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위의 말이 들리는 건 아마 환청이겠지, 틀림없이. 이 내 눈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바보 소악마한테서.


"선배-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요-? 에헤."


"재촉하지 마, 정말."


"뭐 선배 정도의 레벨에서 이 수를 받아낼 수 있을리가 없죠. 오늘은 이만 포기하는 게 어때요-"


"빈틈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더 크게 박살낼 수 있을지 생각 중이야."


"차암."


삐진 듯이 그녀는 말을 멈추고 볼을 한껏 부풀린 채 시선을 옆으로 향한다.


솔직히 말해서 트윈테일보다는 포니테일을 시도해주었으면 하는 연령- 물론 그리 솔직히 말하면 맞아 죽겠지만- 그래도 아직 앳되고 어린 티가 나는게 집과 집 너머 건너뛰면 만났던 서로가 참으로 조그맣던 예전과 달리... 몸은 한껏 안아들 수 있을 정도로 참 커졌는데 정신머리는 영 크질 않아선 맨날 나만 만나면 장난기 넘치는 미소로서 헤실헤실거리곤 툭, 발이나 걸어대고 은근슬쩍 팔을 걸어오곤 가슴팎에 말랑말랑한 살갗을 부벼대어 여기저기 아찔한 촉감이 느껴져서- 그래도 나도 남자인데 말이지- 음, 곤란하게 만들고...


그리고 항상 이겨먹으려 들고... 말이지. 너의 생각 따위는, 전부 알고 있는데. 꼬리 파닥대는 발버둥... 아하하.


"아."


"그래, 이렇게 받아치면 어떨까, 후배야."


그러며, 나는 특공대 하나를 바둑판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이 녀석은 온통 검고 미끈미끈하고 또... 건방진 사람에게 침묵을 선사할 수 있다. 참 재주 많은 녀석이다. 작전 사령관이 누구냐에 따라 가진 힘은 천차만별으로 달라지지만... 내가 흑돌을 잡음은, 적어도 이 녀석 정도는 마음껏 요리할 수 있다는 것과 같고. 네가 초라하게 쌓아올린 새하얀 도읍이야... 沙, 누각樓閣, 모래성일 뿐이고... 


나의 돌이 너의 소꿉장난을 참 아름답게도 부술 뿐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Violence, 폭력일 뿐이고. 공격은 최선의 방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최고의 공격이 꼭 뻔한 곳으로 치고 들어가는 것일까. 너가 일부러 양단수를 열어준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긴 거들떠보지도 않을거야. 그 옆을 절단하면... 그래, 모든 백돌이 서로 흩어져 살 수 없는걸.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어때."


"...멋지네요. 좋은 수네. 그러니까... 히, 졌어요."


"고등학교 가고 나서. 49승 1패."


나의 선언에, 소녀의 눈엔 금방 물기가 어린다. 당돌하고 당찬 모습은 다 어디에 갔는지. 저 녀석은 감정선이 금방금방 변화해서 재미있다. 그러니까 놀릴 마음이 드는 것이고, 그래도 좀 심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1승 49패를 해야만 하는 가련한 소녀의 기분도 좀 생각해 줘요. 그러니까... 언제는, 저도 프로를 꿈꿨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그리 말하며 바둑판에서 돌을 쓸어내 거두려 하는 조그마한, 그리고 떨리는 손을 잡아챈다. 당황하는 얼굴을 뒷전으로 한 채 이런저런 공상을 떠올리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손등을 검지로 살짝 쓰다듬는다.


"에헤."


"심했어?"


"응- 아니요. 다 풀렸어요. 선배가 제 손에 손가락만 살포시 대어줘도 저는 뭔가 기뻐지고- 언제까지나 만져줬으면- 응... 어쩐지 뭐라고 할까 둥실둥실해지고. 으으... 그러니까 에로틱한 건 아니고 플라토닉한..."


"알아."


"히."


"이 대국, 조금 더 해보자. 아직 너가 이길 수도 있어."


"...알았어요. 으응-"


그리 말하며 아이는 바둑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뭐, 초읽기 따위는 없으니 느긋하게... 그러다 살짝 웃고. 내 손바닥 쫙 펼친 것보다도 작을 머리 안에 들어있는 콩알만한 뇌로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 모르겠는 채로, ...아무튼말이지, 여심... 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확신할 수가 없어.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이... 모두 착각일 수도 있잖아.


사실 이 녀석이 날 안 좋아하는 거면 어쩌지. 아하하. 그러면말이지, 음... 별로, 살기 싫은데. 살 이유도 없는데 말이지. 이게 전부 연기고... 나를 놀리고 있을 뿐이라면... 사실 마음은 다른 곳에 보내두고 있다면...


"선배."


"응."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 전부 터져내게 한 뒤 침착함을 가장하고, 나는 홀로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대답한다.


"바둑은 왜 하게 됐어요?"


"...여러 번 말했잖아."


"또 듣고 싶어서요."


