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경비병을 사랑해버렸다 (61)

 

 

 

 

 

121.

 

“저……아가씨?”


“왜.”


“진짜 이 자세로 있어야 합니까?”


“진짜 이 자세 그대로 유지해.”


마을 언덕에 있는 커다란 나무 밑.

 

벌써 저녁 시간이 되어 날은 어둑어둑했고, 바다라 그런지 슬슬 날이 추워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생선 구이 냄새가 끝내주게 좋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계속 중얼거리면 진짜 벌이 뭔지 알게 해줄 거야.”

 

“넵.”

 

나는, 아가씨한테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아가씨가 내 무릎을 베고 누운 것이다.

 

“생각보다 편하네, 이거.”


“저는 생각보다 불편합니다.”
 
“그래야 벌이 되잖아. 아무튼, 생각보다 큰 수확을 거뒀어.”


아가씨가 손에 든 두루마리를 흔들며 말했다.

 

이 두루마리는 플로라 씨가 옛날에 쓴 일기였다.

 

“그냥 일기 아닙니까?”


“일기는 맞는데, 의외로 중요한 정보가 많이 있었어.”


“호오, 그렇군요.”


아가씨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쓸 만한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마침 시간도 남겠다……읽어줄게, 이거.”


“양이 꽤 많습니다만.”


“중요한 부분만 들려주면 되잖아? 자, 움직이지 마. 집중해야 하니까.”


아가씨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 이야기는, 내가 어느 마녀를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122.

 

내 이름은 플로라, 나이는 불명. 아마 30년은 넘게 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한다.

 

나의 이명은 치유의 마녀. 마법 역시 생물을 치유하는 마법이다.

 

대신 마법을 쓸 때마다 나는 기억을 잃는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 가리지 않고.

 

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저주 때문이다.

 

언젠가 읽고 쓰는 법마저 잊어버리겠지만, 누군가가 이걸 읽고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니까.

 

일기의 존재마저 잃어버려도- 내 존재마저 잊히는 건 싫으니까.

 

아무튼 이 마을, 밀레넘에 정착하기로 한 건 에스티아 때문이었다.

 

에스티아가 누구냐면, 자애의 마녀라고 불리는 나의 친구다.

 

사실 친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진 않았다.

 

나이도 모르고- 아마 최소한 50살은 됐을 테지만- 어디가 고향이고 어떤 과거사를

 

지녔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뿐이었다.

 

“슬슬 정착할 곳을 찾아보는 게 어때?”


“아니, 딱히 생각 없는데-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고!”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있는 편이 좋아.”


에스티아는 마녀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독특한 여자였다.

 

외관은 비교적 평범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에, 앞머리로 왼쪽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가슴과 키가 컸고, 인상은 온화했다. 젊었을 때 남편을 잃은 과부 같기도 했다.

 

그녀는 마녀답지 않게 정말 평범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투박한 검정색 로브를 입거나, 아니면 동네 아낙들처럼 입고 다녔다.

 

그러나 마녀들 중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태양의 마녀 헬리온처럼

 

꽤 오래 전부터 살아온 마녀였고, 숱하게 많은 마녀들을 거둬주어 뭇 많은 마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나도 그녀만은 인정했다. 

 

에스티아한테 자애의 마녀란 별명이 붙은 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기억을 잃어버리면 다 똑같다고, 어디든지.”

 

“그럼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면 되는 거야.”


“그런 건 없어, 에스티아. 기억을 잃으면 아무리 사랑하는 것이라도-”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아.”


따뜻한 미소였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런 얼굴이었다.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뭐, 네가 그렇게 권유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어쩔 수 없네- 정말.”


“이 근처에 밀레넘이라는 도시가 있어.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야.”


“흐응-”


“마녀들은, 우리들은 분명 배척받지만, 너라면 분명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의 그 마법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니까.”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같은 설득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넘어갔다.

 

나는 밀레넘에 정착하기로 했다.

