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애들이 여자애를 괴롭히는 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부제 - 미안했던 마음에.


- 그의 마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이 말의 참뜻은 아마도

"일단 태어나 보면 주변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아닐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내 기억이 시작되는 그 곳에는 이미 네가 있었다.

헌데 너무나도 일찍 만나버렸던 탓일까, 

어렸던 나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법을 몰랐고

나보다도 어렸던 너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다행히 늦어버리기 전에 스스로의 잘못을 자각하였기에

이제부터라도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 그녀의 마음.


어렸을 적에 이웃집에 살던 오빠가 있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내게 사소한 장난을 하고는 했다.


정말 사소한 장난이고, 딱히 심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었다.

"남자애들이 여자애를 괴롭히는 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물론 이것이 낭설이라는 건 모두가 익히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 - - - - - - - -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

컴퓨터의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


방 안에 있는 두 명은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계들만이 스스로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드넓은 인터넷을 하염없이 돌고 돌아,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종착점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 얀챈대학교 정시모집 결과조회 ]


떨리는 마음을 안고 마우스 커서를 조금씩 움직인다.


"아으으... 안 돼. 못 보겠어. 오빠, 대신 좀 봐줘..."


"무슨 소리야, 네 시험 결과인데 네가 안 보는 게 말이 돼?"


지금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불과 2년 전의 내가 저런 심정이었을테니까.


떨리는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어 마우스를 클릭했다.


수험번호 xxxxxxxx... 김얀순...

수험결과...


합격?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불" 이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거 실화냐?


물론 실화지. 그것도 감동실화.


"오빠? 나 눈 떠도 돼? 또 불합격 뜬 거 아니지?"


"야야, 얀순아. 눈 떠봐, 빨리!"


"으으... 어... 어, 어어?"


"됐드아!!!!!!!!"


"으와아아!!!!!!!!"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거늘, 

칠 세는 이미 오래 전에 넘긴 두 남녀가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기뻤던지 내게 입을 맞추려는 얀순이를 제지하고

방 밖으로 뛰쳐나가 아주머니께 합격 사실을 알렸다.


"아주머니, 됐어요. 붙었어요!!"

"엄마 이것 좀 봐봐!!"


아주머니께서는 얼마나 감격하셨는지 

나와 얀순이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유... 얀붕아 고맙다... 

네가 우리 얀순이 못살게 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철이 들어서 이리 고마운 일을 다 해줬니..."


"에이, 언젯적 일을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얀순이가 잘 해준 덕이지 저는 딱히 한 것도 없어요."


"엄마 나 진짜로 붙었어 어떡해으어응어..."


아카대학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울며불며 난리였는데,

얀챈대학교에 붙은 지금도 울고 있다.

물론 기쁨의 눈물이지만.


아카대는 떨어졌지만 그게 뭔 상관이냐.

그런 지잡보다 훨씬 더 좋은 얀챈대학에 합격했는데!

...라고 지잡 아카대 출신이 말했습니다.


내가 아카대를 가려고 입시했나 자괴감이 들었으나,

마침 얀순이도 미대입시를 하게 되어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등록금 영수증 볼 때마다 욕이 나오긴 하지만...


이러면 안 되지, 칙칙한 생각은 떨쳐버리자.

오늘은 즐거운 날이야. 풍악을 울려도 모자랄 판에

되도 않는 푸념을 늘어놓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장하다 우리 딸,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이런 날에는 좋은 거 사서 먹여야지. 나갈 준비 하자!"


"엄마 나 스테이크 썰어 볼래! 얀붕 오빠도 빨리 옷 입어!"


"먼저 내려가서 차 끌고 올테니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머뭇거릴 틈이 없다! 

엘리베이터 따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식사 자리에 끼게 되었지만,

얀순이와 그 가족에게 있어 나는 한낱 외간 남자가 아니었다.


철 없던 어린 시절에 얀순이를 괴롭혔던 게 미안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찼을 때부터 줄곧 얀순이를 챙겨줬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새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마치 만화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웃 관계다.


"빨리 고기 썰러 가자!"


"안전벨트부터 해라. 어디서 먹을 지는 정했어?"


"아X백!"


"우리 동네에 아X백이 있었던가...?"


"저기 아카역 근처에 하나 있지 않았니?"


"아, 네비 찍어보니까 나오네요. 거기로 가죠!"


양가 부친들은 아직 출근시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운전대를 잡고 아카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 - - - - - - - - -


그동안 못 먹었던 게 서러웠던 것인지

스테이크에 화이트와인까지 시켜서 마셨던 탓에

영수증의 길이가 점점 늘어났으나, 

오늘은 기쁜 날이니 쿨하게 내가 계산을 했다.

정확히는 다음 달과 다다음 달의 내가 함께.

얀순이가 좋아했음 그걸로 된 거겠지...


얀순이네 어머니를 집 앞에 내려드리고,

나와 얀순이는 차를 대러 주차장으로 갔다.

현란한 운전 스킬(1종 보통)로 발레파킹을 끝내고 차에서 내리자,

얀순이가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오빠 운전하느라 술 못 마셨잖으니까, 우리끼리라도 2차 할래?"


"아까도 마셨잖아. 그거로 모자랐냐?"


"오빠가 안 마셨잖아. 저기 편의점 있으니까

간단하게 뭐라도 사서 들어가자."


"내가 살다 살다 너랑 같이 술 먹는 날이 오네."


"오빠 집에 캔맥주 있으니까 안주거리만 사면 되겠다.

오늘 오빠네 집 비니까 거기서 마셔도 되지?"


"허어, 얘가 성인 됐다고 내 술까지 뺏어먹네?"


"된다는 뜻으로 알고, 엄마한테 오빠네 집 간다고 연락할게!"


