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마경(魔境)이라 불렸다.

과거, 내신과 외신의 전투가 가장 잦았던

장소이자 외신이 봉인된 무저갱이 있는 곳.


어디에도 섞일 수 없는 종족이 거기 살았다.

세상 모든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마경이라 불렸다.


거대한 구덩이 위로 솟아오른 성이 있었다.

그 성에는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괴물도, 강대한

흡혈귀들도 그곳엔 얼씬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성에는 가장 어두운 것이,

이 세상 모든 혼돈을 담은 것이 있었기에.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혼돈의 성’이라 불렀다.


“왜 우리가 여기 틀어박혀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설명해보란 말이다―!!”


쿠구구구― 용의 포효에 성이 흔들렸다.

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미동도 않고

날뛰는 크루어를 노려볼 뿐이었다.


분노와 증오의 성자, 크루어.


붉은 비늘에 수없이 많은 문신을 새긴

리자드맨. 그의 불꽃은 성을 불태우며

그 비늘엔 그 어떤 상처도 나지 않는다.


지금의 용국(龍國)을 지배하고 있는 성자.

강대한 용들조차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아……전부 제 잘못이에요……제가

운이 나쁘니까……죄송합니다……네…….”


불행과 저주의 성녀, 에리스.


검푸른 로브를 푹 뒤집어쓴 여인의

눈가에는 빨간 눈물 자국이 있었다.

또, 그녀의 하반신은 지네의 몸통을

이어붙인 듯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가장 불행한 성녀. 저주받은 성녀.

그녀는 죽지 못해 사는 성녀였다.


“시끄러워……카하하, 정말이지 이런

반푼이들이랑 뭘 하라는 건지…….”


힘과 탐욕의 성자, 위버.


50대 정도로 보이는 회색 머리의 남자는

마치 농부처럼 허름한 차림새였다.


가장 강한 성자. 최강의 외신성자.

그 누구도 위버를 이기진 못했다.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냐?! 위버!!

둘이다! 둘이나 빌어먹을 내신 놈들한테

당했단 말이다! 심지어 프로스티마저!!”


쾅! 콰앙!! 크루어가 테이블을 내리찍자,

강철로 만든 테이블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가면 다 죽게 생겼는데 내가

화를 안 내면 성자지!!”

“하, 하지만 이미 성자…….”

“닥쳐, 벌레년아!!”

“힉!?”


에리스가 얼른 테이블 밑으로 숨었다.

위버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능력에 비해 겁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샤누아 그 년은 배신했다면서?

하, 누가 그딴 년을 성녀로 임명한 거냐?!

그딴 버러지가 지혜의 성녀라고?! 어엉!?”

“실질적으론 셋이 당한 셈인가…….”


위버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그 셋 모두, 외신 측의 중요한 전력이었다.

샤누아야 그렇다 치더라도, 트라스와

프로스티가 당한 건 확실히 뼈아픈 손해였다.


“근데 그 녀석은?”

“그래!! 허무의 성자, 니히리는 어디 있냐!?”

“니히리는 이미 죽었다.”


터벅, 터벅.

어둠 속에서 그 남자가 걸어왔다.


―순백의 갑주를 입은 성기사였다.

머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피부는 약간

검었다. 그러면서도 털만큼은 눈부시게 희었다.


“제이든 라브리가 니히리를 토벌했다.”

“뭐, 뭐라고!? 정의의 성자가 말이냐!?”

“그렇다.”


성기사가 테이블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자세히 설명하지? 진짜냐, 그건?”

“확실하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던가?”

“너야 통 신뢰할 수가 없으니 말이지―”


위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티타니아는 사실상

궤멸했고, 현재 내전이 진행되고 있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넷이나 없다고!?

우리 셋이서 뭘 어쩌라는 거냐아아아―!!”


크루어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너! 이게 다 네 잘못이다!! 네 계획대로

일을 진행했거늘 이런 개판이 됐다고!!”

