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아가씨의 예절교육 1 
  • 십십십새끼
  • 2020.06.30 01:03
  • 조회수 608
  • 추천 35
  • 댓글 6

1946년 4월, 슬슬 추위가 가시고 따뜻해질 무렵이였다.

종로의 저잣거리는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라 안팎으로 조용할 일 없는 시기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작년 해방의 기쁨 때문인지 웃음꽃이 피어나있었다.


하지만 여기, 잡화점의 종업원 지영호는 그러지 못하였다.


영호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불만이 많았다.

여태까지 살면서 세상은 한번도 영호에게 도움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영호가 14살 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동생만 남겨두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던 중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어미 잃은 두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일본 행 배를 탔다가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해 실종되었다.

순식간에 이제 14살 먹은 영호에게서 부모님이 사라진 것이였다.


두번째는 돈 문제였다.

아버지 지인의 도움으로 창신정 단칸방을 얻었지만,

영호는 이 단칸방이 너무나도 싫었다. 비좁고, 어둡고, 춥고...

본래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였던 영호는 항상 공부해야 성공한다는

신념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에 열심히 공부했었지만,

부모님을 잃은 후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할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해야했다.

그런데 지금 동생도 돈이 없어 자기처럼 될 것 같았다.

영호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돈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이런 문제들 때문인지 성격도 어느샌가 지랄맞게 변했다.


"김 기자님, 제 꿈이 원래 기자였다는 거 아십니까?"

영호는 퇴근 후 평소 알고 지내던 평화일보 김 기자와 술자리를 했다.

"그런가? 근데 지금은 왜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는건가?"

김 기자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물었다.

"이 세상이 도와주질 않습디다. 어렸을 땐 부모님 뺏어가서 나 일하느라

공부도 못하게 하고, 이제는 내 동생까지 저학력자로 만드려고 합니다."

영호의 딱한 사정을 들은 김 기자는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딱할수가. 그래도 자네, 너무 비관하진 말게나"

"왜 그렇습니까?"

"옛 격언 중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영호는 그 말을 듣고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씨발 지랄하지 말라고 하십쇼!"

그러고는 술병을 벽에다가 집어던져버렸다.

"허허 이 친구 성질하고는 참..."

김 기자는 익숙하다는듯한 반응을 보이며 연신 혀를 찼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영호는 알딸딸한 기운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씨이발... 세상 참 좆같구료..."

담배를 태우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가게들은 문을 닫고, 거리는 사람이 없어 어둡고 조용했다.


"왜 이러십니까! 그만 가주세요!"

"이 년아, 가지고 있는거 내놓으라니까?"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옆 골목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일인가 하고 봤더니 어떤 양아치놈이 여자 한 명을 붙잡고 있었다.

'아.. 어떡할까' 하고 영호는 내적갈등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자니 아까 김 기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후..."

마침내 결심한 영호는 양아치에게 발걸음을 향했다.

"야이 새끼야!"

"넌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영호의 주먹이 양아치의 복부를 아주 빠르게 가격했다.

양아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으윽...! 이 새끼가... 두고 보자!"

양아치는 배를 부여잡은 채 재빠르게 도망쳤다.

"아가씨 괜찮아요?"

여자는 영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뗐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리할 수도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영호는 당황했다.

"처리는 니미..."

영호는 어이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때 누군가가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한패거리인가?"

다시 전투태세를 취하자 여자가 손을 들어 영호를 말렸다.

"아니에요, 저 분은..."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양복을 입고 단정한 머리를 한 남자가 숨을 고르며 여자에게 물었다.

"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옆에 붙어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다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영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아가씨의 경호를 맡고 있는 박이라고 합니다"

"경호? 경호 하신다는 분이 어디를 갔다 오신거요?"

"그게.. 아가씨께서 주문하신 물건을 받아오는 사이에 그만..."

"괜찮습니다. 어찌됐든 안 다쳤지 않았습니까?"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나저나... 경호원까지 쓰실 정도면 집에 돈이 좀 있나봅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송 영자라고 합니다"

"영자 (英子)... 아, 그럼 '에이코 상' ?"

"왜 그런 식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영자가 눈을 찌푸리며 영호를 쏘아보았다.

"아- 그, 내가 여태까지 봤던 부자란 자들은 말입니다. 해방 전에 일본놈들한테 붙어먹으면서 지네들 배를 불려온 놈들이 대다수였습디다. 해서, 아가씨네 집도 혹시나 그런가 해서 한 번 유추해봤소"

"이보시오, 우리 아가씨 집안은 그런 집안이"

"아니, 괜찮습니다."

