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전경이다. 무채색의 벽지, 낡은 스포츠카 브로마이드, 그놈의 코인 광풍 탓에 성과상여금으로도 최상급은커녕 메인스트림 그래픽카드조차 집어넣을 수 없었던 슬픈 새 컴퓨터. 방 바깥으로는 부엌이다. 낡은 경첩 탓에 5도 각도로 기울어진 찬장 문짝이, 여기가 공직 입문 후 새로 마련한 내 단출한 보금자리임을 말해 준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면 두통. 늘 지니고 다니는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진통제 따위 듣지도 않는, 타가메트랑 카마제핀이 필요한 편두통. 그리고 식탁 의자에 요령 좋게도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기껏 쇠질 해서 단련한 몸뚱이도 소용없이 처량한 사내놈 신세.

 

 마지막으로, 이 꼴을 만들어 놓은 십 년 인연의 중고교, 대학, 그리고 직장 여후배.

 

 공문 작성할 때마다 맞춤법 운운하면서 정작 자신은 ‘되’와 ‘돼’도 구분할 줄 모르는 꼰대 주무팀장 험담이나 하자며, 평소 둘이 즐기던 물처럼 싱거운 맛 맥주 대여섯 캔에 갖은 안주 사 들고 올 때만도 좋았다. 컵라면 대령해 온답시고 부엌으로 도망나갈 때 따라갔어야 했다. 맥주 캔 따는 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불온했기에. 잠드는 약인지 뭔지, 하여튼 나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필시 거기서 섞었을 것이기에.

 

 강산이 바뀌는 세월 동안 쌓은 믿음을 그 가루 한 술로 뒤흔든 여자애에게 나는 물었다.

 

 “무슨 짓이냐?”


 “궁금한 게 있어서요. 물어보려고.”

 

 아니 이 잡것이, 대체 뭘 잘 했다고.

 

 이 꼴을 낸 장본인은 내 앞에 무릎 꿇어 정좌하고는 참 태연히도 말을 받았다. 그리고 마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지, 그게 궁금해서요.”


 “기다리게 하다니, 내가 너를?”


 “아, 진짜! 또 모르는 척이야!”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니까 좀 닥쳐 봐. 사람 묶어 놓고 큰소리치는 게 할 짓이냐, 밥통아?”


 “밥통이라니…….  


 시무룩하니 고개 수그리고 울먹이거나 말거나, 새벽 전동차의 전기 치찰음마냥 지지직 울리는 머리로 지난 기억 더듬었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랑 고백.


 정식 입직한 지 사흘째 되던 지난 3월 초입, 아이는 구애해 왔다. 내 뒤를 따라 공무원 공채에 합격하여 같은 부서로 발령받은 성과와 우연의 연속에 속도를 더하고 싶었던 모양이겠지.

 

 “중학교 때, 무슨 말만 했다 하면 걸레 빤 물이나 뒤집어쓰던 그 빌어먹을 시절에 붙들어 일으켜 주신 후로 오빠는 내 태양이었어요. 고등학교도 따라 가려고 고모 댁으로 위장전입했고 어느 대학 지망하는지 안 다음부터는 한심한 대가리 붙들고 죽어라 공부했어요. 공무원 되겠다 하셨을 때도요. 합격해서 시보 달고 사무실에서 처음 뵀을 때까지만 해도 다 좋았어요. 세상을 가진 것 같았다고요. 그런데, 언제부터 그렇지 않게 됐는지, 초조해졌는지, 아세요?”


 “잠깐만. 나 머리 너무 아파.”


 “머리요? 늘 말하던 편두통이구나! 어, 어떡해. 타이레놀 있어요? 말만 해요.”


 “그걸론 안 되는 거 알잖아. 저기 모니터 옆에 촉수엄금이라고 적힌 약병 있지? 거기서 한 알만 꺼내다 나 좀 먹여 줘.”


 “촉……뭐요? 아, 저거! 새로 마련하셨나 보다. 손 수手 자는 알겠네. 잠깐만 기다려요.”


 “너 수험생 때 한자 공부 안 했지?”