 

에스티아의 말대로, 이 동네 사람들은 딱히 마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사람들을 치료해주니 나를 ‘성녀’라고 부르며 추앙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도 잔뜩 주고, 멋진 집도 지어주고, 아무튼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언젠간 여기 온 이유마저 잊어버리겠지만.

 

뭐, 어쨌거나 나는 여기가 좋았다.

 

 

 

 

 

123.

 

밀레넘에 정착하고 몇 년이나 지났다.

 

나는 치료를 해주고, 그 대가로 음식이나 돈을 받았다.

 

부족함 없는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부족한 걸까, 싶어서 조금 고민해보니 내가 지금 외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먼저 해본 것이 골렘을 사는 것이었다.

 

마침 밀레넘에 골렘 장인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에게 의뢰하여 골렘을 10개 정도 만들었다.

 

귀여운 여자애처럼 생긴 골렘은……음, 내 기대보다 별로였다.

 

유용하긴 하지만 명령에 따르기만 할 뿐. 딱 쓸 만한 하인 정도였다.

 

골렘은 실패했고, 그 다음엔 거북이를 기르기로 했다.

 

거북이는 수명이 기니까, 나랑 오랫동안 함께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처음엔 두 마리였는데, 두 마리, 아니, 네 마리, 열, 스물, 서른-

 

아무리 많이 길러도 외로움이 그치지 않아서, 나중엔 정원을 꽉 채울 정도로 거북이가 많아졌다.

 

뭘 어찌해도 이 고독함을 해결할 수 없다.

 

일전에도 그랬듯, 나는 에스티아를 찾아가 해결법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건, 네가 가족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나는.”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 플로라?”

 

에스티아는 바로 내 문제점을 찾아줬다.

 

가족. 나는 언제까지고 함께 할 가족을 바라던 거였다.

 

하지만 마녀들은- 우리들에게 가족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

 

마녀의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뒤틀렸는지.

 

그걸 모르는 마녀는 없었다.

 

“있지, 얼마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거든. 나.”


“아이들……?”


“마녀가 된 아이들 말이야. 가족한테, 세상한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어.”


딱 에스티아가 할 법한 일이었다.

 

“베그우즈는 손에 닿은 걸 전부 부숴버리는 마법을 써, 또 아이샤라는 아이는-”


그녀는 내게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아이들은 저마다의 절망을 안고 있었다.

 

마법이 폭주해 사람을 죽인 아이, 마법 때문에 신으로 추앙받아 이용되던 아이.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을 매혹하는 마법 때문에 창녀로 쓰이던 아이.

 

그 외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이 세상에게 학대받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티아는 그런 아이들을 모두 거둬주어 길렀다.

 

대단한 일이다.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힘들지 않아?”


나의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힘들어. 하지만, 행복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야?”


“음,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그 아이들 모두,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 대답을 들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음, 가족……가족인가……하지만……누가 나 같은 마녀랑 가족이 되고 싶겠어?”


하지만 생각보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폭풍이 치던 날이었다.

 

이 도시에선 폭풍이 치면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았는데, 가끔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서

 

사람이나 동물을 쓸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집에 숨어있거나 높은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런 날에-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네가 치유의 마녀, 플로라인가?”

 

내게 처음 말을 건 것은, 수염이 멋진 중년 남자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아, 라비스. 그래, 이상한 이름이라 기억이 난다.


“응. 나야, 누가 치료해줘야 할 사람이라도 있어?”


“그렇다. 단, 지금 네가 만날 분께 예의를 갖추도록 하라.”


“헤에- 예의라, 마녀한테 예의를 바라다니, 이상하네!”

 

“……지금 네가 만날 분은, 이 나라의 국왕 전하시다.”


나는 라비스를 따라가, 그가 기다리고 있는 야영지로 향했다.

 

거기엔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고, 모두 날이 바짝 서 있었다.

 

천막들 가운데에 가장 큰 천막이 있었고,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나는 사람이 아니라 곰이 누워있다고 착각했다.

 

“……그대가……치유의 마녀인가.”


“우와, 곰이 말한다!”


“짐은 곰이 아니라……사람이다.”