영자가 박을 말렸다.

"말씀하신대로 저희 집안이 재산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매국을 한 자는 없습니다"

영자가 영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허, 그럼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럼 이만..."

영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저기, 잠시만요!"

"뭐요?"

"죄송합니다. 은인이신데 성함도 여쭤보지 않았네요"

"나 같은 놈 이름 알아서 뭐하려고.. 지영호요"

"지영호... 알겠습니다."

영호는 다시 골목을 터덜거리며 빠져나갔다.

"뭐 초면에 저런 무례를 저지르는 자가 다 있답니까?"

박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영자는 영호의 뒷모습을 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였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영호가 가게 뒤편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흐흐흐, 요즘 벌이는 어떠냐?"

영호의 친구 석이도 담배를 빨며 물었다.

"이런 조그만 잡화점 직원이 벌면 얼마나 벌겠냐... 후우..."

"그건 그렇지..."

"우리 영수, 중학교 보내야 되는데... 나처럼 안되려면"

"그럼... 너 나랑 일 하나 해볼래?"

"아이 새꺄, 너가 하는 일은 도독질이잖아"

석이가 당황해서 영호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야 인마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

"왜, 맞는 말이잖아"

"조용히 하고 좀 들어봐. 이거 한 두 세번만 하면 영수 입학은 문제 없을껄?"

"뭔... 야, 그러다 순사한테 걸리면 형무소에서 썩어야돼!"

"안 들키면 장땡이야 인마! 나 이제 갈꺼니까 할 생각 있음 찾아와!"

석이가 떠난 후 영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걸리면 큰일나는데... 하지만 그 돈이면 영수 중학교 갈 수 있는데..."

잠시 후 영호는 뭔가 결심했다는듯 무릎을 짚고 자리를 박찼다.


퇴근길, 영호는 청계천에 있는 석이의 집에 들렀다.

석이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방 뒷 쪽 창고로 영호를 불렀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창고 안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들과 청자 도자기, 액자 속에 담긴 휘호, 화려한 카펫들이 가득했다.

"뭐긴, 내가 정당하게 '일' 해서 얻어온 것들이지"

"어디서 가져온건데?"

"주로 북촌에 부잣집들에서 훔쳐왔지"

"이 많은걸 어떻게 안 걸리고 팔아버린단 말이야?"

"이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장물아비한테 갖다주면, 그걸 해외의 부자들한테 팔아버리는거야. 요런건 특히 가격을 더 많이 쳐주지"

라고 말하며 석이는 청자 하나를 들어올렸다.

"요런거 두 세개면 영수 중학교 다니면서 드는 돈은 문제도 안된다. 할거야?"

영호는 이미 결심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 저녁 9시까지 우리집으로 와. 한탕 땡기자고"


"사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어! 수고했네!"

영호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마 앞으로 해야할 일이 정말 옳은 짓일까 갈등하는 것이였다.

끼익-

"형! 왔어?"

"응, 영수야. 이거 먹어라"

영호가 챙겨온 봉투 안에는 알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와! 왠 사탕이야?"

"우리 영호 먹일려고 형이 사왔지"

"고마워 형! 역시 형이 최고야!"

"..."

영호는 아무말 없이 영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 좀 다녀와야 되니까 자고 있어. 형 나가면 바로 문 잠구고"

"알았어. 잘 다녀와"

영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석이네 집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도 수십 번을 갈등하는 중이였다.

"지영호 씨?"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영호는 뒤를 돌아봤다.

양복을 입고 단정한 머리를 한 남자, 저번에 봤던 박 이였다.

"아.. 박씨 아닙니까. 어쩐 일로 여기서 다 만납니다?"

"네. 안 그래도 영호씨 소재 파악 중이였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됐군요"

"저 말입니까? 저를 무슨 일로?"

"사실은... 아가씨께서 영호 씨를 초대하셔서요"

"초대요?"

초대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영호가 되물었다.

"허허, 내가 무슨 큰 일을 했다고 초대까지 해주십니까"

"하하... 일단 가시죠. 자동차로 모시겠습니다"

"옛? 아니 잠깐, 지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지금 해도 떨어졌고, 저도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다음에 가겠습니다"

"그래도 아가씨 성의를 봐서라도...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이 사람이... 이건 너무 경우가 없지 않습니까"


"영호 씨.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사람 좋던 웃음을 짓던 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 원... 아무튼 낮에 다시 찾아오십쇼. 나는 저잣거리 잡화점에 일을 하.."