“확실히 맞는 말이군. 이제 어쩔 거지, 응?”

“…….”


성기사가 크루어를 흘겨보았다.

마치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계획은 순조롭다.

다소의 희생은 예상된 일이었다.”

“이게?! 이게 다소의 희생이라고!? 절반

넘게 사라졌는데 이게 다소냐, 이 멍청한

놈아?! 숫자 개념도 똑바로 모르냐고!!”


크루어가 성기사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그를 들어 올렸다.


“크루어, 우리의 목표는 뭐지?”

“당연히 외신의 부활이지! 그것도 모르냐!?”

“그렇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지.

이 모든 건 그저 연막에 불과하다.”


턱, 성기사가 크루어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그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너희가 몇 명이나 죽더라도 상관없다.

날뛰어라, 부수고 불태워라. 어떻게든

놈들이 여기 오는 걸 지연시키란 뜻이다.”

“그럴 거면 그냥 저희 다 뭉쳐있는 게……?”


에리스가 책상 밑에서 손을 들며 말했다.


“흥, 당연히 안 되지. 여기에 신의 아이가

있다고 홍보할 셈이냐? 저쪽에서 전력으로

나오면, 아무리 우리라도 피해가 크겠지.

……여차하면 신의 아이가 죽는다고?”

“위버의 말이 옳다.”


성기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결국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저쪽이 여기

오는 것만 지연시키면 된다……이제 곧

준비가 끝난다. 교황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티타니아를 멸망시킨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몇 명이 죽더라도 상관없다.

설령 성자, 성녀가 죽어도 문제없다.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크루어, 너는 용국으로 돌아가도록.”

“쯧……뭐부터 시작하면 되겠냐!?”

“네가 제일 잘하는 일.”


그 말에 크루어가 씩 웃었다.

그가 가장 잘하는 일.


모든 걸 불태우고 죽이는 것.


“진작 그리했어야지. 드디어 내 차례인가?

드디어 용의 분노가 모든 걸 불태울 때가

왔다는 뜻이지?! 케하하하하하!!”

“저기, 당신은 리자드맨…….”

“나는!! 리자드맨이!! 아니야!!”

“히이익!?”


에리스가 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에리스, 너도 똑같다. 사방에 저주와 불행을

퍼트려라. 가능한 한 많이……불행하게 해라.”

“히.”


그 말에 에리스가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지, 진짜죠?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죠?

에헤헤……이히히히……잔뜩, 잔뜩 저주해도

될까요? 전부 벌레로 만들어도 되겠죠!?”

“물론. 실컷 벌레로 만들도록.”

“이히히히히……!”


스스스― 에리스의 몸이 수천 마리의 지네로

변하며 흩어졌다.


“그럼 나는?”

“너는 아직 보류다. 기적이 다 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위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망할 할망구 같으니. 그가 중얼거렸다.


“회의는 이걸로 끝이다. 나는 그 아이를

돌봐주러 가야 하니 이만.”

“잠깐, 이스 카리오.”


위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아직도 그 일로

삐져있는 건 아니라고 해주면 좋겠는데.”

“……나는 널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카리오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너보다도 그 아이가 먼저다.”


그는 회의장에서 나온 뒤,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끝에는 어느 방이 있었다.

성의 옥상, 그 아이가 있는 장소.


끼익……카리오가 문을 열었다.


넓은 방 안에는 창문도 벽도 없었다.

바깥의 황무지와 무저갱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 무리가 보였고, 마치 우주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온 하늘이 별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바닥에 너부러진 온갖

장난감의 중심에 앉아있었다.


“아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키오.”


그 소녀는 인간처럼 보였다.


새햐안 소녀, 눈보다도 하얀 소녀.

이제 겨우 12살이나 됐을까, 너무나도

작고 가녀려 품에 안으면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빠, 오늘은 뭐 하고 놀까?”

“그렇구나. 뭘 하고 싶니?”

