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온건가요.' 


저 멀리서 산을 오르는 한명의 사내가 보였다. 


이 산에서 그를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기를 벌써 두시간째. 


그가 매주 산을 이 날짜, 이 시간에 오른다는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 그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걱정탓에 어쩔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그를 기다리며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하며 시간을 보내는것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누가 뭐래도 수명이 긴 존재들에겐 시간 지나가는줄도 모를정도로 즐겁게 얘기하는 존재는 소중했으니. 


"아, 모미지씨." 


그가 나를 발견한모양이다, 웃는 얼굴과 내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정도로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 






'정말 너무 귀여운거 아닌가요?' 


무심코 그에게 잔뜩 풀어진 얼굴을 보여줄 뻔했다. 


마음의 긴장의 끈을 다잡으며 앉아있던 바위에서 일어난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우연이네요 모미지씨도 이 산을 좋아하시나봐요?" 


고개를 한번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한뒤, 그의 옆으로 이동하여 보폭을 맞췄다. 


가을이 거의 끝나가는 탓일까,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려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은 수백년간 맑은 모습을 유지하고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줄곧 맑겠지. 


그와, 내 자손들도 볼수있지 않을까. 


"후후." 


머릿속에 든 생각에 스스로 웃음이 지어졌다. 


자손이라니, 진도가 너무나도 빠른것 아닌가.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봐요?" 


갑자기 웃음을 지은 탓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좋은 일, 좋은 일이라면 있었다. 


'지금 당신과 이렇게 걷는것.' 


그것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평범한 인간은 일평생 구경조차 하지못하는 진미도. 


사선을 넘은 전투의 승리의 미주도. 


온갖 금은보화들 조차도. 


부족했다. 


'나에게 이만한 즐거움을 주는건 당신뿐이에요.' 


이젠 더이상 그가 없는 생활은 생각하지도 못할정도로 나는 그에게 매료되어 버리고 만것이었다. 


지금 당장 그에게 청혼할 필요는 없다. 


불과 수십년과 자그마치 수백년, 그 둘사이에 쌓인 경험의 차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은 그와 추억을 하나씩 쌓아가자. 


그와 똑같은 풍경을 보도록하자, 그리고. 


느긋히 이 정적을 즐기도록하자. 


그와 발걸음을 맞추어 '사브락'거리는 낙엽을 밟는 소리만으로도. 


더할나위 없이 즐거웠으니. 


"그러고보니 모미지씨에게는 감사해야겠네요." 


먼저 정적을 깬것은 그였다. 


여태까지 줄곧 자주 미소를 지어왔던 그였지만, 그가 지금 지은 미소는 그 어느때보다 밝게 웃고있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그 미소는 본 나는. 


"제가 원래 여성분만 보면 긴장하는 버릇이 있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었는데." 


불안해져서. 


"모미지씨 덕분에 최근에는 조금 나아져서 이번에는 마음에 담아두고있던 분께 데이트...라도..." 


무척이나 불안해져서. 


"안돼요." 


"모...모미지씨?" 


그만, 무심코 몸이 먼저 뻗어나왔다. 


-쿠웅! 


낙엽에 파묻힌 그를, 내가 위에서 올라타고있는 자세. 


당황한 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것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바...발이라도 미끌어지신건가요?" 


그는 지금 왜 당황하고있는걸까. 


갑자기 내가 덮쳐서? 


여태까지 그와의 대화에서 단 한번도 연적없는 입을 열어서? 


아니면 지금 내가 확인할수없는, 아마도 분노와 질투로 가득한 표정을 보고 놀라서? 


'셋 전부려나요.'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의 얼굴을 시야에 담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용서해드릴게요.' 


그는 무심코 말을 내뱉은것뿐이다. 


그가 마음에 두고있는 여자란, 그저 순진한 그를 흘러가듯 홀린 암여우일뿐.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봐주자. 


-까득. 


"흐익!?" 


두번다시 다른 암여우가 그를 홀릴수없도록. 


그에게 확실한 흔적을 표시해두곤. 


"모...모미지씨 혹시 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팠던 탓일까, 울상을 지으며 목에서 조금씩 흘러내는 피를 닦아내는 그의 손을 치운뒤. 


"자...잠깐!"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핥는다.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그의 피는 천상의 맛이었다. 


"저기." 


"네...네!" 


"오늘은,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상관없죠?" 


"그...그건." 


늑대앞에 놓인 토끼처럼 벌벌떨고있는 그에게. 


거절이라는 말은, 도저히 꺼낼수없었고. 


그저 자신의 목숨을 쥐고있는 늑대의 손을 잡고 일어설뿐이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준 늑대가, 오늘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짜고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