

"네, 알고 있습니다."

"외출은 병가나 연차 외에는 엄금이야. 숙소에서 다른여자랑 자지 말고,,. 아, 차피내가떨어뜨려놓을거지만.."

"잘못들었슴다?"
"아 아냐. 오늘 하루도 수고했고 잘자."


**


어째 찜찜하다.

사생활이 보장된다고는 하지만 내가 자는 내 숙소 병동 개인실에서조차 감시를 받는듯한 느낌이다.


"흐응..."

단체생활에, 자위는 씹선비 원장님 지시로 금지, 여자랑 같이 자지도 못해, 술은 못마셔…


하루하루 어깨가 무거워진다.





"하-암."

아침이다.

..라기엔 새벽 6시라 어중간하다.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을 개고, 핸드폰 알림을 확인한다.


'?'


카톡이 와있었다.


[이수진 간호과장님]


'??'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잘못이라도 했나? 민원 들어왔나? 마음에 안드는게 있나? 설마 해고통보??


문자는 단 1통으로 짧고 간결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떨리는 손으로 채팅방에 들어갔다.


[사랑의내부의사랑의내부의사랑의내부의사랑 의내부의 사랑.

마음의겉면을따라형성된엉성한실,아아그것은나의마음을묶지못한다

알면알수록알면알수록점점깊어지는나의사랑을모르는그.

쌍년쌍년개쌍년죽여야하는개쌍년을입원시키는얽힌마음속실.]


순간 뇌가 정지되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다시 읽으려는 찰나, 메시지가 삭제되었다.


이젠 두려운 마음보다는 궁금한 마음으로 톡을 보내보았다.


[과장님?]

[아, 미안. 친구한테 보낼걸 잘못보냈어. 무시해.]


**


"아! 씨바알~! 밥달라고 밥! 밥줘 씨발새끼야!"

"환자분, 중식은 12시에 나와요. 곧있으면 나오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지랄하지말고 밥이나 내놔 돌팔이새끼야~!"

"..죄송합니다 환자분. 최대한 빨리 내놓을게요."


한바탕 뒤집어질뻔한 속을 되잡고 찾아간 커피 자판기 앞에는, 이수진이 있었다.


"많이 힘들지, 현석아?"

"아뇨. 별로 힘들지 않아요. 저분도 분명 배가 고플거고…"
"씨발련왜현석이한테지랄하는데그냥인슐린끓어버릴까개씨발새끼"

"네? 과장님?"

"아무것도 아냐. 같이 밥이나 먹을래?"

"아, 네."


나는 늘 나의 여사친 강수진에게 하던대로 손을 잡았다.

흰모래보다 곱고 고양이보다 부드러운 손의 감이 뼈속까지 휘감겨온다.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3초 지나서야 내가 한짓을 알고는 급하게 사과했다.


"방금 그거, 혹시 다른 사람한테 하던 습관이라던가..아니지?"

"무슨소리세요! 제가 사람을 헷갈려서 그러겠습니까?"


주둥이는 신나게 털었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딩시절 의사선생님께 손가락 깁스를 몰래 푼것을 들킨 이후로 최강의 두려움이었다.

두근거림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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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기분탓에 내가 그녀를 더 의식해서 그런진 모르겠어도 점점 더 자주 만나게 되는것 같았다.

분명 과장은 그녀였지만 해준것을 내가 그녀보다 많았다.

해봤자 사소한 것이였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일상이 나쁘지는 않다.

귀염상에, 피부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여상사 하나 있으면 직장생활의 반은 성공한것 아니겠는가.

나같은 희귀 케이스는 분명 없으리라 자부하며 1년째의 근무를 끝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물론, 폰에 애니를 켜놓고 말이다.


베시시 웃으며 이어폰을 끼고 하이라이트 장면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방에 들어왔다.


"흐에?!"

야애니를 보던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껐다.


"과장님! 안주무셨습니까? 여기엔 웬일로.."

"그..저기말야..핸드폰, 보여주면 안돼?"

"아, 네..에?!"


눈빛에서 오는 알수없는 두려움에, 나는 곧바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키스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아..그래. 너도 남자니까."

".."

"저기, 근데, 한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런데에.."

"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나는 너가 없으면 안될거같아."

"하하, 네, 제가 많이 도와드리기는 했죠."


"그런게 아니라.."

"네?"


방금까지는 약과였다.

지금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다.

더 차가워진 눈빛, 낮아진 목소리.

무언가 숨기는 늑대의 목소리 같았다.


"강슬희 그 씨발련, 연락처 지우면 안돼?"

"네? 아무리 과장님이셔도.."

"어서."


순간 겁에질린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폰을 집어 연락처를 삭제했다.


"나말이야..역시..너가 없으면 안될거같아..
지금까지 스스로도..그저 동료애라고만 얼버무리면서 지냈는데,

어느순간부터 절제가 안되더라구..

그러니까.. 나랑 사귀면 안돼?"



상상할수 없는일이다.



일반 사원과 과장의 연애?

사내연애는 특별히 조심하는거라고 들었다.

친구의 연락처를 함부로 삭제시키는것모 모잘라 연애?


당장 튀어야한다.


"저 화장실좀.."

"어디가 개새끼야."


낮지만 가는 목소리가 나의 발목을 죄어왔다.

하지만 내면에선 안된다는 느낌이 솟구치고 있었다.

본능은 뇌를 이겼다.


나는 이수진을 밀쳐내고 복도를 달려 1층으로 내려왔다.


'숨을곳, 숨을곳, 숨을곳..'


도망왔지만 숨을곳은 없었다.


"어디가? 나의 영원한 남자친구 아니었어?"


순간 목에 차갑고 따끔한 감촉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어딘가로 항햐는 느낌만을 받은채 무기력하게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