“소꿉놀이.”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카리오가 성기사처럼 생긴 인형을 잡았다.


“아빠, 슬퍼?”

“전혀. 아빠는 키오만 있으면 괜찮단다.”

“……무서워?”


그가 키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아, 사랑스러운 아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또 어디 있을까? 


만약 인간의 아이로, 우리의 아이로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이런 운명도 겪지 않았을 텐데.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너는 아빠가 지킬 거란다. 반드시.”

“……알겠어.”


그가 조심스레 키오를 안았다.


이 세상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그는, 이 아이를 지키기로 맹세했다.

자신이 믿던 신과, 세상을 배신하더라도.


그리고 끝내 맞이할 비극에 삼켜지더라도.


배신의 성기사는, 혼돈의 딸을 지킬 터였다.






쏴아아…….

거대한 범선이 파도를 가르며 출렁였다.


“이, 이제 곧 제국에 도착합니다.”

“그렇군. 한 달이나 걸렸나.”


피 묻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렸다.

순백의 갑주는 피와 먼지, 재로 더럽혀졌고.

그 남자의 두 눈동자는 어둠에 물들었다.


“제, 제이든 님.”

“왜 그러지?”

“부……부디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이든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 범선에 있던 이들은 모두 ‘심판’당했다.

온 사방에서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고,

그 시체는 본보기 삼아 여전히 거기 있었다.


“저, 저, 저는 가족이……돌아갈 곳이…….”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던가?”


제이든이 선원을 향해 말했다.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심판받지

않은 악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

“저……저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악 따윈 없다.”


선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했다.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이.

이 눈앞에 있는 광인이 두려웠다.


그는 미쳐버렸다.

정의와 복수에 미쳐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너의 공로를 치하하여, 조금도

고통을 주지 않고 죽이겠다고 약속하마.

기뻐해도 좋다. 다른 죄인들은 모두 고문

끝에 죽었으므로.”

“이, 이히익……!”


제이든이 다시 앞을 보았다.

저 멀리 육지가, 제국이 보였다.


“신의 아이라고 했던가?”


신의 아이, 외신성자, 외신교도.

전부 상관없다.

악을 저지른 자는, 심판받아야 한다.


“기대되는군, 또 다른 악을 심판할 날이.”


제이든 라브리.

눈 먼 정의가 말했다.















1부 완결 후기


먼저, 사실 나는 2부를 안 쓰려고 했다.

전작보다도 성적도 안 나오고...나는 쓰면서 즐거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생각도 많이 했다.

근데 어째서인지 이번 소설에 자꾸만 애정이 갔고, 특히 반즈나 에르테에게 다른 캐릭터보다도

애정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그냥 쓰기로 했다. 2부는 아마 10월부터 쓰게 될 것 같다.

사실 처음 구상한 거랑 좀 달라지긴 했다. 원래는 얀데레가 훨씬 일찍 나오고,

후회 파트가 더 길고 처참할 예정이었다. (지금도 많이 순하게 만든 거임, 진짜로) 

근데 이래저래 생각을 좀 많이 한 끝에...뭐 이렇게 됐다. 결국 빌드업 쌓는답시고 얀데레가 1부 끝날 때까지

제대로 안 나온 점은 진심으로 사과한다. 미안, 에르테가 생각보다 완고하더라.

그래도 2부부터는 집착 순애가 시작될 거고, 에르테와 반즈의 꽁냥꽁냥이 좀 많이 나올 것 같다.

아무튼 얀데레 채널인데 얀데레도 제대로 안 나온 소설을 여기까지 따라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그 보답으로 2부에선 얀데레...많이 나올 거다...애초에 스토리를 그렇게 짜서...

근데 아마 앞으론 일일연재가 힘들 수도 있다. 내가 현생 사느라 바빠져서 그럼...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럼 대충 한 달 뒤에 돌아오겠음. 그때 마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끝까지 읽어줘서 고맙다:) 또 돌아오겠음!