 “시끄러워요. 붙었으면 됐지 말이 많아. 입이나 벌려요.”

 

 역시 처방전 있어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 성능 확실하다. 지직거리다 못해 파직거리던 통증이 멎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다소곳이 기다리던 아이 눈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여초 직장이라더니 그 말이 맞았어요. 경쟁자들 투성이잖아. 최소 일 년은 만졌을 복사기 토너 교체하는데 왜 오빠 손 붙들고 도와 달래요? 7급 이상끼리만 가는 게 관행이라던 내년도 예산심의회에 왜 8급 나부랭이인 오빠더러 운전기사 할 겸 같이 가재요? 정신 나갈 것 같았다고요! 나 합격하기까지 일 년이나 여자 없이 깨끗하게 지낸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글 같은 곳인데! 그래서 3일 지나기 전에 고백했는데! 시간 좀 달라고 해 놓고 지금껏 반응이 없어! 반응이!”


 “그랬지.”


 “그랬지? 그랬지이? 진짜 미치겠네! 이봐요. 아, 좋아. 그 얼굴에 그 몸 가지고 10년이나 여자 없이 나하고만 있어 준 것 정말 고마워요. 근데 벽 치고 있었던 거잖아! 남매지간, 오누이 사이라면서! 삼천육백오십여 일 애태우다가, 제대로 된 직장 들어가서 좋은 여자 골라잡을 속셈 아니었어?”


 “아닌데.”


 “그럼 왜 내 고백에 답하는 걸 미루는데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거 솔직해서 좋네! 그래서 한 달 동안 뜸 들이면서, 밑으로는 내 동기 애부터 위로는 고시 출신 사무관님까지 온갖 여자들 추파 받으면서 정신적 주지육림에 빠져 계셨어? 그동안 내 속은 잘 익었다고요! 아까 구워먹은 삼겹살처럼!”


 “너 가슴 큰 거야 자타공인이지.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더구먼. 근데 삼겹살 비유는 자기 비하야. 그러지 마.”


 “듣기 싫어요! 지금 이 상황이 나 외면하는 거 아니고 뭐야! 누구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농담 따먹기는 여기까지다. 아이가 나를 해할 생각이 있다면 제 앞에 놓인 독일제 쌍둥이표 식칼을 내게 향할 것이요, 그 반대라면 자기 가슴팍에 들이대리라. 미미한 자해로 끝난다면 모르겠으되 그 이상은 안 된다. 평생 후회할 광경이 될 테니.

 

 "정작 오빠가 날 외면하면 난 어쩌라고요? 뭘로 연명해요? 버림받으면 이걸로 확 손모가지 긋고 죽어 버릴 테야! 닭고기같이 피 쫙 빠져 허여멀건 송장 보고 후회나 배불리 해요! 있을 때 잘 할 걸, 막 이러면서! 나 죽으면 어디 나만 한 여자 만날 수나 있을 것 같냐! 이 바보 등신아!"

 

 흐아앙 하고 목을 놓는 아이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녀석이 준 마지막 기회. 내 대답에 따라 우리 운명이 결정되겠지.

 

 어떻게 답해야 할까?

 

 지난 시간 녀석은 내게 진심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취준생 시절을 지내며 진심 아닌 적이 없었다. 따돌림당하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사회성을 되찾고, 영특한 제 머리를 건전한 목적에 활용할 줄 알게 되고, 나를 따라 공직에 입문하는 동안, 아이는 한결같았다.

 

 일찍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최선의 것들을 갈망하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성직자이며 신의 종이라고.


 가만 생각하면 아이의 삶은 황제의 이 금언金言에 어울린다. 학창 시절의 고통을 극복하고, 온갖 모욕에도 미치지 않고, 부유한 자기 집안으로부터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안락함에도 굴복하는 일 없었잖은가. 어떻게 해야 홀로서기가 되는지 끊임없이 내게 묻고 또 자문한 끝에, 공채 거쳐서,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어엿한 정규직 공직자 되어 자기 인생의 닻을 올리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최선을 추구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지금 여기, 내 앞에 퍼지르고 앉아 섧게섧게 우는 요 어여쁜 꼬마 숙녀야말로, 로마 제국의 오현제 마지막 사람이 찬양한 작은 철인哲人이요 지성인이다.

