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 대사처럼, 낮선 천장이다.

관리되지 않은듯 누렇게 뜬 벽지. 간이 침대. 새 제품 냄새가 나는 베개.


"일어나셨어요, 선생님?"


정정한다. 억지로 2인용이 된 침대, 축축하게 젖은 이불. 살아있는 다키마쿠라.

다 나은 줄 알았던 허리가 다시 말썽이다.


"서윤아, 서윤이 맞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쌤 보고싶어서요··♡ "




어느덧 저녁, 서윤이는 능숙하게 밥을 해왔다.

발목에 묶였던 수갑이 잠깐 풀렸지만, 어차피 도망쳐도 갈 곳이 없다.


"방에 갇혀서 개같이 공부만 했어요. 쌤이 나 대학 붙으면 만나준다며. 듣고 있어요?

나 얀챈대 붙었어요. 알잖아요. 번역은 재택근무 할 수 있어요. 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나랑 같이 하면 되겠다. 그렇죠?

나 쌤 찾으려고 시발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응? 대체 어디로 사라졌었길래 3년을 찾아도 안 보이냐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남은 계란말이에 같이 먹으려는지, 서윤이는 맥주를 가져왔다.

수입 맥주만 먹겠다더니, 필라이트! 필라이트여도 어쩔 수 없다. 프리랜서 벌이니까.


"아! 맞다. 이 집.. 여기 제가 샀어요. 보시다시피 좀 낡았죠···.

괜찮아요! 우리 쌤·· 아니, 서방님이랑 고치고 살면 되니까. 으흐흐··· ♡ "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꼬맹이 시절 귀여움이 어디 안 갔다. 아니.. 술을 먹어서 더 귀엽게 보이나보다.

어차피 끈도 다 떨어졌겠다. 얘 첫 상대도 나였다. 재회하는 방법은 많이 이상했지만,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을 것이다.


그 날, 고무가 떨어졌다. 물론 그 뒤로도 두 번 더 했다.



* * * *



분명히, 배달비를 아끼려 집 앞 얀재치킨으로 가고 있었다.

검은색 승합차에 잡혀간다니. 빠져나가야 한다. 서윤이가 기다리고 있다. 장기가 털릴 수는 없다!


머리 끝까지 덮여있는 두꺼운 이불을 조금씩 들추자, 은은한 무드등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차가운 창고가 아니라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어. 고마워. 덕분에 잘 데려왔어. 어떻게 보답을···

뭐라고? 얀붕이 착정할 시간이라고? 미안. 다음에 내가 전화할게."


얼핏 들려오는 통화를 들어보니, 상대방은 대학 동기 얀순이가 확실했다.

역시, 아직 얀붕이는 잡혀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저 목소리는 유진이일텐데.



"아, 일어났구나!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연락도 한 번 없고···.

이런 방법까지 쓰긴 싫었단 말이야."


너 그렇게 눈치 없는 애 아니었잖아. 나라고 좋아서 연락 안 한 게 아니잖아.

이제 와서 납치라니, 그것도 별로 친하지도 않던 애 손 빌려서.




"나한테 대체 왜 그래? 뭐가 문젠데.

꺼져 주겠다고···. 응?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연락을 네가 끊었지, 내가 끊었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무리 나라도 그냥 넘기기 힘들어···."


"그래. 그렇게 힘들어 하지 말라고 나가줬잖아. 인생에서 나가줬잖아. 이제 그만 해도 돼!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너 행복하게 살라고 비켜줬는데, 왜 이제 와서 이래! 왜!"


먼저 울음이 터진 것은 내 쪽이었다.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지워봐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유진이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때도 말야, 내가 왜 너를 잠시 떠났는지 설명할 시간은 줬어야지.. 그렇게 가버리면 난 어떡해···."


"아.. 아하하! 그게 나를 납치해온 이유야? 다른 남자랑 어떻게 놀아났는지 고백하는 게···.

아, 난 몰랐네. 그런 취미가 있었어?아니면, 어떤 새끼가 가르쳐줬니? 응?"



'짝!'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린다.

뺨이 화끈거린다. 아프다.


"그만!"


"..."


"현아. 난 그날 프러포즈 하려고 했어. 그 반지···.

그거 네가 나 사주려고 했던 반지잖아.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는데.. 너는·· 어째서···."


유진이는 점점 표정이 풀어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현이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너무 힘들었으니까 판단이 잘 안 되는 거야. 현이가 아무것도 못하는 건 당연해···.

그 미친년은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먹여살려줄게···. 이제 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 "


아니다. 저건 내가 사랑했던 유진이가 아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고, 아버지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응원해주던 유진이가 아니다.

둘이서 행복한 미래를 그리자고 약속했던 그녀가 아니다. 추억 속의 그녀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응응. 괜찮아. 넌 그 좆같은 년이랑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돼. 지금처럼 술 많이 먹어도 돼. 일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나한테서 사라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듣고싶지 않다. 저 독백을 끊어야만 했다. 미쳐버릴 것 같다. 아니, 이미 그녀는 미쳤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쥐어짜내듯 말했다.


"풀어줘. 난 가야할 데가 있어. 나는··· 더는 너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닥쳐, 현아. 네가 바람을 폈다고 해서 나까지 그런 건 아니야···.

괜찮아. 그 년을 죽여버리면 되잖아. 그럼 너도 바람따위 핀 적 없어지는 거야··· ♡ "


"안 돼. 차라리 날 죽여줘. 제발. 같이 죽자. 너도 나도 좋은 데로 갈 수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서윤이는 안 돼.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나를 죽여줘···."


그리고 흐르는 정적.




"미안해·· 그래도 나 이해해 줄 거지?"


전기충격기가 이렇게 흔한 물건인지 나는 몰랐다.





2차 납치 ON

결말은 두 개 있는데 동시에 올려보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