"사람 말은 좀 들어라. 근데 우리 집에 맥주 있는 건 어떻게 알았..."


"됐으니까 빨리 와!"


거의 끌려가듯 편의점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가던 내 지갑이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당분간은 물만 먹고 살아야겠네...

비닐봉투가 미어터지도록 주전부리를 쓸어담았는데

얀순이는 더 살 것이 있다며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빨리 안 나오고 뭐해. 추워 죽겠는데 나 먼저 간다?"


"그 잠깐을 못 기다려서 날 버리고 가겠다고?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이렇게 잔뜩 사놓고 뭘 더 살 게 있냐?"


"있어 그런게. 이제 가자!"


아, 그건가. 생리대나 뭐 그런 거겠지.

확실히 그런 건 보여주기 좀 부끄럽겠다.


"♩~♬♪"


대학에 붙은 게 그리도 신났던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매우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집의 도어락을 열었다.

비밀번호 알려줬던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다녀왔습니다~"


"우리 집이거든."


"거의 우리 집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래, 손이나 씻어라..."


더이상 지적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얌전히 술상 세팅이나 하기로 했다.


"그러면 합격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얀순이는 호쾌하게 캔을 따서 단숨에 들이킨다.

갓 스물 된 꼬꼬마들이 자기 주량을 모르고 저렇게 마시고는 하지.

아쉽게도 나는 심각한 술찌였기 때문에

가볍게 홀짝이는 정도에서 그쳤다.


"천천히 마셔라. MT가서도 그렇게 마시려고?"


"그럴 리가. 오빠랑 있을 때만 이러는 거야."


"나랑 있을 때도 좀 자제해라.

꽐라들 뒤치다꺼리하는 건 새내기때 질리도록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대학 생활에 대해 뭐 궁금한 거 없어?"


"아직까지는 딱히 없어.

애초에 대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걸."


"그렇긴 하네, 근데 직접 가 보면 알게 될거야.

이제 학교 다니면서 멋진 남친도 만들고 그래.

근데 같은 과 안에서는 만나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조금 전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한기 어린 목소리에 눌려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오빠가 있는데 다른 남자를 왜 만나."


"너야 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아직은 아니긴 한데... 하아... 진짜 답답하네.

오빠, 내가 3개 밖에 못 쓰는 정시에서 한 곳을 포기하면서까지

굳이 왜 아카대를 지원했는지 진짜 몰랐어?"


"공예과는 학교가 몇 곳 없잖..."

"그만. 


...우리 오빠 진짜 안 되겠네.

내가 오빠랑 같은 학교 가려고 미대입시 시작한 거 몰랐어?"


...뭐라고?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리에 들어와서 그런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잠깐. 그러니까, 단순히 나랑 같은 학교를 가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던 미대입시를 시작했고

아카대 같은 지잡에 원서를 넣었다는 거야?"


"마음에 없다니, 그런 말 하지마.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건

그림을 그리는 오빠의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야.

나한테 있어 그림에 대한 마음은

얀붕 오빠를 향한 마음이나 다를 게 없어.

오빠도 나한테 마음이 있어서 날 도와줬던 거 아니야?"


"후... 얀순아. 그러니까... 아니, 그..."


"아니. 더 말하지 마.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안 나올 것 같네."

...나 대학 붙었으니까 작은 보상 하나 쯤은 있어도 되지?"


얀순이가 어느 새 상 반대편으로 넘어와 내게 다가왔다.


"야, 이거 놔. ...놓으라고!"


힘을 좀 더 주면 뿌리칠 수 있겠지만,

혹여 얀순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망설여졌다.


"아악!"


내가 망설인 그 잠깐 사이에 얀순이가 나를 밀어 넘어뜨렸고, 

이제 완전히 내 위에 올라탄 상태가 되었다.


"어렸을 적에 자주 들었던 말 있잖아.

「 남자애들이 여자애를 괴롭히는 건 좋아해서 그러는 거다. 」

그 때는 오빠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 줄 알았어.

오빠는 내가 좋은데, 단지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오빠가 나에게 잘 해주고 이것저것 도와주기 시작했을 때는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에게 솔직해졌구나 싶었는데,

그냥 단순히 예전에 했던 일들이 미안해서 그랬던 거라고?


나는 과거의 일 따위는 전혀 신경 안 쓰고 있는데,

오빠한테 있어 나는 그저 용서를 구할 대상밖에 안 되는 거야?

지나간 일따위는 잊어버리고 지금의 날 봐달란 말이야!"


내가 속죄를 위해 해왔던 일들이

얀순이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일까,

나는 얀순이를 친동생처럼 여기고 대해 왔건만

얀순이는 나를 한 명의 이성으로 보고 있었다니...


물론 얀순이가 나를 남자로 본다고 해서

내가 얀순이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친동생 같은 애한테 손을 댈 수는 없지.

우선 얀순이를 내 위에서 내려오게 해야...


어?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슬슬 약발이 도나 보네."


얀순이가 테이블의 캔을 들어 캔의 바닥을 보여 줬다.


"오빠 집에 캔맥주가 있는 지 내가 어떻게 알고 있었게?"


그리고 캔의 바닥에는...

X자로 검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대충 이해가 되지? 여기에 뭘 넣었는 지는... 비밀이야."


"얀순아... 너 도대체..."


"혹시 몰라서 아까 편의점에서 하나 사두길 잘했네."


얀순이가 주머니에서 숫자가 적힌 작은 종이박스를 꺼내들었다.


"걱정 마. 벌써 사고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천장의 얼룩이나 세고 있어."


"설마 아까 산다고 했던 게 그거였, 으읍!"


얀순이가 내게 입을 맞추고 혀를 섞기 시작했고,

그 이후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