 

 그러하되 사람치고 완벽한 이는 또 없는지라, 최선을 다해 일군 자기 생활을 녀석은 최악으로 접으려 했다.


 약물을 이용한 결박, 흉기를 동원한 협박. 성인지 감수성이라니 뭐니 해서 아무리 여자 중심으로 도는 요즘 세태라지만, 공인은 물론 사인으로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짓을 아이는 저질렀다. 자칭하길, 사랑에 환장한 사람이어서라니! 돛 가득 순풍 받아 대양으로 나아갈 새 배 되어서는 웬걸, 지는 태양 아름다우니 넋 놓고 쫓아가다가 스스로 해안에 좌초하려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 태양 된 놈은, 나는, 너를 어떻게 보는가?

 

 내게 너는 너다.


 학급 한가운데 오물투성이 되어 넋 나간 왕따 중학생이건, 홍보정책관실 불려가 지상파 광고 출연 제의받는 절세 미모의 신임 주무관이건, 너는 내게 너다. 제 머리만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과제 가지고 와서는 여름 매미처럼 달라붙던 중고교 시절에도, 수면제 대용품으로 안성맞춤인 철학 서적 가지고 인생을 논하자며 일주일 치 식재료 사 와서는 자취방에 눌러앉던 대학생 때도. 어르신들 보좌하랴 새올 전산시스템 적응하랴 민원 전화 받으랴 둘이 함께 혼비백산하는 지금 이 나날까지도 너는 오롯이 너다. 내 삶의 중요한 일단一團이다. 그랬기에, 제법 있었던 기회들 다 외면하면서, 또래 여자라고는 여태 너밖에 곁에 두지 않았겠지.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 너를, 오늘 나는 무턱대고 꾸짖기부터 했다. 동원해서는 안 될 수단 동원해서 해서는 안 될 짓 하려 한 점은 분명 네 죄이지만 나 또한 잘못이 있다. 너로 하여금 벽을 느끼고 좌절토록 한 잘못이.

 

 이제 그것을 갚아 나가야겠다. 사랑에 맹목적인 너, 귀여운 후배님에게 손을 내밀자. 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나도 너를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반짝반짝 미끈하고 멋진 흘수선으로 대양의 파도를 가르도록, 저녁놀 만들 생각 그만두고 다시 네 하늘 한가운데 떠올라 보자.

 

 나는 묶인 두 다리 들어 아이 무릎 위에 얹었다. 화해의 악수 대신이다.

 

 “울 만큼 울었어?”


 “대충요.”


 “네 마음 알았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네 말이 맞아. 내 잘못이 커. 너랑 누구보다도 가깝게 오래 지낸 주제에 이렇게 애태우기나 하고. 그간 무심하게 대해서 면목이 없네.”


 “저도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놀랍게도 아이는 비척비척 다가와 손으로 칼로 매듭 풀고 끊어 주었다. 되찾은 인신의 자유. 원한다면 경찰서행도 불가능은 않겠으나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녀석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애가 탔어도 이건 너무 나갔다. 원, 급발진도 이런 급발진이 다 있냐?”


 “인정해요. 오랏줄 달게 받을게요. 파출소 가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얘기나 잘 들어.”

 

 짐짓 엄하게 내는 목소리. 어린 새처럼 내 품에 든 몸을 아이는 바르르 떨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사귀자고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믿음이 필요하니까. 사귄다 해도 수틀리면 또 묶어서 식칼 놓고 눈물바다 안 만들리라고 장담할 수 있어? 시작은 급발진으로 했지만 끝은 급제동이 아니리라는 확신을 내게 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서로 알아 가야지. 지금까지 오빠 동생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남자 여자로서. 상대가 정녕 어떤 사람인지. 이를테면, 그래, 비밀스러운 취미 생활은 어떨까? 너를 만나기 전의 내가 남몰래 무엇을 좋아하고 아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너는 궁금해하고, 나도 네게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야.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그렇게 다가가면 오빠는 나를 받아 줄 거예요?"