그 때, 갑자기 누군가 뒷골목에서 튀어나와 영호의 코와 입을 막았다.

"잠...! 이게 뭐ㅇ... 읍!"

천에 묻은 에테르 냄새를 흡입한 영호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박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들렸다.

"참... 말로 할때 잠자코 따라오시지 거..."


무언가 덜컹거리는 느낌에 영호는 깨어났다.

차에 탄 영호 양 옆으로 박과 누군가가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 날 어디로 데려가는겁니까"

"광주에 아가씨 집안 별장이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그 곳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 이 자는 누구요?"

영호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 저랑 같이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최 라고 합니다"

영호는 계속 최를 빤히 바라보았다.

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허.."

영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 차는 계속 산 속으로 난 길을 따라 달렸다.


덜컥-


"도착했습니다. 이 곳입니다"

영호는 박과 최의 부축을 받아 자동차에서 나왔다.

마당이 넓은 2층 짜리 커다란 양옥이였다.

'산 속에 이런 으리으리한 집이 있다니...'

"자, 이제 들어가시죠.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는 훨씬 고급스러웠다.

현관이 영호가 동생과 사는 단칸방보다 더 넓어보였다.

"와..."

"저... 영호 씨. 침 흐릅니다"

"아? 아이고 이런"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침이 흘렀다.

영호는 부끄러워서 재빨리 소매로 침을 닦았다.

"그럼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응접실로 가니 영자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영자의 고고한 자태는 마치

'나 부잣집 자제요' 라는 표현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것만 같았다.

"오셨군요"

"아니... 아가씨, 대체 이게 무슨 경우요?"

"무엇 때문에 그러시죠?"

"이 야밤 중에 초대한건 그렇다칩시다, 근데 거절했다고 사람을 납치해서 끌고 오는건 대체 뭡니까?"

"기절 시킨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하면 지금 못 오실거 같아서요"

영자는 놀랍도록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허..."

"아무튼 제가 이 시간에 초대드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

"궁금하지 않으세요?"

"... 그래 뭐... 들어나 봅시다"

"영호 씨, 영호 씨는 완벽한 남자입니다"

"뭐라고요?"

"하지만"

"하지만?"

"영호 씨한테 부족한 딱 하나, 그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모르겠는데"

"바로 '예절' 입니다. 그것만 갖춰진다면 영호 씨는 비로소 완벽해지는겁니다"

"참 나... 헛소리 마시고, 납치까지 해가면서 나를 여기 데려온 이유가 뭐요?"

"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부터 영호 씨에게 '예절'에 대해서 교육 시켜드리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나서 영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영호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영호는 영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납치를 해와서 예절교육을 시킨다니, 이런 사례는 들어본적도 없었다.

"아이 씨발!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대체!"

"어머나.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영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개소리 마시구요. 나 갈꺼요. 무슨 짓이야 이게..."

영호는 여기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가실 수 없으십니다"

박이 현관으로 나가는 문을 막아섰다.

"댁도 저 미친년 말 그만 따르고 비키시지?"

순간 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박의 주먹이 순식간에 영호의 명치에 퍽- 하고 박혔다.

"끄억-!"

"박 씨, 주먹은 안 쓰기로 하셨잖아요"

영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욕보여서 순간..."

"전 괜찮습니다. 앞으로 하나씩 고쳐가면 됩니다"

"이, 이런 ㅆ..."

"그런 말은 여기선 안된다니까요 영호 씨"

순간 영호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과일과 과도가 들어왔다.

영호는 재빨리 과도를 집어들고 영자를 붙잡고 목에 과도를 갖다댔다.

"아가씨!"

"잠깐, 저는 괜찮아요"

영자는 이런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이 박 씨, 아가씨 목에 구멍 뚫리는 꼴 보기 싫으면 빨리 비켜"

"아, 그게..."

"뭐해! 빨리 비키라니까!"

"지금 영호 씨가 더 위험하신데..."

"뭐?"


순간 영자가 몸을 틀어 영호의 멱살과 팔을 잡고 업기 시작했다.

영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어?"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영호가 땅바닥에 꽂혔다.

"커헉.. 끅..."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꽤 큰 타격을 받아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 아가씨는 어릴 적에 유도의 거장 나카다시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박이 뒷머리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아무튼 영호 씨, 교육은 내일부터 시작입니다."

"이런 미친..."


영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