베오우른 알렉산드로스.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나이가 꽤 많았고, 덩치가 엄청나게 컸고, 수염이 엄청 풍성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의 흉터와 눈빛이었다.

 

몸에 숱하게 남은 흔적들은 그가 얼마나 거칠게 살아왔는지 보여주었고.

 

그의 눈빛은, 그가 어떤 사선을 넘어왔는지 말해주었다.

 

“짐을 치유해주면,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다.”


“이 나라를 달라고 하면?”


“……짐이 줄 수 있는 것에 한해서 말이다.”


“설마, 그렇게 파렴치하진 않다고. 그래도 뭐, 마음에 드네!”


나는 그를 치유해주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내 마법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지간한 부상이나 질병은 곧바로 치유할 수 있지만, 유전병처럼 그 뿌리가 깊은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병세를 누그러트리고 수명을 늘려주는 게 한계였다.

 

“저기, 이건 쉽지 않겠는데.”


“알고 있다. 태어날 적부터 앓은 지병이니, 그리 쉽게 낫진 않겠지.”


그의 지병은 혈통에 의한 것이었다.

 

아마도, 내 추측대로면 누적된 근친으로 인한 혈액병이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 혈통을 지키려고 근친혼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했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사냥을 하다가 다쳤다.”


“근데 피가 안 멎었지? 흠, 상처가 더 깊지 않아서 다행이네.”


“짐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며칠 정도 꾸준히 치유해주면, 어느 정도는 나을 거야. 근데 이러면 대가가 클 텐데…….”
 
“원하는 무엇이든 주마.”


내가 원하는 것.

 

그건…….

 

“그럼 말이야.”


“듣고 있다.”


“가족도……줄 수 있어?”


“줄 수 있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그럼 좋아. 치료해줄게.”


그 후, 나는 보름 정도 거기 머물러서 그를 치료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마녀 플로라여,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


“이상한 질문이네. 사는 이유? 살고 싶어서 사는 것뿐이야.”


“어리석구나. 살아야만 하는 이유 없이 살아가는 삶이라니.”


“사는 이유 같은 걸 찾아야 돼?”
 
“살아가는 이유가 없다면, 살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그럼 너는, 있어? 살아가는 이유.”


내 질문에 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땅의 백성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모범적인 대답이네.”


“그걸 위해서, 나는 아직 살아야만 한다. 적어도 내 자식들이 준비될 때까지는.”


“흠……그럼 어떻게 이 나라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들 건데?”


“그걸 알기 위해서 통치하고 있다.”

 

이상한 대답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이상하잖아, 그 대답은. 좀 더 제대로 된 답은 없어?”


“뭐가 이상하지?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간다. 그건 틀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좋은 나라를 만드는 법을 찾고자 나라를 이끌 수도 있는 법이지.”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산다……역시, 이상하네.”


“언젠간 그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준 뒤, 나는 그에게 가족을 요구했다.

 

“그래, 가족을 바란다고 했느냐?”


“응. 가족이 필요해, 줄 수 있어?”


“줄 수 있지. 단, 네가 각오됐다면 말이다.”


“뭐든 상관없어. 가족을 줘, 그게 바로 네가 나한테 바칠 제물이니까.”


“……알겠다. 그럼, 옷을 벗어라.”


“어, 저기- 꺄악!?”

 

……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굳이 적지 않는 편이 낫겠지.

 

어쨌거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내 뱃속에, 처음으로 ‘가족’이 생겼다.

 

나의 이름은 어느 나라에서만 핀다는 꽃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니 이 아이의 이름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로비우나 꽃의 이름을 따서 짓기로 했다.

 

드로비우나.

 

그것이 내 아이, 내 가족의 이름이었다.

 

 

 

 







드디어 연재 몇 달 만에 에스티아가 처음으로 직접 등장했다...

그리고 사소한 설정이지만, 마녀의 자식이라고 딱히 특별한 능력을 타고 태어나진 않음.

독특한 외모를 물려받긴 하지만 능력 자체는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

또 마녀는 늙지 않기 때문에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50, 100살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녀를 멀리해서, 마녀와 인간 사이에 자식이 태어난 경우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