 "열의와 성의를 봐서."

 

 치이, 무슨 대답이 그래요? 공직 인생 박살날 거 각오하고 약물 감금까지 한 사람한테 열의를 바란다고? 뭐, 머리에서 김 나는 모습이라도 보여 줘요? 그 뭐야, 일부러 방열판 드러내 놓은 컴퓨터 뻥파워처럼 푸슈슈! 막 이렇게? 불만 섞인 목소리 속, 그러나 아까 전과 같은 독기도, 설움도 없었다. 다행스럽다.

 

 "그럼 합격률 백 퍼센트짜리 기회를 주지. 바로 지금부터."


 "정말요? 뭔데요?"


 "면접 응시. 방금 내가 한, 서로 다시 알아 가자는 말 똑바로 이해했는지. 합격하면 그 다음 단계, 불합격하면 합격할 때까지 무한 재도전. 앞으로 이 과정의 연속일 거야. 어때? 할래?"


 "할래요! 할게요!"

 

 원하신다면, 꼬마 아가씨.

 

 얼굴 환해져 다가드는 녀석과 눈을 맞추며 나는 침대로 올라갔다. 편하게 누워 자리 잡고 이불을 들추었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아이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오빠. 설마 그, 그런 면접이었어요? 쓸데없이 뜸이나 들이고, 난 언제든 환영이었는데. 하여튼 사람을 너무 배려해서 탈이야. 하기야 그런 점에 반한 거지만. 들러붙는 잡놈들 다 쳐내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요. 오빠가 갈 때까지 견디면 합격인가? 오빠 보내 버리려면 어떤 체위가 나으려나? 정상위나 후배위는 내게 불리하고, 전측위는 도중에 흐름 타서 하는 법이고, 그럼 기승위? 공평하게 대면좌위? 그런데 어쩜 좋아. 처녀 바치는 자리에서 벌써부터 그렇게 대담하게 굴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모자란데. 빙빙 도는 눈동자로 횡설수설 새살거리는 여자애를 나는 붙들었다. 그대로 끌어올려 품에 안고 함께 이불을 덮었다. 원체 작은 얼굴. 크고 예쁜 두 눈꺼풀 가리기에 오른손만으로도 모자람 없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제일가는 취미는 너야. 앞으로 사랑이 되고 평생 함께할 반려가 될 수도 있는데, 그건 너 하기 나름이지.”

 

 그리 부연하고 나는 물었다.

 

 "너 이전엔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지 않니? 아무한테도 밝히지 않은 내 으뜸 취미."


 "넹. 알고 싶어여."

 

 헤헤 하는 웃음소리며 따스한 숨결이 귀와 코를 간지럽힌다. 완전히 느슨해져 양 입꼬리 귀 밑에 가 걸렸으니 전에 없이 귀엽다. 어른이 되고서도 졸업하지 못한, 누구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한 혼자만의 즐길거리를 지금이라면 터놓을 수 있겠다. 나 같은 놈 싫다 않고 오랜 기간 쫓아와 준 이 장하고 기특한 녀석에게는.

 

 머리맡 리모컨 들어 조명을 끄고, 아이 눈 가린 오른손을 풀었다.

 

 “그대로 천장 봐봐.”

 

 와아 하는 탄성이 정인情人의 고운 입술로부터 흘렀다. 바라지도 않았던 반응에 힘입어 나는 자랑스레 물었다.

 

 

 

 

 

 

 

 

 

 

 

 

 

 

 

 

 

 

 

 

 

 

 

 

 

 

 

 

 

 

 

 

 

 

 

 

 

 

 

 

 

 

 

 

 

 

 

 

 

 

 

 

 

 

 

 

 

 

 

 

 


 

 


 "짠! 야광 공룡이야. 멋있지?"


 "냉. 멋있어여. 오빠같이."

 

 첫 면접은 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