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수많은 신들이 있다.

어떤 신들은 악하고, 어떤 신들은 선하고

어떤 신들은 강대하며, 어떤 신들은 나약했다.


신들의 성향과 그 강대함은

신도들의 '신실함'으로 결정되었다.


질서를 따르는 자들이 믿는 신은

아무리 그 신이 오만방자하더라도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힘써야 했다.


농사꾼들의 신은 평소엔 검소하고 근면했지만

추수감사절만큼은 자신들의 신도와 함께 음악과 술을 사랑하는 축제의 신으로 변모하였다.


뱃사람들의 신은 술과 싸움과 노략질을 일삼았지만

'동료'와 '신뢰'를 관장하고, 배신자들의 처분을 직접 도맞았다.


그리고.... 여기 단 한명의 신도만을 거느리고 있는 

나약하디 나약한 신이 있었다.


그는 남신임에도 '순결'을 관장하였다.

좀더 넓은 범위의 '정절'이나 '도덕'이 아닌, 아침이슬과 같은 '순결'만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신도는 단 한명의 여성뿐이였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순결의 남신은 나약했지만 매우 아름답고, 고결하였다.


매일 아침, 순결의 신을 믿는 여신도는

자신이 직접 만든 작은 제단에서 

맑은 물 한그릇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신실함이 하늘을 감동시켯던 것일까

아니면 단 한명의 신도를 위한 신의 변덕이였을까

순결의 신은 언제나 직접 작은 제단에 강림하여 

자신의 신도와 '신탁'이란 이름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하느냐'

'점심식사는 호밀빵과 물에 섞은 식초가 좋겠구나'

'저번에 넘어져 다친 무릎의 상처는 어떻느냐'

'두려워 하지 말거라, 내가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느니라.'


신탁이라기엔 참으로 쓸데없는 말들이엿지만

단 한명을 위한 신과, 하나뿐인 신도에겐 소중한 시간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여신도의 마음엔 '사랑'이란 감정이 생겨났다.

하나뿐인 신도는 자신이 만든 작은 제단에서, 자신의 신에게 '기도'라는 이름의 고백을 하였으며,

그 날, 순결의 신은 '순애'와 '순결'의 신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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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의 신실함이 커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도의 '마음'이 깊었기 때문일까

'순결'의 신의 힘은 더욱 더 강대해졌다.


하지만 이를 '사랑'의 신은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감히 별볼일 없는 잡신이, 자신의 관할을 빼앗아 가려 하다니!


'사랑'의 신은, '애욕'과 '성욕'의 신도들을 불러모아

'순결'의 신전을 파괴하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채찍과 재갈과 가죽옷으로 무장한 신도들이 모였다.

'애욕'과 '성욕'의 신도들은 기세등등하게 작은 제단을을 파괴하려 하였다.


"이딴 작은 제단따위, 발길질 한번이면 충분하지!"


하지만 감히 어떤 신도들도 작은 제단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리고 작은 제단 뒤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여기사(팔라딘)가 나타났다.


여신도의 신실함이 깊었던 것을까, '순애'의 힘이란 생각 이상으로 강대했던 것일까

제단을 파괴하러 온 '사랑'의 신도들은, 강력한 신의 대리인 앞에서 스러져 갈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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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사랑'의 신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햇다. 

자신의 관장하는 영역을 뺏겻을 뿐더러, 한명의 신도에게 자신이 직접 축복한 신도들이 패배하엿기 때문이다.


'순결'의 신은 날로 유명해져 갔으며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작은 제단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결'의 신은 기뻐하며 자신의 새로운 신도들을 맞이하려 하였으나.........

그리 할 수 없었다.


그의 하나뿐인 신도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낫기 때문이다.


'나의 신을 모실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야'

'나만이, 나의 신을 사랑할 수 있어'

'나만이, 나의 신의 곁에 있을 수 있어'

'다른 모든 것들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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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제단을 찾아간 사람들은, 신에게서 어떠한 신탁도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실망한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순결의 신은 날로 강대해져 갔으며,  관장하는 범위 또한 넒어져갔다.

'순결', '순애', '애정', '질투', '감시', '속박', '집착', '독점'.......

이윽고 '광기'에 이르럿을 무렵


다른 어떠한 신도 감히 '순결'의 신에게 대적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순결'의 신은 누구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내 잊혀져 갔다.


다만, 그에겐 '단 한명'의 여신도가  언제나 곁을 지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