하아, 그렇네. 나는 다시금 반복한다.


"너와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지. 집중하는 모습이 예뻤어. 너와 나, 모두... 발달이 더뎠지. 각자의 부모님들은 우리를 사랑했고,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 있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켰지. 게임... 그 중에 이것도 있었던 것이고, 너가 먼저 시작했지."


"응응, 그랬죠."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 하던 네가 어쩐지 나와 하는 이 '놀이' 에는 흥미를 보이는 것 같다고 해서... 너의 부모님은 너에게 바둑을 시켰지. 그리하며, 나도 같이... 네 집안의 권유에 따라 해당 취미를 갖게 된 것이고... 너는 늘... 나와 시간을 보냈지, 이렇게."


소녀는, 어쩐지 슬퍼도 보이고 감상에도 젖은 듯한 미묘한 표정으로서, 우수에 잠긴다.


"그랬죠."


"서로 분해하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많이도 보았지... 우리는 늘 감정을 나눴고 서로의 기분을 알기 위해 노력했지, 물론 상대를 이기려고... 상대의 수를 읽으려고... 였겠지만... 그 사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참 많이 알게 되었고, 늘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게 되었지..."


"에헤, 네. 선배만을 항상 생각했어요. 항상 언제나 늘 계속."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삶의 목표는 너를 굴복시키는 것이 되고...  너에게 졌다는 말을 한 번 더 듣는 것이 되고 뭐, 참으로 유치하지만, 우주비행사나 대통령이 꿈인 것보다도... 그래도 소소히 즐겁고, 의미도 있겠고, 영원으로 이어져도 될 가치가 있겠지."


"...그래서 명문고를 가실 수 있었는데 이렇게 나를 따라 일반고에 오셨고. 지능검사 만점의 초천재가."


"어려서부터 늘 말이지, 꼬맹이일 때부터, 일부러 멍청함을 가장했지. 그도그럴게, 너, 바로 옆의 옆에 사니까, 비교될 거 아니야. 누구는 똑같은 장애를 떠안았는데도 저리 활짝 피어 나는데, 너는 뭐 하고 있냐... 그러면 너... 불행해질 거 아니야. 슬퍼지고 힘들어지고.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받고 싶은 대우, 취급, 미래, 그런 것들을 조금 포기했지. 크게는 아니야. 별로 신경 쓸 건 없어."


"...미안해지잖아요. 고맙다기보다."


"미안해하는 것도 고마워하는 것도 바라지 않아. 딱히 너에게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너가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되어도 딱히 뭐 크게 상관은 없고... 그래도 뭐... 나도... 나도 행복해져보고는 싶어. 너를 안아보고는 싶은데... 너의 행복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정말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것들이지. 너를 슬프게 한다면야, 즐겁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웃게만 할, 자신감도, 부족하고..."


"아하하, 하. 하하... 하하... 네? 뭐요? 자신?"


"응."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화난 듯도 그냥 삐진 듯도 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날 올려다본다.


"바둑 이거 혼자 두는 거에요?"


"아니. 둘이서."


"왜 행복은 서로, 양쪽이, 노력하며, 만들어가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주는데요?"


"너가 믿음직스럽지 않아서일까?"


"그건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깔보는 거죠. 무시하는 거라고요... 저- 저는, 선배 없이도 스스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어요. 다 컸다고요. 어른인데도, 그런데도... 언제까지고 나를, 그 때 그 시절 꼬맹이로만..."


"혼자 영화관도 못 가, 카페에서 주문도 못 해, 도통 말을 안 한대. 내 앞에서만 그리도 조잘댄대. 분명 가능성은 있는데도... 지능지수가 떨어지는 건 아닌데도... SQ(사회지능)의 부족,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확률이 절망적으로 없대."


"...치이."


"그러니, 내가 다 책임져야지. 내가 더 노력하고, 내가 더 힘내고... 너의... 앞에서 걸어야지. 너보다 강하고, 너보다 똑똑해야지."


그러며, 나는 소녀가 어느샌가 자신없게 두어낸 백돌 하나를, 강하게 쳐내 끊으며.


"자, 다음."


강압적으로 선포한다. 너무해? 응, 뭐, 그렇겠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새장은 가두기 위함이 아니다, 보호하기 위함이다. 부러진 날개에 부목을 대는 것은 자유를 제한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더 언젠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그리 너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기 위함이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겨줬으면 좋겠다. 세상은 약자에게 친절하지만은 않다. 가혹하니까... 너는 너가 상처로부터 배우고 강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좋고 따듯한 사람들 곁에서...


따듯히 자랐으면 한다.


"선배."


"응?"


"항상 자신이 위에 있는 줄 알았어요?"


"뭐?"


그러며, 내가 사랑하는 연약하디 작은 소녀는,


킥, 웃으며,


이 바둑판을, 내려다본다.


"왜 저는,"


"항상,"


"진심이였을 거라 생각해요?"


입꼬리가,


비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